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나폴레옹의 마지막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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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의 시종 비서관 '라스 카스'의 일기를 바탕으로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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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6월 21일 수요일
황제께서 엘리제 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즉시 궁으로 갔다. 나는 거기서 나와 같은 이유로 먼저 와있던 몽딸랑베르 백작과 몽톨롱 백작을 만났다. 황제는 전장의 먼지도 털 시간이 없이, 의원들을 만나 조국이 처해있는 위험과 조국의 역량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가 프랑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워털루 전투의 패배를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명백한 배신행위 때문에 빚어진 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루쉬(Grouchy) 장군의 삼만 대군이 명령받은 시간과 장소에 가지 않았다. 저녁 때 다 이겨놓은 전투가 다음날 아침 여덟 시에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녹아버렸다. 모두가 떨고,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1815년 6월 22일 목요일

밤새도록 논의를 거듭한 의회 간부들은 “황제의 퇴위만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회의장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퇴위할 것을 황제에게 간청했다. 황제께서는 회의적이었지만 높은 도량으로 이를 수용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집에 들렀다. 저녁에는 임시정부 구성원의 명단이 발표됐다.

 

 

 

 

 


1815년 7월 4-7일 수-금요일

로쉬포르에서 황제는 파리에서와 비슷하게 지냈다. 다만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황제는 침착하고 무표정해서 주변 상황에 무관심한 것처럼 모였다.

덴마크 상선의 함장으로 있는 프랑스 해군장교 한 사람이 와서 황제를 구하겠다고 제안해왔다. 그는 황제만 모시고 잘 감추고 항해해서 미국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만일의 사태에 그가 입을 피해를 보상할 적은 액수의 돈만을 요구했다. 베르트랑은 몇 가지 조건을 달고 동의하고는 내 이름으로 계약서를 만들고 내가 서명하도록 했다.

 

 

 

 

 


815년 7월 10일 월요일

일요일 밤과 월요일 아침 사이에 나는 사바리와 함께 임시정부가 우리들에게 약속한 미국행 통행증을 받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호섬(Hotham) 제독을 만나러갔다. 제도은 우리가 황제가 백기를 단 프리깃 범선으로 출항할 경우를 가정했더니 그들은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중립국가의 함정을 이용할 경우를 가정했더니, 모든 중립국 함정도 수색 당할 것이며 영국 항구로 예인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벨레로폰(Bellerophon) 호는 우리를 따라와서 정박했다. 양국의 함정들이 서로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에 대치하고 있다. 우리가 벨레로폰 호에 올라갔을 때 영국 함장은 우리에게 프랑스어로 말했다. 

 

 

 

 

 


1815년 7월 13일 목요일

황제의 형인 조세프 보나파르트가 그를 만나러 왔다. 조제프 왕자는 황제가 영국인들에게 몸을 맡기는 것에 극구 반대하며 인근 지방의 군대를 장악하여 재기하는 방법이나, 배로 미국으로 가는 방안을 제시했다. 동시에 그는 황제에게 보르도의 무역상을 통해 미국 배에 은밀하게 승선할 것을 권했다. 황제는 이 제안을 거부하며, 형에게 몸조심할 것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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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7월 15일 토요일

황제가 탄 배 에뻬르비에(Epervier) 호가 백기를 달고 벨레로폰 호에 접근했다. 황제가 배를 옮길 무렵 말메종에서 동행했던 Beker 장군과 황제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

 

베커 장군: “폐하, 제가 벨레로폰 호까지 폐하를 모실까요?”

나폴레옹: “장군, 그럴 필요 없소. 그러면 당신이 나를 영국사람들에게 넘겼다고 소문이 날 것이요. 그런 의심을 받을 필요 없소.”

베커 장군: “폐하, 안녕히 가십시오. 부디 강녕하십시오!”

 

황제는 배에 오르면서 메이트랜드(Maitland) 함장에게 “나는 영국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함장의 배에 왔다”라고 하셨다. 함장은 황제를 함장실로 모시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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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7월 16일 일요일

영군군은 황제께 예포를 제외한 모든 의전을 다 갖추었다.

황제가 제독의 배로 가는 길에 도열한 영국군인들에 앞에 섰다. 황제는 그들에게 몇 가지 집총 자세를 구령해보았고, 군인들 사이로 들어가서 손수 두 손으로 총검을 집어 프랑스군과 집총 자세의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황제가 영국군의 총검들 사이에 서있을 때, 어떤 대검들은 황제를 찌를 듯이 가슴 가까웠다. 영국 사병과 장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영국인들은 황제가 평소에도 사병들과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 물으며, 황제의 자신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우리들은 오후 한 시경에 벨레로폰 호로 돌아와서 영국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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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7월 20-22일 목-토요일
영국인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가당찮은 소문에 세뇌되어 있었지만, 황제의 후광은 조만간 벨레로폰 호에서 빛을 발했다. 

함장과 장교, 사병들까지 우리가 황제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의 갖추고 대했다. 

함장은 황제를 폐하라고 불렀고, 황제를 갑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으며,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의 수행원들을 통했고, 황제가 초대하는 사람들만 같은 식탁에 앉았다.

 

 

 

 

 

 

 

1815년 7월 23일 일요일

우리가 영불해협에 접근하게 되자 사방으로 움직이는 영국 배들이 보였다. 밤중에 우리는 육안으로 영국 해안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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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7월 26일 수요일
우리는 오후 네 시경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황제가 영국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영국신문들도 사람들의 이런 행위를 비난했다. 모든 영국 사람들이 플리머스로 모여드는 듯했다. 내가 아는 영국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오다가 말과 숙소가 없어 계획을 포기했다는 말을 들었다. 바다는 몰려드는 배로 뒤덮혔고 배 한 척을 빌리는데 육십 나폴레옹금화를 낸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황제가 오후 다섯 시경에 갑판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알려졌다. 사람들의 반응에서 적대적인 감정은 볼 수 없었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중들의 이런 반응이 영국정부를 더 자극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더욱 불안해졌다.

 

 

 

 

 

 

 

1815년 7월 29-30일 토-일요일
전쟁성 차관이 케이스 제독과 함께 나타나서 공문을 제시했는데, 황제를 이송하며, 황제를 동반하는 인원을 세 명으로 제한하며, 로비고(Rovigo) 공작과 랄르망(Lallemand) 장군은 황제를 동반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논리적으로 극구 항의했다고 한다: “나는 영국의 손님이며, 포로가 아니다, 나는 영국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자유의사로 왔다, 영국은 관용의 법칙을 위반하고 있다.. 나는 영국의 범법행위를 인정 할 수 없다, 오직 폭력만이 나를 무릎 꿇릴 것이다...”

 

 

 

 

 

 


1815년 8월 2-3일 수-목요일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 세인트 헬레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황제: “내가 정말 거기를 가야하나? 사람이 살기가 싫을 때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나? 나는 저 세상에서 받는다는 벌은 저 세상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상상해낸 거라고 믿는 사람이야. 이게 다 뭐야?”

 

나는 이렇게 황제에게 말씀드렸다.

 

“역경도 인간에게 영광을 줄 수 있습니다.  역경과 싸우는 인간은 신의 수준으로 찬양 받을 수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적들에게 모든 것을 내줄 것입니까? 황제께서 대한 적들의 악착스런 행동에 저항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시간의 비밀을 누가 압니까? 누가 미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까? 장관의 교체나, 왕자의 죽음이나, 조그만 사건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황제: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우리가 그런 데서 도대체 뭘 할 수 있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우리는 과거를 되새기며 살 것입니다. 우리들은 카이사르의 인생이나 알렉산더 대왕의 일대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은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 “그래! 회고록을 써야겠어. 일을 해야 시간을 죽일 수 있어.... 맞아... 내 운명을 완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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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8월 7일 월요일

우리가 벨레로폰 호를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황제와 대원수는 오래 전부터 황제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우리들은 그 앞방에 있었다. 

세인트 헬레나 행에서 제외된 로비고 공작이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흐느끼며 황제의 발치로 달려들어 황제의 손에 입을 맞췄다. 

황제는 침착하고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포옹하고 나서 배를 갈아타러 나갔다. 가는 길에 있는 사람들에게 황제는 머리를 가볍게 꺼덕여 인사를 했다. 우리들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나는 케이스 제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지금 우는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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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8월 10일 목요일

영불해협을 빠져 나오자 육안으로 육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이 시작된다. 
 

 

 

 

 

 

 

1815년 8월 11-14일 금-월요일
우리는 가스코뉴(Gascogne) 만을 통과하여 피니스테르(Finistère) 곶을 지나고 있다. 바람은 약하지만 좋았고, 날씨는 더웠고 하루는 지루하다. 우리는 프랑스식으로 열 시에 점심을 먹고, 영국인들은 그들 방식대로 여덟 시에 먹는다. 황제께서 우리들 중 한 사람을 불러서 항해일정, 통과한 장소, 바람의 상태, 새로운 소식 등을 물으셨다. 독서를 많이 하시고 네 시쯤 옷을 입고, 우리들 중 한 사람과 체스를 하고 다섯 시쯤 저녁을 드셨다.

 

황제의 식사시간은 십오 분이 넘지 않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것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황제께서는 표정과 몸짓이 모두 감정을 보이지 않으셨다. 

 

이 새로운 음식에 동의도 거부감도 표시하지 않으셨다. 원하는 것도 거슬리는 것도 없었다. 황제 뒤에 서있는 하인 두 명이 서빙을 담당한다. 제독은 여러 가지를 제의하지만 황제는 대부분 거절하셨다. 제독은 계속 배려했지만 황제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종들에게만 의존했다. 황제께서는 보는 것도 원하는 것도 없는 완전히 이방인 같다. 보통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침묵을 깨는 경우에는 주로 과학이나 기술적인 질문을 하기 위해서거나 제독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영국인들은 디저트 후에도 식탁에 오랫동안 앉아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황제께서는 이미 긴 식사시간에 지쳐 이 관습을 참을 수 없다. 

