역사

American Socialists-링컨대대의 투쟁과 최후(中)

전투 이후

 

그 악몽 같던 하라마 전투로부터 1개월 뒤 1937년 3월 14일 국가주의자(aka. 팔랑헤) 소속 무어인 부대가 소규모 피아트 전차 부대의 지원을 받아 링컨대대 인근의 공화파 스페인 징집병들의 진지를 돌파하려는 순간이 왔다. 무기가 부족하여 1860년대 무기(수많은 골동품 무기 상당수는 스탈린이 적백내전 당시의 무기들을 빨리 처분하기 위해 상태 확인도 안하고 보낸것들이었다.)까지도 들고 있던 공화파 의용군에게 최악의 순간이 올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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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당시의 사진, 참호는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영국 머지사이드 의용병의 사진

 

이때 공화파 의용군에게 뽕차고 이상적인 순간이 이때 아아아아아주 잠시 동안 찾아왔다. 후에 '죽은 노새 진지의 전투Dead mule trench'라고 불리는 비공식 명칭의 전투에서 미국인과 영국인 병사들은 앞장서서 진지로 돌격하고 프랑스 출신 의용군 장교는 저격수로 힘을 보태며 소련탱크들이 망치 역할을 하는 인터내셔널 적인 순간이 펼쳐지며 전투가 승리로 끝났다. 무어인 병사들의 시신이 뒤덮힌 곳에서 스페인 병사들은 링컨 대대원들에게 찾아와 감사를 표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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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에서는 도주&탈주도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1938년 에브로강 전역의 사진

 

그 영광적인 순간이 끝나자, 링컨대대에게 냉혹한 현실이 찾아왔다. 그래도 어느정도 로테이션 돌려가며 휴식을 주던 1차대전 시기 참호전과 다르게 며칠에 한 번 교대를 돌긴 했지만, No 샤워, No 양질의 휴식, No 따뜻한 음식으로 의용대대원들은 고통을 겪었다. 때떄로 날아오는 국가주의자 군들의 박격포탄 공격으로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고, 저격과 포탄 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제대로 씻지도 못하기 시작하여 대대원들의 옷에 이가 드글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탈영병까지 늘어나고 있었다. 어쩌다 한 명 탈영해도 대대는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야 공식 발표로 나지는 않으니깐 말이다.

 

물론 탈영병들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스페인 내전 초기 의(義)기 만으로 의용대대에 입대한 인원들 상당수는 복무기간을 따지지 않고 근무했다. 일부는 의용군의 열기로 국가주의자의 패배로 내전은 조만간 끝날것이란 생각으로 지원했고, 일부 인원은 복무기간이 6개월(? 스페인 내전은 3년 넘게 지속되었다.)이란 말을 듣고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6개월이 넘게 내전이 지속되자, 링컨대대가 속한 제15국제여단원들은 항의했다. 부대원들은 급기야 항의대표단과 고충처리위원회를 발족했는데, 여단 신문 "우리의 투쟁Our Fight"은 "동지들이여 불평 그만합시다."란 말로 간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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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팻" 거니 Jason "Pat" Gurney의 사진

 

부실한 급식은 이러한 의용대대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중요 요소 중 하나였다. 영국 출신 대대원 팻 거니Pat Gurney는 이렇게 불평했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몽땅 통 속에 쓸어 넣고 물을 부어 부글부글 끓이는 것이 요리의 전부였다. 이렇게 끓이면 고기 조각 몇 개와 올리브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감자와 마른 콩만 잔뜩 들어간 희끄무레한 수프가 만들어져 나왔다. 게다가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다 보면 음식은 차갑게 식어 있어, 먹기도 전에 입맛이 싹 달아났다.

