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붓으로 그린 별똥별 1

길 잃은 숲 속에서 고개를 들어 본 밤하늘.

붓을 빛에 살짝 담갔다가 휘갈긴 아름다운 광경.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붓을 꾸욱 눌러 그린 커다란 빛 하나.

황홀하게 아름다운 빛이 밤하늘을 채웠고 나에게 도달했을 때 나를 가득 채웠다.

더 이상 길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사람들은 빛으로 가득찬 나에게 다가왔으니까.

 

밤 지상에는 오늘도 별이 수놓고 있다. 보는 내가 설레고 질투할 정도로 아름다운 별이 가득하다.

축제가 한창인 이 시각. 창문 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연인들을 구경한다. 서로 팔짱을 낀 그들의 가슴은 분홍색 별을 품어 자신의 사랑이 더 큼을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 별이 지금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으니 이번 축제도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이겠지. 아쉽게도 이번 축제도 참여를 하지 못해 저 은하수에 끼지 못한다. 그저 하나의 행성으로써 그들 주변을 맴돌 뿐이다. 내가 ‘빛을 잃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많다. 선천적, 후천적인 이유로 빛을 잃은 사람들인데 희박하게 아예 얻지 못하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투, 사고, 질병 등의 이유로 심장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빛을 잃은 사람들’은 ‘ 비츠’(’아른’이라는 마법에너지를 이용해 특별한 물질을 공중에 그리는 행위)를 사용하지 못해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 되거나 다른 마을과 교류하며 물건을 내다 파는 상인으로써 마을구성원의 역할을 해낸다. 다만 나는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빛이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다. 미안하다. 쉽게말해 나는 빛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다. 일반적이라면 심장이 ‘아른’(이 에너지는 공중에서 붓을 매개체로 공중에서 입자화하고 빛을 발하며 사라진다. 에너지 자체에서 감정에 따라 바로 빛을 발하기도 한다.)을 생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아까 축제에서 보았다시피 분홍 별들, 그들 심장의 아른이 ‘사랑’을 느끼면서 표출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왜 아른을 만드는데도 표출하지 못하느냐. 왜인지 나는 아른을 머리에서 만든다.

당신이 타지역사람이라도 얘기는 들어봤을 것이다. 별똥별에 맞은 전설의 아이가 있다고.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은 저주였고 그 아이는 평생을 빛나는 얼굴 반쪽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음. 그게 나다. 이 반쪽 얼굴에선 빛이난다. 그것도 과하게. 어떤 학자는 내게 신이 깃들었다고 얘기한다. 아마 전설에 나오는 우리 비츠의 근원인 바르가 때문일 것이다. (이건 당신도 알고 있는 내용이니 넘어가겠다. 궁금하면 주변 어른에게 물어보도록 해라.)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가두기로 했다. 이 일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이고 당신은 들으면 아마 눈물이 날것이다. 어쩌면 공감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아, 모르겠다. 당신이 누구가 되었든 이걸 읽으면 나라는 인간이 있음을 기억해 줘라. 그럼 이만

-아나나비야-

 

길거리에 떨어져 있던 종이를 줏어 한 남자가 읽고는 품 속에 넣었다. 그의 이름은 강리오. 평범한 마을청년이다. 무슨 의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종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만은 느껴졌다. 집에 도착한 리오는 본인의 오래된 나무 의자에 앉아 빨간색과 하얀색 체크무늬 보자기가 깔린 테이블 위 등불에 불을 붙이고 편지를 다시 펴보았다. 하늘하늘거리는 불꽃에 편지의 내용도 같이 흔들리고 있지만 내용은 확실하게 읽혔다. 이 소년이 어릴 적에 같이 놀았던 추억을 가지고 있던 것이 이유일까. 주변에서는 저주를 받을 지 모르니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것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고. 앎에도 사람들은 몰라야만 한다는 듯이 모른척한다. 수도의 간섭이 그만큼 두려운 것 일거라 생각했다. 이해는 한다. 주변 마을과도 동떨어져 있는 시골마을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그닥 기뻐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수도에서 한번 행차하면 장군과 병사들, 직접 보러온 대신들을 위해 한상을 차려서 대접하고 떠날 때 까지 수발을 들어야 했으니 누가 좋아하겠나. 하지만 비범함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당장 편지만 보아도 이런 아름다운 일필휘지가 없다. 곧 그 아이가 스스로 비츠를 깨닫는 날은 머지 않아 곧 다가올터. 나는 그 때 무얼 할 수있을까…

 

