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긴글,노잼] 아버지 이야기 - 상

익판에다 쓰려다 혹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으니 여기에 쓸게.

 

나처럼 세상물정 아예 모르는 어린 친구가 읽으면 참고정도는 되지 싶어.

 

설령 재미없거나 다 아는 정보라도 그냥... 어디에라도 분출하고 싶었어.

 

 

 

 

 

 

 

지난해 할로윈 데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3년전에 폐암 3기 판정 받고부터의 이야기를 쭉 되짚어보려고 함.

 

 

17년 8월. 전역을 6개월 앞둔 나는 하루하루 예초병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개인정비 시간에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원래 공용 휴대전화를 독차지하던 여자친구 있는 말년동기의 짜증스러운 표정을 무시하며 전화를 건네받았다.

 

엄마가 자꾸 뜸을 들이고 울먹이자 내가 화를 냈다. 한참이 걸렸다.

 

아버지 회사에서 1년에 한번 시켜주는 건강검진 결과를 엄마가 우연히 찾아냈다고 했다.

 

몇달이나 지난 검진 결과서에는 폐암 3기라고 써 있었다.

 

 

 

취침 소등 하고 싸지방 연등을 신청해서 네이버에 검색해봤다.

 

폐암은 3기 이상은 완치사례가 거의 없고, 암 중에서도 가장 사망율이 높다고 했다.

 

뭐 찾아보기야 열심히 봤는데 그냥 최악이라는 결론 뿐이었다.

 

몇가지 치료방법 - 흔히 아는 방사선같은 것부터 여러 표적항암인지 뭐시기.

 

모르는 일이니깐요! 간바떼!하는 식이지만 사실상 연명을 목적으로 하는 치료였다. 낫는 게 아니라.

 

기억나는건 5년생존율이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

 

 

 

예전부터 부모님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던 나였다.

 

남들 티비보고 탁구칠때 나는 군대에서 책읽고 공부했다.

 

전역하면 대학교 때려치고 잠적해서 하고싶은 일 할라고.

 

불효자고 뭐고 다 좆까고 꿈에 잔뜩 부풀어있던 나는

 

풍선 터지고 남은 고무 쪼가리처럼 허망했다.

 

항상 내 입으로 떠들어댔었다.

 

부모님이 싫고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키워준 빚은 잊지 않는다고.

 

언제가 됐든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게 확정이었다.

 

어린애처럼 뭐해야지, 뭐도 해야지로 노트에 리스트까지 만들었던 나는

 

당장에라도 가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8월치고 꽤 선선했던 밤, 울먹이는 엄마의 전화를 끊고

 

아버지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담배를 계속 태웠다. 아이러니 하게도 더 맛있었다.

 

 

 

엄마의 제안에 말년휴가를 당겨 12월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요즘은 복무기간이 점점 짧아져서 그런가, 여자친구 사귀는 병사들도 많다.

 

행보관과 포대장의 어설픈 위로와 함께 치열한 경쟁을 뚫고 12월에 휴가를 나와도 기분은 꿀꿀했다.

 

늘 그렇듯 아무 말 없는 아버지, 어린 여동생, 평소에 툴툴대는 것과 다르게 애써 밝은 엄마.

 

12월에 강원도는 가지 마라. 특히 바닷가에는.

 

속초 뭐시기 닭강정? 과장없이 먹어본 치킨 중 최악이었다.

 

한창때 두마리는 혼자 먹던, 최고기록 하루 4마리 찍었던 나에게도 그 닭강정 한마리가 버거웠다. 맛없어서.

 

지금생각해보면 아버지에게 하는 엄마의 무언의 항의였던 것 같다.

 

이거 포기할거야? 그냥 맥아리 없이 죽을거야? 그런.

 

 

 

전역할때까지 별 진전은 없었다.

 

항상 속을 알 수 없는 아버지가 치료 의욕이 없는 것 같다고 엄마를 통해 전해들었다.

