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은화 서른 닢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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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초 카무치니, 카이사르의 죽음. 카이사르는 브루투스를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건만, 이렇듯 3월의 칼날로 되돌아 왔다>

 

단테에 따르면 배신자는 지옥 가장 밑바닥인 코퀴토스 호에 떨어져 영원토록 고통 받는다고 한다. 코퀴토스 호수는 꽁꽁 얼어 있으며, 통수 친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죄인은 하반신만 들어가 있거나,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거나, 아예 밑바닥에 가라 앉아 있단다. 제법 그럴싸한 설정인데, 배신의 냉혹함을 생각해 본다면 당해 본 사람은 배신자가 얼음 지옥에 갇혀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같은 교황파 사람들끼리 흑당이니 백당이니 편가름 하여 싸우는 통에 거하게 배신 당했던 단테 그 자신이야말로 가장 절감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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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신/국중록, 웹툰 '첩보의 별'의 한 장면. 논리적 허점이 없는 달변이다>
 

하지만 배신 행위를 극악으로 단죄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 아닐까? 배신이라는 게 사전적으로는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림"이라는 뜻인데, 이를 저버리는 모든 행동에 배신 낙인을 찍게 되면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없게 된다. 약속 시간에 늦거나, 언제 한 번 밥 사겠다고 해놓고 안 샀거나, 아 언니 너무 이뻐요 라고 말 했으나 너 닮았다고 하면 정색하는 사람 모두 배신자라는 말씀이다. 이들도 죄인이라 해야 하나? 기말고사만은 잘 칠 거라 믿어주신 어머니께 반타작으로 답한 나를 브루투스와 함께 사탄의 아귀에 물려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이문옥 감사관, 김영수 소령 같은 내부고발자들도 부패한 조직의 입장에서는 배신자에 해당하나, 우리는 그들의 용기를 칭송하지 변절을 욕하는 법이 없다. 이로 미뤄보건대, 배신은 악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원숭이, 돌고래 등 고지능 사회성 동물에게서도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 배신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배신 = 악행이라는 말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단테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한데, 그가 신곡에서 다루는 두 인물이 이를 입증한다 : 베드로는 예수의 충직한 제자로 주님 가시는 곳은 어디든 따르겠나이다, 라고 떠든 주제에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3번이나 그를 부정하며 배신했다. 유다는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 장본인으로, 로마에 사람의 아들을 판 놈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과오를 뉘우치고 재림 예수에게 빌어 끝내 순교자로 죽음으로써 단테에 의해 여덟번째 천국에 올랐다. 반면, 유다는 더욱 큰 죄인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지옥 밑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말하자면 배신이 아닌, 배신 이후의 삶을 기준으로 평한 셈이다.

 

우리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배신자들에게 지옥행 티켓을 끊어주기 앞서 한 번 기회를 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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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소열제 유비(劉備), 현덕(玄德). 필부에서 천자로 등극한 입지전적 인물이나, 시대의 난망함을 이용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배신이 난무하던 후한 말엽, 군웅으로 일어선 유비는 가장 교묘한 배신자다. 일생을 배신하며 살아왔음에도 황제까지 해 먹은 점에서 남다르다고 할 수 있지. 아니, 제일 유명한 여포를 놔두고, 인의의 대명사인 유비를 왜 배신자라고 하는거야?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런 이미지의 유비이기 때문에 그의 배신 행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유비가 의병대장으로 시작해 천자로 화려하게 마치기까지의 여정은 천운과 결단력의 눈부신 조화였다 : 먼저 공손찬 휘하에서 평원상(相)을 지내며 원소·조조와 대치하던 유비는, 돌연 원소로부터 서주목(牧)에 임명 받음으로써 공손찬을 배반한다. 당시 공손찬은 후한 말에 유명한 인격자였던 유우를 무참히 살해하는 것으로 민심을 크게 말아먹었는데, 이에 유비가 재빠르게 공손찬과 결별한 것이다. 인의군자를 표방하는 유비가 공손찬의 됨됨이를 비방하며 손절각을 세운 모습처럼 보이지만, 공손찬은 유비와 동문수학한 사이이며 유비가 별 볼 일 없을 때 그를 품어 전공을 세우게 도와주었고 누구보다 크게 후원해 준 은인이다. 곤궁할 적에는 빨아먹고, 단물이 다 빠지자 뱉어내는 것도 인의인가.