소년과 소녀는 한 남자가 편지를 주워가는 것을 보았다. 아나나비야의 옛 친구들. 이 날은 그저 평범하게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고 용돈 몇푼을 받아 가게로 가는 길이었다. 소년은 마을 중앙 바위로 쌓은 1층 높이 지지대 위로 나무로 뾰족히 세운 첨탑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당장 말햇다. 소녀는 그 얘기를 듣고 직감했다. ‘아나비다!’, 소녀는 당장 그것을 줍고 싶어했으나 행운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남자가 그것을 줍고는 글쎄 홀랑 가져가버렸다. ‘아니 저걸 왜 가져가지?’, ‘혹시 이장님한테라도 보여주면 괜히 큰일나는거 아니야?’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서 그들은 한 밤중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거리에서 갈색 돗자리와 간단한 녹색 천막만 나무막대기로 고정해 설치하고 장사를 하고 있던 한 묘령의 나이를 가진 여자는 아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시선 끝에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무언가를 읽더니 그대로 가지고 가니 아이들이 푸욱 기가 죽었다. 후에 쑥덕거리는 모습이 재밌었던 여자는 안되는 장사 때려치고 아이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다가 갈라질 때 여자는 소녀에게 접근했다. ‘안녕! 아까 시장거리에서 너흴 봤는데 뭔가 재밌는거 꾸미는 것 같더라? 언니가 도와줘도 될까?’ 누가봐도 의심스러웠다. 소녀는 놀라 뛰어가다가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구! 얘야 미안해!’ 덩달아 놀란 여자도 뛰어가자마자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에서 풀을 꺼내 이빨과 돌로 짓이기더니 상처 위에 발라주었다. ‘이거는 빛로아 나무 이파리야. 이걸 상처에 바르면 약간 따가워도 흉터없이 금방 나아. 내가 놀라게 했구나 미안해. 내 이름은 고에아야. 저기 시장에서 잡초 같은 거 파는 사람 본 적있어?’ 소녀는 그제서야 얼굴을 알아본 듯 울먹거리며 맺힌 눈물과 반대로 입가를 올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막 언니가 훔쳐보고 그런건 아닌데. 언니가 그 남자 집 어딘지 알아. 아마 걔 내 친구일거야!’ 소녀는 금세 기운을 되찾고 눈이 반짝반짝해져 쫑알쫑알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남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뭐하는 사람인지, 혹시 이장님하고 친한 사람인지, 본인들이 누구의 친구인지도 사실 궁금하지 않은 것 까지 모두 말했다. 에아는 어차피 이장님은 다른 마을에 일이 있으니 밤에 천천히 하자고 말을 끊고 진정시켰다. 그래도 소녀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날 밤 에아, 소녀, 소년 세명은 은빛 달 아래 모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장한 표졍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세명,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표정 그게 뭐야 웃겨!’ , ‘야! 너가 더웃겨! 하하하하하!’ 한참을 웃다가 다시 정신차리고 정색을 한 세명, 에아가 작전을 설명한다. 둘은 금세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아이들은 크게 골목을 돌아 집 뒤편으로 향했다. 여자는 집 앞에 있던 우물 뒤에 몸을 숨기고 아이들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소녀는 뒷편에 도착하고 바닥의 돌을 주워 열린 창문 틈새로 던졌다! …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그게 아니라며 본인이 돌을 줍고 던졌다! ‘빡!!’…’쿵’ 소년의 눈알엔 지진이 일어났다. 집안에서 난 소란에 여자는 급하게 들어갔다. 앞으로 쓰러져 침대에 한쪽팔만 거치고 있는 남성의 몸이 있었다.여자의 눈알엔 지진이 일어났다. 우선은 긴급히 아이들을 불러 할일부터 하라고 하고 여자는 남자를 침대에 눕혔다. 귀를 가슴에 갖다대니 다행히 살아는 있다. 숨도 제대로 쉰다. 편지는 책상 위에서 바로 찾아서 이제 도망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야 하는데 리오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에아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묘한 긴장감. 기절해 초점을 잃은 리오의 눈을 보고 생각했다. ‘리오야… 내가 미안하다…’ 차마 이러고 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보내고 여자는 남아 집정리를 하고 이마 상처를 치료하고 곱게 눕힌 다음에야 떠날 수 있었다. 리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뜨고 시장은 시끌벅적했다. 왜인지 집안은 깨끗했다. 책상 위도 바르게 정리되어있었다. 단 하나, 편지만 없었다.