 

첫날부터 커피를 마신후 갑판으로 가셨는데, 베르트랑 대원수와 내가 따라갔다. 제독은 당황했다. 제독은 동석한 영국인들에게 약간의 유감을 표시했으나, 

 

베르트랑 백작부인이 모국어인 영어로 황제를 변호하였다.

 

“제독님, 저분은 세계를 지배하셨고, 수많은 왕들이 그와 함께 식사하기 위해 경쟁할 정도의 자리에 계셨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이후 제독은 황제의 이런 습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음식을 빨리 내오도록 하고, 황제와 같이 빨리 식사를 끝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미리 내오도록 조치했다. 황제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일어서고, 다른 사람들은 황제가 식당을 떠날 때까지 일어서 있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한 시간 정도 더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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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8월 16-21일 수-월요일
우리는 피니스테르 곶, 세인트 빈센트 곶,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조만간 아프리카를 따라 내려간다. 항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으며, 똑같은 일과를 보내고,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화제뿐이었다.

황제께서는 오전 내내 방에 계셨다. 더위가 심해서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지내셨다. 잠을 잘 못 주무시고 밤에 여러 번 깨셨다. 독서로 시간을 보내셨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일 저녁식사 후 황제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먼저 일어나서 갑판으로 가셨다. 황제는 갑판을 열 번쯤 왕복하고 나서 선체의 왼쪽 끝에서 두 번째 대포에 몸을 기대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젊은 수병들이 그것을 “황제의 대포”라고 했다. 황제는 그 자세로 몇 시간이고 말씀하셨다. 


 

 

 

 

 

 

1815년 9월 23-25일 토-월요일
23일 우리는 경도 영도, 위도 영도 지역을 지났다. 

배에서는 이 지역을 처음 지나는 사람들을 바다의 신 형상 앞에 데리고 가서 면도를 시키는 시늉을 하게 하고 위에서 물통으로 물을 쏟아 붓는 관습이 있었다. 제독의 배려로 우리는 물세례를 면했다. 황제는 이 관습과 배려에 대해 듣고는 금화 백 냥을 수병들에게 주겠다고 했지만, 제독은 수병들이 황제를 숭배하게 될까봐 정중하게 거부 하였다.

 

 

 

 

 

 


1815년 9월 26-30일 화-토요일

수병들이 엄청나게 큰 상어를 잡았다. 황제는 머리 위에서 큰 소리와 사람들의 혼잡한 움직임이 벌어지는 것을 듣고 갑판으로 올라가셨다. 

황제가 가까이 갔을 때 상어가 갑자기 몸부림을 치자 수병 네다섯 명이 넘어지면서 황제를 다치게 할 뻔했다. 황제의 다리가 피범벅이 된 것을 보고 다친 줄 알았으며 상어의 피였다. 

황제는 수병들이 상어의 살을 발려내는 것을 재미있게 보시다가 상어고기를 먹어보고 싶다 하셨다. 그러나 그날 저녁식사 시간에 상어고기를 드셔보시고는 먹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하셨다. 며칠 후 더 큰 상어를 잡았는데, 상어의 몸에서 사람의 옷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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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0월 15일 일요일

마침내 도착했다. 영국을 떠난 지 칠십 일, 파리를 떠난 지 백십 일.

황제는 평소보다 일찍 옷을 입고 갑판으로 나오셨다. 육지를 좀더 가까이 보기 위해 가운데 갑판으로 나오셨다. 황제는 망원경으로 보셨다. 나는 황제의 곁에서 표정을 살폈다. 나는 아무 표정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은 그의 영원한 감옥이 아닌가! 무덤이 될 수도! 

 

육지에 갔던 제독이 아주 지쳐서 돌아왔다. 그는 모든 곳들을 다 돌아보고 왔는데 적당한 곳이 있지만 수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수리는 두 달 정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이 나무 감옥에서 벌써 석 달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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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0월 16일 월요일
저녁식사 후 황제는 콕번 제독과 베르트랑 대원수와 함께 보트를 타고 육지로 이동했다. 모든 장교들이 갑판에 모여있었다. 그들이 모인 동기는 호기심이라기보다 깊은 관심이었다. 

보트에 옮겨 타기 전에 황제는 함장을 불러, 작별인사를 하고 장교와 수병들에게 대해 감사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을 직접 듣는 사람들이나 전달받은 사람들은 황제의 배려에 감동했다.황제의 수행원들 중 나머지 사람들은 여덟 시쯤 하선했다. 우리가 배를 떠날 때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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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0월 18일 수요일

황제는 이 동네를 탐방하자고 하셨다. 정원을 걷다가 이웃집 '발콤' 가의 두 딸을 만났다. 각각 열네 살, 열다섯 살 정도 되었는데 동생은 발칙할 정도로 활당한 성격이었고, 언니는 좀더 침착하고 순진한 편이었다.  그녀들을 황제에게 갖가지 이상한 질문을 해댔는데, 황제는 이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재미있어 하셨다. 그 애들과 헤어지면서 황제는 “마치 가면무도회에서 나오는 것 같다”이라고 하셨다.

 

 

 

 

 

 

 


1815년 10월 19-20일 목-금요일
저녁이 되자 황제는 발콤 일가의 집에 가보고자 하셨다. 주인은 통풍이 걸려 잠옷 차림으로 누워있었고, 부인과 아침에 만났던 딸들이 있었다. 

“가면무도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황제와 소녀들은 서로 아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녀들은 자신들이 읽은 책을 황제도 읽었다는 사실에 발견하고 아주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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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0월 22-24일 일-화요일
세인트 헬레나 섬은 시베리아와 마찬가지다. 더위와 추위가 뒤바뀌고 넓이만 틀릴 뿐이다.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많은 왕들을 무릎 꿇렸던 황제가 바위돌 산에 걸려있는 몇 평 짜리 오두막집에서 커튼도, 덧문도, 가구도 없이 지내고 있다.

 

그는 그 오두막집 안에서 먹고, 자고, 옷 입고, 일해야 하며, 청소를 할 때는 집밖으로 나가야 한다. 감옥에 갇혀있는 죄인에게처럼 멀리서 흉측한 음식을 가져온다. 빵, 포도주, 물, 커피, 버터, 기름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하다. 그의 건강에 필요한 목욕시설이 없으며 말을 타고 운동을 할 수도 없다.

 

황제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를 이렇게 야비하게 대접하다니! 그들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가려는 거야! 그냥 나를 죽이면 되는 거 아냐? 심장이나 머리에 총알 몇 방이면 되잖아? 그런 범죄행위를 약간의 에너지라도 있어야지! 사실 나는 일개 사병의 부식만 받아도 돼. 어떻게 유럽의 주권군주들이 나를 통해서 고귀한 군주의 권리을 이렇게 오염시킬 수 있나! 나는 정복자로 그들의 수도에 입성했어. 그들은 모두 나를 형제라고 불렀어. 내가 그들의 형제가 된 것은 국민들의 선택이며, 승리를 통해서이며, 종교와 정치적인 연합, 혈연관계를 통해서였어.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바라는 거야? 유럽 천하가 알 수 있도록 당신들의 불만을 전달해! 이건 나의 존엄성에 어긋나고 내 성격에 맞지 않아.”

 

 

 

 

 

 

 


1815년 11월 5일 일요일

우리 일행 모두가 정원에서 황제를 모시고 모였다. 시내에서 묵고있는 사람들의 원성이 높았다. 황제께서는 영국당국에 대한 모든 불만사항은 서면으로 전달하기 이 주일 전에 정하셨다. 

그것을 서면으로 전달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이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 베르트랑 대원수를 직접 간접적으로 질책하셨다. 대원수는 반박하였다. 황제는 대원수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튈르리(Tuileries) 궁에서였다면 당신이 이렇게 말하지는 못했겠지!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옳다고 했으니까!”

 

황제께서 산보하시면서 우리에게서 좀 멀어졌을 때, 대원수가 “내가 화가 나서 말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대원수에게 “황제와 단 두 분만 계시면 황제께서 금방 잊으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저녁에 황제는 그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계시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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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1월 6일 월요일
황제는 몸이 불편하셔서 방에서 구술하셨다. 

황제는 고대 그리스의 전쟁에 대한 기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승리와 적의 패배를 수없이 많이 그리고 자랑스럽게 늘어놓지만,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주장이며, 그들이 허영심이 많고 과장이 심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상대방인 페르시아인들의 기록을 보기 전에는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로마인들의 역사는 믿는다. 세부적인 것은 다 믿을 수 없더라도 그 결과만은 믿지 않을 수 없다. 결과는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징기스칸의 승리와 정복에 관한 기록은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유목민족을 이끌었기 때문에 승리를 거듭하면서 전진함에 따라 군사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럽도 그렇게 끝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

 

“러시아는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러시아는 무한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원을 유럽에 퍼부을 수 있다. 최근의 사례가 그들의 상상력과 탐욕을 더 자극했을 것이다.”

 

황제는 정복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복자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잔인해야 한다. 내가 좀더 잔인했더라면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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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1월10일 금요일
오늘 황제는 새로운 산책로를 택해서 항구가 보이는 지점까지 가셨다. 오는 길에 우리는 집주인인 발콤 부인과 스튜어트(Stuart) 부인을 만났다. 

황제는 그녀와 인도의 풍습, 특히 여성들이 여행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리고 스튜어트 부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시인 오시안(Ossian)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시다가 인도에서 살았던 것에도 불구하고 부인의 스코틀랜드 특유의 기개를 잃지 않은 것에 찬사를 보냈다.

우리가 같이 걷던 중, 맞은 편에서 오던 무거운 짐을 진 노예들을 마주쳤는데, 발콤 부인이 길을 막는 노예들을 꾸짖었다. 

 

그때 황제는 부인을 제지하며 “부인, 짐을 존중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스튜어트 부인은 발콤 부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맙소사, 소문과 다르게 정말 인자하신 분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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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1월 11-13일 토-월요일
황제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여성 두 명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첫째 부인 조제핀은 예술과 멋을 내는 것을 좋아했고, 둘째 부인 마리루이즈는 그저 순진하고 단순한 성격이었다고 하셨다. 

 

조제핀은 언제라도 상냥하고 매혹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고, 같이 있으면서 불편할 때가 없었고 외모를 가꾸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면서도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고 하셨다. 

