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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쟁중에 각성했다 00.행군

00. 행군


"야. 거기 미끄럽다."


?

 

툭! 하고 돌부리에 발끝이 살짝 걸린다. 발이 뒤로 쭉 밀린다. 어어- 하며 보이는 손을 잡는다.

 

"으이구- 조심하랬지?"

 

약간 고양이 울음처럼 앵알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거친 장갑을 낀 손의 주인을 바라본다. 살짝 쳐진 긴 귀, 빗겨 맨 대궁. 몸 곳곳에 달린 짧은 화살통. 한 12살즈음 돼 보이는 작은 키

 

"미끄럽다고 했잖아. 정신 차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중 한쪽 눈썹이 슬쩍 들리며 귀가 까닥인다.

 

"주의할게요. 롭."

 

롭은 내게 조금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써전트."


"..주의하겠습니다 써전트." 롭은 씩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몇 분인가를 더 오르막을 오르자, 앞서간 선임들의 거대한 등이 벽처럼 늘어 서 있다.
우리의 발소리를 들은 건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리막을 지나 평야 지대에 도달하면 숙영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꼭 살아남자."

 

그 말에 선임 중 몇 정도가 웃으며 너나 살아남으라거나 시대에 뒤처졌다며 웃어넘겼고 몇몇은 이번 전투를 마치면 술 한잔 사라는 둥 농담을 던졌다.
나는 선임들로 이뤄진 벽을 비집고 들어간다.
휘이잉-하는 찬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아든다. 저 산을 넘는 해가 눈 결정을 반짝여도 내 눈은 꽉 메말라 찡그려질 뿐이다.


눈을 비비고 산 아래 작전지역을 바라본다. 바스칼 절벽지대. 밖에서는 절벽이지만 안쪽에서는 언덕인 말도 안 되는 언덕이 마치 양파처럼 일곱 겹이나 둘러쳐졌고. 그 중심에 우뚝 솟은 고원 위, 드넓게 자리한 멜던성국의 본성 카야낙소르가 보인다. 지형을 따라 바람의 방향이 이리저리 꼬여있어 살도, 공중침투도 난해한.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다.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물론 나의 써전트일것이다. 롭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뒤쫒아오는 이퀄러들만 아니었으면 정말 보기 좋은 풍경인데. 그치?"

 

나는 퍽 건조한 입을 열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면. 올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자 롭이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때린다.

 

"어린 녀석이 완전 말라비틀어졌어!"


"키로 보자면 제가 형인데요?"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작은 손을 들어, 내 코를 찰싹! 때렸다. 날씨가 시려서인지 더 따갑다.


"나이는 내가 한참 많아임마!" 나는 조용히 코를 감쌌다. 너무 아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봤자 나보다 2살은 더 어려 보인다'는 입 모양을 가리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동작이었다.


"어이 수색! 얼른 안 내려와?" 아차. 선임들이 부른다! 나는 대답보다 얼른 뛰어 내려가길 선택했다. 어 물론..


"아 거 쪼지 좀 마십쇼! 전쟁 하루이틀인가 씹빨!" 롭은 표정을 구기며 말을 했지만.

 

그래도 혼나는건 나다. 나름 전력을 다해 뛰어도 롭보다 느리니까. 롭은 휙 스쳐 지나가며 빨리 오라고 나를 재촉한다. 젠장 내가 7년만 더 컸더라면.. 일단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다.

 

"아아-앗!"
"기동 중에 소리 지르지 마라. 꼬맹2호. 소리지르려먼 더 빨리 이동하던지."

 

숙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

 

 "지오." 누군가 내게 속삭인다. 건조한 공기. 차갑다. 어둡다. 여긴-..

숙영지..! 정신이 번쩍 든다. 이렇게 깊이 잠이 들다니.

 

 "수색2번 지오입니다. 톰."

 

토미는 커다란 손으로 내 이마를 툭툭 두들긴다.

 

 "졸리면 좀 더 자도 좋아."

 

텐트 밖의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 그의 미소를 비춘다.

 

 "아닙니다. 멀쩡합니다."

 

토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어깨를 툭툭치곤 천막 밖으로 나갔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지 뽀드득한 소리가 천막밖을 서성인다.

손을 들어 몸을 더듬어 본다. 먼저 갈비뼈를 따라 걸린 투척 단검 8개, 머리맡의 아밍소드, 옆에 떼어둔 투척 도끼 두 자루.. 좋아.
무장을 확인한 후에 가죽으로 덮인 방한 도구를 대충 걸치고 천막을 나선다.
토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특이사항 없다고 전하며 오른손등을 들어보이고는 자신의 텐트로 걸어갔다. 정 피곤하면 깨우라는 토미의 말이 멀어진다.

 

.
.

 

탁...타닥.. 작게 타는 모닥불 소리가 들려온다. 노란 모닥불. 주변에 둘러놓인 굵은 통나무.
그 위에 걸터앉은 그리즐리 베어 같은 덩치. 통나무에 기대어진 거대한 전쟁 망치.. 내 사수는 단장님이었다.
단장은 아무 말이 없다. 그저 긴 막대기고 모닥불을 말없이 뒤적일 뿐이었다.
나 역시 할 말은 없으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스치고 부딪히며 눈이 쏟아지는 소리만이 주변을 둘러싼다.