 

이후 유비는 조조 밑으로 들어가, 조조가 내리는 좌장군의 직책을 받고 원술을 토벌하라고 보낸 원정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비는 원술이 패망하자, 그대로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자신이 서주를 낼름 집어 삼켜 조조에게 반기를 든다. 조조는 역적이니 놈을 통수치는 게 무슨 허물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는 조조가 유비에게 보여준 신임을 무시하는 처사다. 당시 한실의 대장군은 원소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유비에게 내린 좌장군 관직은 조정 내 군부 최선임자에 해당했다. 조조가 한 평생 외정을 맡은 장수 중에 종친을 제외하고 좌장군급으로 높은 관직을 내린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조조는 유비를 진심으로 믿고 써보려 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유비와 마주 앉아 나눈 논영회 일화도 어쩌면 조조 자신은 진정으로 유비를 높이 평가했거나, 최소한 그를 구슬려서 수하로 써먹으려 했던 속셈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유비가 조조의 순정을 이렇게 짓밟으니, 마 깡패가 되는 거지.

 

익주로 넘어간 유비의 행보도 걸작이다. 나이 50이 넘은 유비는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익주 내 군벌인 유장과 다투었는데, 전쟁의 명분을 유장에게서 찾고 있었다. 유장이 당초에 책임지겠다던 군비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주장. 하지만 이는 억지라고 할 수 있는데, 유비는 장로를 대신 상대해 달라는 유장의 초청으로 익주에 들어와놓고는, 정작 미적거리며 결전을 미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군사도 내어주고, 군량도 원하는대로 제공했던 유장이었으나 시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염려되어 지원하는 군수품을 줄였더랬다. 그러자 유비가 이를 핑계 대고 유장을 선제공격했고, 결국 익주를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유비가 행한 최악의 배신은 바로 칭제건원이다. 유비는 협천자의 명분으로 전횡을 일삼는 조조를 역신이라 규탄하는 한 편, 자신은 그에 대적하고 한실을 구할 충신으로 포장해 왔다. 실제로 유비는 헌제의 밀지를 받들 만큼 충의지사로 널리 인정 받았던 모양. 하지만 조비가 위 개국을 선포하자, 이에 발맞춰 자신도 한의 천자를 멋대로 계승한다. 그 과정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헌제를 죽었다고 공표하며 애도의 기간을 갖고, 시호까지 지어다 바치는 등 억지를 부려댔다. 정말로 충직한 신하였다면 유우처럼 황실에 공납을 성실히 올리고, 죽은 헌제의 시체라도 수습해주고, 살아있는 게 확인 되면 즉시 모셔와 옹립해야 맞는 것 아닌가? 헌제가 제갈량과 같은 해에 죽었으니 유비 사후 11년 간이나 더 살았던 사람이다. 그 동안 깜깜무소식일 리도 없으니, 촉한 조정에서 의도적으로 그를 송장 취급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즉, 유비는 황위에 오르려는 개인적 열망 때문에 한실의 재건을 원했던 선비들과 신민들, 자신이 떠받들던 천자까지 모두 배신한 사람이다.

 