 

반대로 둘째 부인 마리 루이즈는는 전혀 꾸밈이 없었다고 하셨다. 첫째는 항상 진실을 비켜가고 우선 부정적인 움직임부터 보였다고 하셨다. 둘째는 거짓말을 할 줄 몰랐고, 직설적이었다고 하셨다. 

두 여성이 모두 근본적으로 착하고 상냥했으며 남편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다시피 두 황후들은 모든 점에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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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1월 29-30일 수-목요일

우리가 자주 산보하는 주인집 정원에는 나이 많은 흑인이 일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를 처음 봤을 때, 평소처럼 황제는 내게 말을 걸게 하셨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인도계통의 말레이시아 사람인데 아주 오래 전에 영국 선원들이 불법적으로 납치해서 배에 태웠다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노예로 팔았다. 황제는 그의 이야기에 분노했고, 황제는 그를 다시 사서 그의 고향으로 보낼 생각을 하셨다. 

 

이후 황제는 정원에 가실 때마다 그 노예에게 그의 나라, 젊은 시절, 가족, 현재상황에 대해 물러보도록 하셨다. 황제는 그의 느낌과 생각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끝나면 황제는 항상 나폴레옹 금화 하나를 그에게 주셨다. 그 노예도 우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가 정원에 올 때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면서 하던 일을 중단하고 삽에 몸을 기대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내가 통역을 할 때까지 미리 미소 짖고 있었다.  그는 황제를 “the good gentleman"이라고 불렀지만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몰랐다. 황제가 그런 의도를 제독에게 피력했을 때 제독은 '토비 (Tobie, 노예의 이름)는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제독이 조사한 결과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노하고 자기가 직접 처리하겠다고 했다.

 

 

 

 

 

 

 

 

 


1815년 12월 1-3일 금-일요일

황제는 이탈리아 원정 당시 몇 가지 일화를 말씀하셨다.

“전투가 끝난 후 아직 시체들을 치우지 않은 전쟁터를 달빛이 비치는 밤에 혼자 돌아보고 있었어. 한 시체의 품속에서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나에게 위협적으로 달려들었어. 그러다가 다시 그 시체로 돌아가면서 고통스럽게 짖더군. 개가 송장이 된 주인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혀로 핥다가 다시 내게 달려들더군. 그 개의 행동은 명백하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는데, 동시에 복수도 하려는 것이었어. 정말 이상한 감정이 들더군."

 

"그 시간이나 장소, 날씨, 개의 행동이 묘하게 어우러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어. 나는 그때 벌써 군단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명령을 아무 감정 없이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나는 수많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명령을 눈시울을 적시지 않고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런 내가 한 마리 개의 고통과 울음소리에 감정이 그렇게 동요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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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2월 4-5일 월-화요일

황제는 현대전에서 장군들은 겪는 위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옛날 전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현대전에서 장군들은 적 포격의 사정거리 안에 들지 않을 수 없어. 옛날에는 장군들이 직접 공격에 참여하더라도 그런 위험은 없었어. 시저가 그런 위험을 감수한 전투는 두세 번밖에 안돼.”

 

육체적인 용기와 정신적인 용기가 화제가 되었을 때 황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육체적인 용기에 있어서 뮈라(Murat)나 네(Ney)보다 용감할 수는 없어. 그러나 정신적인 용기는 부족했어, 특히 뮈라는 그랬어.”

 

정신적인 용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정 두 시간 후의 용기, 즉 어떤 급작스런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변함없는 정신력과 판단력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정말 보기 힘들다.”

 

황제는 정신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군단의 운명, 한 나라의 운명, 한 왕권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전투를 할 때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과감하게 전투에 임하는 장군들을 보기 힘들어. 장군들은 진지를 잡고 버티면서 여러 가지 책략을 고심하는데 거기서 우유부단이 시작되는 거야. 결단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건지 몰라.

 

황제는 우리가 몇몇 장군들에 대해 여쭌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다:

“클레베르(Kléber)가 가장 재능이 많았지만 그는 인생의 쾌락을 얻기 위해 영광을 찾았어. 그리고 프랑스의 영광은 전혀 아니고. 그는 적국에 충성할 수도 있었을 거야. 사실 그는 젊었을 때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복무했고, 오스트리아라면 사족을 못썼으니까."

“드제(Desaix)는 육체적인 용기와 정신적인 용기의 귀중한 균형을 보기 드물게 잘 갖추고 있는 경우였어.”

“모로(Moreau)는 최상급 장군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어. 재능보다는 본능으로 행동했어.”

“란(Lannes)은 용기가 정신력을 월등하게 넘었지. 그러나 정신력이 갈수록 향상되어 균형이 잡혀갔어. 그가 전사했을 때 아주 훌륭한 상태였어. 내가 그를 처음 알았을 때는 난쟁이였는데, 내가 그를 잃었을 때는 거인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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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2월 6일 수요일

황제는 아침에 내게 구술을 하시고 나서 다른 사람들과 차례로 계속하신 후 그들과 산보를 하셨다. 

산보를 시작하시기 전에 황제는 침울하고, 말이 없고, 뭔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산보에서 돌아오시면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롱우드에 가면 보초들이 우리 창턱에서 근무를 서겠군. 우리 식탁에도 영국장교를 앉히겠다는군. 내가 감시 받으면서 말에 오르는 일이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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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12월 10일 일요일
마침내 브리아르를 떠났다. 황제는 희망봉에서 보내온 말에 오르셨다. 황제는 오늘 멋진 군복을 입으셨고 안색도 좋아 보였다. 제독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황제에게 덕담을 했다. 영국장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황제를 보기 위에 길에 서있었다. 브리아르에서 롱우드로 가자면 시내 쪽으로 다시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야 한다.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경사길을 서너 번 거쳐서 약간 경사진 분지가 나타난다. 이 분지는 벌거벗은 산과 바위돌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길을 계속 가다보면 왼쪽으로 골짜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베르트랑 대원수 가족이 사는 오두막집이 있다. 그리고 나서 길이 갑자기 좁아지는데 오른쪽에는 절벽이 있어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걷다보면 갑자기 롱우드에 도착한다. 롱우드 입구에는 의장대가 도열해 있었다. 길이 들지 않고 이런 광경을 처음 볼뿐더러 북소리에 놀란 말이 뒷걸음을 쳐 황제가 애를 써셨다. 우리들은 네 시경 새로운 거처에 도착했다. 제독은 집안의 아주 세부적인 부분까지 소개하며, 그가 직접 수리작업을 지휘했으며 어떤 부분은 자기 손으로 직접 했다고 했다. 황제는 대체로 만족해하셨다.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우려했던 제독은 안심하는 듯했다. 황제는 아주 호의적으로 대하셨다.

 

 

 

 

 

 

 

1815년 12월 17일

우리가 산보하던 중 중국인들의 숙소에 도달했다. 그 사람들은 마카오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몇 년 동안 섬에서 노동으로 번 돈을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그들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싶어하셨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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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년 12월 20-23일
영국정부는 황제의 식탁에 영국장교 한 명이 동석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황제는 침실에서만 식사를 하겠다고 하셨다. 

황제가 말을 타실 때도 영국장교 한 명이 동행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황제는 말을 타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서글픈 상황에 날마다 새롭고 잔인한 자극을 받는다. 황제는 제독에게 항의서한을 보내라고 몽톨롱 백작에게 지시하셨다. 몽톨롱 백작의 서한에 대한 답장은 거칠고 욕된 내용이었다.  세인트 헬레나에는 황제라는 존재가 없으며, 우리들에 대한 영국정부의 정당하고 온건한 대우는 다음 세대를 감탄하게 할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1815년 12월 25일 월요일

황제가 옷을 갈아입으시는데 왼쪽 허벅지에 큰 구멍이 나있었다. 황제의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툴롱 전투'에서 적의 대검에 찔려 죽을 뻔했던 상처라고 하셨다. 그 전투에서 타던 말이 세 마리나 죽었다고 하셨다.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고도 크게 다치거나 죽지 않은 것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라고 하셨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이나 그 이후에도 황제의 신변에 일어난 일에 대해 절대적인 보안을 지키도록 했기 때문에 부상당한 기억도 별로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르콜레 전투'에서 늪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과 '라티스본 전투'에서 발 뒤꿈치를 대포알이 치고 지나간 것, '바그람 전투'에서 파편에 맞아 군화가 찢어진 정도라고 하셨다.  전투에서 타고 있던 말이 죽은 것은 열여덟 번이나 열아홉 번이라고 하셨다.

 

 

 

 

 

 

1816년 1월 1-3일 월-수요일

새해 첫날 우리는 황제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두 모였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끝에 같이 모인 한 줌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니 서로 사랑하면서 지내야 서로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고 황제는 말씀하셨다. 

 

 

 

 

 

 


1816년 2월 7-8일 수-목요일

유럽에서 온 신문에 칼라브리아 해안에 상륙했던 나폴리 왕 뮈라(Murat)가 잡혀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있다. 황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칼라브리아인들 참 맘에 드는군. 영국인들보다 더 고결해.”

 

 

 

 

 

 

 

 

 

1816년 2월 9일 금요일

내일 유럽으로 출항하는 테벤 호의 선장과 세이란 연대의 막케이(Mackay) 대령이 황제를 뵈러 왔다. 대령은 한쪽 다리가 없고 머리에는 칼을 맞은 흉터가 있었는데, 소령 때 코르시카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그 당시 부대장이 조만간 세인트 헬레나 섬의 총독으로 부임할 허드슨 로우 장군이었는데, 장군은 인품이 높아 우리들을 잘 배려할 것이라고 했다.

 

 

 

 

 

 


1816년 3월 4일 월요일

황제는 어제 입항한 영국 아시아함대의 장교들을 접견하셨는데, 중국과의 교역, 중국인들과의 관계, 풍속 등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다. 

