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2)

 

257.jpg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메두사. 여러분 모두 돌이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에게 가장 먼저 죽은 괴물은 메두사다. 그리고 첫 괴물 사냥꾼의 영광은 페르세우스가 차지했다. 하지만 이 당시 페르세우스는 혈기방장한 청년일 뿐, 가진 것도 없고 뒷배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전대미문의 괴물 퇴치에 성공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22.jpg

<파리스 보르도네, 페르세우스를 무장시키는 헤르메스와 아테나. 과분한 득템에 어리둥절한 페르세우스의 표정이 돋보인다>

 

바로 극한의 템빨 !!! 

 

페르세우스는 올림포스의 주신들로부터 신들의 무구를 잔뜩 제공받아 메두사를 잡아낼 수 있었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속 버프, 공간 이동), 하데스의 은신 투구(투명화), 헤라의 요술 주머니(인벤토리 강화), 그리고 아테나의 청동 방패(무지개 반사)면 올림포스 온라인 종결템이라 봐도 무방하다. 후손들이 쇠뭉둥이니, 사자 가죽이니 하며 마르고 닳도록 썼던 템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호화 무장이란 말이다. 

 

여기서 질문 : 페르세우스라는 청년이 이 정도로 신들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dd.jpg

<레옹 프랑수아 코메르, 다나에와 황금비. 극한의 가능충이 간음 중이다>

 

우선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다. 모 영웅처럼 인간쪽 아버지와 신쪽 아버지가 따로 있는 개족보 집안 출신이 아니라, 정말로 아버지가 제우스이다. 왜냐면 그의 어머니 다나에는 외할아버지 아크리시우스가 금남의 탑에 가둬버렸거든. 아크리시우스는 신탁을 받았다가 외손주에게 살해당한다는 사망 플래그를 세우고는 겁이 나서 친딸을 탑 속에 가뒀는데, 우연히 다나에를 보았던 제우스가 육욕을 채우려고 황금비로 변신해서 탑 속의 다나에에게 스며들었다고 한다. 그 길로 잉태해서 낳은 아들이 페르세우스.

 

미케네왕가 가계도.png

<미케네 왕가 가계도. 이름 하나 하나가 일화를 남긴 유명인들이다>

 

마이너한 전승에서는 아크리시우스의 동생이 아르고스의 왕위를 갖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조카를 강간했고, 이런 집안일이 부끄러웠던 아크리시우스가 입단속을 하기 위해 다나에를 탑에 가두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는데, 이게 진짜더라도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의 혈통이 맞다. 다나에가 제우스의 증손녀거든. 이렇게 이해하면 아버지가 둘인 것보다 더 막장이지만, 그리스 신화가 원래 그런 거니까 넘어가주자. 그냥 제우스의 여자 수비 범위가 넓은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제우스의 아들인 것만으로 페르세우스의 로또 당첨 이벤트는 설명되지 않는다. 혈통으로 따지면 제우스의 아들인 영웅이 어디 한둘인가? 그 숱한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 중에도 페르세우스만큼 올림포스의 신뢰와 지지를 얻은 자는 거의 없다 : 오직 아킬레우스만이 외삼촌 헤파이스토스로부터 갑주와 방패를 하사 받았을 뿐, 신들이 스스로 쓰던 애장품을 내어준 사례는 없다.

 

eece3603acecdf90c94f623ef245f18d.jpg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미녀, 지위, 영광을 모두 차지한 완벽남>

 

나는 그 답을, "페르세우스와 후대의 영웅들은 격이 다르다" 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초인적인 힘을 가졌고 위업을 달성하는데 집착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당시 남성성이 추구하는 가치를 영웅들의 모습에 투영한 것 같은데, 남자라면 모름지기 강인해야 하고 굵직한 업적을 남겨 역사에 길이 빛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당시의 업적이란 대개 무용담이므로 힘을 자랑하는 영웅은 많아도 지혜를 자랑하는 영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오죽하면 꾀 많기로 유명한 오디세우스조차, 그 자신만 다룰 수 있는 강궁(强弓)에 대한 신화를 통해 힘 자체는 초인적이라는 신화를 남겼을까. 하지만 영웅들은 또 하나의 특징을 공유한다 : 바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점이다.

