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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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치오 리미날디,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자력으로 하늘을 날았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다이달로스는 천재 공학자였다.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들만 해도 접고 펼 수 있는 돛, 브레이크 달린 수레, 자루를 끼울 수 있게 만든 도끼날, 구멍 낼 때 쓰는 송곳 등등 다양하고 유용했다. 이처럼 당대 그리스인들이 향유하던 것보다 우월한 기술력을 자랑했던 다이달로스의 발명품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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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코임브라의 로마 시대 모자이크. 방금 귀엽다고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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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은화. 크노소스 궁전에서 출토됐다. 미궁은 오래 전부터 그리스인들에게 친숙했던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단연 미궁이다. 다이달로스의 손으로 탄생한 미궁은 그와 관련된 신화 대부분의 주요 소재이자 배경이 된다. 공학도들은 뛰어난 기능 = 고부가가치 상품이라는 생각을 갖는 경향이 있는데, 다이달로스도 마찬가지였던 듯 하다. 왜냐면 그 자신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을만큼 미궁을 복잡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당초 제작 목표만큼은 훌륭하게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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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반 다이크,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아빠는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아들의 표정은 외않된데 하고 있다>

 

익히 아시다시피,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미궁을 탈출할 방법을 일러줬다가, 분노한 미노스 왕에 의해 미궁 속에 던져졌다. 그러자 다이달로스는 기책을 써서 미노스 왕의 손아귀로부터 달아나는데, 바로 미궁 외벽에 나 있는 창문으로 날아서 내뺀 것이다. 새 깃털과 밀랍을 모아 만든 날개 두 쌍으로 아들과 다이달로스는 크레타를 벗어나고자 했다. 뭐, 절반은 성공했지.

 

하지만 다이달로스만큼 유능한 사람을 꼭지가 돌았다고 내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듯 하다. 미노스 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죽어서도 저승의 판관 노릇을 한다고 믿어질 정도로 공정했던 임금이고, 따지고보면 다이달로스 잘못도 아니기 때문이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왕녀까지 납치한 사람은 테세우스였지, 다이달로스가 아니다. 오히려 다이달로스를 동원해 테세우스를 잡아들일 궁리를 했어야 하는 게 미노스 왕으로서는 더 현명한 처사 아니었을까? 이런 재간꾼을 정당한 사유도 없이 처벌했다가는 좋은 소리를 들을 리 없었다 : "다이달로스급 인재도 버려지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들에 있어서야" 라며 오히려 인재 유출이 생겼으면 생겼겠지.

 

여기서 질문 : 미노스 왕은 왜 다이달로스를 처벌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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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아손과 아르고나우타이 원정대의 한 장면. 탈로스가 섬을 순찰하고 있다>


나는 다이달로스의 걸작들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탈로스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인으로, 하루 3번 크레타 섬을 순찰하면서 왕국의 해안을 방비했다. 배가 접근하는 것이 보이면 바위를 던져서 침몰시키고, 상륙한 선원들에게는 자신의 몸을 달궈서 바디 프레스를 가했다고 한다. 쇳덩어리가 저절로 움직이고, 피아를 식별해 공격한다구? 실로 시대를 앞서간 관념의 산물이 아닐 수 없는데, 오늘날 자동인형(= 로봇)의 시조로 받들어모셔질만큼 획기적인 존재다.

 

탈로스의 탄생설에는 헤파이스토스가 만들고 제우스가 크레타에 선물했다는 설과 청동시대의 마지막 후예라는 설, 그리고 다이달로스가 미노스 왕에게 헌납했다는 설이 있는데, 여기선 당연히 다이달로스가 관여했다는 설을 채택했다. 그도 그럴 게, 크레타는 후발 그리스 문명인 미케네 문명의 토대에 해당하므로 제우스 신앙이 덮어 씌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달로스가 그 청동 수호신을 크레타에 선물했다? 생각해보자. 크레타에 살면 매일 볼 것 아닌가,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탈로스를 ! 자연히 다이달로스의 입지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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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소스 궁전 복원도. 구 왕궁을 허물고 새로 지은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선물인 크노소스 궁전을 보자. 다이달로스가 특별히 설계해 올린 이 궁전은 장엄한 규모로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들고, 1400 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왕궁과 별궁, 가신들의 주택, 대장간과 곳간, 화장실 등등 없는 게 없는 다목적 주거공간이었다. 다이달로스는 이렇듯 크레타 왕가에 해준 게 많은 일꾼이었고, 따라서 미노스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치적 위상이 커져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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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로마 시대 모자이크.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가 싸우고 있고, 오른쪽에는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이 길을 알려준다>