세인트 헬레나에 정박해 있는 여섯 척에 적재된 화물은 대부분 차라고 하는데, 그 가치가 육천만 프랑에 이른다고 한다. 광동에 있는 유럽인들은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어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아주 영리하고 끈질기고 부지런하지만, 사람을 잘 속이고 도둑질을 잘 한다고 한다. 모든 상행위는 유럽의 언어로 이루어지는데, 중국인들은 외국어를 잘 한다고 한다.

 

 

 

 

 

 


1816년 3월 8일 금요일

황제는 의사 바르덴에게 물으셨다.


“생명이란 무엇이요? 우리들은 생명을 언제 어떻게 받는 거요? 죽음이라 무엇이요? 죽음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가요?”

바르덴: “죽음은 호흡기와 심장 같은 중요한 기관이 기능을 멈추는 것입니다.”

황제: “잠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바르덴: “잠은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는 능력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거나 하지 못하는 능력이 지속적으로 중단된 것입니다.”

황제: “영혼은 언제 몸을 떠나는 거요?”

바르덴: “그것에 대해 제가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황제: “영혼이 언제 몸에 들어간다고 보세요?”

바르덴: “저는 형이상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1816년 3월 27일 수요일
황제는 나와 대원수에게 각자 정치적인 양심선언을 하자고 제안하셨다.

황제: “프랑스혁명 초기에 나는 열렬한 지지자였어. 그러나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 정치적인 만행이 자행되는 것을 보고 나의 애국심을 식어버렸어. 이집트 원정대를 지휘하고 있을 때 집정관정부가 국민의 선택을 뒤엎은 것을 보고 공화국에 대한 신뢰감이 사라져버렸어.”

베르트랑 대원수: “저는 공화국을 지지한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헌법에 바탕을 둔 체재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8월 10일 사태 때 튈르리(Tuileries) 궁전을 지켜려다 폭도들에게 죽을 뻔했던 일을 겪은 후 환상이 사라졌습니다."

라스카스: “제가 그때 왕당파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황제: “아, 이 사람들, 그러고 보니 공화국을 지지한 사람은 나밖에 없군. 공화국을 믿은 애국자는 나밖에 없단 말이군.”

라스카스: “저는 왕당파였지만 애국심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제정 하에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황제: “자네들 참 나쁜 사람들이구먼, 결국 조국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건가?”

라스카스: “폐하, 방금 우리가 양심선언을 하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1816년 3월 29일 금요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날씨가 너무 나빠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집안에는 습기뿐만 아니라 온 집안에 우글거리는 쥐와 벼룩, 빈대가 우리를 밤낮으로 괴롭힌다. 

쥐들은 부엌 바닥을 떼를 지어 휩쓸고 다니며 음식재료들을 먹어치울뿐더러, 사람들이 식탁을 떠나기 무섭게 쥐들이 남은 음식에 달려든다. 

쥐들은 말과 닭도 공격하며, 황제의 방에 있는 모자 안에서도 쥐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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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4월 5-8일 금-월요일

 

황제는 며칠 전부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셨다. 집안 내부에서 있었던 일로 큰 상처를 받으셨다.  이후 사흘 동안 정원을 산책하면서 황제는 내게 그 문제를 언급하셨는데 때로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권력을 잃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내 가족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걸 느껴야 하다니! 아...!” 

 

황제는 계속 말씀하셨다.

“인간이 까다롭고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자주 잘못을 범할 수 있지. 그러나 내 스스로 이렇게 자문해 볼 때가 있어. ‘내가 권좌에 있을 때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대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정말 괴로워."

 

 

 

 

 

 

 


1816년 4월 14일 일요일

허드슨 로우(Hudson Lowe) 새 총독이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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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4월 16일 화요일

계속 내리는 비에도 불구하고 새 총독이 제독과 함께 열 시쯤 도착했다.

황제는 몸이 불편하셔서 그를 접견할 수 없었다. 총독은 사전 연락도 없이 그 시간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제독의 말만 듣고 왔다고 했다. 황제의 태도에 총독은 아주 당황하며 불쾌감을 표시하며 떠났다.

다섯 시 경 황제께서 나를 부르셨다. 총독이 우리들 각자에게 새로운 확인서를 쓸 것을 요구하며 이에 불응할 경우 섬에서 추방한다는 연락이 왔다고 하셨다.

 

 

 

 

 

 


1816년 4월 19일 금요일
황제는 정원에서 오찬을 하시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베르트랑 대원수 부부가 왔다. 그러나 황제께서 밤에 잠을 못 주무셔서 몸이 불편해 혼자 방에서 드셨다. 새 총독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확인서를 요구했는데 그 확인서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롱우드에 있는 것이며 황제의 감금에 필요한 모든 제한조치를 감시하겠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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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4월 26일 금요일

나는 총독관저 플랜테이션 하우스를 방문했다. 총독부인은 아름답고 친절했으며 배우 같은 면이 있었다. 그녀는 워털루 전투에서 죽은 대령의 여동생이다.

총독은 내게 예의바르고 호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내가 쓴 책에 대해서 그 내용이 영국에 대해 편파적이지 않다는 덕담을 했다. 

그러나 왕정 하에서 귀족이었던 내가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에 대해 이상한 모순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탈리아에서 영국군 정보부대를 지휘했다고 내가 들은 바 있는 허드슨 로우 총독이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의가 있는 것으로 들렸다.

 

 

 

 

 

 

 


1816년 4월 27일 토요일
두 시쯤 총독이 왔다. 모든 하인들을 집합시키는데 황제가 동의해 달라고 했다. 총독의 첫 번째 모욕적인 행위다.

총독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의사로 확인서를 썼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이에 황제는 몽톨롱 백작을 통해서 황제와 하인들 사이에 총독이 끼어 드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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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4월 30일 화요일

낮에 총독이 와서 황제께서는 옷도 입지 않고 만나셨다고 하셨다. 총독과 나눈 이야기를 요약해주시고 나서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총독이란 인간, 정말 지독하고 재수 없어! 내 여태까지 살면서 저런 인간은 처음이야. 잠시 틈을 주면 내 커피 잔에 독을 탈 인간이야. 우리한테 간수보다 더 지독한 놈을 보냈어!”

 

 

 

 

 

 

 


1816년 5월 1일 수요일
식사 후 골드스미스의 “나폴레옹 어록”을 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없애려고 별 짓을 다해도 나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기는 어려울 거야. 사실이 증명하고 있고, 태양처럼 빛나고 있으니까.”

 

 

 

 

 

 

 

 

1816년 5월 6일 월요일
아홉 시쯤 황제가 부르셨다. 황제의 방이라는 성역을 인정하지 않는 총독의 새로운 조치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다.

“그런 폭력을 감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결심이 서있어. 총독이 여러 가지 구실을 대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파국으로 몰고 가자는 것이야. 그런 위험을 피할 생각은 없어. 내가 권력을 포기했을 때 어떤 상황도 예상했지만, 결국 그들이 여기서 나를 죽이려고 해...”

황제는 며칠 전에 총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셨다. 

 

“나는 영국정부가 당신을 보낸 것은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 당신이 나를 간단하게 죽이는 법을 가르쳐 줄까? 당신 부하에게 내 방에 강제로 들어오도록 해. 그러면 난 맨 처음 들어오는 놈을 죽일 거야. 그리고 그 다음 놈들이 나를 해치우겠지. 당신은 내가 다투다가 죽었다고 보고만 하면 돼.

 

그리고 황제는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는 프로이센놈들, 타타르, 카자크, 칼미크 놈들도 봤지만, 저렇게 추악한 인간은 본 적이 없어. 그의 면상에는 '악인'라고 써있더군.”

 

 

 

 

 

 

 

 


1816년 5월 11일 토요일
네 시경 나는 황제의 방에 있었다. 대원수가 들어와서 황제에게 종이 쪽지를 주었다. 황제는 그것을 훑어보고 나서 어깨를 으쓱하며 말씀하셨다.

 

“너무 어리석군, 대답할 필요 없어.”

 

거기에는 '나폴레옹 황제'가 아닌, '보나파르트 장군'을 총독관저의 만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1816년 5월 19일 일요일

황제는 가족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조제핀 황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제핀은 내 생각이나 행동 하나 하나를 놓치는 적이 없이 모든 것은 이해하고 예상했어. 그래서 내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불편한 때도 있을 정도였어. 내가 조제핀에게서 아들만 하나 얻었더라면 정치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부부관계도 더 좋았을 거야. 그랬더라면 내가 아직 왕좌에 있을 거야. 꽃으로 가려진 심연에 발을 디디지 않았을 거야. 인간이 저지르고 난 일을 나중에 생각하면 지혜롭지 못한 일이 너무 많지! 그런데 우리는 미래의 행복과 불행을 감히 예측하잖아!”

“부부관계가 좋았더라면 조제핀이 질투심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지냈을 거야. 그런데 이 질투심이 정치적인 수작까지 부리게 했어. 조제핀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애를 낳을 수 없다는 것에 때문에 동요하기 시작했어. 그녀의 위치가 점점 더 높아질수록 더 불안해진 거지. 모든 의술을 동원해도 안 되니 나중에는 임신한 것처럼 행동하기까지 했어. 조세핀이 모든 희망을 포기했을 때 내가 정치적인 술수를 쓰지 않을 수 없었지.”

“조세핀은 지나치게 사치를 좋아해서 낭비가 심했어. 서인도제도 식민지 출신 여자들의 특징이지. 그녀는 예산을 새울 줄을 몰랐어. 항상 외상으로 사고 청구서나 날아오면 항상 나와 싸웠어.

 

 

 

 

 

 

 

1816년 5월 20일 월요일

교훈적인 격언

황제는 “동방의 설화”를 읽으시다가 통상 교훈적인 격언이 현실에 맞지 않는 예를들고 설명하셨다.

 “사람들이 흔히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인간은 바뀌는데 좋게 바뀔 수도 있고 나쁘게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인간은 배은망덕하다‘고 하지만, 나는 은혜를 베푼 사람이 자기가 준 것보다 더 많은 반대급부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얼굴이 정신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아주 판단하기 어려워. 인간을 행동만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그 순간에는 맞을 수 있겠지.”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미덕과 악덕, 영웅심과 변태성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선하다거나, 일반적으로 악하다라고 단언할 수 없어. 

