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국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2

 

먼저 읽으면 좋은 글 : http://www.dogdrip.net/138029898 - 한 노인의 최후변론

앞선 글: http://www.dogdrip.net/160514756 - 조국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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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31일 부역자재판소가 활동을 종결하기까지 32만 건에 달하는 소송이 부역자재판소와 공민재판소에 의해 진행되어 12만 명 이상이 판결을 받았다.

그 중 6,723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4만 명 가량이 징역이나 금고를, 5만 명 이상이 공민권박탈형을 받았다.

고등법원에서도 필리프 페탱과 피에르 라발 등을 비롯해 정부고위인사들에 대해 108건의 공소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형선고자 6,723명 중 실제 사형집행자는 767명이었다.

108건의 정부인사들에 대한 공소에서도 42건이 면소로 처벌을 받지 않았고, 7명이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처벌 면제, 무죄가 3명, 재판전 사망이 8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정부요인은 공소 중 절반도 되지 못했다. 현실적인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재판은 응당 그 과정에 긴 시간이 소요되었고 더군다나 독일협력자들을 처벌해야할 경찰과 사법기구들이 바로 그 부역혐의자들이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가장 유명한 경우는 비시정부의 경찰총수로 5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체포해 독일로 보낸 르네 부스케였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1949년 뒤늦게 재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작 공민권박탈 5년형에, 그조차도 레지스탕스 행위를 핑계로 처벌을 완전히 면제받았다.

 

또한 재판과정의 비일관성과 불평등함도 문제가 되었다.

특히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은 강도가 높았지만 정재계에 대한 숙청은 비교적 미약했다.

이는 문인이나 언론인, 학자들은 그들이 작성한 글과 발표한 글들이 결정적인 부역의 증거가 되었지만

정계와 재계의 인사들은 부역의 근거를 확실하게 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레지스탕스 출신의 작가 장 폴랑은 이러한 현실을 보며

대서양 장벽을 건설했던(즉, 독일에 협력했던) 토목기사, 기업가, 석공들이 우리들 사이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제 대서양 장벽을 잘 지었다고 쓰는 잘못을 범한 언론인들을 가둘 새 감옥의 벽들을 짓고 있다고 비판했다.

1944년 10월에는 프랑수아 모리악과 알베르 카뮈가 신문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모리악은 관용을, 카뮈는 단죄를 요구했다.

 

 모리악.jpg 카뮈.jpg

좌-프랑수아 모리악 / 우- 알베르 카뮈

둘 모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나치에 저항했던 프랑스의 대문호들이다

 

재미있는 점은 단죄를 요구하던 카뮈가 몇 달 뒤인 1945년 1월 신문 사설에서

"모리악이 옳았음을 알게 될 것"이라며 "우리는 자비심을 필요로 한다"고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1946년 8월에는 "프랑스에서 숙청작업이 실패했고 신용을 잃었으며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고까지 발언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 있었던 젊은 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반역죄로 사형(당시 36세)당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글이 실제로 사형당해야할만큼 중죄인지는 큰 논란이 되었으며

브라지야크의 능력을 아까워한 모리악이 사형을 면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에 서명한 59인 중에는 카뮈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탄원에도 불구하고 브라지야크는 1월 19일 사형선고를 받고 2월 6일 총살당했다.

 

청산작업이 얼추 마무리되자 뒤이은 논쟁은 사면 문제였다.

사면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은 1946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공민재판소가 청산의 소임을 마치고 폐쇄된 이후였는데

본격적으로 사면이 진행된 것은 1949년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의 당수 조르주 비도(레지스탕스 출신, 전후 프랑스 총리 역임)가

"잊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잊자"는 제목으로 신문에 글을 실으면서 부터였다.

그는 징벌의 시기가 지났으므로 살인, 밀고, 반역자를 제외한 사람들을 재통합시키자고 주장했고 이 주장에 드골까지 가세했다.

 

이에 따라 뱅상 오리올 대통령은 특사조치의 확대를 선언했고 여론조사 결과 찬성 60%, 반대 23%로 압도적인 여론이 사면조치에 찬성했다.

힘을 얻은 인민공화운동은 사면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사회당과 공산당 의원들이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1950년 12월 사면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으로 15년 이하의 징역형과 공민권박탈형을 받은 이들이 사면을 받았다.

1953년 7월에는 2차 사면법이 통과되었는데 이번에는 범위가 더욱 확장되어 공민권박탈형만 받았던 이들은 선고된 형량과 상관없이 자동사면을 받게 되었다.