출처: 스페인 내전-그곳에 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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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시라이의 사진

 

개판이던 급식 상황은 4월 말 미국 공산당 소속 정치운동가(모스크바 코민테른 근무 경력자)인 스티브 넬슨Steve Nelson(본명 스테판 메사로스 Stjepan Mesaros)이 대대 통제위원으로 오면서 사정이 조금은 나아졌다. 스티브 넬슨은 링컨대대 최고의 급양병을 한 명 데려왔는데,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 잭 시라이Jack Shirai를 데려왔다. 소총병으로 근무를 고집하는 잭 시라이에게 스티브 넬슨은 위기가 오면 소총을 들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급양병으로 데려왔다. 시라이의 요리 솜씨는 그 영국인들도 질색하게 만드는 대대 요리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는데, 시라이의 요리를 먹은 대대원들은 시라이를 "기적의 일꾼"이라고 불렀다.

 

바르셀로나 5월 사태(May Days)-공화파 최악의 ㅄ 짓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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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테러는 지금의 브라질 파벨라의 총성 소리 만큼 스페인 정치사에 흔해빠진 일상사 중 하나였다. 사진은 마테우 모랄Mateu Morral이 계획한 알폰소 13세 결혼식 암살 미수 사건

 

 

https://youtu.be/lkds0QbroWY?si=6T4dA8SgzC-lz1D6

바르셀로나 5월 사태에 대한 동영상

 

국가주의자 부대보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준 사건 중 하나는 바로 공화파 내부의 분열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사회주의 세력에 빠지게 된 스페인 노동층은 스페인 왕정과 공권력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었고, 또 그에 따라 각종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스페인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사건의 주요 당사자인 전국 노동 연맹(CNT)은 국왕 알폰소 13세부터 후안 프림, 카노바스 데 카스티요, 호세 카날레하스, 에두아르도 다토 등 수상 및 거대 정당 대표 등등 일단 거물 정치인들은 암살시도를 하였고,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이들 무정부주의자의 암살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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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역작인 카사 밀라도 스페인 내전 당시 카탈로니아 연합사회당에게 점거되어 내전 기간 동안 카탈로니아 정부 경제농업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일단 내전으로 CNT와 같은 배를 타게 된 공화파 정부는 상당한 무장을 갖춘 이들을 공화국군으로 완전히 편입할려고 추진했고, 아나키즘 유토피아를 꿈꾸던 CNT는 그런 공화정부의 모습에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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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5월 사건을 촉진 시킨 원흉? 바르셀로나 텔레포니카 빌딩, 내전 이전 국제전신회사ITT Corporation 재산이었다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탈취당했다.

 

1937년 5월 2일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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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당사자 인달레시오 프리에토Indalecio Prieto Tuero

 

"카탈루냐 정부 각료 있소? 나 발렌시아에서 전화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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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해당 사건과 연관이 없음 1

 

"거기서 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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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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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에는 정부는 없다!!!! 방어위원회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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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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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아사냐Manuel Azana 스페인 제2 공화국 대통령

 

유이스 콤파니스Lluís Companys i Jover 카탈루냐 지방정부 대통령 있소? 나 대통령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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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톱! 너희 "틀"들이 내뱉는 숨소리보다 다른 중요한 전화들이 많다! Homb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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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정부주의자 새끼들이 우리 전화를 통제한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당장 저 건물 점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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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진은 사건과 연관이 없음

 

아 좋게 좋게 말할때 무장해제하고 항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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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건과 연관이 없음.

 

노란 개들이 다가온다 쏴버려!!!!!!

 

 

 

새떼가 총소리에 놀라 회색 구름이 덮인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도시에는 '기어코 올 것이 왔다'는 말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스페인 내전 당시 영국인 POUM 민병대원인 로이스 오르Lois Orr의 증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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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의 사진

 

그때는 신참내기 작가인 조지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가 이 공화파군과 CNT, POUM의 세력이 맞부딪히는 전투의 한복판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때 조지 오웰은 POUM 민병대에서 국제여단으로의 이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POUM 민병대보다는 무장이 잘 갖춰져 있고 또한 POUM이 싸우던 지루한 아라곤 전선보다 그당시(1937년 기준)엔 가장 치열한 전선인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싸우고 싶은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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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M 집회의 사진