선악을 다 가지고 있고 둘 다 실행에 옮기는 거지. 그건 원칙에 불과하고 거기다 타고난 성격, 교육, 우연한 일들도 감안해야지.”

 

 

 

 

 

 


1816년 5월 21일 화요일

황제는 계속 몸이 편찮으시다. 그래도 우리는 평소대로 마차를 타고 돌았다. 돌아와 보니 우리가 없는 사이에 총독이 와서 우리 하인들 중에 한 명을 체포했다고 했다. 몽톨롱 백작의 하인이다.  그 말을 듣고 황제는 탄식하셨다.

 

“정말 비열하군! 총독이란 사람이.....! 하인을 체포하다니! 정말 너무 역겨운 인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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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6월 1일 토요일
집권 당시 황제를 모함하고 전복시키려고 시도했던 인물들에 대해 언급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권력을 찬탈했다고?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왕권을 뺏지 않았어. 나는 그저 시궁창에 버려진 왕관을 주워서,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 것 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왕관을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머리에 썼어. 나는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한것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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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6월 18일 화요일
오늘은 워털루 전투 기념일이다. 누가 이 날을 언급하자 황제의 얼굴 표정이 바꿨다. 황제께서 고통스럽게 탄식하시고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전례 없는 운명의 장난이었지! 그루쉬(Grouchy)! 네! 데를롱(D'Erlon)! 누가 배신했나? 운이 없어서였나? 아! 불쌍한 내 조국...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완료되었는데! 모든 것이 성공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졌어!...”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프랑스의 운명이 결정될 기회를 내 손으로 세 번이나 놓쳤어... 탈영한 배신자 한 명만 아니었더라면 적을 전멸시킬 수 있었는데... 내 왼쪽에서만 제 몫을 해주었어도 리니 (Ligny)에서 적을 전멸시킬 수 있었는데...”

 

“이상한 전투였어... 최악의 결말이었지만 패자의 명예도 타격받지 않았고, 승자의 명예도 드높아지지 않은 이상한 승리였어.... 패자는 그 패배를 뛰어넘어 기억 될 것이고, 승자는 승리의 사실 속에서 잊혀질 거야”

 

 

 

 

 

 

 

1816년 6월 23일 일요일


우리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억이 나쁜 머리는 수비대가 없는 요새와 마찬가지다”라고 하셨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기억력이 시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떤 장소나 물건에서 멀어지면 기억이 흐려진다고 말했다. 


황제는 자신의 기억력은 심장에 의존해서 자신이 아끼는 것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하셨다.

황제는 이집트 원정 당시 한 작전에 참가했던 부대들을 번호를 하나 하나 나열하셨다, 베르트랑 부인은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떻게 다 기억하시느냐고 놀라워했다. 


황제는 이렇게 대꾸하셨다.

 

“그저 옛날 사랑했던 정부들에 대한 추억이지요.”

 

 

 

 

 

 

 

 

1816년 6월 28일 금요일

총독이 대원수를 방문해서 롱우드의 생활비용을 줄일 뜻을 비췄다. 총독은 대원수에게 우리의 생활에 드는 비용의 일부를 우리가 부담할 것을 시사했다. 영국정부는 황제의 한끼 식사에 최대 네 사람을 예상했고, 사람을 초대하는 식사는 일주일에 한번을 예상해서 예산을 책정했다고 했다.

 

 

 

 

 

 

 

1816년 7월 1-4일 월-목요일
오후 세 시경 콕번 제독의 후임인 말콤 제독이 휘하의 모든 장교들을 동반해서 황제를 만났다. 작년 워털루에서 황제와 싸운 영국군들은 모두 그가 북미대륙에서 태우고 돌아오던 병력이었다고 한다. 제독은, 당시 영국인들은 하루 종일 완전히 진 전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루쉬 장군의 배신이 없었더라면 당연히 영군군이 졌을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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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7월 9-11일 화-목요일
황제는 몽톨롱 백작부인의 장남인 일곱 살 된 트리스탄을 데리고 노셨다. 

트리스탄은  황제에게 매일 공부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황제: “넌 매일 밥을 먹지?”

트리스탄: “매일 먹습니다, 폐하.”

황제: “그럼, 매일 공부해야지. 공부는 밥 먹는 것과 같단다.”

트리스탄: “그러면 매일 공부할게요.”

 

 

 

 

 

 

 

1816년 7월 19일 금요일

이 기회에 황제에 대한 우리들의 예절에 대해 적어보겠다. 런던에서 오는 신문들을 보면 황제께서 우스꽝스럽게도 유배지에서 튈르리 궁전과 똑같은 의전을 요구한다고 비꼬고있지만 사실과 달랐다. 

황제께서는 우리들에게 친근하게 대했으며, 우리는 충성스런 신하답게 황제를 모시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황제께서 원하시는 것과 필요한 것을 미리 예측하려고 노력했고, 말씀만 하시면 금방 움직였다. 우리는 황제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황제의 방에 가지 않았다. 우리가 황제께 긴히 들릴 말씀이 있으면 알현을 요청했다. 우리 중의 한 사람이 황제와 산보를 할 경우, 황제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아무도 합류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황제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있었다. 이 습관을 이상하게 여긴 영국인들은 황제에게 접근한 후 모자를 벗고 있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황제께서는 이런 대조적인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여기시고 우리들에게도 모자를 벗지 말라고 하셨다. 황제께서 먼저 말씀을 하기 전에는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는데, 물론 토론을 할 때는 예외였다. 대부분의 경우 황제께서 대화를 주도하셨다.

 

 

 

 

 

 

1816년 7월 25일 목요일

세 시경 말콤 제독이 5월 13일까지 신문을 가지고 왔다. 황제는 나에게 접견에 참석하라고 해서 우리는 세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는 제독을 마음에 들어해서 허심탄회하게 대하셨다. 

 

제독은 많은 문제에 대해 황제와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그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기 때문에 황제께 자유롭게 섬 전체를 마음대로 다니셔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총독이 황제에게 총독관저인 플랜테이션 하우스를 드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황제를 장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모욕적인 행위라는데 동의했다. 그는 총독이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령이 없으며, 영국정부의 장관들이 황제를 증오한다기보다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독은 황제는 아직도 영국에게는 두려운 존재이지만 곧 프랑스로 돌아가실수 있을거라 말했다.

 

 

 

 

 

 

1816년 8월 16 토요일

황제께서 종교와 사제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에 던져진 인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나? 이런 신비한 의문들이 우리를 종교로 향하게 한다. 우리는 종교를 향해 뛰어가고 우리의 성향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교육과 역사를 그 길을 막는다. 진정한 종교의 최대의 적은 종교를 교육과 역사다. 인간의 불완전함들이 종교를 왜곡한다. 왜 파리의 종교는 런던이나 베를린의 종교와 다른가? 왜 산페테르스버그의 종교는 콘스탄틴노플의 종교와 다른다. 왜 페르시아의 종교는 인도나 중국의 종교와 다른가? 왜 고대의 종교는 오늘날의 종교와 다른가? 이때 이성이 고통스럽게 움츠리며 소리친다: 종교들! 종교들!... 그것들은 인간들이 만든 산물이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을 제외하더라도 뉴톤이나 라이프니츠도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배운 교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시계를 만든 사람을 모르면서 시계만 볼뿐이다.”

 

“우리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미숙함을 보자. 그들은 우리들을 이교나 우상으로부터 멀리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들이 우리들이 논리적인 사고를 하게 만들어 우리들이 수동적인 믿음에 저항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들을 수많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사이에서 키운다. 나의 정신적인 성장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믿음을 가질 필요를 느꼈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논리적인 사고를 시작할 때부터 나의 믿음은 장애물에 부딪혔다. 그것은 내가 열세 살 때였다. 내가 다시 맹목적으로 신을 믿을 것인가? 나는 저항 없이 그렇게 하고 싶다. 내가 그것이 진정하고 큰 행복일 거라고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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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8월 18일 일요일

산책중 총독이 나타나 분위기를 망쳐버렸다. 황제는 그를 보지 않으려고 급히 숲 속으로 가버리시고 나는 뒤를 따랐다. 조금 후에 몽톨롱 백작이 나타나서 총독과 제독이 황제를 뵙고자 한다고 했다.

우리들은 총독을 동반한 장교들과 물러서 있었고, 황제와 총독, 제독이 걸으면서 사이에 열띤 대화를 했다.

우리들의 생활비 감축과 관련해서 우리들이 분담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황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했다.

 

“생활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로 우리들은 고통받고 있소. 아주 열악하기 짝이 없소. 당신이 나를 뜨거운 석탄 불 위에 놓는다고 해도 내게서 돈을 뜯어내지 못할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한테 뭘 요구했소? 누가 당신한테 우리들을 먹여살리라고 했소? 당신이 보급을 중단하고, 내가 배가 고프면, 저기서 경비를 보고 있는 53연대에 가서 사병들과 같이 식사하겠소. 나는 유럽에서 최고 고참 군인이요.”

 

황제께서 유럽에서 황제에게 보낸 책을 총독이 압류하고 있는 문제를 거론하셨을 때, 총독은 수신인이 “황제”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황제는 총독을 이렇게 꾸짖으셨다.

 

 “누가 당신에게 나의 칭호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를 줬어? 몇 년만 지나면 당신 정부의 캐슬리그, 배서스트 장관들을 비롯해서 당신도 망각의 먼지 속에 묻혀 버릴 거요. 혹시 당신들의 이름이 회자된다면 그것은 당신들이 내게 가한 잔악 행위 때문일 거요. 그러나 나폴레옹 황제는 모든 문명 민족들의 역사에 길이 남을 거요. 당신들의 나에 대한 비방공작은 아무 소용이 없어. 당신들은 그 공작에 수백만 프랑을 투입했지만, 그 결과가 뭐야? 진실은 구름을 뚫고, 태양처럼 빛날 거야. 태양처럼, 진실은 소멸되지 않는 거야.”

 

나중에 황제는 총독에게 거칠게 대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황제는 이렇게 자책하셨다.

