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나라잃은 국민(특히 여성)들이 당하는 지옥(1930~45년)

구소련은 국가의 성립 이후 본국 뿐 아니라 연방에 합병된 각 지역에도 공산주의, 집단농장 등 자신들의 제도를 이식하려고 함.

이런 이식의 과정은 당연히 폭력과 강제가 동반되어 현지의 기존 문화를 파괴하려는 것에서 출발하였음.

특히 스탈린은 '러시아와 공산정권을 붕괴시키려는 폴란드 정부의 획책'이라는 음모론을 진심으로 믿었음.

또한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이 식량을 숨겨두고 정권의 지시를 사보타주 하고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음.

 

독일 또한 나치당 집권이후 독일을 내부에서 배신한 유대인의 음모론과 독일인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인종이라는 

우생학적 논리를 진심으로 신봉하며 이것들을 국가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함.

 

당시의 강대국인 두 나라의 수뇌부가 이런 음모론 내지 사이비 이론에 심취해 있었고

이 결과는 두 나라의 지배에 들어간 각 나라의 국민들에겐 재앙이나 다름 없었음.

 

당시 나라잃은 국민들의 참상은 역사에 관심 좀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니 

한동안 핫했던 주제에 맞춰 당시 여자들이 겪었던 일에 대해 몇가지 소개함.

 

1.

폴란드 박멸 작전이 가장 격렬하게 진행된 우크라이나는 인위적인 기근 때문에 지난 수년 동안 수백만 명이 사망한 지역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대공포 시대에 남자 가족을 잃은 폴란드계 가정 중 일부는 이미 기근의 상처가 깊은 상태였다. 예를 들어 한나 소볼레프스카는 1933년 다섯 형제자매와 아버지가 굶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남동생인 유제프는 굶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되뇌이던 아이였다. “우리, 이젠 살 수 있어, 살 수 있어!”

1938년 검은 까마귀(소련 경찰)가 그때까지 살아 있던 그녀의 다른 형제와 남편을 데려갔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대공포 시대의 우크라이나 내 폴란드 마을에서 “아이들은 울고, 여자들은 남겨질 뿐이었다”

 

2.

1932년의 연간 징발 목표량은 1933년 1월 후반에 달성했지만, 곡물 징수는 계속되었다.

당원들이 봄에 파종할 곡물을 찾으면서 징발은 2월과 3월까지 이어졌다.

1932년 12월 말, 스탈린은 봄에 사용할 종곡을 압수해 연간 목표량을 달성하자는 카가노비치의 건의를 승인했다.

그 결과 집단농장에는 다가오는 가을에 심을 곡식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봄에 파종할 종곡은 수출 직전인 기차 화물에서 가져오거나, 소련이 비축물로 보관해온 300만 톤에서 빼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농민이 아직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종곡을 압수해서 얻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농민이 봄 수확철까지 살아남는 데 필요한 최후의 식량이었다.

같은 달 약 3만7392명이 소련령 우크라이나 마을에서 체포됐는데, 굶주림으로부터 가족을 구하려 했던 이들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이 최후의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마는데, 살인을 실행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한 활동가의 기억에 따르면, 그해 봄 그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봤다. 여자와 아이들은 배가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창백하며, 숨은 쉬지만 눈빛은 공허하고 생기가 전혀 없었다”

 

3.

농민에게 문화를 제공하라는 중앙 당국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반두라 악단과 함께 현장으로 이동했다.

농민의 마지막 음식을 강탈하는 순간에도, 국가는 죽어가는 사람의 ‘정신을 고양하고 기운을 북돋워야 한다’는 기묘한 태도를 보였다.

악단은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을 숱하게 발견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만난 사람들, 여자아이 두 명은 죽은 채로 침대에 있었고, 한 남자의 두 다리가 스토브에서 튀어나와 있었으며, 노부인은 미친 듯이 손톱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4.

독일군의 눈에 폴란드인들은 인간 이하의 괴물이었다.

폴란드인에 대한 적개심이 몹시 투철했던 어떤 군인은 고통으로 숨진 한 폴란드인의 일그러진 표정을 ‘독일인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가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일군을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곧 그 폴란드인은 독일군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었다.