 

 

5월 3일 정오 경, 친구 한 명이 호텔 로비를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듣자하니 전화 교환국에서 모종의 사건이 일어났다는군.... 거리 위 아래 쪽 상점들에서도 점주들이 유리창 위로 철컥 철컥, 철제 셔터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략

"나는 그 모든 어처구니없는 일들에 경악하며 지붕에 앉아 있었다. ..... 그곳에 앉아있으니 길고 홀쭉한 건물, 유리로 된 돔과 반짝이는 녹색과 구릿빛 타일이 구불구불 이어진 지붕, 저 너머 동쪽의 파리한 푸른색 바다 전경까지 수마일 밖 경치가 다 보였다. 그것은 스페인에 온 뒤로 내가 처음 보는 바다였다. 인구 백만 명의 대도시가 폭력의 관성에 매몰되어 ..... 바리케이드와 모래주머니들로 방어벽을 쌓은 유리창들에서 총탄만 연신 발사될 뿐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전차들도 람블라스 거리 이곳저곳에 미동 없이 서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전차 운전사들이 차 밖으로 뛰어나간 탓이었다. 그동안 도시에서는 열대 지방의 폭풍우와도 같은 끔찍한 소음만 수천 채의 석조 건물들에서 울려 나올 뿐이었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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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아내 에일린 오웰Eileen Orwell의 사진

 

조지 오웰은 사건이 터지자 아내 아일린과 찰스 오르가 일하고 있는 POUM 건물의 방어병력으로 투입되었다. 조지 오웰와 헨리 밀턴을 포함한 일군의 민병대들은 사흘동안 람블라스 가로수 길 건너편 건물이 내려다 보이는 영화관 건물에서 머물렀다. 그 뒤에는 오웰과 민병대 무리는 돌덩어리로 POUM 건물을 요새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는데 가진 무기를 다 합해봐야 소총 20정, 총탄 50여발(?!?) 권총 몇 정, 수류탄 몇 발 밖에 없었다. 공화국군측과 무정부측 병력들은 거리의 옥상들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웰이 점거한 옥상 맞은편에는 공화국 정부의 준군사적 도시 경찰인 일부 돌격대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상황이 울화통 터졌던 것은 전선에서 115일을 보낸 뒤 그리도 고대하던 달콤한 휴식을 맛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는데 정작 나는 지붕에 죽치고 앉아, 나 못지않게 따분해하며 간간이 손을 흔들어주고 자신들도 '노동자'일뿐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었지만(자기들에게 총질하지 말라는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떨어지면 발포할 게 분명한 돌격대원들을 마주보며 시간을 죽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회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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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5월 사태 당시 시가전의 사진

 

조지 오웰이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공화국 정부는 공산주의자의 지원을 받아 무정부주의자와 POUM을 상대로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최대 1,000명 적어도 수백명이 전화 교환수의 도발(실상을 보면 사실상 CNT 전체의 속내)로 인해 생겨난 사건에서 죽었다. 조지 오웰은 적이 코 앞에 있는데 파벌싸움이나 하는 상황에 신물이 나버렸다. 국제여단으로 옮길려는 생각도 쏙 들어가고 진실이 뭐든 내전에선 여전히 싸울 가치가 있다 믿고 전선의 민병대 부대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꽤나 깊고 치명적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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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당시 후안 네그린Juan Negrin의 사진, 네그린은 이 사태를 최소화 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물주 소련은 그런걸 원치 않았다.