 

AA.17542177.1.jpg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운명마저 내 탓이란 말입니까?>

 

어느 영웅을 고른들, 좋게 끝난 사람이 드물다. 영웅이라 칭해진 인물 가운데 말로가 순탄했던 사람은 없다시피 하잖은가. 물론 죽고 난 뒤에야 별자리가 됐느니, 신이 됐느니 하는 신화는 있지만 살아서 번영과 안락 속에 천수를 누린 자는 거의 없다는 얘기다. 그들의 최후는 그 원인이 본인 과실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천벌에 해당한다 : 그것이 영웅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의 본질은 전사가 되는 것이고, 전사의 영광은 당연히 장엄하고 고결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본질적 지향점이 영웅들의 또 다른 본질에 해당하는 "그들도 결국 인간" 이라는 한계로 인해 충돌을 겪게 된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의 몸으로, 신에 필적하는 재능과 힘을 가진 영웅들은 양면성을 내재하면서 소용돌이와도 같은 욕망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그들도 신들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bellerophon-on-pegasus-1747.jpg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페가수스를 탄 벨레로폰. 키메라를 죽인 사나이였건만, 오만이 화를 재촉했다>

 

신들이 그와 같은 불경을 용서할까? 그리스 주신들은 신왕 제우스부터가 허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등, 기강이 문란하고 이기적이었다. 한없이 인간적인 신들이었기 때문에, 잠재적 경쟁자가 될 우려가 있는 그리스 영웅들의 비상(飛上)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웅들은 죽어야 했다. 그렇다고 영웅을 죽이는 또 다른 영웅을 세우면, 점점 더 영웅들이 강해지니까 이런 식의 전개는 끝이 없다. 따라서 영웅들에게는 보잘것 없고 하찮은 죽음, 비극적이고 초라한 최후만이 허락되었다. 그것이 영웅 간에 웅장한 결투가 벌어지지 않는 이유이고, 영웅들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1280px-Corinthian_Vase_depicting_Perseus,_Andromeda_and_Ketos.jpg

<페르세우스가 그려진 항아리. 우측은 제물로 바쳐진 안드로메다 공주, 좌측은 그걸 받으러 온 바다 괴물이다>

 

<에우리노메가 창조한 일곱 별과 그 지배자들. 익숙한 이름이 많이도 보인다>

 

페르세우스가 그런 죽음을 비껴가서 복록을 다 누리다 죽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전형적인 그리스 영웅이 아닐뿐더러 신화적인 융합이 덜 이루어진 초기 등장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 신화는 사실 에게 해의 선주민족인 펠라스고이족의 창세 신화가 거의 대부분 전승되어 변화한 것으로, 펠라스고이인들의 창조신 에우리노메가 낳은 아이들 중에 제우스의 부모인 레아와 크로노스도 있었다. 초창기 그리스 신화가 이것 저것 짜깁기 해서 누더기가 된 것도, 본래 제우스 신앙을 받들던 후발 미노아인들이 펠라스고이인들의 신화를 받아들이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결손이나 모순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제우스보다 동생이 된 사연이나, 티탄신과 기가스들이 신위를 잃고 탄압 받아야만 했던 사연 등이 그러한 일에서 기인한다.