대체로 그들은 새 영토를 얻고 나면 습관처럼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이는 심지어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아군 사상자가 발생한다면, 그들은 닥치는 대로 그 책임을 물었다.

먼저 남자들에게, 그 다음은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게까지도.

 

 5.

한 무리의 독일 군인들이 유대인 남성 주위를 에워싸고 그의 긴 수염과 머리칼을 밀어버리는 모습, 이를 두고 낄낄대며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처벌받을 범죄는커녕, 무슨 장난이라도 치듯 유대인 여성을 강간하는 모습 또한 자주 보였다.

강간을 일삼던 병사들이 붙잡히더라도, 인종 혼합을 금지하는 독일 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말을 다시 들려주고는 ‘그만 가보게’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6.

디나 프로니체바는 자신의 부모님과 여자 형제들을 비롯한 키예프 유대인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귀중품과 서류를 빼앗긴 사람들은 강제로 발가벗겨졌다. 그 뒤 10명씩 조를 이뤄 위협에, 혹은 머리에 총을 맞아 바비야르라고 알려진 골짜기 아래로 떨어졌다.

많은 사람이 이미 폭행당한 상태였다. 프로니체바는 “사람들은 총에 맞기 전부터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라고 기억했다.

 

7.

유대인 남성들은 구덩이를 파내는 작업을 위해 우츠크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히르카 폴론카 인근의 숲으로 보내졌다.

감시하던 독일인들은 이들에게 앞으로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숨기려들기는커녕 ‘구덩이를 잘 파라. 내일 네놈들 아내와 엄마가 묻힐 거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인 8월 21일, 우츠크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으로 끌려왔다. 즐겁게 웃으면서 먹고 마시던 독일인들은 여인들에게 “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외도록 했다. 그러고는 한 번에 다섯 명씩 옷을 벗고 구덩이 앞에 나체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다음 차례인 여인들은 앞서 사망한 시체들 위에 나체로 누운 채 총을 맞았다.

 

8.

민스크를 방문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그곳에 죽음의 시설물들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나치 친위대는 민스크 밖 말리 트라스차네츠에 새로운 시설물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1942년 5월 초, 약 4만 명이 죽음을 맞게 된다.

독일군 장교의 배우자들은 말리 트라스차네츠에 대해 ‘말타기를 즐기며 모피 코트(유대인 여자들이 사살되기 전 빼앗은)를 모으기 아주 좋은 장소’로 기억했다.

 

9.

1942년 9월 22일에서 23일, 빨치산들과 관련 있다는 표면상의 이유를 들어 마을 세 곳을 파괴하고자 310 보안경찰 대대가 파견되었다.

첫 번째 마을인 보르키에서 있었던 일이다. 경찰들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을 체포하고는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700미터 정도 걸어가게 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삽을 나누어주며 곧 파묻힐 곳을 스스로 파내도록 지시했다.

경찰들은 이날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들 벨라루스인 소작농 남자 203명, 여자 372명, 어린아이 130명에게 방아쇠를 당겨댔다.

보안경찰은 “믿을 만한” 이들로 분류된 104명은 남겨두었는데, 물론 이들이 그 난리통 뒤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10.

빨치산들이 반드시 유대인들의 합류를 반겨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독일 점령 세력을 무찌르는 것이지 그곳에서 고통받던 민간인들을 돕는 것이 아니었다.

무장하지 않은 채 합류하려는 유대인들은 외면당하기 일쑤였고, 여자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무장한 유대인들조차 때때로 합류를 거부당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무기를 빼앗기고 빨치산들에게 살해당했다.

 

11.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독일 여성들에게 자행된 폭력은 무시무시했다.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지키려 나선 남자들은 두들겨 맞거나 살해당했다.