우리는 유비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오래도록 삼국지의 주역으로, 맨주먹으로 시작한 풍운아로, 정의를 근본으로 삼은 영웅으로 알아주지 않는가? 그의 배신과 야망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사서 및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여준 인의지사로서의 명예는, 이 모든 유비의 행적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애민(愛民)의 정신 때문이리라. 이로써 그를 평해 본다면, 중요한 기로에서 자신을 믿었던 이들의 통수가 번쩍이게 만들었으나 결국 백성들을 아우르고 천하를 안정되게 하겠다는 뜻에서 행했으니, 극악무도한 자는 아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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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세조 양광. 워낙 개차반으로 군림해서 당나라 때 지어올린 별호인 "양제"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수 세조 양광은 보기 드문 패륜아로, 부황과 모후가 모두 훌륭한 인격자였는데 반해 본인은 비뚤어진 인품을 지녔다. 수 고조 양견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본래 방탕하고 문란했으나, 태자를 제치고 자신이 황위를 물려받기 위해 갖은 쇼를 다 했다. 부황이 행차하신다는 소식이 들리면 요염한 무희들을 치우고 늙다리들을 배치해서 여색을 멀리한다는 것을 어필하고, 일부러 줄 끊어진 거문고를 슬쩍 갖다 놔서 잡기도 탐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당시 양견은 태자 양용이 사치스러운 점을 염려하고 있었는데, 양광이 이를 알고서 자기 PR을 한 것이다. 그는 친형을 수시로 모함하여 부자지간을 이간질 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결국 양견의 후계자는 양광이 되었다. 이 때를 즈음하여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도 병석에 드러눕게 되자 양광은 거침없이 야심을 드러냈다. 동생과 함께 아버지 사후의 일을 논의하는 편지를 주고 받았던 모양. 이를 본 양견은 격노하여 양광을 끌어내릴 생각을 품었는데, 아들들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들은 당일 밤에 황궁을 포위하여 양견을 죽이고 양용에게도 사람을 보내 그를 교살한다. 가만히 있어도 황제가 될 사람이, 아버지와 친형을 도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 엄마였던 후궁 진씨를 자기가 겁탈하고 황후로 세우니, 인륜지사 최악의 배신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이따위로 굴어놓고 한다는 짓은 쓸 데 없이 큰 국가 프로젝트를 자꾸만 벌여 국고를 탕진하는 일이었다. 북경과 항주를 잇는 대운하를 파재끼고 기슭을 따라 행궁을 40 여 채씩이나 짓지를 않나, 낙양을 동경이라 칭하며 두번째 수도로 꾸미고 그 곳에 서원이라는 황실 공원을 만들기 위해 억만금을 갖다 버리질 않나,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가는 곳마다 대로를 닦기 위해 인부 수 백 만을 수시로 동원하질 않나.

 

가장 심한 건 고구려 원정이었다. 양광은 이미 왕자 시절에 고구려를 치러 간 적이 있으나, 대패하여 30만 대군이 전멸하고 자신도 겨우 몸만 내뺄 수 있었다. 양견이 한심해서 나가 죽으라(실제로 한 말)고까지 했는데, 정신을 못 차린 건지, 당한 게 분했던 건지 양광은 3차례나 고구려 공격을 명한다.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그대로.

 

끝내 자신을 믿어준 아버지마저 도륙 내고 황위에 오른 양광은 이렇게 학정만 일삼다가 부황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자신도 신세를 망쳐 수는 건국 38년만에 종말을 고한다. 양광 시절에 반란만 100 건이 넘게 발발했다고 하니, 개차반도 이런 개차반이 따로 없다. 고작 이렇게 되려고 그 조바심을 냈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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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 이세민 (李世民). 빼어난 업적과 어진 정치로 이름 높은 그도 얼룩진 과거가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땅에 세워진 당나라에서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이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세민은 수가 산산조각 난 틈을 타 거병한 아버지를 따라 중원을 종횡무진 휩쓸었다. 이세민의 군재는 대단히 뛰어났는데, 병주의 유무주와 하남의 왕세충, 하북의 두건덕 등 당시 위세를 떨치던 반군들을 모조리 때려잡아 내란을 종결낸 공을 세웠다. 불과 1년 여 만에 !

 

이세민에 힘입어 당은 안정기를 맞고, 조정의 이목은 전쟁 영웅 이세민에게로 쏟아졌다. 일이 이쯤 되어서는 태자 이건성도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그는 넷째 동생 이원길과 결탁하여 이세민 일파 기죽이기를 단행했는데, 정도가 심했다고 한다. 이건성은 친근한 사이인 비빈들을 조종해 황제로 하여금 이세민이 후궁과 그 자식들을 핍박하려 한다는 날조를 믿게 만들었고, 이원길 또한 부황 앞에서 작은 형님을 실컷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강건한 무골로서 눈부신 전공에 길이 빛나는 이세민도 형제들의 정치적 수 싸움은 당해내지 못 했다.

