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기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이미 흘려버린 눈물 이제와서 어쩌겠는가.

이미 불어친 감정 이제와서 어쩌겠는가.’

 

오전 7시 사람들이 아침 해와 함께 활동을 시작할 때, 어처구니 없이 미친놈이 자수를 했다.

“없던 일로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시간의 흐름인데 거역할 수야 있겠나. 나 홀로 싫다며 기억을 구석에 매달고 안 볼 수야 있겠지 결국은 묶어둔 밧줄이 삭아 끊어지면 다시 다가오는 것이 추억인데 받아들여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더 거센 파도가 몰아칠 먼 훗날 꿋꿋이 버틸 수 있지않겠는가.”

“…야. 헛소리 말고 피해자들 위치나 말하라고 니가 숨겨둔 그 사람들 이 새끼야!”

화가 난 김두식 형사는 참지 못하고 고성을 질렀다.

“당신의 마음은 상처로 가득한대 어째서 치료를 할 생각을 안하시오? 나를 보시오. 당당히 내 안의 상처 모두 치료하고 당신과 대면하고 있는 나 자신을.”

세로로 길쭉한 얼굴형에 코와 볼에는 자잘한 상처가 많았고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당당하다는 듯이 말을 끝내고 굳게 닫은 큰 입이 상당히 불쾌했다.

“이런 씨발새끼가.”

김두식 형사의 팔이 올라갈 때 선배 홍정우 형사가 그를 말렸다.

“너. 잠깐 나가있어라. 머리 식히고 와. 야! 김형사 데리고 나가라!”

“아니. 선배님! 이런 놈을 상대로 어떻게 더 참습니까!”

“됐어 그냥 말 들어라 나가있어.”

홍형사의 얘기를 들은 다른 후배 형사가 들어와 김형사의 팔을 잡았지만 금방 뿌리쳤다.

“아니 하… 내 발로 나갑니다. 내 발로 나가.”

“됐으니 하던 얘기나 계속 해봐. 그 추억인지 뭔지 묶었다드니. 거기가 대체 어딘데.”

“돌려말하지는 않겠소. 두억산 등산로 4km걸은 후 오른쪽 샛길로 빠져 쭉 가시오. 그 후 보이는 덩굴 헤쳐서 나오는 동굴 따라 쭉 기어가시오 그럼 내 집이 나오니. 마당 중앙에 아마 있을 것이오. 멀쩡히 죽었다면…”

“이런 시발…두식이! 나갈 준비해라.”

의미심장하게 전해온 혹시나 살아있을지 모르는 생존자 이야기를 듣고 홍형사는 무심한 하늘에 욕을 하며 다급하게 뛰쳐나갔다.

차로 1시간 걸리는 두억산을 30분만에 주파하고 다리를 이용해 매미가 머리 아파올만큼 우는 산 속을 김형사와 홍형사가 땀을 흘리며 아무도 없는 등산로를 걷고 있었다.

“선배님. 헉…헉… 이거 그냥 속은 거 아닙니까? 오후 2시에 산 타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 한 여름에. 예?”

“야 어르신들도 잘만 산 타고 다니신다. 너는 젊은데 체력이 왜 그 모양이냐?”

홍형사. 등산이 취미인 남자. 비싼 등산옷과 신발, 목걸이형 선풍기와 얼음물을 몸에 지닌 채 얘기했다.

“서에 왜 그걸 다 놓고 다니냐고 집도 아니고… 물이라도 주던가…”

김형사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라 했어? 마. 준비된 사람이 기회가 오면 기회를 딱 잡는거야! 어휴. 말을 말자. 야 4km면 저기 표지판 있는데 맞냐?”

김형사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커다란 두억산 지도를 피고 살펴봤다.

“예. 거기 맞을 겁니다. 근데 오른쪽 샛길이라고 하면 설마 저 길입니까?”