 

 “내가 이 자를 더 이상 만나지 말아야 해. 그자와 대화하면 흥분하게 되더군. 그건 내 위신 문제야. 튈리르궁에서는 쓰지도 않던 말들을 쏟아내게 된다고."

 

 

 

 

 

 

1816년 9월 1일 일요일
세 시경 황제께서 나오셨다. 마차를 준비하는 동안에 우리는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황제는 고무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지만 나뭇잎이 별로 없는 나무라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차가 우리를 찾으러 왔다. 

마차를 타고 가는데 총독이 오는 것이 보였다. 황제는 길을 바꿔 가능한 최고 속력으로 달리도록 하셨다. 황제는 두 개의 악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면 작은 악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우리는 천둥벼락이 치는 중에 마차를 계속 탔다. 총독을 피했으니 소득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1816년 9월 7일 토요일

오늘 총독이 긴축정책을 실행에 옮겨, 지금까지 우리에게 제공했던 영국인 하인 8명을 철수시켰다. 

떠나는 이들은 큰 고통을 느꼈으며 우리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했던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애착을 가진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다. 우리는 생활비가 부족했다.  그래서 황제께서는 우리가 가진 그릇들을 일부 팔기로 결정하셨다.

 

 

 

 

 


1816년 11월 4일 월요일
황제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인생에서 복을 받았다는 건 인정해야 해. 인생에 뛰어들자마자 권력을 잡고 항상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았으니까. 내가 복종해야 할 군주도 법도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모스크바에서 죽었어야 해. 그랬더라면 군인으로서의 영광에 오점이 없고 정치적으로도 세계역사에 표본으로 남았을 거야. 아니면 워털루에서 죽었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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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11월 25일 월요일

영국 장교 리드(Reade)와 포플튼(Poppleton), 그리고 사복을 입은 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라스카즈의 방으로 갔다. 잠시 후 라스카즈와 함께 나오는데 그의 목소리가 높았다. 나는 몽톨롱 방에 가서 그 부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상황을 파악하고 온 몽톨롱에 의하면, 영국 장교들과 경찰서장이 라스카즈의 구술자료들을 압수하고 노예인 제임즈를 통해 불법서신을 유럽으로 보내려고 시도하여 법을 어긴 죄로 체포했다고 한다. 
며칠 전에 라스카즈가 황제에게 제임즈를 통해 유럽으로 편지를 보내자고 제안했을 때 황제는 일언지하에 미친 짓이라고 잘랐다. 그 후에 라스카즈는 황제에게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으며 황제 몰래 편지를 썼다. 그리고 하인의 아버지가 고발했다고 하셨다. 저녁식사 후 황제는 오미라 의사에게서 이야기의 전모를 듣고 우리들에게 알려주셨다. 라스카즈는 아들을 시켜 하얀 비단에 편지 두 통을 써서 제임스의 조끼 안쪽에 기웠고, 제임스의 말을 듣고 겁이 난 그의 아버지가 총독에게 고발했다는 것이다.

 

 

 

 

 

1816년 12월 7일 토요일

황제께서 인체해부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심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나는 정말 충실한 신하 같이 황제의 심장은 머리에 있다고 말씀드렸다. 황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일단 완전히 생명이 꺼지면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은 가사상태에 빠졌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황제는 이런 말을 하셨다. “내 생각이 물질론자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왜냐하면 ‘죽음과 회생 사이에 흐른 시간 동안 영혼은 어떻게 되냐?’ 되물을 수 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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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부터는 (나폴레옹의 다른 충신이었던 드루고, 몽톨롱, 베르트랑의 일기를 바탕으로 전개) === 

 

 


1816년 12월 8일 일요일

황제께서 우리들과 저녁을 드시는 동안 화제가 전쟁으로 흘렀다.

 

“나는 포병이든 공병이든 전쟁을 해본 장교들이 더 좋아. 실전경험이 있는 포병장교는 전투 상황에 어디에다 대포를 설치할지 판단할 줄 알지만 실전경험이 없는 포병장교는 노동자 또는 관리인이나 마찬가지야. 좋은 공병장교는 포위공략이나 요새방어를 해봤기 때문에 전투 상황에 맞는 요새를 만들 수 있어. 실전경험이 없는 공병장교는 노가다나 마찬가지야. 전쟁을 통해서만 경험을 쌓을 수 있어. 

“나는 뮈라(Murat)가 아주 용감했기 때문에 좋아했어. 그래서 그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하는 것을 용서했지. 베시에르(Bessières)는 훌륭한 기병장교였지만 좀 가리는게 있었지. 뮈라가 가지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조금 부족했어. 네(Ney)는 정말 보기 드물게 용감했어. 프랑스에는 재치있는 사람이나 계획을 잘 짜는 사람은 결코 부족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성스러운 불 맛을 본 위대한 성격과 추진력을 가진 사람은 충분하지 않지.”

황제는 기병이 공격을 할 때 보병의 총격에 노출되기 때문에 보병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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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12월 17일 화요일

황제께서 내가 라스카스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하셨다고 베르트랑이 내게 경고를 주었다. 그것이 황제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내가 황제를 흥분하게 만들며, 계속 그럴 경우 방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라스카스에게 보낼 황제의 편지와 관련해서 황제가 나의 의견을 물었던 일을 이야기하려 했더니, 베르트랑이 내 말을 막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황제를 잘 모르는군. 황제가 어떤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것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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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 1월 11일 토요일

황제는 죄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프랑스 사람들 같이 왕을 많이 죽인 국민들이 없어. 정말 통치하기 쉽지 않은 국민이야. 그래도 나를 죽이려 했던 프랑스 사람은 많지 않았어. 한번은 나를 암살하려고 했던 자를 체포했어. 그는 국민들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나를 죽이려했다고 했어. 그는 그의 모든 행동을 성서를 인용하면서 정당화하는 광신도였다. 내가 그에게 사면을 하면 다시 암살을 시도하겠느냐고 물었지. 그는 망설이다가 ‘나는 내 임무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이 원치 않는 걸로 생각하고 다시 시도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어.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게 진심으로 보이지 않았어. 이십사시간 굶기고 나서 다시 심문했지. 변함 없이 똑같은 인간이었어. 총살시켰어.

 

 

 

 

 

1817년 1월 12일 일요일

“예수가 실제 존재했는가? 그것을 논하는 역사가는 없는 걸로 알고 있어, 조세프조차도. 그가 죽을 당시 지구를 뒤덮고 있던 어둠에 대해 아무도 언급하지 않아.”

“예수의 도덕은 플라톤에서 나온 거야. 인간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사는데 종교가 필요해. 종교는 아주 큰 기쁨을 주지만, 어떤 형태의 지도를 받아가며 행동하는 것이 선인가 악인가? 형편없는 성직자들이 너무 많아!”

 

 

 

 


1817년 1월 30일 목요일

황제는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도와 책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황제는 지도를 보며 농담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면 참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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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 3월 3일 월요일

저녁, 우리는 영혼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황제: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이 불멸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영혼이 육체가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과거를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수 없다면,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질주의자들은 영혼이 물질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유기물의 속성을 가졌다고 본다. 자석이나 전기가 그 나름대로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1817년 3월 4일 화요일
“그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훗날 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아! 내가 프랑스를 사십 년만 통치했더라면 전대미문의 제국을 건설했을 거야!” 

이 말을 듣고 몽톨롱 부인은 폐하께서 미국에 큰 제국을 세우실거라고 말했다.

 

나폴레옹: “아! 나는 너무 늙었어!”

 

 

 

 


1817년 7월 14일 월요일

황제는 섬과 해안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배가 한 척 있으면 우리들이 떠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포플튼 대위와 상의해봐. 그 사람이 당신한테 잘 하는 것은 돈을 바라기 때문이야. 영국인들은 돈만 있으면 매수할 수 있어.”

 

황제는 저녁식사 중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섬의 지도를 가져오게 해서 탈출계획에 대해 말씀하셨다.

“시내를 통해서 대낮에 하는데 낫겠어. 해안을 통해서 가면 우리가 가진 사냥총으로 한 진지에서 한  10명 정도는 해치울 수 있을 거야. 잘만 하면 20명도 가능해.” 

우리들은 총독을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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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 7월 23일 수요일

황제는 영국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하셨다.

 

“당신은 내 머리 위에 예수같이 가시관을 얻어줬소, 당신 덕분에 수많은 신봉자들이 내게로 왔소.”

 

 

 

 

 

 

 

1817년 8월 30일 금요일

“나는 마리루이즈를 사랑하긴 했지만 조세핀을 더 사랑했어. 당연하지, 나는 조제핀과 살면서 출세를 했고, 진정한 여자였고, 내가 선택한 여자였어. 잠자리에 들 때나 옷을 입었을 때 우아했어. 화가를 시켜 그림으로 남길 걸 그랬어. 마리루이즈가 정직한 만큼 조제핀은 거짓말쟁이였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 우선 아니라고 말로 시작했어, 빚을 많이 지고, 내가 갚아야 했지. 

그녀가 자제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한달에 한번쯤 마음 속에 있는 걸 다 털어놨지, 파리여자답게. 조제핀이 애만 낳았더라면 이혼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내가 마리루이즈와 결혼만 안 했더라도 러시아와 전쟁을 안 했을 거야. 나는 오스트리아가 내 편이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어.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진정한 적이었지.”

 

 

 

 

 

 

1817년 9월 10일 수요일
저녁식사 후 우리는 “카이사르의 죽음”을 읽었다. 황제는 자신이 카이사르에 관한 책을 썼다면 볼테르와는 다른 방향으로 썼을 거라고 하셨다.

황제: “나는 젊어서 카이사르처럼 하려고 했어.”

구르고: “폐하도 카이사르와 마찬가지십니다.”

황제: “그러나 성공했어야지! 하기야 그도 성공하지 못했지, 칼 맞아 죽었으니.”

 

 

 

 

 

 

1817년 10월 4일 토요일

황제는 프랑스 사람 특히 파리 사람들을 칭찬하셨다.: “나는 파리 사람들을 좋아했어. 내가 파리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해. 그 사람들이 파리의 영광된 날들을 회고할 때 나를 생각한다면 나는 만족해. 그들은 그런 경우에 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나는 파리를 좀더 외곽지대까지 확대해서 거대한 수도로 만들 꿈을 가졌었지."