 

비상한 일에는 비상한 공을 들이는 법, 결국 현무문의 변이 터지고 말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건성과 이원길이 먼저 이세민 일파를 쓸어버릴 함정을 팠다고 한다. 이미 이세민의 심복들을 회유하려다 실패한 이건성이 그들을 감금하는 등, 저의를 내비쳤기 때문에 충분히 위협적이었겠지. 그러나 이러한 흉계가 누설되면서, 이세민이 역으로 움직였다 : 황제에게 이건성과 이원길이 후궁들을 겁탈했다고 참소해 그들을 소환하도록 만든 뒤, 현무문에 매복시켜 둔 병사들로 두 사람을 죽여버리고 부황은 연금해버린 것이다. 이세민은 특히 이건성을 손수 활로 쏴죽이고, 달아나던 이원길을 끝내 추격해 살해했다. 당시 뱃놀이 중이었던 이연이 겁에 질려 군권과 태자 자리를 내려주면서 사태는 종결된다.

 

양광과 이세민은 묘하게 닮아 있다. 둘 다 부황의 차남으로 태생적인 경쟁자가 있었고, 끝내 정변으로 이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계파 싸움에서 양광은 우세했던 반면 이세민은 열세였다는 점이다. 이세민은 빼어난 전공에 비해 대접이 시원찮았는데, 황제가 "둘째가 예전엔 저러지 않았는데 영 이상하다. 내가 알던 걔가 아닌 것 같다."며 불신을 드러내질 않나, 형님과 동생이 허구한 날 자기를 견제해서 세력이 위축되질 않나, 전쟁 영웅 치고는 항상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이는 이세민이 당 개국 직후부터 줄곧 진왕(秦王), 즉 이미 왕이어서 더 오를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훈을 많이 세운 왕에게 황위 말고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는가? 그러나 황태자가 아닌 그에게는 어불성설이었으니, 이 같은 모순 속에서 갈등과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 정도면 사실 이세민이가 먼저 당한 배신을 되갚아 준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지만, 어쨌든 혈육을 무참하게 도살해버린 게 잘 한 짓은 아니잖아? 후에 당 태종으로 등극한 이세민은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관지치라 불리우는 태평성세를 이루어냈다. 그의 배신이 개인 가정사에만 비극으로 머물러서 다행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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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결지왕(缺地王), 존. 영국 왕실에서 이후 존이라는 휘(諱)는 기피 대상이 된다>

 

존 왕은 사실 헨리 2세가 낳은 8남매 중 막내였기 때문에 왕위와는 거리도 멀었고 기반도 미미했다. 별명인 결지왕이란, 위로 나란히 있는 형들이 다 해먹어서 내려줄 땅(地)이 없다(缺)는 뜻에서 붙은 것인데, 그만큼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다. 때문일까, 존 왕은 왕이 되기 위하여 배신에 배신을 거듭했다.

 

헨리 2세의 자식 농사는 처참하기 그지 없어, 장남인 기욤 9세가 요절하여 그나마 효자였고, 차남인 청년왕 헨리, 삼남인 리처드 1세, 사남인 제프리 2세 등은 모두 부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특히 실질적 장자였던 청년왕 헨리는 어려서부터 헨리 2세가 공동왕으로 추대해 일찌기 지존의 자리였으나, 실권은 아버지가 다 갖고 있던 탓에 불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에 반란을 획책, 리처드 1세와 제프리 2세까지 가담한 대규모 내전이 발발했다. 반란을 진압한 헨리 2세는 가정에 소홀했던 주제에, 이 악마새끼들을 참수하는 대신 관대하게 용서해줬다.

 

하지만 부왕의 역성을 들어 칼까지 쥐었던 청년왕 헨리에게 크게 실망했는지, 헨리 2세는 이 당시 나이가 어려 반란에 참가하지 않은 존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놈들에게서 각각 충성 서약을 받아낸 다음 봉토를 떼어다가 존에게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글로스터 백작영애와의 결혼을 주선해 백작령을 내리려 했고, 뒷날 리처드 1세의 영토인 아키텐을 존에게 주려 했다. 아키텐으로 말하자면 프랑스에서 제일 큰 공국이며 헨리 2세 본인이 대성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던 땅인만큼, 이는 노골적으로 존으로 하여금 잉글랜드의 대권을 노리도록 부추키는 행위였다. 당연히 리처드 1세가 반발하면서 헨리 2세와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결국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 간에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프랑스에 가세해버린다.