 

엄마가 전화로 약간 떠듬거리며 요즘은 회사다니면서 치료받는 사람도 많다던데, 하는 말에

 

그래도 그건 아니지, 라고 말하며 나도 말에 확신이 없었다.

 

동생은 초등학생이었고 엄마는 나 낳을때 직장을 관두었다. 암 투병에 얼마가 들지 알수 없었다.

 

아버지는 지방에서 원룸을 얻어 일하고 주말에만 서울로 올라오셨다.

 

말하면 누구나 아는, 손꼽히는 좋은 회사였지만, 병가가 길어지면 점점 월급이 줄다가 은퇴하는건 어쩔 수 없었다.

 

말수가 없는 아버지에게 엄마가 의사를 물었지만 답을 듣기 어렵다고 했다.

 

치료 받을거지? 으음. 안 받을거야? 으음. 이런 식이었다.

 

 

 

 

전역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대학에 돌아가야 했다.

 

문제를 늘리긴 싫었다. 아직 어린 동생에 대한 생각이 컸다.

 

초등학교 다니는 동생을 들먹이는 엄마에 결국 아버지도 치료를 받겠다고 넘어왔다.

 

군생활 21개월 동안 전화한번 없던 아버지가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별 감흥은 없었다. 우리 부자 사이는 늘 더없이 어색했으니.

 

어디선가 베껴온건가, 아니면 엄마가 대신 썼나 싶은 진부한 카톡에 나도 상투적인 답변을 건넸다.

 

 

 

폐암 2기까지는 수술로 떼어낼 수도 있지만, 3기 이후로는 치료가 주가 된다. 4기까지 있다.

 

미디어로만 항암을 접한 우리는 고문받는 표정의 대머리 환자를 상상하기 쉽지만,

 

요즘은 치료 방법도 다양해졌고, 대부분 통원을 권장한다. 아버지도 모근은 끝까지 온전했다.

 

50살에 폐암은 상당히 젊은 나이였는데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노인보다 세포 재생이 빠르기에, 암세포도 잘 안 죽는다고.

 

아니, 그 전에 높은 확률로 죽는다는데 젊은 건 안 좋은거겠지. 쨌든.

 

 

결국 회사를 관둔 아버지는 혼자서 병원도 곧잘 다니고 그 외에는 바쁘게 놀러다니셨다.

 

후에 들은 바로는 술담배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엄마에게 허가 받았다는데,

 

내색은 안했지만 이왕 치료 시작한 거 제대로 하고싶었는지 스스로 약도 잘 먹고 산도 많이 타셨다.

 

암이 무서운 점 중 하나는 다른 부위로 번진다는 거다.

 

폐쪽의 암세포는 줄어들지는 않아도 잘 억제되고 있었지만

 

뼈와 뇌쪽으로도 암세포가 전이됐다.

 

뇌쪽의 방사선 치료는 부담이 있는지 며칠씩 입원했다.

 

길어지면 2주도 입원하니 그제서야 나에게 헬프가 들어왔다.

 

 

 

아버지한테 넷플릭스를 공유해드리고 엄마랑 번갈아가며 입원 간호를 했다.

 

어디가서 치료받고 오면 약간 찡그린 채로 잠드는 정도였다.

 

밥오면 뚜껑 열어주고 다먹으면 치우고 하는 일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말을 거는 아버지와 짤막한 대화가 가끔 오고갔다.

 

 

 

임상 제의가 들어왔다고 했다. 개발중인 치료법을 실험해볼 수 있다는 거다.

 

효과는 좋지만 조건이 빡세서 5명 중 1명만 받을 수 있다는데 그 조건을 만족했다.

 

암 진단 1년에서 2년차로 가며 상황은 좋아지는 듯 보였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 건강해보였다. 전국 방방곳곳을 혼자 여행다녔다.

 

서울 둘레길을 몇달에 걸쳐 다 돌았다고 했다.