 

 "몇살이라고 했었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진한 녹색이었고, 가로로 넓은 코와 짙은 눈썹이 약간 찌푸려져 있었다. 고동색에 가까운 피부. 주변을 맴도는 어둠속에서 점점 깊이 찡그려지는 얼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열 세살입니다. 단장."

 

단장은 아 하는 표정과 함께 도톰한 입술을 다물었다. 각진 턱, 단검으로 대충 자른 수염.. 그를 이룬 모른 요소들이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그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썹들이 대단히 낯설었지만, 이제는 그가 얼마나 잔정이 많고, 용병 단원들에게 진심인지 알고 있다. 말끝에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와 크고 작은 흉터들은 그가 지나온 전장과 승리를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그에게 어쩌다 용병 일을 하게 됐는지 물어보았다.


단장은 불침번 중에는 그냥 므로슐이라 부르라며 등을 토닥였고, 충격에 울리는 나의 등과는 별개로 그는 말을 시작했다.

 

 "이 일을 결심한 날이라. 음... 아주 까마득한.. 밤. 이었지."

 

그는 후- 숨을 뱉고는 꺼져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썩 아름다웠어. 그래. 바들레오스의 허리띠를 따라 별빛들이 흔들리고 있었지. 나의 그녀. 다프네.. 그녀의 금빛 머리칼과 살구색 눈동자는... 아직도 선하군."

 

그는 오른손을 들어 코를 쓱 비볐다가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중지가 한마디 부족한, 두꺼운 그의 오른손 위에는 데이고 찢긴 흉터들이 보인다. 그는 그 손을 무릎 위에서 몇 번 들썩이다 주먹을 말아쥐곤 다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미소를 볼 수 있던 것도 그날이 마지막이었지. 딱 지금과 같은 하늘..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던 것을 빼고 말이야. 먼 곳에서 들리는 함성소리는 점점 커지고. 하늘은 점차.."

 

그는 그날 벌어진 전쟁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 아름답다던 다프네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까지도.

 

팍! 거칠게 모닥불을 헤집는 왼손과 입술이 얇게 떨렸다. 그는 두어 번 숨을 나눠 삼켰다가.

후..- 숨을 벹는다 그의 눈동자는 다시 깊게 가라앉았다. 되살아난 모닥불을 보던 그는 시선을 내게로 돌린다.


나는 므로슐을 바라보며 오른쪽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가 툭 떨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팔려 온 거죠 뭐. 어느날 일어나 보니-......"

 

뻔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졸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러다가 문득 머나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말이 멈추고, 므로슐은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

 

ㄱ략--ㅀ-!

 

 썩은 가래가 끓는듯한 소리. 경계 방향 너머 약 200온타스. 규모는… 너무 많다. 단장을 바라보자 시선이 얽힌다.

 

 "방어선 너머 약 200온타스. 군단 이상입니다. 우리의 위치를 확신하고 있고.. 이퀄러. 전원 이퀄러 무리입니다."

 

단장은 혀로 입천장을 긁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전투 망치를 잡으며 나를 바라봤다. 

 

 "..다음에는. 어찌 그리 귀가 밝은지부터 물어보고 싶군."

 

그는 곧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불침번-! 불침-번!! 전원 기상시켜라! 방어선 너머 200온타스(약 30km)! 규모 미상의 적 고속접근 중이다! 전달해!"

 

각자 천막 앞에서 반쯤 졸던 불침번들이 바짝 고개를 들며 텐트안에 들어가 기둥을 발로 찬다. 꽁꽁 언 땅에 단단히 박힌 나무 기둥이 요란하게 넘어진다.

 

 "기상! 기상! 199온타스(약 29,850m) 남았다! 어서 일어나!"

 

천막마다 한 명씩 뛰쳐나와 횃불을 받아들고 소리치며 불침번과 함께 넘어진 천막을 접었고. 막 깨어난 용병들은 분주히 무장을 확인하며 방한 도구가 들어있는 가방을 챙겨 나왔다.

 

준비를 마친 모두가 나와 단장이 앉아있던 모닥불 인근으로 모여들었을 즈음, 나는 준비를 마치고 다가온 롭과 함께 절벽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온 절벽이 울리며 나무들이 몸을 떨어 쌓인 눈을 털어냈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협곡을 앞둔 넓은 평지 곳곳이 밝아져 올 때 즈음, 용병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야. 너 시간 많냐?"

 

불쑥 들려온 롭의 소리에 아닙니다! 라고 답하며 열심히 언덕을 달려 오른다.


 

1개의 댓글

2023.12.25

글이 너무 무거운지, 전개가 이해 안되는부분이 있는지 등 뭔가 찝을거 있으면 찝어줘 혼자짱박혀서 쓰는게 정답이 아닌것같아서 ..한마디 남겨주면 정말 고마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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