“나는 이탈리아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야. 우리 집안도 이백 년 전 토스카나 지방 출신이지. 내가 이탈리아를 위해 좀더 무엇인가를 했었어야 했는데, 두 번째 아들이 생기면 이탈리아를 독립시키려고 했어."

 

 

 

 

 

 

 

1817년 12월 25일 목요일

한 시 반, 황제가 불러서 마렝고(Marengo) 전투에 대해 구술하셨다.

“전쟁은 참 이상한 기술이야. 나는 육십 번쯤 전투를 했는데 수많은 전투을 하면서 특별히 배운 게 없어. 카이사르를 봐. 그도 처음 전투와 마지막 전투가 똑같아. 훌륭한 군대는 장교 각자가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할 줄 하는 군대야. 내가 이긴 전투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내 공은 반쯤 된다고 봐.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군사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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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1월 16일 금요일

저녁, 체스. 황제는 카드놀이를 하다가 소리쳤다. 

“매일 똑같아! 참으로 지겹군....!” 


한때 유럽을 지배하였던 인물이 저렇게 변하였다는 것에 나는 슬픈 감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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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5월 8일

황제의 말씀.

 

“1813년에 내가 범한 잘못으로 인해 연합군들이 프랑스에 발을 들여 놓게 한 것을 생각할 때 나는 회한에 시달린다네. 그때 이겨놓고도 휴전을 받아들이는잘못을 저지르다니! 내가 한 방만 더 먹였더라면 러시아와 프로이센 군대는 가루가 되었고 내 마음대로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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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5월 16일

얼마 전, 발콤 일가는 우리의 불법 서신교환을 도와준다는 의심 사서 영국으로 추방 통보를 받았다. 그들을 보기 위해 황제는 브리아르에 가셨다. 황제는 그 일가에게 런던에서 환전할 수 있는 72,000프랑 짜리 어음과 12,000 프랑 짜리 지불보증서를 하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세인트 헬레나에 도착한 직후 당신 집안이 우리들에게 베푼 호의 때문에 추방 당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소. 하지만 그대들이 나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요.”


총독이 모든 주민들과 군인들에게 그의 특별한 허락을 받기 전에는 우리들과의 어떤 관계도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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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1월 1일
1818년 9월 엑스라샤펠(Aix-la-Chapelle)에서 열린 연합국 회의에서 연합국들은 황제의 유배 조건을 더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같은 코르시카 출신이자 황제의 집안과 원수였던 포조 디 보르고(Pozzo di Borgo)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때까지 무슨 계기가 있으면 유럽으로 귀환하거나 이송될 것을 은근히 기대했던 황제는 1819년초 유럽에서 온 신문을 통해 이 결정을 알게 되었다. 석방이나 탈출에 대한 희망이 없는 죄수가 된 황제는 살아서 세인트 헬레나 섬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느끼고 절망하였다.

 

 

 

 

 

1819년 7월 2일

황제는 침실시종 마르샹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희들은 유럽으로 돌아가고, 가족들을 다시 보겠지. 몽톨롱은 부인과 애들을 볼 것이며, 너는 네 어머니를 보겠지. 나는 죽어서도 이 고독 속에 내팽개쳐져 있을 거야.”

 

 

 

 

 

 

1820년 8월 15일

생신을 맞은 황제께서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과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황제는 아이들이 큰소리로 표시하는 즐거움을 나누시는 것 같았다. 애들에 둘러싸인 평범한 가장 같이 행복해 보였다.

 

 

 

 

 

1820년 8월 20일

최근 유럽에서 도착한 정치선전물은 황제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1820년 10월 14일

오늘 아침 황제는 왼쪽 팔에 부황을 했다. 앙또마르키 의사는 몸 전체에 하자고 제의했지만, 황제는 거부하셨다.

 “당신은 내가 총독한테서 괴로움을 받는 걸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거요?”

 

 

 

 


1821년 2월 19일

황제가 정원에 계신다. 마르샹이 롱우드를 그린 수채화를 황제께 보여드렸다. 거기 나온 황제의 존안은 그다지 닮지 않았다. 마르샹이 황제의 정장 모습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샹은 이 그림을 그의 아버지에게 보내겠다고 한다.

 

 

 

 


1821년 3월 10일

아내가 황제를 방문했는데 기분이 좋으셨다고 한다. 상태가 좋아져서 조만간 말을 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미국에 가보고 싶구만. 우선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한 6개월 동안은 전국을 돌아다닐 거야. 루이지애나를 보고 싶어. 내가 그땅을 미국에게 팔았지. 그걸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냥 줄 수도 있던걸 돈 받고 판거야. 만약 그대로 뒀다면 영국군이 쳐들어가서 빼았았을거야 .”

황제는 하루종일 읽고 구술하셨다. 기분이 좋으셨다. 조만간 이 저주받은 곳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셨다.

 

 

 

1821년 3월 23일

황제가 네 시에 나를 부르셨다. 열이 계속 나면 일 주일 안에 죽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1821년 3월 26일

앙또마르키 의사가 아노트(Arnott) 의사와 상의. 후자는 황제의 열이 위험한 성격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아랫배를 덮지 말고 하루에 서너 번씩 소량의 아편을 주라고 한다.

 

 

1821년 4월 6일

황제가 좀 나아지셨다. 아노트 의사는 아주 낙관적이다.

 

저녁 여섯 시, 다시 열이 난다. 침실시종 노베라즈(Noverraz)가 어제부터 아프다. 나는 황제에게 곁에서 밤을 새겠다고 제의했다.

 

 

1821년 4월 17일

황제는 혼란스런 밤을 보내셨다. 두 번 토하셨다. 토한 양은 많지 않았고 약간의 초콜렛과 소화가 많이 된 음식물이었다. 앙또마르키 의사는 황제의 위가 이완되어 모든 것을 토할 수 있을 힘이 없다고 했다.

 

몽톨롱이 앙또마르키에게 말 한 바에 의하면, 황제는 어제 밤에 황제가 가진 모든 상자들을 나눠줄 준비를 하고 그것을 넣을 포장을 손수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유언장은 아직 쓰지 않아서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면 아무도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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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4월 18일

 

황제는 밤 사이 두 번 토했다. 옷을 자주 갈아입어서 셔츠가 없어 조끼를 입고 계셨다. 삼 일 전부터 창문을 열게 하셨다.

황제는 소파에 앉아서 “잘 있었거라 태양이여, 잘 있게나 내 친구야!” 라고 하시면서 인사를 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1821년 4월 21일

황제는 밤새 주무시지 못했다. 졸거나 구술을 하곤 했는데, 몽톨롱에 의하면 너무 흥분해 있기 때문에 좋은 조짐이 아니라고 했다.

황제는 “의사들이 나를 낫게 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나를 좀 붙들고 있는 거지.” 라고 말씀하셨다.

 

 

 

 

 


1821년 4월 22일

황제는 유언장을 세 가지 만들었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첫 번째 유언장은 파리에서 열어봐야 하며, 영국사람들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부오나비따 신부를 통해서 유럽으로 보냈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셨다. 

 

두 번째 유언장은 유언추가서로 여기서 열어봐야 하며, 영국인들이 여기 있는 물건들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황제가 직접 배분했기 때문에 영국인들에게도 보여야 한다고 하셨다. 

 

세 번째 유언장은 마리 루이즈 황후에게 주라고 하셨다. 

 

마르샹은 황제가 지시한 때와 방법에 따라 이 유언장들을 공개할 것이라고 하셨다.

 

종교: 황제는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카톨릭 종교 속에서 죽겠다고 하셨다. 황제는 죽기 전에 비날리 신부로부터 영성체(領聖體)와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받겠다고 하셨다. 카톨릭 종교 속에서 죽겠다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공공도덕에 적합하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매장: 황제는 앙또마르키만이 황제의 몸을 해부할 수 있다고 하셨다. 황제를 치료한 아노트 의사가 입회할 수 있지만 조서에 엉뚱한 것들을 넣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하셨다.

황제는 부르봉 왕가에서 반대하지 않으며 페르라쉐즈(Père-Lachaise) 묘지에 묻히고 싶으며 가능하면 마세나와 르페브르 장군 사이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황제는 부르봉 왕가 사람들이 많이 묻혀 있는 셍드니(Saint Denis) 묘지에 묻히는 것보다 이걸 선호한다고 하셨다. 만약 부르봉 왕가가 굳이 황제를 그 집안 사람들 가운데 묻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론 강과 손 강이 만나는 지점 부근, 즉 리용 근처에 있는 섬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그마저 안된다면,  코르시카의 아작시오(Ajaccio)에 있는 조상들과 삼촌 뤼시엥(Lucien)이 묻힌 성당 묘지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만약 상기 방법이 모두 불가능한 경우, 섬에 머무는 동안 황제께서 마신 물을 제공한 샘 부근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유언장 집행인으로는 나와 몽톨롱 장군, 마르샹을 지정한다고 하셨다. 몽톨롱은 황제를 동행한 육 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고 하셨다. 

 

황제는 마르샹에게 작위를 주고 싶으며 모든 군주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하셨다. 황제의 전임 시종 꽁스땅(Constant)이나 루스탐(Roustan)은 경멸받아 마땅한 인간들이지만, 마르샹은 높이 평가할 인간이라고 하셨다.  황제는 이미 마르샹에게 상당한 땅과 재산을 주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이 언젠가 그에게 공작 작위를 주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황제는 우리들에게 마르샹이 재산을 낭비하지 않도록 조언해주라고 하셨다.

 

아들: 황제는 아들 로마왕이 열여섯 살이 되면 황제가 쓰시던 무기들을 주라고 나에게 맡기셨다. 무기들을 잘 관리하라고 당부하셨는데, 특히 권총들은 녹이 슬 것을 우려하셨다. 황제는 아들이 결코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서자들: 발레프스카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에게 20만 프랑을 주라고 하셨다. 뮈라(Murat)가 소개 해준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레옹에게 15만 프랑을 남기고, 그의 보호자에게 맡긴 삼십만 파운드에서 나오는 이자로 땅을 사주라고 하셨다.