 

스탈린은 공화국 정부에 이단을 정죄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었다. 목표는 좌파공산주의 민병조직인 POUM이었다. 비교적 작고, 무장도 빈약하기에 내부의 적으로 정죄하기 딱 좋은 목표였다. 좌파 사회주의자이자 총리인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는 거부했지만, 온건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와 손 잡은 소련이 카바예로를 사임시키고 외국어 능통자이자 풍채좋은 대식가인 후안 네그린을 다음 총리로 임명시켰다. 내전의 가장 큰 공화파 지원인 소련의 압력에 네그린은 악마의 거래에 굴복하였고(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한게 아니라, 스탈린의 단순한 도구라고 예단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사학자 휴 토마스(1931~)의 의견처럼 일부 조건만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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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공화파가 점령한 몬주익 교도소의 사진, 공화파는 5월 사태 이후 의심가는 이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데로 수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코민테른의 비밀요원에게 끌려 바르셀로나 경찰서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자기의 친구이자, 혹은 충실한 공산주의자 선임이 알고보니 코민테른의 스파이이자 비밀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경찰서의 유치장은 이가 드글거렸고, 수프 두 사발과 빵 두 조각이 하루 식사의 전부였다. 수십 명의 스페인 내전 참가 외국인들은 내전 전 우파 인사의 저택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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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사태 이후 수감되어 옥사한 안드레우 닌Andreu Nin i Perez의 사진, 안드레우 닌은 POUM의 대표이자 카탈루냐 지방 정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거물이었다.

 

POUM은 공산주의자 신문에서 국가주의자 간첩단의 일부란 기사가 실렸다.(그 말을 들은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매우 기뻐했다.) 다행히 그들 수감자에 대해서 간수 역할을 하던 병사들은 매우 우호적으로 행동했다. 비록 수감된 이들 중에서도 간첩이 있을까봐 마음놓고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영어가 유창한 코민테른 요원에게서 취조도 당했지만, 필요한 물품도 간수들을 통해 살수 있고,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전수하며 고난의 시간을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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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 가장 키큰 사람이 조지 오웰이다.

 

한편 조지 오웰은 바르셀로나 시가전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서 전선으로 돌아갔으나, 지금의 상황과 자기가 좋아하던 스코틀랜드 친구인 밥 스밀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울적했다. 그럼에도 조지 오웰은 지금의 상황에도 공화정부가 국가주의자 정부보다 더 낫다는 생각에 애써 안좋은 생각을 없애고 있었다. 오웰은 우에스카 외곽의 전선에 있었고, 국가주의자 정부군 진지와의 거리는 150여 미터에 있었다. 그리고 국가주의자 군이 POUM 민병대 참호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어 항상 저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192cm의 커다란 키의 조지 오웰은 딱 좋은 표적이었다.

 

 

총에 맞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경험이어서 충분히 상술할 가치가 있다. .... 대체로 그것은 폭발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위에서 섬광이 번쩍 비치는 듯하더니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통증은 아니고 감전되었을 때처럼 무력감이 들면서 몸이 점점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앞에 놓인 모래주머니도 가물가물해 보였다. 벼락을 맞을 때와 흡사하다고 할까....

 목의 경동맥 가까이 총알이 스쳐지나간 당시의 조지 오웰의 회고 출처-카탈로니아 찬가\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나 바르셀로나로 온 조지 오웰에게 아내 아일린은 바르셀로나의 호텔에서 사이 좋은 부부 처럼 팔을 두른 채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다가 오웰에게 무서운 충고를 했다.

 

"여기서 나가요!!!!(아일린 블레어-오웰의 아내)"

"네?(오웰)"

"여기서 당장 나가야 된다구요!(아일린)"

"무슨 말을 하는 거요!(오웰)"

"여기 서 있으면 안 돼요! 빨리 밖으로 나가자구요!(아일린)"

"왜? 대체 무슨 일인데요?(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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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스페인 내전 당시 동지인 밥 스밀리Robert "Bob" Smillie의 모습, 조부가 스코틀랜드 노조 지도자였다. 스코틀랜드 민요를 맛깔나게 부른 걸로 유명했다.

