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라디오



“라디오?”

“예 그러니까.. 이 라디오라는 것은 신문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기존에 장거리 항해사들의 연락수단이었던 전파통신을 이용한 기술으로서… 그러니까 쉽게 말해… 신문을 읽어서 들려주는 겁니다.”

“신문을 뭐하러 읽어주나? 그냥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

“에 그러니까…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글을 읽지도 못하는 무지렁이들이 신문을 왜 듣고자 하겠느냔 말일세.”

“그게 그러니까…”

“또, 어느 지식인이 글을 쓰지 않고 말로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려 하겠느냐 말일세. 얼굴도 나오지 않고 이름도 나오지 않는 그저 목소리만 나오는 기계에서 나오는 말을 신뢰할만한 멍청이는 또 어디 있겠느냔 말이야! 무치, 이 멍청한 양반아. 신기한 물건 만드는 건 박람회장에서나 하게, 제발 뭔가를 만들 때는 그걸로 어떻게 돈이 될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란 말일세! 바쁘니까 이만 나가보게!”

“하지만 이번 발명품은 반응도 좋은데다가…”

“그래, 자네는 유능한 엔지니어야. 나도 그 점은 인정은 하네, 하지만 팔 수 없는 기계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겠냔 말야. 박람회에서 박수 받으라고 내가 연구비를 투자하는 게 아니란 말일세… 알겠는가?”

“....예"


힘없이 문을 나선 무치의 심정만큼이나 힘없이 문이 닫혔다. 참담한 기분만큼 문에 매달린 큰 유리도 참담한 소리를 냈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무치, 마도공학 엔지니어이다. 그의 스승이었던 마르코니의 제자들 중 그만 변변찮은 발명품이 없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항상 누군가에게 도둑맞거나, 특허 신청에서 밀리거나, 시장성이 없다고 반려당했다. 오늘도 그 세 가지 중 하나가 반복되는 전형적인 안토니오 무치의 날이었다. 참담했다. 실력이 없고 할 수 없다면 예저녁에 포기했을 텐데, 실력도 있고 할 수 있는데 되지를 않는다. 업적은 많은데 업적이 되질 않는다. 딱히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나에게는 왜 이런 일만 생길까…


디오티(Dioti) 기업 본사 정문을 나선 그는 무너지듯 근처 벤치에 앉아 깊은 한숨으로 머리에 쌓인 시름을 토로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너무 지친다… 발명가는 무슨… 스승님의 제자는 무슨… 그냥 아무 마도공학회사에 취직해서 설계도나 그리다 죽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던 도중, 한 허름한 양복 차림의 사내가 그 앞에 섰다.


“무치씨?”


무치는 시름으로 탁해진 시야를 걷고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큰 덩치에 매우 굵은 인상의 사내였다.


“비온 어뷰즈(Beon Abuse) 라고 합니다. 비온이 성이죠.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은 무치는 아무 반응 없음으로 동의를 표했고 비온은 조용히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무선 송신장치를 연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리고 싶은 장치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비온은 속주머니에서 어떤 서류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무치에게 건넸다. 멍한 무치가 서류를 받아들지 않자 비온은 받으라는 듯 서류를 그에게 쿡 찔러넣었다.


“저는 아세오르 자유청년연맹이라는 걸 이끌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마도혁명 시대에 변화할 사회를 대비하는 세력을 키우고 있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저희의 뜻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간을 건너뛰어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말처럼 효과적으로 사람을 울리는 수단은 없으니까요.”


무치는 그제서야 이 남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사내가 건넨 요구조건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개별화된 수신장치는 최대한 단순한 구조로 해서 싸게 공급할 수 있도록 하고, 송신장치는 좀 번잡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하나의 목소리를 여러군데에 전달하는 것이 목표니까요.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저희가 현재 자금이 넉넉하지는 않은 편이지만… 앞으로를 보고 투자하신다고 생각해주시고 개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상황이 어려우신 건 저희도 잘 알고 있으니 무리한 부탁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얼마나 기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3개월.. 3개월만 시간을 주시오.”

“네? 그렇게나 빨리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닙니다. 핵심 기술은 이미 다 나와 있는 제품이니까요… 다만 설계도도 그려야 하고… 테스트도 해봐야 하고… 혹시 선금도 줍니까?”

“예… 1만 우롱 정도 준비했습니다만…”

“그거면 됩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걸 보면 제 사무실 위치나 연락처는 아시고 계시겠죠?”

“네… 근데 정말 그거면 됩니까?”

“이래뵈도 무선기술의 거장 마르코니의 세번째 제자요. 내게 무선기술 관련해서는 어려움은 없소. 곧 연락 주겠소.”


무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힘찬 발걸음으로 비온을 떠났다. 적당히 멀어진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무치는 씨익 웃으면서 나지막히 말했다.


“한 2개월간 여행이나 다녀와야겠군.”


# # #


3개월 후.


“무치 이양반 진짜…”

비온이 무치가 열어준 시설을 보고 말했다.


“어마어마한 기계를 만들었군.”

“어마어마하다마다! 이제 모든 아세오르 사람들이 이 기계를 통해 세상사를 공유하게 될 걸세!”

“내일부터 시험방송 할 수 있다고 했지?”

“그럼! 이미 공장에서 수신장치는 양산도 시작했다네. 라디오라고 하는 거지.”