 

황제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황제를 섬긴 사람들에 대한 만족의 표시로 분배하셨다.

 

황제는 나와 몽톨롱에게 각각 1백만 프랑을 남기셨다. 그밖에 시종 알리(Ali)에게 5만 프랑, 노베라즈(Noverraz)에게 20만 프랑을 남기셨다.

 

 

 

 

 

1821년 4월 26일

황제는 정오까지 아주 자주 물을 마셨다.  황제는 위가 아프다고 하시며 음식물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온다고 하셨다. 의사들은 그런 느낌일 뿐이며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황제는 또 토하셨고, 물과 포도주를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토하셨다.

황제는 오늘 자주 기억이 오락가락 했다. 십 일 전부터 하루 두세 번 씩 똑같은 질문을 하셨다.

 

 

 

 

 


1821년 4월 29일

황제는 밤새 네 번 토하셨다. 황제는 휘하에 있다 전사한 장군들에 대해 몽톨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는 세 번이나 삐에롱을 불러 똑같은 질문과 답을 반복하셨다.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처럼. 황제는 연속적인 질문을 계속 하신다. 

아노트 의사는 황제의 목소리가 변한 것을 감지하고, 이미 대답한 질문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알아챘다. 

 

황제: “늘 아침 내가 정원을 산책하지 않았어?”

몽톨롱: “산책 안 하셨습니다, 폐하.”

황제: “뭐라고! 내가 오늘 아침 정원을 산책하지 않았다고?”

몽톨롱: “안 하셨습니다.”

황제: “앙또마르키, 내가 너한테 정원 이야기를 안 했어?”

앙또마르키: “안 하셨습니다.”

황제: “이상하다. 희망봉의 오렌지는 달아?”

몽톨롱: “네.”

황제: “나한테 가져와 봐.”

베르트랑: “폐하께서 오늘 아침 맛을 보셨습니다. 시다고 하시고는 토하셨습니다.”

황제: “아냐, 나는 먹지 않았어. 아! 정말 시군. 이건 레몬이지 오렌지가 아냐. 설탕조림은 하고, 나머지는 익게 나둬.”

삐에롱: “네, 폐하.”

황제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도 나를 못 알아보셨다. 아침에는 커피를 마셔도 되느냐고 스무 번쯤 물으셨다.

베르트랑: “죄송하지만 안됩니다, 폐하.”

황제: “의사들이 한 숟갈 먹어도 된다고 하지 않을까?”

베르트랑: “아닙니다, 폐하, 지금은 안됩니다, 위가 너무 자극을 받아서 곧 토하실 겁니다.”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니! 그렇게 자랑스럽게, 그렇게 절대적으로 세상을 지배했고, 그렇게 무서웠던 분이 커피 한 숟갈을 받아먹기 위해 어린애처럼 애원하고, 거절 받으니 참을성 있게 또 애원하는 것을 보고,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병환이 깊어지고 나서도 의사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셨던 분이 말이다.

 

위대한 황제폐하, 불쌍하고, 겸손하신 황제폐하..

 

 

 

 

 


1821년 4월 30일

밤에는 상당히 조용했다. 황제는 잠을 주무셨다기보다는 쉬셨다고 해야하겠다.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일곱 시 반, 내가 들어갔다:

황제: “당신 가족들은 어때?”

베르트랑: “잘 지냅니다, 폐하.”

황제: “날씨가 어때?”

베르트랑: “아주 좋습니다.”

황제: “해가 있어?”

베르트랑: “네.”

황제: “몇 시야?”

베르트랑: “여덟 시입니다.”

삼십 분 후 황제: “구르고는 어디 있어?”

베르트랑: “파리에 있을 겁니다.”

황제: “왜 떠났어?”

베르트랑: “몸이 아파서 떠났습니다.”

황제: “내 허락을 받고 갔나?”

베르트랑: “네, 폐하, 폐하께서 편지도 써주셨습니다.”


네 시 반, 내가 방에 들어갔다.

황제: “당신이 몽톨롱이야?”

베르트랑: “아닙니다. 저는 베르트랑입니다. 몽톨롱은 몸이 아픕니다.” 

앙또마르키가 들어와서 황제에게 수프, 물 탄 포도주를 권해도 다 싫다고 하셨다.

 

 

 

 

 


1821년 5월 1일

황제는 숨을 쉬는데 힘들어 보였다.

비날리 신부는 제단을 만들고 황제에게 종부성사를 드렸다. 나는 황제께서 영성체를 받았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에도 황제는 딸꾹질을 계속 하신다. 아무 것도 드시는 것을 거부하신다.

 

저녁 열한 시까지 딸꾹질이 계속 되어 호흡이 힘들다. 아노트 의사와 마르샹은 자러 가고, 나와 비날리 신부, 알리만 남아있다.

 

 

 

 

 


1821년 5월 2일

새벽에 딸꾹질을 하셔서 몽톨롱이 다가갔다.

황제: “당신은 누구야?”

몽톨롱: “몽톨롱입니다.”

황제: “뭘 원해?”

몽톨롱: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황제: “아냐.”

새벽에 황제는 일어서기를 원하셨다. 담요를 바닥에 던지며 산보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몽톨롱은 날이 밝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했더니, “아냐”라고 하셨다.

나는 의사를 불렀다. 황제는 걸으려고 시도하셨다. 몽톨롱과 비날리 신부가 부축했다. “이렇게 밀지마!” 비날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알리와 의사가 와서 황제를 침대로 다시 데리고 갔다. 황제는 심한 위경련을 일으켰다. 모두들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맥박이 다시 돌아왔다.

 

 

 

1821년 5월 4일

황제의 옷을 갈아 입힌다. 황제는 나를 보고 “그래, 베르트랑, 내 친구.” 라고 말씀하신다.

황제는 모든 사람들을 보신다.  앙또마르키는 황제가 자정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한다. 황제는 고통스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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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5월 5일 


황제는 지난 밤 아들의 이름을 부르셨다. 두 번이나 마르샹에게 “내 아들 이름이 뭐야?”라고 물으셨다. 마르샹은 “나폴레옹입니다”이라고 대답했다.


신음, 하품, 고통스런 표정, 황제는 "군대의 선봉"이라고 들리는 말씀을 중얼거리셨다.

신음. 의사가 베개를 좀 높여 준다. 황제는 이제 눈을 뜨지 않으신다. 어제보다 더 기력이 떨어져 보인다. 

밤새도록 하던 딸꾹질은 줄어들고 상당히 깊은 신음소리, 때로는 방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을 깨울 정도로 크다.

06:00 , 앙또마르키 의사가 손가락으로 황제의 배를 두드리니 북같이 울린다. 황제는 몸이 붓고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의사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고 알린다.

08:00 , 신음, 아랫배에서 나는 듯한 둔한 소리. 신음이라기보다는 악기에서 나는 소리 같다. 왼쪽 눈에서 귀까지 눈물이 흐른다. 내가 눈물을 닦아드렸다. 아노트는 황제의 생명이 지속되는 것에 놀란다.

10:30 , 호흡은 부드러웠다. 몸 전체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시선은 고정되어있었고, 눈은 사분의 삼쯤 닫혔다. 같
지켜보고 있는 열여섯 사람 중 프랑스 사람은 열두 명이다.

11:00 , 한숨만 쉬신다. 의사가 여러 번 목 부근에서 맥을 짚어본다.

14:00 , 아노트 의사가 뜨거운 물이 가득 찬 병을 배 위에 놓는다.

17:45 , 마지막 삼 분 동안 세 번 한숨을 쉬셨다. 그렇게 황제는 마지막 숨을 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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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armée, tête d'armée..... Joséphine.
(프랑스, 군대(육군), 선봉...... 조제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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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1821년 5월 5일, 세인트 헬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직감대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 묻혔다.

 

그는 살아생전 리스본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 유럽 전체를 정복하고 수많은 군주들을 굴복시켰으나, 그건 한낱 지나간 영광이었을 뿐이다. 

 

세인트 헬레나까지 그를 따라온 인물들 대부분은 황제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의 권세에 힘입어 출세한 귀족들과 장군들, 오랜세월을 같이 보낸 친지들과 맹우들은 정작 그가 힘을 잃자 어떠한 도움의 손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유배기간 내내 그를 옥죄었던 허드슨 로우 총독은 나폴레옹이 죽는 것을 보고 나서야 총독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시행한 억압적인 정책들로 인해 로우는 본국인 영국에서 조차 '악당'이라고 질타받았다.

 

 

 

나폴레옹의 유해가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그로 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840년에서였다.

 

한때 그를 보필했던 과거의 신하들은 다시 그를 찾아와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관을 운구하였고 그 해 겨울, 프랑스 황제로써 국장을 치룬 뒤 앵발리드에 묻혔다.

 

 

 

 

 

 

 

15개의 댓글

2019.10.05

재밌네

0

초스압 ㅊㅊ

0
2019.10.05

요약은 없냐

0
2019.10.05

슬프다 이런 글을 어디서 찾아오는진 모르겠지만 너무 잘봤다

 

황제라는 사람이 이렇게 최후가 보잘것 없다는게 참

0
2019.10.05
@번째고양이

그럴만한게 개인사적인 부분 보면 인품이 좋다라는 사람은 아니었음

 

특히나 자서전 편찬에서 다른 이의 공적을 깍거나 자신의 것으로 말하고 자기의 과오는 모르쇠하던 양반이라서

0
2019.10.05

재밌다

혹시 책으로 나온 내용 가져온거면 책 이름 좀 가르쳐줘

0
2019.10.05

유럽을 휘몰아친 독재자라던데 의외로 인간적이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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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5

나폴레옹 정도면 상남자임ㅋㅋㅋ 울나라 대통령시킴 으떻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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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1
@방구석히틀러

고향이 어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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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1
@불펌충

마! 부산모리나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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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권좌에서 빛나는 사람이었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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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백만 단위 목숨을 날린 전범이 너무 편하게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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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죽기전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이름 부르고싶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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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에 걸쳐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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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임마느금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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