 

좋아하시는 락 콘서트, 락 페스티벌도 여러번 가셨다. 윤도현 밴드의 팬이 되었다.

 

락 컨텐츠를 하는 당민리뷰라는 채널도 추천해주었다.

 

 

 

반백년 만에 그런 자유를 처음 만끽하는 아버지를 보며 다행이었지만,

 

참 모지라게도 나는 섭섭했다.

 

10살도 되기 전 아버지의 mp3에서 들은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나도 락 음악을 좋아했다. 그게 아버지와 나의 유일한 접점이었다.

 

근데도 한번도 같이가자고 권유하지 않으셨다. 가끔 너도 꼭 가보라고 짧게 말만했다.

 

엄마가 나보고 먼저 같이가자고 제안하라 했다. 그러긴 싫었다. 그러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 좋은 회사 다니고 야근은 거의 안했지만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 늦게 들어왔다.

 

때리거나 욕을 하지 않았지만 토닥이거나 말을 걸지도 않았다.

 

주말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늦잠자거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보던 아버지.

 

아무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몇년, 혹은 몇달 안에 아버지는 죽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내가 권유할 수 있었다. 아마 알았다고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한번쯤은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또다른 이유로는 아버지가 하고 싶은 일만 했으면 했다.

 

50평생 남을 위해 바친 그 수고스러움을 나는 존경했다. 미웠을 망정 그건 확실했다.

 

하고싶은걸 혼자하는게 가장 좋다면 그러셨으면 했다. 

 

변명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도 아닌 것 같다.

 

 

 

19년 여름에 아버지는 갑자기 전화해 여행가자고 했다. 나랑 둘이.

 

엄마가 등떠밀었을 거라고 90프로 정도 확신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여수가고 싶다고 해서 숙소를 잡고 계획을 짰다.

 

먼저 잡힌 친구들과의 일본 여행 바로 전 주였다.

 

끔찍한 더위의 한여름이었고 우리는 기차를 타고갔다.

 

우리 부자의 몇 안되는 공통점 중 하나는 게으름이었기에

 

여수까지 가서도 우리는 밖에 있는 시간보다 실내에서 더 오래 있었다.

 

우와 저거 봐라, 우와 멋있네요. 끝. 우리 대화의 태반은 그런 느낌이었다. 

 

마지막 날 돌아오면서 순천의 세계정원이라는 곳을 갔다.

 

유명한 곳이라는데 나는 처음 들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간 여행지 중에 가장 좋았다. 추천함.

 

단, 폭염만 아니었다면. 우린 그곳의 작은 도서관에서 에어컨 바람에 커피마시고 돌아왔다.

 

 

전체적으로 괜찮았다. 괜찮았지만 신나는 여행은 아니었다. 다음주에 친구들과 오사카를 가기에.

 

오사카에서 돌아온 인천공항에서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였다.

 

여수 갔다온 다음날 열이 많이 올랐고 내가 오사카 있는동안 입원해있다고 했다.

 

신경쓰일까봐 이제 전화했다고.

 

그 여름날에 엄살 안부린다고 억지로 나랑 걸어다녀서?

 

밤새서 담배 두 갑을 핀 것처럼 그 질문이 기분나쁘게 내 입안에 멤돌았지만 꺼내지는 않았다.

 

엄마도, 아버지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 아니겠냐?

 

 

 

 

제일 비싸고 좋은 병원 중 하나인 삼성서울병원이지만,

 

간호인을 위한 시설은 당연하게도 병원 입장에서 우선순위 밖이다.

 

간호인은 제대로 씻을 곳이 없어 여름에는 몇 주 씩 간호하기 매우 힘들다.

 

하도 걸었더니 고래잡은것처럼 뒤뚱거리며 걸었지만 나는 다음날 바로 엄마랑 교대하기로 했다.