국민부적격죄에 따른 공민권박탈형은 이로써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

독일협력 공무원이나 군인들도 모두 사면되었고 비시정부에 관여했던 정치인들에 대한 피선거권 박탈 조치도 2차 사면법을 통해 사라졌다.

 

이런 사면의 확대 과정에는 냉전의 심화라는 대외적 요인도 있었다.  

전후 수립된 프랑스 제4공화국은 중도 우파인 인민공화운동과 사회당, 공산당 이렇게 3당의 협력으로 정부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즈음 미국은 마셜플랜을 통해 유럽국가들을 지원하려고 했고 누구보다도 프랑스는 전후복구를 위해 막대한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 정부 내의 공산당의 존재를 미국이 꺼려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미국의 지원을 얻기위해 내각에서 공산당이 축출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그 대가로 막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자연히 정치, 사회, 노동 등 문제에서 공산당에 의한 투쟁활동이 활발해졌고 냉전으로 인해 좌익과 소련에 대한 불안이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2년에는 비시정부에 참여했던 앙투안 피네가 프랑스 제4공화국의 총리가 되기도 했다.

 

점차 비시정부는 레지스탕스 신화라는 만들어진 기억과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 프랑스 역사의 상처이자 예외적인 존재로 망각되어 갔다.

프랑스인들 스스로도 그 당시 비시정부를 묵인했던 자신들을 공론장으로 다시 끌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협력.jpg

프랑스경찰과 나치친위대

 

 

벨로드롬 디베르 대검거(La Rafle du Vélodrome d'Hiver), 일명 벨디브(Vél d'Hiv) 사건은

1990년대 초까지만해도 유대인 단체들이 주도하는 유대인 위주의 기념식일 뿐이었다.

 

벨디브 사건은 1942년 7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파리와 파리 인근 교외에 살던 유대인 13,152명이 검거되어 독일의 수용소로 끌려간 사건을 말한다.

검거 후 가장 많이 유대인을 모아놓았던 장소가 파리의 벨로드롬 디베르, 다시 말해 동계 경륜장이었기 때문에 벨디브 사건이나 벨디브 대검거로 불린다. 

당시 벨디브에는 4,115명의 어린이들, 2,916명의 여성들, 1,129명의 남성들이 수용되었었다.

벨디브에 있던 유대인들 중 독일에 끌려가 살아돌아온 사람은 100명이 되지 않았고 아이들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13,000명이 넘는 전체 검거 유대인들 중 전후 생존자는 400명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대규모 검거는 파리를 지배하고 있던 독일군이 아닌 프랑스 검경의 손에 의해 진행되었다.

파리지역 유대인 검거 작업을 위한 프랑스 경찰력 지원 요청을 비시정부가 승인하면서 4,500명 규모의 프랑스 경찰력이 투입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는 비시정부의 경찰총수였던 르네 부스케와 총리였던 피에르 라발, 나아가 필리프 페탱까지 연관되어 있었다.

 

1992년 6월 17일 프랑스 신문 '르몽드'에 '42 벨디브 위원회'라는 단체가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으로 하여금

프랑스 유대인 박해의 책임이 있음을 공식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잊혀져있던 이 사건이 프랑스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유대인을 박해하고 차별하고 독일로 보낸 것이 비시정부의 자발적인 행위였음을 인정하고

벨디브 50주년 기념식에 비시정부가 범죄의 책임이 있음을 대통령이 공식 인정할 것을 청원했다.

청원은 큰 호응을 얻어 한달 사이에 자크 데리다 등 저명한 학자들을 비롯해 수천명이 서명을 했다.

 

당시 여론의 호응에는 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재판이 무산되고 있다는 점도 원인이 되었다.

대검거를 위해 파리에 파견된 비시정부 측 경찰책임자인 장 르게는 사망으로 재판이 무산되었고

경찰총수 르네 부스케 역시 1989년 다시 공소가 제기된 상태였으나 프랑스 정치권과 사법부의 방해로 몇 년째 재판이 지연되는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1993년 6월 그가 살해당하며 르네 부스케 역시 재판이 무산되었다.

 

비시정부 당시 보르도의 치안담당으로 어린이 200여명을 포함, 1,600명 규모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는데 가담한

모리스 파퐁도 1981년 그의 죄가 폭로되어 1983년 고소 당했으나 1987년 재판이 기각되었다.

파퐁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1998년의 일이었다.