 

2016010801919_4.jpg

<잔 로렌초 베르니니, 메두사의 두상. 그다지 추하게 생기진 않은 듯하다>

 

메두사 신화에서도 그러한 기미를 엿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상으로, 메두사는 본래 아테나 신전의 무녀였는데 그 아름다움에 반한 포세이돈이 그녀를 겁탈했다. 이에 아테나가 그녀를 경멸하여 머리칼은 뱀이 되고, 괴물 같은 스펙을 내려 저주했다고 한다. 이상하지, 강간은 삼촌이 했는데 벌은 피해자가 받았으니. 이것은 당대의 여권이 낮아서 그런 게 아니고, 포세이돈과 메두사 모두 제우스 신앙 체제에 흡수되면서 신위를 실추시키는 작업을 당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뱀은 전통적으로 대지신의 심볼과도 같으니, 메두사는 어쩌면 펠라스고이인들의 대지모신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포세이돈 또한 선주민족들의 바다신이었고. 그러므로 메두사 신화는 펠라스고이족 관점에서 볼 때, 대양신과 대지신의 결합을 통해 조화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티탄신, 기가스, 그 외 님프나 잡신으로 격하 당해 아예 신화에서 소멸한 존재들에 비하면 메두사는 임팩트를 강하게 남기므로 그들보단 상위 신이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목을 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보다도 더 격조 높은 고대신이었을 것이다.

 

 

405px-MAN_Atlante_fronte_1040572.JPG

<형벌을 받는 아틀라스. 그는 언더아머를 입을 자격이 충분하다>

 

어떻게 아냐고? 페르세우스의 행적은 연표가 불분명하고, 그 본인의 감정 표현이 거의 안 되거든.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참수하고 곧바로 귀국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 저곳을 방랑하는데 그의 신화는 이런 식으로 분량이 뽑힌다.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아틀라스를 돌로 굳혀 버리는 것. 아시다시피, 아틀라스는 후일 헤라클레스와 황금 사과를 따는 과업을 두고 옥신각신하며 다툰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증조부에 해당하는 페르세우스가 이미 돌덩어리로 만들어버린 아틀라스가 무슨 수로 헤라클레스랑 씨름을 한담?

여기에 더해, 페르세우스는 작중 딱 두 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그 첫번째는 안드로메다의 약혼자를 자칭하는 피네우스에게 분노하여 그 일당과 함께 돌로 만든 일이고, 두번째는 고향인 세리포스 섬에 가봤더니 폴리덱테스 왕이 엄마를 핍박해서 개빡친 나머지 또 궁정에 쳐들어가 닥치는대로 돌로 만든 일이다. 거의 소시오패스급인데, 이런 잔학한 짓을 벌이고도 평판이 좋거나 말년이 행복했던 그리스 영웅은 없다. 오히려 이런 일화들을 통해 페르세우스의 권능이 "악행을 저지른 자를 돌로 만들어 버리는" 그것이 아닌가, 유추해 볼 수 있고 묘사 순서의 모순으로부터 페르세우스의 여행기가 훗날 창작되었거나 끼워맞춘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hb_67.110.1.jpg

<안토니오 카노바, 메두사의 머리와 페르세우스. 다시 보니 별로 영광스러운 것 같진 않다>

 

올림포스 만신들의 지지를 받는 것 또한, 종교적으로 페르세우스 신앙이 제우스 신앙의 강적이었다는 반증이다. 황금비로 수태되어 아비 없이 태어난 존재 ! 굉장히 낯익은 설정 아닌가? 하지만 그게 사실일지라도 과거일 뿐, 신격이 거세 당한 페르세우스는 숭배의 대상은 커녕 동화에나 나오는 왕자님 1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뭐, 그래도 헤라클레스의 시조이고 미케네 문명을 융성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으니, 썩어도 준치인 셈이다.

 

이 글에도 문제가 많지만, 대략 세 가지 문제가 있다 :

 

1. 어디까지나 신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 신화를 취사 선택한 것과 취사 해석한 문제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2. 공식적인 첫 킬이 아닐 수도 있다 - 카드모스가 테베 왕가를 세우면서 참한 아레스의 용(드라콘)이 먼저일 수도 있는데,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페르세우스의 후손이 헤라클레스이고, 테베는 바로 그 헤라클레스의 장인 크레온의 왕국이었던 것. 이와 같은 왕족 계보가 반드시 상관 관계를 가진다고 볼 순 없지만, 적어도 테베인들이 정통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우리도 미케네만큼 역사가 유구함 !" 이라고 딸치려는 목적으로 카데미아 왕조의 건국 신화를 덧붙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즉, 신들로부터 총애받는 영웅 페르세우스의 나라만큼(또는 그보다 더) 위대한 우리 나라의 위상을 확보하고자 용 이야기를 지어내다보니, 페르세우스와 비슷한 시기에 영웅담을 올릴 수 밖에 없었지 않았겠느냐는 뜻이다.