 

호텔 밖 인도에서 아일린은 오웰에게 호텔은 POUM 출신에게 금지라는 말과 함께 앞서 언급한 로이스와 찰스 오르Charles Orr(찰스 오르는 경제학자 이면서 스페인 내전 이전에는 국제연맹 서기로 근무했다. 1906~1999) 부부와 앤드류 닌 같은 여러 당 간부들이 체포되었으며, 친구 밥 스밀리도 투옥되었고, 이틀 전에 민간인 복장을 한 경찰들이 자기 방에 들어가 2시간 가까이 수색을 하고 부부의 편지와 문서들(조지 오웰이 전선에서 쓴 일기-이거 아직도 모스크바의 비밀 문서에 들어 있을 거라고 한다.)을 압수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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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숨어다니던 동지 중에는 훗날 서독의 총리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도 있었다. 이때는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이었던가?

 

조지 오웰은 아일린을 체포하지 않고 냅둔 것이 자기를 체포할려고 하는 일종의 미끼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는 폐허가 된 교회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친구인 밥 스밀리가 맹장염 수술을 받지 못해 옥사했다는 소식에 오웰은 실의에 빠졌다. 안드레우 닌도 이후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사실로 밝혀지자, 며칠 간 오웰 부부는 다른 외국인 POUM 동조자들과 같이 이곳 저곳을 숨어 은신하다가 프랑스로 도주했다. 공화정부에 배신당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오웰은 이 내전 이후에 더 큰 전쟁이 옴을 직감하는 글을 남겼다.

 

 

런던 외곽(의 거대하고 평화로운 황무지), 진창을 이룬 강물 위에 떠 있는 거룻배, 낯익은 거리, 크리켓 경기와 왕실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중산모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들, 빨간색 버스들, 푸른 제복의 경관들-이 모든 것들이 깊디깊은 영국의 잠에 곤히 빠져있다. 이따금 나는 폭탄의 굉음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기 전에는 그 잠에서 결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조지 오웰

 

 

 

 

브루네테 전투Brun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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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네테 전투 당시의 사진

 

1937년 7월 6일 마드리드 서쪽, 과다라마 산맥 경사면의 소도시 브루네테에서 링컨대대의 또다른 싸움이 시작되었다. 브루네테 전투는 마드리드에 사정없이 포격을 하기 위해 브루네테로 밀려오는 국가주의자 군을 막기위해서 공화정부군이 선제 공격을 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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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최신 전차? 라 할 수 있는 T-26의 사진, 국제여단이 운용중 인 모습이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공산주의자만 운전 가능이란 해괴한 논리로 제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마드리드 공방전이 전세계 언론 매체의 헤드라인에 장식되는 와중에 브루네테에서의 또다른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외에 프로파간다적 승리도 가지고 있었다. 공화국군은 전차, 대포를 포함한 7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라마 전투 이후 보충된 미국인 의용병들에게 브루네테는 첫번째 전투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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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화국측 지휘관 중 하나인 엔리케 리스테르Enrique Lister의 사진, 당시에는 선전으로 거의 사상자 없이 국가주의자군 참모진을 생포했다는 명성을 얻었지만, 훗날 역사가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는 리스테르의 군 병력 13,353명 중 4,300명이 전사했다는 내용과 후퇴를 막기 위해 400명의 병사를 도주죄로 즉결 처형 했다는 소련 군사고문단의 기록을 찾아 냈다.

 

국가주의자 군대에게 열등하게 부족한 장교 및 사관 문제도 주요 지휘관들 마다 소련 고문관을 배정함으로 해결되었다. 당시에는 최신 전차인 T-26 전차도 132대나 가지고 있어서 전투 시작 후 얼마되지 않아 공화정부군은 상당수의 영토를 얻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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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 게르다 타로Gerda Taro가 찍은 공화군측 탱크

 

하지만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공화정부군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전차병들은 운전 숙련도나 혹은 기계에 능숙한 이들이 아닌 공산주의자를 위주로 선발되었다. 또한 소련의 명장 투하쳅스키(전투가 벌어지기 얼마전 처형되었다.)가 고안한 기동전은 투하쳅스키가 숙청당했기 때문에 소련 고문관들이 잘 이용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 덕분에 전차들이 효율적으로 산개되지 않고 제병협동이 엉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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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네테 전투 당시의 공화군