벨디브 청원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92년 4월 13일, 친독민병대 국장으로 레지스탕스와 유대인들을 처형하고 다녔던 폴 투비에가

항소법원에서 그의 행위는 반인륜범죄가 아니라며 면소판결을 받은 것도 여론을 자극했다. (다만 투비에는 이후 1994년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대검거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헌화하겠지만 책임인정은 거부한다고 밝혔다.

벨디브 사건을 주도한 것은 비시정부로 프랑스 공화국이 해명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미테랑의 대답이었다.

레지스탕스, 드골의 자유프랑스, 이후의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이 프랑스 제3공화국을 이었으며

프랑스는 비시정부와 관련이 없다는 종래의 입장을 반복한 것이다.

 

42 벨디브 위원회 측은 이런 미테랑의 발언에 대해 "프랑스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것에는 오늘날 프랑스가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1992년 7월 16일 처음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50주년 기념식에서 미테랑은 야유를 받았고 그는 기념식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논쟁이 끊이지 않던 차에 1942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에 미테랑이 페탱의 묘에 헌화한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이 폭발했다.

사람들은 극우 파시스트들의 헌화와 대통령의 헌화가 페탱의 묘역에 나란히 놓여진 점을 개탄했다.

사태가 격화되자 미테랑은 프랑스의 이름으로 비시정부를 규탄하겠다고 인정했고 벨디브 대검거 사건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미테랑은 이런 와중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범죄는 프랑스 공화국과 프랑스 국민이 아닌

부당하게 권력을 잡은 비시정부의 책임이라는 기존의 주장은 계속해서 유지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독일협력과 비시정부의 행위를 프랑스의 행위로 간주하는 것은 레지스탕스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찬동했다.

그들에게 비시는 일부 프랑스인들의 범죄였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것은 페탱이나 라발, 부스케가 아니라 자유프랑스의 드골과 레지스탕스 앙리 프르네, 장 물랭이었다.

이것은 비단 어느 한쪽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당 대통령, 절멸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은 유대인, 레지스탕스 출신들까지 광범위한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공유했다.

비시정부가 프랑스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결정한 것을 인정한다면 드골과 레지스탕스들이 반역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1994년 7월 17일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후 처음으로 진행된 벨디브 기념식에서도 미테랑은 다시 한번 침묵을 지켰다.

 

침묵을 깨고 프랑스의 책임을 인정한 것은 후임인 우파 대통령 자크 시라크였다.

그는 1995년 벨디브 대검거 53주년 기념식에서 독일의 범죄가 프랑스인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프랑스의 경찰들이 지도자들의 권한 아래에서 나치의 요구에 응했음을, 다시 말해 자발성이 있음을 고백했다.  

드디어 반세기만에 대통령까지 얽혀들어가며 전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던 사건이 겉으로나마 일단락 되었다.

벨디브.jpg


파리 벨디브 대검거 기념 추모비

"1942년 7월 16일과 17일에 13,152명의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 강제수용되고 절멸되었다.

이곳 벨디브에는 나치점령당국의 명령으로 비시정부의 경찰들에 의해

4,115명의 어린이들, 2,916명의 여성들, 1,129명에 달하는 남성들이 비인간적인 상태로 가두어졌다.

그들을 도우려고 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지나가는 이들이여, 기억하라!"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시작부터 난해하게 꼬인 실타래였다.

드골을 위시한 자유프랑스 세력은 전후 정계의 주도권을 레지스탕스 세력, 특히 좌익 레지스탕스 세력에게 넘겨주려 하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드골주의적 레지스탕스 신화가 만들어졌다.

비시정부는 불법적인 정부이고 프랑스인들 다수는 레지스탕스를 지지했으며 자유프랑스의 지원 아래 파리와 프랑스를 해방시켰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드골은 항독세력의 으뜸에 스스로를 위치시킴과 동시에 좌우를 막론하고 레지스탕스들에게는 불멸의 권위를 안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페탱이 제3공화국을 합법적으로 승계받았다는 사실,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페탱과 비시정부를 지지하고 협력했다는 사실은 잊혀졌다.

 

청산 과정 역시 초기의 초법적 사형과 이후 재판의 비일관성은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았고 많은 논란과 논쟁을 불러왔다.

비시정부의 경찰총수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반면 로베르 브라지야크는 자신이 과거에 쓴 글 때문에 총살을 당했다.