사실 그녀들을 지켜줄 남자도 별로 없었다. 대부분 전사했거나(이 전선에서 벌어진 작전으로 약 500만 명의 독일 남성이 죽었다), 독일군에 차출되었거나, 비상향토방위군에 차출되었거나, 소련군에게 잡혀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가정에 남아 있던 남자들은 대개 노인 아니면 장애인이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여성이 강간당했다.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가 나중에 자라서 알게 된 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누이동생 대신 소련군에게 몸을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누이도 무사하지 못했다. 윤간도 아주 흔했다. 거듭되는 강간으로 몸이 망가져서 죽는 여성도 많았다.

 독일 여성들은 강간을 피하기 위해, 또는 강간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거나 자살 시도를 많이 했다.

한 여성의 회상처럼, “세상이 캄캄해졌다. 말로 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수많은 여자와 어린 소녀들이 러시아인들에게 강간당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비명을 들으며, 그 여성은 한 자매와 함께 손목을 그었다. 하지만 목숨을 잃지 않았는데, 아마도 지독하게 추운 날씨로 피가 덜 흘러나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튿날 어느 소련 의사에게 치료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은 밤새 능욕을 면했다. 기절하고 있었던 것이 죽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

 

12.

육로로 피란길에 나선 독일인들은 종종 붉은 군대와 독일 육군의 ‘십자 포화’에 쓰러졌다. 몇 번이고, 소련군의 전차는 독일 민간인들의 피란 대열과 마차들을 짓부수고 지나갔다.

에바 얀츠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몇몇 남자가 총에 맞았다. 여자들은 강간당했다. 아이들은 두들겨 맞고, 어머니의 품에서 빼돌려졌다.”

무장 친위대 병사의 한 명으로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귄터 그라스는 “한 여자가 부르짖는 걸 봤다. 하지만 그녀의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13.

소련과 독일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전혀 새로울 것 없던 기술인 내연기관, 철도, 화약무기, 살충제, 철조망 등을 써서 대량학살을 했다.

어떤 기술을 썼든 간에 그 학살은 개인적인 살인이었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감시탑에 있는 장본인들의 눈에 보였다. 총살당하는 이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셋 중 둘은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셋 중 한 명은 머리에 권총이 겨눠진 채로 보였다. 중독사하게 될 사람들은 색출되고, 기차에 태워지며, 가스실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고, 다음엔 입은 옷을 빼앗기더니, 여성들은 머리카락마저 잃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 죽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14.

공산당원들도 스스로 챙길 수 있는 건 모조리 챙겨 배를 채웠고, 그들의 일과 열정보다 고통과 죽음만 과시했다.

죄책감 때문에, 혹은 승리의 쾌감 때문에 그들은 어딜 가든 농민들을 능욕했다. 피클 통에 소변을 보거나, 그저 재미로 배고픈 농민들이 서로 싸우게 하거나, 개처럼 기고 짖게 하거나, 진창에 무릎을 꿇고 빌게 하는 식이었다. 집단농장에서 물건을 훔치다 잡힌 여성은 옷을 다 벗기고 구타당한 다음 나체로 온 마을에 끌려다녀야 했다.

어느 마을에서는 수색단원들이 농민의 오두막에서 술에 취한 채로 농민의 딸을 윤간하기도 했다. 곡물 압수가 핑곗거리가 되어 혼자 사는 여성은 야간에 일상적으로 강간을 당했다.

 

15.

어떤 이들은 굶주림 때문에 너무 약해져서 낯선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는 서 있지도 못했다. 기다림은 온종일 계속되었고, 이틀이 걸릴 때도 있었다.

임신부와 상이용사들은 남들보다 먼저 물건을 살 권리를 빼앗긴 채 뭔가를 먹으려면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간혹 대기열에 있던 한 여성이 흐느끼면 울음소리가 줄을 따라 울려 퍼져, 수천 명이, 원초적 공포를 느끼는 한 마리 짐승 같은 소리를 내곤 했다.

 

 16.

1933년 5월, 대부분의 희생자가 이미 죽은 때였다. 그다음 여름과 가을 내내, 폴란드의 우크라이나계 신문들은 기근 소식으로 도배되었고, 우크라이나계 폴란드 정치인들은 시위 행진과 규탄 시위를 계획했다. 우크라이나 페미니즘 조직의 대표는 세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자, 소련 상품에 대한 국제적 불매운동을 벌이려 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몇 차례인가 청원이 올라갔다.