 

보급도 개판인지라, 스페인의 살인적인 더위에 새로 편성된 미국인 의용병 대대인 조지 워싱턴 대대원 중에 일사병으로 쓰러진 병사만 6명이 되었다. 국가주의자 군은 소이탄을 쏘며 반격했고, 스페인 7월의 메마른 관목이 소이탄에 맞을 때마다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미국인 의용병들의 스튜 냄비에도 포탄 파편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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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네테 전투의 개략도

 

제15 국제여단의 첫 목표는 국가주의자군이 주둔 중이던 일명 모기 언덕 이었다. 링컨 대대와 조지 워싱턴 대대원들은 스페인 알바공작의 개인 사냥터를 지나 독일과 이탈리아 전투기의 기총 세례를 받으며 진격했다. 전투기의 기총 세례에 보급 물자를 가지고 오는 보급반은 총을 맞고 쓰러졌고, 갈증에 허덕여 흙탕물을 마시다가 배에 탈이나 설사를 하는 부대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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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로의 사진, 전임 대대 지휘관 마틴 후리한은 로가 장교 교육을 받기 적합한 인재라고 평했다.

 

이당시 링컨 대대의 지휘관은 36세의 텍사스 출신 미육군 퇴역병인 올리버 로Oliver Law였다. 전임 지휘관 마틴 후리한이 병에 걸려서 지휘권을 행사하기 힘들어 대신 그가 지휘관이 되었다. 시카고에서 택시운전을 하다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올리버 로에 대해 정확한 생애가 어떠한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마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몇차례 노동 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하라마 전투에도 참전했던 올리버 로는 메리먼 다음(이 당시 메리먼은 미국인 의용병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으로 군 경험이 풍부한 인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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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올리버 로는 처음엔 두려운 듯 땅에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뒤 병사들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어나 진격하던 올리버 로의 몸에 총탄이 박혔고 올리버 로는 그자리에서 절명했다. 미국 군사사에서 2차대전 이전까지 미국 백인들을 이끌었던 최초의 유색인종 지휘관이던 올리버 로의 군사경력은 단 며칠만에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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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파의 공세종말이 찾아오자 국가주의자군의 반격이 쏟아졌다. BF-100이 이 전투에서 최초로 투입되었다. 콘도르 군단이 전투 시기 하루에만 공화파 전투기 21대를 격추시킨 적이 있을 정도로 공화파 공군은 신속히 제압되었다. 루프트바페와 이탈리아제 중폭격기 4대가 미국인 의용 대대원들을 폭격했고, 수많은 의용군이 전사했다.

 

 

이탈리아군_폭격기.png

두체Mussolini가 카우디요Franco에게 공여한 이탈리아제 폭격기 사보이아-마르케티 SM. 81 피피스트렐로Savoia-Marchetti SM.81 Pipistrello

 

 

 

 

큼지막한 폭탄 구멍들 사이를 지나다 보니 구멍들 가장자리에,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십 수 명의 미국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병사들은 기묘한 모양의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브루네테 전투에 참전한 영국 대대 대위의 증언 중에서

 

 

 

조지_네이선.jpg

영국 대대 참모장 조지 네이선Samuel George Montague Nathan의 사진,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자 아일랜드 독립 전쟁에 참전한 이 베테랑 군인은 동성애자를 배척하던 시기에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대놓고 말하고 다녔다. 전투 중에 치명상을 입자 부하들에게 자기가 죽을 때까지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조지 네이선은 괴짜였지만 대대 내에선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3주 후 브루네테 전투가 끝났을 때 공화파군 2만 5천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좋은 음식 솜씨로 병사들의 입맛을 즐겁게 한 잭 시라이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미국인 대대 군의관 2명도 전사했다.) 국제여단에서 가장 유능하기로 알려진 영국 대대의 참모장 조지 네이선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링컨 대대와 조지 워싱턴 대대의 인원 절반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인력이 부족하여 이 둘을 합쳐 링컨-워싱턴 대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많은 의용병들은 그냥 링컨 대대라고 불렀다.