 

존은 자신 때문에 벌어진 것이나 다름 없는 부자 갈등 앞에서 기묘한 태도를 취한다. 처음에는 부왕의 명으로 아키텐을 공격했지만, 전황이 형 쪽으로 기울자 냉큼 줄을 갈아타버린 것이다. 헨리 2세가 이 소식을 접하고 크게 좌절하여 자식 새끼 길러봐야 소용 없다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자신에게 줄 영지를 만들어주려고 아등바등 애쓰면서까지 편애했던 아버지에게, 존간나새끼가 한 짓을 보라. 물론 이 때 리처드 1세에게 거역했다가 아키텐의 항우에게 무슨 꼴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니, 존이 현명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존은 끝내 리처드 1세마저 등처먹는다.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십자군 원정을 떠난 형이 전장에서 신화와도 같은 업적을 이룰 동안, 존은 형과의 서약을 깨고 왕좌를 차지하려 했으니까. 본래 영국 땅을 밟아서도 안 됐던 존이었지만, 헨리 2세의 자손들을 이간질 시켜 재미를 봤던 필리프 2세가 바람을 넣자 옳다꾸나 하고 형을 배반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존의 행실을 듣게 된 리처드 1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살라딘과 화친을 맺은 뒤, 동생과 공모자들을 주벌하기 위해 회군해야 했다. 우습게도 존은 리처드 1세가 당도하자마자 자신이 머물던 요새를 바치며 항복할 의사를 밝히는 등, 심히 비굴하게 나왔다. 리처드 1세는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존을 용서한다.

 

리처드 1세가 죽자, 또 문제가 발생한다. 사자심왕에게 후사가 없었던 터라, 잉글랜드의 왕 자리가 공석이 되었더랬다. 그래서 제프리 2세의 아들 아서가 존과 후계 구도를 두고 쌈박질을 했다. 결말은 조선 단종과 세조의 예처럼, 삼촌인 존의 승리. 이후 아서는 어떻게 됐는지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는데, 아서의 누이를 평생 연금해둔 것과 이후 존이 보여줄 행보로 미뤄보건대 진작에 죽여버렸을 것이다.

 

아버지, 형님들을 모조리 통수친 결지왕 존간나새끼는 이후 선정을 베풀긴 개뿔, 방탕하고 멍청하게 굴다가 플랜태저넷 왕가에 먹칠을 한다. 재혼하려고 임자 있는 여자를 건드렸다가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때 워낙 아둔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헨리 2세 때 넓혀 놓은 프랑스 영지는 다 빼앗기고, 자신을 지지해주던 귀족들마저 적으로 돌리는 등 답도 없이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전쟁 당시, 포로를 잡아들이는 족족 감옥에 가둔 다음 뚜렷한 이유도 없이 굶겨 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패전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성직자들에게까지 세금을 빡세게 걷었다가 파문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도 리처드 1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막대한 돈을 바치며 빌고 빌어서 겨우 파문을 면했다.

 

존 왕은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일삼아 조세를 가혹하게 거두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이 강력한 군대를 활용하여 위업을 남긴 것과 달리, 존은 지리멸렬하게 패퇴만 거듭했다. 때문에 신민들과 귀족들로부터 신의를 잃었고, 대헌장(大憲章)에 강제로 서명하는 신세가 된다. 오늘날 마그나 카르타는 근대 헌법의 토대로 널리 추앙받지만, 존은 그저 궁여지책으로 용인했을 뿐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오히려 교황에게 청을 넣어, 교황의 이름으로 대헌장이 무효라고 선언하게 했기 때문이다. 결국 또 싸움이 벌어졌지만, 존 왕은 이듬해에 죽었고 사태는 아들 대에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자기 백성들 통수도 거하게 쳐버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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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시리아 민주군(Syrian Democratic Forces). 쿠르드족 계파가 주도하는 SDF는 지난 수 년 간 IS와 격전을 벌인 용사들이다>

 

이렇듯 배신은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더러 저질러 왔다. 믿음을 규격화하여 체계에 편입한 신용사회, 오늘날은 좀 다를까? 애석하게도 아닌 듯 하다. 꼭 나쁜 사람만 신용불량자가 되는 게 아니며, 신용이 더 없이 중요한 국가 간의 관계도 배신으로 점철돼 있으니까.