  그 어떤 시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국제 시장을 규율하는 법규는 우크라이나에서 거둬들인 곡식으로 외국인들을 먹이는 일을 아무도 방해할 수 없도록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대공황 시기 미국 노동자들의 입지에 대해 골몰하고 있던 루스벨트는 소련과 원만한 외교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17.

독일 경찰 및 군인들은 벨라루스 여성과 아이들을 살해했고, 그들의 남편이나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람들은 노동 노예로 삼았다. 따라서 1943년 봄과 여름에 이뤄진 대 빨치산 작전은 무엇보다 노예화 작전의 성격이 짙었다.

 

18.

침공 이튿날, 독일군은 민간인들을 전장으로 끌고 와 인간 방패로 쓰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련군은 잡는 즉시 사살해야 할 빨치산으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항복을 시도하는 이들 역시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붉은 군대에서는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제복 입은 여군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먼저 살해당했다. 

 

 19.

유대인 여성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고통받았다. “인종적 더럽힘”을 단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독일인은 재빨리 강간을 살인의 전주곡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일부 독일인은 유대인 여성들을 두고 일종의 “미인 대회”를 개최하고는, 곧 그 여인들을 묘지로 끌고 들어갔으며, 강제로 옷을 벗긴 뒤, 몸을 그리고 목숨을 빼앗았다.

게토 안의 경우, 독일 군인들은 유대인 소녀들에게 한밤중에 발가벗긴 채 춤을 추도록 했고, 이튿날 아침 그곳에는 소녀들의 싸늘한 시신만 남아 있었다.

페를라 아긴스카야는 1941년 가을 어느 날 밤 자신이 어두운 아파트에서 목격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 작은 방에는 탁자 하나와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녀 가슴에 난 깊고 거무스름한 상처에서 나온 피가 그녀의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강간당한 뒤 살해된 것이 틀림없었다. 음부 주변에도 총에 맞은 상처가 가득했다.”

 

 20.

바르샤바는 땅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경찰력 및 디를레방거 특무단이 이것의 실행에 들어간 것은 1944년 8월 5일과 6일로, 양일간 그들 손에 살해당한 민간인의 숫자만 약 4만 명이었다. 그들의 군사적 목표는 서부 중앙 볼라 인근까지 행군해 작센 공원에 있던 독일 지휘부를 한숨 돌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들을 자기네 맨 앞에 세워 일을 시키고, 그 와중에 여성과 아이들을 인간 방패로 삼거나 심지어 여인들을 강간하면서, 볼가 거리에 폴란드 국내군이 설치해둔 바리케이드를 걷어내고 있었다

 

*4줄 요약

1. 나라와 이를 지킬 힘이 없으면 피지배자는 굶주리고 살해당한다.

2. 여자들에게는 성적인 희롱과 괴롭힘 이후 살해당하고 누구도 막아주지 못한다.

3. 저당시 독일, 소련놈들의 인식, 인성 수준과 지금의 '짱'의 그것이 과연 다를까?

4. ??여고 : 그래서요? 깔깔깔

 

*자료출처 : 티모시 스나이더 저, '피에 젖은 땅(원제 Blood lands)'

7개의 댓글

2022.01.26

군인들 경멸하는 그 집단이 군인들 없었으면 겪었을 상황이지

 

2
2022.01.27

오예 읽을거리

0

국군장병들 비하하는 머저리들은 절대 모르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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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학생들에게(고등학교이상) 전쟁의 참상을 여과없이 보여줘야한다고생각한다 그냥 총맞고 으악하고죽는그런거말고 정말로 팔다리가 나뒹구는 그런..그리고 패전국의 현실까지...

11
@스시먹으려고돈버는사람

라이언일병 오마하비치 ㄱㄱ 다 보고나면 체코 점령지에서 끌려온 군인들이 항복하고 싶어도 미군이랑 말 안통해서 다른 독일군처럼 총맞아 죽는 것도 설명해줘라

0
sad
2022.01.27

끔찍하다 시도때도없이 강간이라니

0
2022.01.27

우리나라도 비슷했겠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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