날이 밝았다. 한 밤중의 소동은 끝이나고 새로운 하루의 시작. 누군가는 반나절을 영혼없이 누워서 보냈지만 뭐 어떠랴. 아이들은 편지를 마귀의 손에서 뺏어냈다. 소녀와 소년은 갈림길 사이 숲 속에 몰래 표시해둔 표식을 따라가면 보이는 아지트로 돌아갔다. 이제 아나비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이제서야 아나비의 편지를 읽었다. 그의 외로움과 바깥세상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같은 또래라고 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필체가 눈을 끌었다. 몇 분을 집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크소리에 정신이 깨서야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얘들아 안에 있는 거 안다.”

어제 그 남자다! 아지트는 소년, 소녀 둘 밖에 모르는 장소인데 어찌된 일이지… 큰일났다. 어제 일이 생각나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둘은 입을 틀어막고 숨어 안에 없는 척을 했다. 문이 쾅쾅쾅 소리를 낸다. 온 실내를 가득채우는 파동에 심장 박동이 같이 울렸다.

“얘들아… 나와… 이미 다 말했어…”

앗! 이 목소리는 에아의 목소리. 아이들은 이럴줄 알았다며 옥신각신 다투다가 그만 어두운 실내를 밝히려 켜둔 등불을 깨버리고 말았다. 결국 들통난 둘은 문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대면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이 초조하고 손이 절로 앞으로 모아지는 게 크게 혼날 것 쯤은 알고 있던 모양이다. 리오가 결국은 문을 열어 안을 밝혔다. 아이들은 무서운 짐승이라도 본 것 마냥 구석에서 둘이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글자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방안을 가득채우는 밝은 빛. 편지를 중심으로 하얀빛이 퍼져나오더니 이내 스스로 여러갈래로 갈라져 이 세상 모든 색깔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세밀하고 정교한 감정들이 글자 속에서 우러나왔다. 온갖 사랑과 슬픔, 분노, 기쁨, 역겨움, 공포, 그리움, 화, 짜증이 한 곳에 섞여서 본인의 감정 모든 것이 방 안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따듯하면서도 차갑고 부드러우면서도 따가운 빛이 아나나비야의 억눌린 감정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심장 근육을 꽉 쥐어 답답하게 만드는 그리움이 있었다.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친구에 대한 그리움, 그는 갇히고 나서 지금까지 쭉 혼자였다. 감정이 깊은 속에서 발생하더라도 다시 자신의 속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처참한 상황이 상상된다. 눈물이 흘렀다. 미소를 지었다. 화를 냈다. 끌어안았다. 그가 우리를 그리워하는 만큼 우리도 그가 그립다. 아나비의 응축된 감정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은 리오를 껴안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그…그래 안녕.”

이리도 어색할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한쪽은 공포에 빠져있었고 한쪽은 미지의 괴물이었는데 지금은 친구가 되었다. 친구라고 하기엔 아직 어색한데 친구다. 묘한 친근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본인들이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야기를 했다. 리오는 자신의 허리쯤 오는 키를 가진 아이들을 보면서 화가 났지만서도 친구를 위해 했다는 것에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밖에 없었다. 똑같이 아나나비야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잘못한 일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는 법.

“그래도 혼나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아. 너희가 제 아무리 옳은 결과를 위하더라도 그 수단은 결코 ‘그른 것이어도 괜찮다’ 합리화를 해서는 안돼. 선을 위한 선, 선을 위한 악에 선택권이 있다면 당연히 선을 위한 선을 골라야지 너희는 충분히 선택할 수 있었어. 나와 대화해 볼 수 있었지. 특히 얘가 너희한테 갔을 때 말이야. 물론 얘도 잘못이고 말이야.”

리오는 뒤를 돌아 에아를 째려봤다.

“너는 어른이 되서 애들한테 뭐하는 거야? 나 하나 놀리자고 애들을 잘못된 길에 빠뜨리고 잘하는 짓이다. 어휴…”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아니면 그 아이의 마음이 대신 둘을 이어준걸까. 분명한건 그 빛은 생각보다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츠로써 구체화된 아른은 물리적인 영향 밖에 끼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 우리의 감정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였다. 이전 수 많은 경험이 떠오른 리오는 불안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어? 아저씨 가슴 빛나요!”

리오의 중앙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가슴팍에서 빛이 살결을 뚫고 선홍빛과 보라빛을 오묘히 섞어서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예전에 빛을 잃었을 텐데…?”

아이들도 마찬가지 갑자기 아른이 가슴에서 솟아나 각기 다른 감정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홍빛깔, 노랑빛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아른의 느낌. 그리고 이제서야 사람들이 가슴덮개를 입고 다니는 이유를 확실히 알게되었다.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것은 꽤나 부끄러웠다. 투명한 유리창 앞에 서서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너무도 부끄러우면서도 왜인지 후련한 마음이다. 그에 반면 어른들은 썩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어른에게 솔직하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특히 요즘같이 전운이 감도는 시기라면 말이다.