“라디오라… 그게 기술 이름 아닌가?”

“이름은 단순할수록 좋은 거지.”


송신장치에 대해 설명을 장황하게 하던 무치가 문득 생각난 듯 비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방송할 역사적인 내용은 뭔가?”

“잠시 후에 회의를 시작할텐데, 그때 같이 참석하시죠. 저희 소속 소식꾼들이 안그래도 곳곳에서 소식을 몰아온 상태입니다. 일단은 화젯거리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렇구만, 생각보다 음파 변조기능이 뛰어나서, 음악 같은 것들도 전파가 가능하다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그런 것들이니까, 그 쪽도 한번 알아 보게.”

“언제 그런 것까지 생각해 두신 겁니까?”

“.... 인생의 경험이라고나 할까…”


무치는 디오티사에서 시장성 때문에 호되게 깨지던 나날의 자신을 잠깐 떠올렸다.


“이런 걸 못 알아보고 말이야.. 멍청한 디오티 사장 같으니.”

“네?”

“아닐세. 그나저나 첫 방송 회의라니. 감격스럽군"

“비온님! 소식꾼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럼 들어가 볼까?”


허름한 지하실에 먼 길을 온 여행자들이 열 명 정도 모여있었다. 몇 명은 신문사에서 온 듯 기자 신분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비온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동안 소식들을 모아오느라 수고했네. 첫 방송회의라는 역사적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네. 아 방송은 이 무치님께서 만드신 용어로 널리 놓아 보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네. 새로운 기계에 걸맞는 새로운 용어지. 자네들이 모아온 소식을 세상에 놓아 보낼거란 얘기일세. 흥분되지 않는가?”


피로에 쩌든 소식꾼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의사를 온 얼굴로 내비치자, 비온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가장 큰 사건은 뭔가?”

“뭐니뭐니해도 오늘 가장 큰 사건은 안펙 공장 폭발 사건이죠.”


제오노르 지방에서 온 소식꾼이 말하자, 비온이 안다는 듯 되물었다.


“아 그 사건 오늘 뉴스에서 이미 다루지 않았나?”  신문사에서 온 듯한 기자가 말을 이었다.

“메소기업에서는 초동조치 완벽했고 사상자는 없었다고 보도자료 냈는데?”


제오노르 지방에서 온 소식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박했다.


“그게 그게 아니랍니다. 엄청난 인원이 죽었답니다. 듣자 하니 그날 견학 왔던 인근 고급학교 학생들도 죽었다는데요?”

“그게 사실인가? 우리 신문사는 메소 보도자료대로 기사 냈는데?”

“그냥 들리는 소식은 그렇습니다.”

“들리는 소식이라니! 무책임한 소리 말게! 이래서 정식 기자가 아닌 사람들이란..”

“기자님처럼 보도자료 주는대로 써내는 사람들은 할 말 없는 것 같은데요?”

“뭐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현장은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주필이랍시고 내는 기사의 출처가 사건 당사자 보도자료라는게 신빙성이 있느냔 말이죠"

“그럼 출처도 없는 유령같은 소문을 보도합니까!?”

“그건 그렇지만…”


보다못한 비온이 둘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 시험방송할 주제는 확실하게 정해진 것 같네요. 기자분들은 메소측에 확인요청 한번 넣어주시고, 제오노르 지방 담당 소식자분께서는 오늘 밤 기차로 사고지역 가셔서 취재좀 부탁드립니다. 각자 정리해온 소식들은 여기 담당비서에게 제출해 주시구요, 일단은 공장 폭발 사건에 다들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닌 밤 중에 추가근무 외근 하게 생긴 소식꾼 낯빛은 먹물처럼 새까매졌고, 짜증과 의구심이 뒤섞인 듯한 표정의 신문사 기자들은 저마다 흩어져 전화기를 찾았다. 비온은 폭발사건을 조사한 소식꾼에게 몇가지 추가 정보를 물어봤고, 정리된 자료를 받아들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신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모양입니다.”

“신께서 도우시다니!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게 할 말인가?” 너무나도 급작스런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진 무치는 당황스럽게 얘기했다.


“아니 아니.. 그런게 아니라.. 으흠.. 아무튼 엔지니어님 발명품은 이번 사건으로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게 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죽음을 이용해 버는 돈이라니 나는 탐탁치가 않네.”

“그래도 보십시오. 사상자가 없었다고 보도를 내는 메소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자기들 공장이 폭발했는데! 보십시오, 이제 이 발명품으로 인해 세상의 진실이 드러나고 세상도 바뀌게 될 겁니다!”


비온이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고, 순간 말문이 막힌 무치는 복잡한 심경으로 막힌 수많은 말문들을 얼빠진 얼굴로 붙들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본 글은 실제 인물 및 단체와 무관하며 여러분이 떠올릴 수 있는 연관성은 순수한 우연임을 주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개의 댓글

2014.06.30
멍청이들의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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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30
왤케 현실성있지..ㅋㅋㅋㅋㅋ판타지쪽이아니라 정말 산업혁명배경 읽는 기분이야 이름때문에 더그런가..나쁜뜻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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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역시 재밌네.

나도 예전에 고딩때 이거랑 비슷한 세계관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4화까지 쓰고 버렸는데. 이거보니 다시 떠오르네.

세계관이 짜임새가 있어보여서 정말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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