전후 냉전의 고착화와 좌경화, 소련에 대한 우려는 프랑스 사회의 불안을 자극해 사면이 본격적으로 논의된지 3년 만에 절대다수의 협력자들이 사면받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 공산당은 레지스탕스의 명성에 힘입어 이후로 장기간 제1야당의 지위를 누렸으나 내각에서는 배제당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비시정부와 그 치하의 프랑스인들의 행위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전통적 역사인식과의 충돌은 사회에 분열과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 흐름이 극적으로 터져나온 사례가 바로 벨디브 대검거 문제였다.

사회당 출신의 대통령은 물론이고 일부 유대인들과 레지스탕스 출신들도 프랑스 정부의 책임을 끝까지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 공화국이 스스로 만들어낸 신화의 굴레는 그렇게 강력했던 것이다.



 


참고 문헌



Henry Rousso, 이학수 옮김, 『비시 신드롬』, 휴머니스트, 2006.

Jacques Attali, 김용채 옮김, 『미테랑 평전』, 뷰스, 2006.

박지현,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책세상, 2004.

박지현, 『비시 프랑스, 잃어버린 역사는 없다』, 서강대학교출판부, 2013.

박지현, 「역사와 기억의 새로운 관계 - 영화로 본 "비시 프랑스"에 대한 기억」, 『서양사론』88, 2006.

박지현, 「비시 프랑스, 프랑스 공화정의 두 얼굴?」, 『프랑스사연구』22, 2010.
신행선, 「비시 프랑스 -민족혁명의 이상과 현실」, 『서양사론』79, 2003.

유진현,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과 모리악 - 카뮈 논쟁」, 『본질과형상』3, 2006.

이용우, 「프랑스 초기 레지스탕스의 비시-페탱 인식(1940-1942)」, 『프랑스사연구』25, 2011.

이용우, 「반유대주의와 국가적 협력-독일 강점기 프랑스의 유대인 박해」, 『서양사론』101, 2009.

이용우, 「超法的 숙청과 司法的 숙청-해방후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역사학보』181, 2004.

이용우, 「망각, 관용, 복권」, 『동국사학』48, 2010.

이용우, 「벨디브(Vel` d`Hiv)의 기념: 비시, 공화국, 프랑스(1992-1995)」, 『이화사학연구』48, 2014.


* 이용우 선생님의 글들은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라는 책 한권으로 묶여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그거 사보는 것을 추천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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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의 댓글

2018.04.17
잘보고갑니다
0
2018.04.17
@FcTlis
감사함니다
0
2018.04.18
언제나 좋은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0
2018.04.18
@Uzhitz
허섭한 글입니다...시간 때우기용으로 즐기십셔 ㅎㅎ
0
2018.04.18
프랑스는 알제리 식민지 문제로 사과하는것도 자국역사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는 병신나라임.
심지어 아직도 사과안함. 일본보다 못한 놈들이지
1
2018.04.18
@꼬북꼬북
???: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
0
2018.04.18
프랑스도 결국 완전히 칼로 도려내듯이 깨끗하게 청산은 못하고 공산화 반대라는 시대상황하에서 일부 청산으로 끝난거구나.
0
2018.04.19
@pepero
그런 한계가 있었죠.
청산은 처음부터 제대로 되기 힘들었던게 본문에도 썼지만 비시정부는 단순괴뢰정부가 아니었고
많은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프랑스를 개혁시킨다는 이상(?)으로 비시정부에 대해 묵인하거나 협력했습니다.
다양한 민족주의 우파 계열도 비시정부를 지지했구요.
4년 후 히틀러와 비시정부가 파멸했을 때
레지스탕스의 대다수를 점했던 사회주의계열과 공산주의계열은 자연스럽게 정치적 발언권이 커졌지만
우파는 드골파, 중도우파(인민공화운동), 페탱파 기타 등등 사분오열되어 있었습니다.
드골파든, 인민공화운동이든, 페탱파든 좌파에 대항하려면 청산의 족쇄를 길게 끌 수는 없다는 정치적 계산이 분명 있었죠.
어찌되었든 비시정부에 협력한 인사들, 그래서 처벌받은 인사들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범우파 집단이었으니까요.
0
2018.04.19
페탱은 프랑스 항복을 보불전쟁 2탄으로 봤었다 했던가.
0
2018.04.19
@문틈
늙은이 그냥 스페인에 있었으면 영웅으로 죽어 앵발리드에 묻혔을 것을...
0
2018.04.19
@Basileus
죽 잘맞는 파시스트 제자가 잘 봉양해줄 터인데 잘먹고 잘살다 뒈졌음 명예도 건사할 수 있었거늘... 그놈의 영웅심리 때문에ㅋㅋㅋ
0
2018.04.19
@문틈
ㅅㅂ 프랑코 ㅋㅋㅋㅋㅋㅋㅋ
0
2018.04.23
저 책들을 다 읽고서 이 글을 쓴거면 진짜 대단하다..
일단 그 유명한 프랑스 전후 숙청이라는게 결국 각 정치세력들의 다툼과 시대적상황(콩산화 와 심화되는 냉전)의 흐름에 의해 아주 복잡하고 짬뽕되 있었고 그런한계 때문에 청산과 그 과정들도 실상 그렇에 크-린 하지 못했다. 그 입장들은 아직도 매우 논란적이다.이거로 이해했는데
왜 유대인은 하수구 쓰레기통 샌드백이 되었어?
왜 유대인만 잡아도 조지려 함? 프랑스 뿐만아니라 당시 유럽이 좀 그런더 같은데 이유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1차대전 때 페탱의 업적과 1차 대전 전후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궁금합니다
0
2018.04.23
@PainkilleR
반유대주의의 뿌리는 중세까지 거슬러올라가며 그 자체만으로도 한 주제인데
문제는 제가 거기에 대해서는 깊은 지식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는 예수를 팔아먹고 죽인 자들의 족속이라고 인식되었고
고리대금업 등 중세 기독교사회가 죄악시 했던 일에 종사했으며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점 등이
반유대주의의 여러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죠.
사회에서 이질적인 집단은 배척받고 경멸당하기 쉽죠. 그게 폐쇄적이고 공동체적인 전근대사회일수록...
0
2018.04.23
@PainkilleR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하고 퇴위한 이후
프랑스 제2제정이 폐지되고 제3공화국이 들어섭니다.
제3공화국 시기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는데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1881년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사이에 삼제동맹을
1882년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사이에 삼국동맹을 맺음으로써 대륙에서 프랑스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죠.