“기쁜 색은 없네? 오랜만에 빛내는 건데 말이야.” 에아가 한 마디 거들었다.

“기쁘긴 무슨… 이깟 빛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명이고 차별받는 사람이 몇명인데…”

“어머? 너가 속죄하면서 사는지는 몰랐네?”

리오는 조용히 눈을 깔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왜 이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또 전장을 이리 환히도 밝히는가. 조용히 있고자 하는 건 쌓은 업보에 맞지 않는단 말인가. 과하게 시무룩해진 리오에게 에아는 미안했는지 다시 말을 걸었다.

“리오야. 널 괴롭히려 한 말은 아니야. 지난 것들은 너의 잘못이 아니잖아. 세상 위를 흘러가다 어쩌다 마주친 바위에 튕겨진 것 뿐이지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면 일부러 바위를 그 곳에 둔 인간들이잖아?”

“하지만 내가 한 일은 사라지지 않아. 그 환한 빛 속에 있으면서도 눈에는 전혀 빛이 없었어. 오히려 깊고 짙은 그림자가 우리를 잡아먹었지. 그래서 빛을 잃었을 때 나는 기뻤어. 이제 빛에 의한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제와서 다시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내가 아는 것은… 피를 흘리게 하는 것 밖에 없으니까.”

저 멀리 아이들이 흥분해 뛰어다니다가 멈추더니 금세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저씨… 다시 잃어버렸어요…”, “줬다 뺐는게 어딨어… 아나비 나빠…”

리오도 서서히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싸움을 하나도 모르는 나도 알겠다. 그 아이, 버퍼구나? 방금까지만 해도 되게 고양된 느낌이었어. 마치 너라도 금방 쓰러뜨릴 수 있는 것 처럼. 그래도 아른이 없는 사람에게도 아른을 부여한다는 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그래. 나도 처음이야. 갑옷, 무기에 덧씌우거나 상대방 한명의 감각을 흔드는 정도지 이건… 말이 안돼. 그 아이의 모든 감정이 깊숙히 들어왔어.”

그때 동굴 문 앞에 아래 풀들이 바스락하며 돌이 떨어진 듯한 소리를 냈다. 네 명 모두 그 곳으로 시선이 뺏겼다. 그 때 하얀 섬광이 서있는 네 명 뒤로 아주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이…이건?’ 동공이 과한 빛에 반응해 잠시 죽어있는 사이 잽싼 누군가가 그들을 꿇어 앉히고 뒤로 손을 묶어 포박을 완료했다. 네명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포대가 씌여지고 어딘가로 끌려갔다. 가는 내내 누군지도 몇명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말도 없었다. 들리는 것은 발소리 뿐, 리오는 이대로는 지금의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스스로의 무력을 믿고자했다.

“조용히 가자.”

리오 어깨에 손을 올리고 드디어 입을 연 누군가.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압박이 느껴졌다. 수치스럽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설령 양손, 양발이 자유롭다고 해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반나절은 걸었을까. 포대가 벗겨졌을 때 주변은 어두웠다. 어느 벌레소리, 짐승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일한 것은 저 멀리 푸른색 불빛하나. 전혀 본인을 숨기지 않는다는 의도, 자신을 신뢰라도 하라는 걸까. 빛은 다가오고 양 옆으로 반짝이는 휘장을 매달은 팔들이 지나갔다. ‘속임수인가? 아니면 정말 몇십명의 병사를 끌고 왔단 건가? 고작 우리 때문에?’

“그리 긴장하지 말게. 목숨을 해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 말일세. 다만 그 탑의 아이에 대해서만 알고 싶은 것 뿐이야. 이 근방에서는 저주받은 아이라고 하더군. 그럴만도 하지. 별똥별의 선택을 받았을 때 즉시 자신의 모든 재능을 깨우쳤으니 주변에 달려온 사람들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야 있었겠어? 그러니 어리석어도 그대들 같은 촌민들은 별 선택지가 없었을거야. 그런 사용하지도 못하는 무시무시한 무기는 꽁꽁 싸매 숨겨두는게 맞지 암…”

굉장히 늙고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 하지만 강단있고 깊이가 있으며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단조로웠다.

‘애초에 소문이 퍼지고 부터 감시가 있었구나!’ 리오는 생각했다. 그런 능구렁이같은 늙은이들은 전장에서 수도 없이 봐왔으니 금방 알아챘다. 잡힌 후에 알아채서야 뭣하나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지가 막막하기만 하다.

“원하는 것은 오로지 그 아이입니까?”