 

쿠르드족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 3천만이 넘는다고 집계된 쿠르드족은 중동 네 개 국가에 나뉘어 살며, 때문에 소속감도 다르고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도 다른 등, 단일 민족으로 여기기엔 연대가 약한 것이 사실이다. 가장 많은 쿠르드족(1400만 명 쯤?)이 거주하는 터키는 눈덩이 불어나듯 세를 늘려가는 이들을 골칫덩이로 여겨서 호시탐탐 쓸어버릴 기회만 엿보아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쿠르드족이 대 IS전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독립국가를 수립하는데 동의하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흑해와 접한 터키는 구공산권의 진격을 막는 요충지니까. 또한 이전에 언론인 납치 살해 사건 당시 빈 살만 왕자를 지지하여 이미 터키에 압박을 준 미국인지라, 더욱 터키를 몰아붙일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연합국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이해한다. 국제관계란 원래 냉엄한 법이다. 쿠르드족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라 없는 설움이란 게 다 그런거지. 하지만 그들은 함께 피를 흘리며 악과 마주 싸웠던 전우였는데... 이로써 미국은 혈맹 모두에 똑똑히 메시지를 전달했다 : 당신들도 적당한 값에 팔아치워버리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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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살시오, 유다의 입맞춤. 사람의 아들이 헐값에 팔려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지옥에 떨어져야 할 배신자는 누구인가? 바로, 배신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놈들이다. 배신이 참담한 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나,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배신을 종용받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면 평생 속죄해도 모자랄 것이다. 때문에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또한 배신이 헛되지 않게 선업을 많이 쌓아야 한다. 내가 말하는 바는,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길이다. 이것마저 하지 않겠다면, 지옥에나 가버리라지.

 

24개의 댓글

2019.12.10
1
@작은투자자
0
2019.12.11
@작은투자자
1
@네르기간테
0
2019.12.11
@네르기간테

:O

1
2019.12.10

1. 배신에 대한 유명한 고사를 인용하여 흥미를 돋구었다.

배신은 지옥에나 들어갈 나쁜 짓이다. 예수님이 그랬다.

 

2. 배신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배신은 나쁜 짓이지만 반성을 하면 재활용 쓰레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3. 유명한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재활용 쓰레기와 그냥 쓰레기를 구분하였다.

한나라를 지킨다며 거병하고 자기가 한나라 황제가 된 유비

아버지 나라 백성을 전부 통수치고 말아먹은 양광

배신이라기엔 애매한 이세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간만 보다가 자기도 양념이 되버린 존

쿠르드를 용병으로 써먹고 배신한 천조국 황제

 

4. 글쓴이의 주장을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 하고 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배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신하고 반성도 안하는놈은 쓰레기이다.

사람새끼라면 양심에 따라 살도록 하자.

 

요새 장문이 잘 안읽혀서 정리 해 봤다.

근데 글쓴이 누가 배신했냐?

1
2019.12.10
@도희

AV표지라도 믿었나?

1
@근성가이
0
@도희

잘 정리했네. 누군가에게 배신 당한 건 아니고, 우리 시대 최악의 배신을 지켜보니 문득 든 생각이야ㅎㅎ 읽어줘서 고마워

0

빌드업 탄탄추

1
@이미존재하는닉네임입니다

고마워, 다른 글도 잘 부탁해 :)

0
2019.12.11

얘 글은 재밌어

 

다음번에 쓸 주제는 뭐니?

답하지 않는다면 네 닉네임으로 일베의 최우수화원이 되어주갓서

2
@lIlIlIlIlIlIlIlI

그것만은 제발;;

 

다음 글은 아마도 풍운아들의 이야기와 신화 잡념 글이 될 것 같아. 항상 고마워 :)

1
2019.12.11
@한그르데아이사쯔
1
2019.12.11

유비개새끼 존나싫어해서 추

2
@조선족추방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의 주제로 다뤄볼게 :)

0
2019.12.11
@한그르데아이사쯔

여포 ㄱㄱ

1
@조선족추방

그거 좋지 ;)

0
AZ
2019.12.12

논술 선생님이신가요?

글 조리 있게 잘 쓰네

1
@AZ

고민 많은 한량일 뿐이야. 읽어줘서 고마워 :)

0
2019.12.12

그래서 은화 서른 닢은 무슨 이야기인데...

1
@철갑충

유다가 예수를 팔고 받은 돈이야

0
2019.12.12

글잘봤다.

1
@야동수당

고마워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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