 

 

 

어느 면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싸우는 존재, 고통스럽게 그리고 또 때로는 무장이 덜 된 채로 저들에 비해서는 최소한 상당한 품격을 지니고 야만에 맞서 위험한 곡예를 하는 존재

국제 여단에 대한 조지 오웰의 평가

 

 

게르다_타로가_촬영한_브루네테_전투.png

브루네테 전투 후 폐허를 살피는 공화파 병사의 사진, 사진은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연인인 게르다 타로Gerda Taro가 찍었다.

 

사기가 바닥난 병사들이 탈영을 시도하였다. 의용대대에서 최소 2명의 병사들이 도주죄로 총살되었다. 일부는 피레네 산맥(여기 넘어서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가다가 낙사로 죽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을 넘어서 도주하거나 혹은 밀항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탈주했다. 브루네테 전투는 끔찍한 비극으로 끝났지만 공화정부는 계속 전투를 유지한 것 외에 다른 활로를 찾지 못했다.

 

 

 

 

 

TMI

TMI) 영국 노동당 당수 클레멘스 애틀리는 공화파의 구호이자 "그들은 통과할 수 없다."란 스페인말인 "No Pasaran"이란 말을 "우리는 통과하지 않는다."란 의미의 "No Pasaremos"로 잘못 말하는 실수를 범했다.

 

TMI) 미국인 대대가 생기기도 전에 미국인 의용병 전사자는 이미 있었는데, 첫 전사자는 영국 의용병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전사한 조지프 셀리그먼 주니어Joseph Seligman Jr.가 그 주인공이다. 스와스모어대학교에서 진학중(하버드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스페인으로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건너가 가명(아일랜드인 프랭크 니어리)으로 마드리드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셀리그먼의 아버지는 켄터키주 공화당 의장을 지낸 거물이었고, 아들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온갖 인맥(당시 국무장관이던 코델 헐?!?에게도 요청했다.)을 동원하여 자식의 시신이라도(영국인 의용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건지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유품으로 켄터키주 운전면허증과 스와스모어 대학교 학생증이 들은 지갑 2개 만을 받았을 뿐 이었다.

 

TMI) 마드리드 전투에서 전사한(유력한 원인이 아군의 오발로 추측) 부에나벤투라 두루티는 출혈이 심한 가운데 무정부주의자들이 한탄하듯이 "위원회가 너무 많아!"를 중얼거리다가 이튿날 새벽에 숨졌다.

 

TMI) 국가주의자이자 반군 장군인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는 라디오 방송에서 "무어인 한 명 당 민병대 여자 셋이라, 호시절이 따로 없네!"를 연신 읊었고, "이 전쟁(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스페인인들끼리 싸우는 내전이 아니다. 전 세계 유대인과 서구 문명 간의 전쟁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며 공화파 여자들을 유린(river run 후 살해)하는 것 이상의 복수를 할것이라고 말했다. 데 야노는 지독한 술꾼이기도 했는데, 라디오 방송에서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른 채 부관에게 "아 젠장, 술 가져와"라고 고함치는 추태를 벌였다.

 

TMI) 그 문제의 바르셀로나 전화 교환원의 정치 성향은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이라고 한다.

 

TMI)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문서에는 조지 오웰 부부의 성향을 "명백한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지 오웰이 프랑스로 도망간 것은 어떻게 보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TMI)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서 미국이 스페인 공화국을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네덜란드인 영화감독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와 같이 스페인의 대지The Spanish Earth라는 다큐 영화를 만들었다.

https://youtu.be/L7ti8qvi_8I?si=l5URo9hUZVU4WP4u

 

 

 

 

1개의 댓글

15 일 전

이번 파트는 공화파가 이길 수 있는데도 어떻게 ㅄ같이 말아먹었는가 파트임. 5열에 대한 자기실현적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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