 

친구들과 공항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 아직 있다. 내 얼굴이 돌부처마냥 굳어있는.

 

 

 

그 입원이 끝나고부터 아버지는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아픈지 좀처럼 밖에 나가지 않자 엄마가 구박했다. 산책은 중요하다.

 

아버지는 나가는 척 하고 카페에 앉아있다가 여러번 걸렸다고 한다.

 

엄마는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운이 좋아 임상까지 포함해 현존하는 대부분의 치료를 받았지만,

 

20년이 시작될 즈음 상황은 안좋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왼쪽 다리뼈에 전이된 암이 빠르게 악화되었다.

 

절단해야할 수준이지만 오래 투병한 암환자에게 수술은 자살과도 같다.

 

잠시 멈칫했던 폐쪽은 놀리듯이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질세라 뇌쪽도 찔끔찔끔 커져갔다.

 

치료는 효과가 없어지면 더 하는 걸 권유하지 않는다. 비싸서.

 

마지막 임상치료는 천단위의 돈이 들었다.

 

 

 

전에는 이래도 되나 싶을정도로 몇달에 한번 가던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이 길어졌다.

 

다리의 암은 골반까지 올라와 거동이 힘들어졌다. 기저귀를 차기 시작했다.

 

코로나라는 것이 사회의 암처럼 일상을 좀먹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면회를 금지했고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씩 나도 간호를 나누어 맡았다. 24시간 마스크를 써야했다.

 

삐쩍 말라 이제 70키로도 안되지만 성인 남성의 기저귀를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나마 예부터 비위는 좋아 다행이었지만, 당신 스스로 느낌이 둔해지면서

 

하루에 작은 똥을 대여섯번씩 누니 지쳐갔다.

 

소변도 양으로 치면 딱 종이컵 반을 수시로 누는 걸 직접 통에 받아야했다.

 

대소변은 잠잘시간도 가리지 않았다. 비위좋은 건 별 의미가 없었다. 그냥 지친다.

 

 

 

엄마나 나나 얼굴에 마스크를 쓰는 데에 익숙해져갔다.

 

코로나 때문에 쓰는 그런 마스크가 아니었다. 웃는 얼굴의 가면이었다.

 

그러자고 합의를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아는 가장 짜증이 많은 엄마도 싫은 내색 한 번 안했다.

 

 

 

2월, 3월, 더 나쁠것도 없지!라는 말은 최악의 개소리가 되었다.

 

병원에서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제 안해줘. 그런 게 아니었다. 완곡히, 돌려 말했다.

 

암치료에 도가 튼 엄마가 이것저것 물어도,

 

그건 이제 의미 없다. 그건 추천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이었다.

 

기어코는 병원 쪽에서 진료를 잘 안잡아주기 시작했다.

 

거동이 안되는 시점에 이제 병원 가려면 앰뷸런스를 불러야 했다.

 

건드리기만 해도 신음을 내는 아버지의 퉁퉁부은 왼다리는 뼈만 남은 오른다리보다 반지름으로 두배는 더 되어보였다.

 

대구 신천지였나 뭐였나 그쯤 입원할 때는,

 

코로나가 심해지자 수십시간씩 병원앞에서 기다렸다가 검사가 끝나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입원해도 의사는 만날 수 없었다.

 

몇가지 검사받고 간단한 치료받고 끝이었다. 확실히 오는 건 퇴원권유뿐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두분의 상의 끝에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한달정도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환자 외에는 입장이 불가했다.

 

거동이 안되는 아버지는 혼자서 그곳에서 있었다.

 

밤에 엄마가 전화하면 마음에 든다고 했다고 한다.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내 의견을 말했다.

 

이제는 진짜 남은 시간이 없었다. 그럼 적어도 집에서는. 가족과 함께라도.

 

설득해서 집으로 데려왔다.

 

 

 

나는 전역하고 쭉 자취였다.

 

필요하면 부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빈말로 들렸으려나.