말과 함께 가르킨 손가락 끝에는 깎여진 절벽이 있었다.

“어…그치. 저 길…? 이지 맞지. 하 시발 설마.”

“아 그니까. 왜 그런 정신 이상한 놈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요.”

“조용히 해봐. 일단 저기까진 가보자고. 뭐라도 있겠지. 4km걸어와서 멀리서 보고만 갈거냐?”

“예 봐야죠. 봐야죠.”

툴툴거리며 대답하는 중에 표지판은 가까워졌다. 그리고 너머에 있는 내리막길에 또 다른 표지판이 있었다.

“선배님. 뭐가 또 있네요?”

표지판에는 빨간 글씨로 ‘위험. 이 앞 등산로는 폐쇄되었으니 다른 길을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써있었다.

“길이 있긴 있었네. 근데 여기 관리 직원하고 동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희끼리 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잖아요.”

“니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냐.”

“아. 제발”

“나 산만 10년 넘게 타고 절벽만 5년을 올랐다. 이런 길 쯤이야 내겐 문제가 되지 않아.”

“저한텐 문제가 되는데요.”

“자 가자”

“…”

김형사는 힘이 빠진 눈, 목은 꺾여진 채 경고를 무시하고 밧줄로 막힌 길을 넘어 가는 홍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수사를 하러 왔으면 해야지라는 심정으로 뒤따라갔다. 험난한 숲길. 표지판이 세워진 뒤로 사람들이 다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인위적인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계단과 철사, 못들은 풀들에 덮여져 희미하게 길이라고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쓰이는 점이 있었다. 옆으로 지나가는 나무들 표면에 희미하게 긁혀진 자국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동물이 낸 것이지 않을까 했지만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에 모두 자국이 있었다. 홍형사는 심하게 두리번거리는 김형사를 흘끗 보며 말을 했다.

“그래서 뭐인 것 같냐.”

“거의 제 눈높이 쯤 되고 그 녀석도 제 키랑 비슷하니. 걔가 낸 거 아닐까요?”

“길을 몰라서? 하지만 길따라 나있고 걔 말이 맞으면 여기는 홈그라운드인데 굳이 길을 표시할 필요가 있을까?”

“뭐 길이 이리도 안보이는데 본인도 햇갈렸나보죠.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낸 건 어떱니까.”

“그건 그럴듯한 이유야 잔뜩 있겠지. 지금처럼 길이 만들어지 전에 안전한 코스를 알려주기 위한 표식일 수도 있고. 작업하면서 낸 것일 수도 있고. 표지만 생긴 후에 호기심으로 들어온 사람이 자랑할 겸 새긴걸 수도 있지. 굳이 이 사건과 엮으면 피해자가 낸 걸 수도 있기도 하고. 하지만 이 경우는 그닥 납득할만한 상황이 안 떠오른다. 굳이 자기가 지나간 길을 표시할 이유가 있을까?”

김형사는 홍형사의 말을 들으며 나무에 난 자국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렇긴 하죠. 그런데 말이에요. 이 자국 좀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진 않거든요? 그러면 최근에 이 곳을 지나간 사람이 새긴건데. 선배 말대로 정말 피해자가 새긴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녀석의 아지트까지의 표식을 알리기 위해서 라든지.”

그 말을 들은 홍형사가 같이 자세히 표식을 보려 얼굴을 붙였다.

“그래 니 말대로 나무가 회복한 느낌은 아니네. 옛날에 여자친구랑 새겻을 때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오. 지금 형수님이요?”

홍형사는 김형사를 째려보며 말했다.

“아니니까. 그거 니 형수 앞에서 얘기꺼내지 마라…”

“하하하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거 아무래도 칼자국이죠? 사람 손톱으로 이렇게 정교하게 겉껍질이 잘려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답을 알려면 이 표식을 따라가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두 형사는 표식을 찾기 위해 길 양쪽 모퉁이에 서서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던 중 김형사가 멀리 표식이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홍형사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홍형사님! 선배! 여기!”