 

그리고 미궁. 바로 이 미궁이 크노소스 궁전에 탑재되면서 비로소 다이달로스의 위업이 세상에 알려지고, 은 주화에까지 새겨지게 된다. 이를 통해 한껏 주가를 올린 다이달로스가 크레타 왕국에서 중임을 맡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에게 주어진 직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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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1453 파노라마 박물관 삽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장면이다>

 

내 생각에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의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 되었을 것 같다. 탈로스의 실존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 역할이 해안가를 방비하는 것이었고 왕궁을 설계하고 미궁으로 개조한 이야기 역시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다는 목적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이달로스의 헌상품이 모두 일관적으로 방어용 시설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미노스 왕이 다이달로스를 신임해 왕국의 수비 대장으로 앉혔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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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로스를 박살한 테세우스가 그려진 접시. 아테나 여신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문제는 그의 출신지인데, 다름 아닌 아테네이다. 다이달로스는 본래 아테네 사람으로, 뛰어난 재주를 발휘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면 못 참는 성격적 결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조카 페르딕스가 본인을 초월한 천재성을 발휘하자, 질투심에 절벽 아래로 밀어서 죽여버렸다. 이로 인해 추방형에 처해지니, 다이달로스가 선택한 망명국이 크레타였다. 이러한 일화는 정말로 다이달로스의 시기심을 드러내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가 미궁을 탈출할 수 있었던 계기가 다이달로스였다는 점에서 볼 때 매우 공교롭고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에 파견된 아테네의 첩자가 아니었을까. 아티카의 새로운 패자로 태동하는 아테네에서, 지중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해상 제국으로 거듭나려는 목적으로 크레타를 도모하려 했다면, 충분히 스파이를 보낼만 하겠다. 다이달로스가 정말 뛰어난 공학자였는지는 모르지만, 청동 거신상과 멋진 궁전을 지어다 바쳤다면 왕의 환심을 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 그는 미노스 왕의 신임을 발판 삼아, 크레타 왕가 내에 높은 입지를 구축하고 고국의 침공에 대비해 사전 작업을 해놓았다 : 자기 책임 하에 방어 체계를 마련하고 나라의 빗장을 자기 손에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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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몬 오도허티, 파시파에. 절제된 묘사만으로도 굉장히 관능적이게 보인다>

 

다이달로스의 음흉함은 이미 몇 차례 드러난 바 있다. 미노스 왕의 정비 파시파에가 소에게 품은 욕정을 해소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하자, 다이달로스가 나무로 근사한 암소를 만들어주었단다. 파시파에는 그 나무 소 안에 들어가 자신의 육욕을 마음껏 풀었고, 그래서 나온 게 미노타우로스다. 미노타우로스는 포악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반인반우(半人半牛)의 괴물인지라, 미노스 왕은 그를 가두기 위한 계책을 요구했고 이에 다이달로스가 내놓은 해답이 미궁이었다. 한편, 그렇게 가둬둔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기 위해 찾아온 테세우스에게 반한 아리아드네는 다이달로스로부터 미궁을 탈출할 방법을 얻었다. 이렇게 적고보니 다이달로스가 크레타 왕가를 푸짐하게 맥인 것 같잖아? 