그런데 영국을 자극하지 않고 식민지 확장에도 소극적이었던 비스마르크와 달리
새로이 독일의 카이저가 된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대양정책을 펼쳤고 비스마르크와 충돌,
결국 1890년 비스마르크가 수상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0
2018.04.23
@PainkilleR
이건 영국을 자극했고 프랑스에게 기회가 되었죠.
프랑스는 러시아에 막대한 지원을 하는 동시에 1891년 러시아와 독일에 대한 상호방위조약을 맺었고
1902년에는 이탈리아와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어 이탈리아를 삼국동맹에서 분리시킵니다.
영국과도 식민지 분쟁을 마무리하고 협력하게 되죠.
프랑스 해군이 지중해를, 영국해군이 영불해협과 유럽의 해안선을 담당하는 구도가 이때 만들어집니다.
이런 협력의 대상은 뚜렷했죠. 바로 독일제국이었습니다.

빌헬름 2세는 지중해와 아프리카로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지만 그의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 확대 시도는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가로막히고 프랑스의 지배권만 강화시켜주었으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발칸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을 든 것은 러시아를 영국과 프랑스 측에 협력하도록 만들었죠.
(범게르만주의 VS 범슬라브주의)

결과적으로 1912년이 되면 전유럽에서는 전쟁이 곧 닥칠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하게 되었습니다.
1912년 프랑스 정부 수반이 된 푸앵카레는 병역 기간을 3년으로 늘리고 러시아와 관계를 공고히 하는 등 전쟁준비에 힘썼고
실제로 1914년 세르비아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하면서 전유럽이 전쟁에 휘말려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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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Basileus
감사합니다! 센세이....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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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PainkilleR
마지막으로 페탱에 관련해서는
그가 똥별들과 달리 프랑스군을 단순히 소모품 취급하지 않고 진정 아꼈다는 사실과
여러 위급한 상황에서 소방수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네요.

1차 세계대전 1916년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공세에 프랑스군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전선을 지휘해 독일군을 방어하고 밀어낸 것도 페탱이었고
(베르됭 전투 기간 동안 독일과 프랑스 양군은 100만이 넘는 사상사를 발생시켰죠.)
이후 1917년 로베르 니벨 총사령관의 공세실패로 프랑스군이 갈려나갔을 때
그를 대신해 프랑스군을 수습하고 독일군을 막은 것도 페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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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http://m.dcinside.com/view.php?id=war&no=306187

이정도면 1머전 겪은 프랑스 사람들이 물고빨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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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A TNT
원수 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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