 

알바하고 공부하고. 주로 놀고. 그런 생활 중에 갑자기 집으로 들어와달라고 했다.

 

사실 집에 들어가 사는건 죽도록 싫었지만, 그걸 엄마가 모를리도 없었다.

 

그랬기에 그 요청에 군말없이 방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보증금은 못 받았다.

 

9월. 돌아온 집에 익숙한 기운이 가득했다.

 

병원에서 많이 느낀, 죽음의 기운.

 

안방의 침대에 홀로 누운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고 조용했다.

 

가끔 들어가 몸을 일으키고 밥을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았다.

 

설령 아내와 아들에게 아랫도리 내놓고 똥치우라 하는 당신 입장이 어떨까 싶어

 

우린 더 진화한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기저귀를 치우는 방에는 깔깔거리는 웃음이 가득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방 밖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엄마와 나는 죄지은것마냥 구석에 숨어 소곤거리며 대화했다.

 

장례식은 어디서 할지, 영정사진, 화장터, 납골당, 호스피스, 그런 것들.

 

뒤에 더 설명하겠지만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한 것들이다.

 

죽으라고 제사지내는 거냐? 이딴 소리 만약 누가 한다면 혀를 뽑아 재떨이로 쓸테지.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래도 해야한다.

 

 

 

 

아버지는 하루 대부분 잠을 잤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소리를 했다.

 

하루가 다르게 말이 어눌해지고 논리를 잃어갔다.

 

나를 못알아보기도 했다. 엄마와 나는 애써 농담처럼 웃어넘겼다.

 

일으켜만 주면 곧잘 드시던 밥도 이제는 자꾸 먹기 싫다 하셨다.

 

손에 힘이 안들어가 떠먹여 줘도 입가에 흐르기 시작했다.

 

 

 

 

 

어디 집구석에 굴러다니던 씨디 플레이어를 갖다놓았다.

 

본조비, U2, 린킨파크, 토토... 좋아하는 가수의 씨디를 사와 틀었다.

 

반 억지로 먹이는 호박죽이 입가에 반은 흘렀지만 손가락이 리듬을 타며 똑딱였다.

 

등이 가렵다고 긁어달라고 수시로 말했다. 등은 욕창은 간신히 막았지만 더 긁으면 피가 날 것 같았다.

 

더위가 끝나고 슬슬 가을이긴 했지만 너무 춥다해서 전기매트를 깔았다. 

 

우리가 안보는 사이에 전기매트를 끝까지 올려버리곤 해서 등이 데일 듯이 뜨거운 일도 종종 있었다.

 

그동안은 미리 신호정도는 주던 소변도 이제 마구 누더니 하루에 몇번씩 매트를 갈기도 했다.

 

성인 둘이서 해도 매트 가는 일은 중노동이다. 엄마의 표정이 중간중간 험악해지기도 했다.

 

 

 

엄마가 병원에 가기 싫다고 해서 대신 내가 갔다.

 

원래는 환자가 같이 가야하지만 가봤자 의미도 없고, 갈 상황도 아니었다.

 

조심스레 호스피스 허가서를 부탁했더니 의사가 흔쾌히 허락했다. 그동안은 거절당했었다.

 

안해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설득할까 뇌내망상을 엄청 돌렸던 나는 간단히 받아버린 호스피스 허가서를 들고 참 밍숭맹숭해졌다.

 

 

 

10월, 엄마는 호스피스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렸다.

 

대부분 거절당했다. 설령 호스피스라 해도 정도가 심하면 거절한다는 듯.

 

한군데,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곳에서 간신히 허락은 받았지만, 깨름칙한 눈치였다.

 

전화로 임종증상이란 걸 알려주었다.

 

임종 증상이라. 검색해봤다.

 

목에 가래가 끓고, 식욕이 없고,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위로 올라가고... 기타 등등.