 

그러한 이유로 미노스 왕이 다이달로스를 미궁에 가둬버리지 않았나, 하는 게 나의 결론이다. 테세우스 같은 인간 흉기가 이끄는 아테네 원정대는 막강했고, 그들을 막아낼 거라 기대했던 미궁과 그 책임자 다이달로스가 속수무책으로 뚫리면서 왕국은 개털 됐다. 최악의 배신을 당했으니, 미노스 왕이 진노하는 것도 당연할 수 밖에. 그나마 바로 참수하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 어쩌면 아테네 눈치가 보여서 차마 죽이지 못한 걸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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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이카로스를 위한 탄식. 님프들이 슬퍼하는 것은 이카로스의 청춘인가, 인간의 오만인가>

 

결국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아들 이카로스를 잃었던 듯 하다. 이로 인해 다이달로스에게는 미노스 왕을 증오할 명분이 생기고 말았다. 미노스 왕의 최후는 다이달로스로부터 비롯됐으니, 그가 설계한 목욕탕에서 끓는 물에 삶아졌다고 한다. 다이달로스의 교묘함이 이러하니, 그에 관한 신화들에서 일컫는 빼어난 재주들은 사실 그의 지략을 은유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글에도 문제가 많지만, 대략 다섯 가지 문제가 있다 :

 

1. 어디까지나 신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 신화를 취사 선택한 것과 취사 해석한 문제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2. 당시 공장(工匠)들의 입지는 불분명하다 - 미노스 왕이 일시적인 감정으로 다이달로스를 처벌하는 것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확인할 길은 없다. 심각하게 비약해서, 다이달로스의 발명품을 접해 본 사람들이 "신통한 재주를 가진 천민 놈" 정도로 대했을 수도 있다. 즉, 다이달로스가 반드시 국경 수비대장의 중임을 맡아야 할 이유도 없고, 남의 잘못으로 죄를 받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왕정 체제 하의 신민으로서 재수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3. 다이달로스는 죄인이다 - 사실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조카를 살해했다는 명목으로 추방형에 처해졌으니 다이달로스는 죄인이 맞다. 그가 아테네의 첩자로서 크레타에 파견된 것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협객 예양이나 요리(要離)처럼 고육지계를 행한 것일 수도 있지만, 지나친 추측일 수도 있다. 

4. 다이달로스가 지략가인지는 알 수 없다 - 마치 해결사처럼 그려져 있지만, 사실 미궁을 만들고 그곳에 갇힌 원인이 모두 근본적으로 다이달로스 자신에게 있었다. 그가 왕과 왕비, 공주 모두에게 깊이 관여한 부분이 음험하고 계략 꾸미기 좋아하는 성격의 편린이라고 표현한 것은 비약이다.

5. 증거가 부족하다 - 신화에 기반한 뇌피셜이다보니 이렇다 할 증빙 자료는 없다. 위의 네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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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낭비하게 해서 미안

 

10개의 댓글

2019.03.09

지식이 늘었따. 재밌게 읽고 갑니다.

1
@멍댕이

감삼다 :)

0
2019.03.09

이런 글 너무 재밌는데 저 시대의 기록이 더 많았으면 좋겠단 생각도 들어요 잘 읽었습니다

1
@재롱이

항상 고맙습니다 :)

0
2019.03.10

다이달로스를 보면 꼭 켈트 신화의 디안케트가 떠오름.

능력은 존나 좋은데 별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다거나 질투가 심해서 혈육을 해한다거나.

1
@섹시도발

또는 북유럽 신화의 토르처럼, 고대에는 신들이 우리 인간과 같이 격정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존재였다고 생각했나보다 ㅋㅋㅋㅋ

0
2019.03.10
@한그르데아이사쯔

다신교에선 신이란 존재를 "존나 쩔고 대단하긴 한데 우리보다 엄청 나을건 없어ㅋㅋ"라는 시선으로 보긴 하더라

1
2019.03.11

이런 그림들은 어디서 보고 오는거여?

박물관 같은데서?

1
@불타는 수염

보통은 어떤 그림을 책이나 방송에서 보고, 잡념이 시작되면 그에 맞는 그림들을 인터넷으로 찾아 감상하고 올리지 :)

0
2019.03.11
@한그르데아이사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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