3. 증거가 부족하다 - 신화에 기반한 뇌피셜이다보니 이렇다 할 증빙 자료는 없다. 위의 두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할 것이다.

 

이전 글 보러가기 -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https://www.dogdrip.net/192913923)

다음 글 보러가기 -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3) (https://www.dogdrip.net/195725772)

 

시간낭비하게 해서 미안

12개의 댓글

2019.02.06

꿀잼 ㅊㅊ

1
@내일까지

ㄱㅅㄱㅅ

0
2019.02.06

암만 봐도 그리스로마신화는 애들용스토리가 아니여...

1
@공업용알코홀

교훈을 얻을 수는 있어여!

0
ll
2019.02.06

제우스 꼬추를 뽑아버리는 신은 없냐?

1

테바이 : 우리 테베 력사 짱 기퍼!!!

0
2019.02.06

언더아머 미친넘 ㅋㅋㅋㅋ

1
@Quantomn

아틀라스 3대 500 침 (단위 : t)

0
2019.02.06

꿀쟘

1
2019.02.07

아틀라스는 언더아머를 입을 자격이 충분 ㅋㅋㅋㅋ 글 재미있다 잘읽었음

1
@재롱이

고마와잉.. :)

1

오딧세이 하는 중인데 몰입도 되고 꿀잼이네

1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408 [역사]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ver2 11 FishAndMaps 8 1 일 전
12407 [기타 지식] 100년을 시간을 넘어서 유행한 칵테일, 사제락편 - 바텐더 개... 2 지나가는김개붕 1 1 일 전
12406 [기타 지식] 오이...좋아하세요? 오이 칵테일 아이리쉬 메이드편 - 바텐더... 3 지나가는김개붕 2 2 일 전
12405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지구 1부 29 Mtrap 8 2 일 전
12404 [기타 지식] 칵테일의 근본, 올드 패션드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야기 15 지나가는김개붕 13 3 일 전
12403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2부 21 Mtrap 13 3 일 전
12402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1부 13 Mtrap 19 3 일 전
12401 [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完) 1 綠象 0 2 일 전
12400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체포되기까지 28년이... 1 그그그그 6 4 일 전
12399 [역사] 아편 전쟁 실제 후기의 후기 3 carrera 11 4 일 전
12398 [과학] 경계선 지능이 700만 있다는 기사들에 대해 36 LinkedList 9 5 일 전
12397 [역사] 미지에의 동경을 그린 만화 8 식별불해 5 7 일 전
12396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두 아내 모두 욕조에서 술을 마시고 익사했... 그그그그 2 7 일 전
12395 [기타 지식] 서부 개척시대에 만들어진 칵테일, 카우보이 그리고 프레리 ... 3 지나가는김개붕 5 8 일 전
12394 [유머] 웃는 자에게 복이 오는 삶 10 한그르데아이사쯔 7 8 일 전
12393 [기타 지식] 모던 클래식의 현재를 제시한 칵테일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4 지나가는김개붕 2 9 일 전
12392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공소시효만료 11개월을 앞두고 체포된 범인 그그그그 3 9 일 전
12391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범인으로 지목받자 딸에게 누명을 씌우려다... 그그그그 4 10 일 전
12390 [기타 지식] 브라질에서 이 칵테일을 다른 술로 만들면 불법이다, 카이피... 5 지나가는김개붕 1 10 일 전
12389 [기타 지식] 럼, 라임, 설탕 그리고 다이키리 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 2 지나가는김개붕 6 11 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