 

참 신기할 정도로 아버지의 상황과 한치의 차이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알고는 있었다. 나름 마음의 준비도 했었다. 수도 없이.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건 이기적이다. 죽는 사람 앞에서 운다? 이기적인 짓이다.

 

떠나는 사람 마음을 생각하면 그러면 안된다.

 

아버지는 이제는 어눌하게라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음악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거리지도 않았다.

 

엄마는 잠자리를 거실에서 아버지 침대 옆으로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잘 준비를 하던 오밤중에 엄마가 나와 동생을 불렀다.

 

인사하라고 했다.

 

여보, 우리 열심히 살게. 행복하게 살게, 잊지 않을게. 이제 고통받지 말아. 편한 곳으로 가. 우리 걱정은 말아.

 

나도, 동생도 뭐라고 했다. 기억은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단 한가지, 허공을 향한 아버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이었다.

 

그리고 그 날 밤이 지났다.

 

 

 

다음날 저녁까지 평소와 같은 일상이었다.

 

할로윈 데이라고 사탕같은 건 없었다.

 

엄마가 샤워할테니 잠깐 아빠 옆에있으라고 불렀다.

 

의자를 끌어다 잠시 옆에 앉았다.

 

씨디플레이어로 u2의 명곡 모음집을 틀었다.

 

갑자기 아버지 목에서 그르렁 거리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긁, 긁거리며 힙겹게 숨을 쉬자 나는 살짝 당황했다. 가래를 어떻게 빼지?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환자의 입속에 손가락을 넣으면 안된다. 잘릴 수도 있다.

 

호흡이 가빠져 오자 나는 아버지 상체를 일으켰다.

 

목석같은 몸을 뒤에서 등으로 받치고 등을 두들겼다.

 

한참 낑낑대다가 엄마가 샤워를 마치고 왔다.

 

왜그러냐고 해서 가래가 낀 것 같다고 등을 두들겼다고 했다.

 

힘들어서 잠시 두들기는 걸 멈추고 뒤에서 안듯이 몸을 기댔다.

 

아버지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향했다. 무어라고 으으~하며 말을 하려 했지만 알아들을 순 없었다.

 

엄마가 당신 아들이여, 당신 아들. 이라고 말했다.

 

순간 이미 힘이없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참 이상하게도 그걸로 난 알았다. 천천히 빠져나오며 몸을 눕혔다.

 

그르륵거리던 목소리가 멈추고, 눈동자는 위로 치켜뜬채로 깜빡임을 멈췄다.

 

엄마가 이거, 지금... 하며 말을 멈추었다.

 

어. 그런 것 같아.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엄마가 무너지듯이 엎드리고, 나는 옆방에서 공부하던 동생을 불러왔다.

 

엄마와 동생이 엎드려 우는 걸 잠시 보다가 조심스레 치켜뜬 아버지의 눈을 감겼다.

 

헤벌린 입 안에 백태가 껴 하얀 혀와 진한 가래와 침 거품이 보였다.

 

입도 닫아보려했지만 안되는 것 같았다.

 

울지는 않았다. 울 수가 없었다.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디선가 사람이 죽으면 잠시동안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들은 게 떠올랐다.

 

귓속말하듯이 3년동안 고심하고 준비한 말을 했다.

 

고생하셨어요.

 

하고나서야, 그 말을 처음 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길어져서 나누어서 올릴게.

 

쓰다보니 조금 힘드네. 재미도 없는 것 같고.

 

소주한잔 하고 내일 올려야겠다.

 

 

 

5개의 댓글

2021.01.21

글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담배는 끊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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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제발 넌 담배를 끊어라. 주변에서 스스로도 수없이 듣고 생각하겠지만 끊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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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아 마음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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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글쓴이는 담배 먼저 끊어라.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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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담담해서 더 호소력있네. 군번보니까 내 또래같은데 이런 과정을 무덤덤하게 써내려가는것만 해도 나보다는 한참 성숙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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