“그래. 그 아이 뿐이다. 어찌 얘기해 줄 수 있나? 자네 말고는 얘기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말이야. 아, 편히 얘기하라고 줄은 풀어주지.”

‘나 밖에 없다고?’

리오는 당황해서 큰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에아? 얘들아? 지금 여기 있어? 있으면 소리내봐!”

‘최악의 상황이다. 이 어둠 속에서 흩어지기 까지 하다니. 이런 약아빠진 수에 당해야만 한다는게 너무 화가 난다.

리오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멀리서 종이비행기가 마치 별똥별처럼 빛나는 꼬리를 달고 날아왔다. 순수하게 하얀 꼬리는 이내 빨간색으로 변하고 종이가 스스로 펼쳐지며 그 속에 있던 글자가 뜨거운 빛을 내며 공간을 밝혔다. 그 곳은 지붕과 기둥, 약간의 벽만 남은 폐허 위에 천막을 씌워 놓은 곳이었다. 붉은 색으로 빛나던 글자는 병사들 사이를 휘저으며 왔다갔다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적습이라 생각했으나 전혀 무해한 모습에 코웃음 쳤다. 한참을 별볼일 없는 쇼에 웃다가 왜인지 속이 뒤집힐 듯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한 병사가 부들부들 떠는 병사에게 왜그러냐고 어깨에 손을 턱 올리니, 손을 잡고 끌고 서는 비츠로 그린 단검으로 사정없이 찌르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건물 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자해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이상한 욕구가 솟아올라 그 내부는 끔찍하게도 사방이 빨간빛에 녹아들었다. 혼란함 속 리오는 에아와 아이들을 찾아 해매던 중 찢어진 천막 사이로 바깥을 보게 되었다. 밝고 빨간 조명 속 그 곳에 전장이 있었다. 잊으려 노력했던 기억들. 지금 이들처럼 광기에 취해 비츠 도끼를 휘두르던 그 때가 눈 앞에 있었다. 멍한 기분으로 천막을 들추고 폐허를 나와 전장 속으로 들어갔다. 나무에 박힌 일반 무기에 손을 뻗어 잡고는 닥치는 대로 눈 앞의 적을 휩쓸어 버렸다. 머리는 함성과 무기끼리 부딪히는 소리만 가득했다.

“아저씨!”, “리오!”

난장판 속 도망친 에아와 아이들이 그런 리오를 보고 계속 소리쳤지만 그의 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예전에 느끼던 피를 그리워했다는 듯 위협적으로 휘둘러지는 그의 손 위로 하얗게 빛나는 글자 하나가 입을 맞췄다. 손등에서 부터 서서히 차분해지고 따듯해졌다. 좀전에 느꼈던 그 느낌. ‘이건 아나비 인가…?’ 에아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리오는 무기를 집어 던지고 당장 뛰어 갔다. 아직 포박되어 있던 상태였기에 앗차하고 다시 무기를 주우러 가던 찰나 발 아래 떨어져 있던 붓을 보았다.

‘설마… 이게 된다고?’ 리오는 가볍게 공중에 붓을 휘둘렀다. 가슴 속에서 아른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붓의 끝에서 비츠가 생성되었다가 금방 흩어졌다. 리오는 절망하고 싶었다. 비츠와 함께 억눌렀던 감정이 되돌아왔다.

“어…리오? 지금 뭔가에 빠진 건 알겠는데. 우리 좀 풀어주지 않을래?”

에아가 리오를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리오는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비츠 단검을 그리고는 에아와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당장은 여길 벗어나자. 아무래도 아나비한테 가봐야 할거 같아.”

숲을 빠져나가고 아이들의 아지트 뒷쪽 경사진 곳에 있던 개울에서 온몸을 씻어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흩어졌다. 다행일까 추적은 없었다. 다만 다시 돌아가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리오는 바로 집을 나섰다. 잠을 자지 못해 퀭해진 눈과 함께 타워 앞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타워 근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리오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무슨일인지 보기위해 앞으로 향했고 그 곳에는 가면을 쓴 소년이 서있었다. 소년은 종이에 쓴 글씨를 비츠로 만들어 손 위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관객 중에는 오랫동안 사라져있던 소년이 성장한 모습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단지 먼 동네에서 온 광대라고 소개한 것을 믿은채 그저 그가 선보이는 쇼를 즐기고 있었다. 리오는 소년을 보자마자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나비…!’ 이제서야 보게 된 것이 기뻤다. 그대로 다가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 앞에 있을 뿐더러 이 아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자 행렬이 작은 꼬마 병정처럼 걸어와서 리오 눈앞에 스스로 정렬되었다.

‘안 잊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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