“왜! 뭔데!”

급하게 달려온 홍형사에게 김형사는 저 멀리 손으로 가르켰다. 그 곳에는 피로 얼룩진 바위가 있었고 옆으로는 아주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나무는 거칠게 난도질되어 껍질은 모두 까지고 나무의 옅은 속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 속살 위로는 피로 글이 써져있었다.

“너희들을 위해…”

김형사가 천천히 다가간 후 피로 적힌 글을 읽었다.

“’너희들을 위해’? 너희들이라니 누굴얘기하는 거지?”

두 형사의 시선은 나무와 마주한 바위로 이동했다. 바위는 허리쯤 되는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고 폭은 성인 남성 양팔의 길이보다는 조금 작았다. 또한 주변과는 다르게 꽤나 둥글둥글하게 연마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바위 위의 피는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라는 듯이 나무에 마주한 면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엄청난걸 발견했네… 잘했어…”

“아닙니다…”

한마디씩 나눈 후 눈을 마주쳤다. 아무말도 없었다. 정적이 숲을 에워쌌다. 개울따라 약한 바람이 불어 정적을 깨고 바위 바로 옆에 있던 나뭇잎을 치웠다. 홍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떨궜고 못본 걸 본 것 마냥 손을 머리에 올리고 급히 뒤돌았다.

“선배님?”

김형사도 잠깐 홍형사를 쳐다본 다음 고개를 내렸다. 수 많은 나뭇잎 틈새로 눈이 마주쳤다. 흰자를 찾을 수 없게 빨갛게 충혈된 그 눈. 생기를 잃어버린 동공과 흰자를 대신한 빨간색 그리고 눈꺼풀이 사라져 마치 부릅 눈을 뜬것마냥 사홍안으로 쳐다보니 오랜 경력의 형사에게마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위 아래에는 지금까지 희생된 피해자들의 시신이 묻혀져 있었다. 정말 이 모든 것을 그 미친 놈이 한 것인지. 도대체 여기로 우릴 부른 이유는 무엇인지. 머리에 온갖 생각들이 휘몰아치고 섞여 도저히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 뭔가 떠오른 김형사가 한마디 했다.

“덩굴…”

“뭐?”

“표식이 아지트를 가르키는게 아니라면 저희는 정말 그 새끼 말대로 길을 따라가서 덩굴을 찾아야죠.”

홍형사는 표정을 찡그리며 곧바로 있었던 등산길로 뛰어갔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길을 찾아가며 덩굴이 있을 장소로 달렸다. 약 10분을 달렸고 만들어진 등산로의 끝에 도달했다. 아마 여기는 암벽 등반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었던 것 같다. 꽤나 높은 절벽이 눈 앞에 있었다. 끊어진 밧줄과 곳곳에 카라비너 등을 거는 볼트가 박혀있었다. 그리고 절벽을 탄 흔적으로 피가 묻어있었고 그 아래 바닥에는 작은 피 웅덩이의 흔적이 보였다. 그 바닥에서 핏자국은 홍형사 오른쪽 수풀로 이어져 있었다. 그가 오면서 핏자국을 못 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뒤따라오던 김형사가 도착했다.

“어쩌냐 아무래도 여길 올라가야 될 것 같은데. 싫어도 이 자국들을 보니 저 위에 있는 모양이다.”

“허억…허억… 그렇네요… 저정도면 어떻게 가능할 것 같으세요?”

“해봐야지 사람하나 살릴수도 있는데. 해야지. 여기는 나 혼자갈테니까 너는 저거 핏자국이나 따라가 봐라. 혹시나 다른 피해자가 탈출해서 그 새끼가 자수한것도 모르고 산으로 도망친거면 더 위험해지니까.”

“알겠어요. 조심해요. 혹시 위험해지면 소리질러요 어떻게든 갈테니까.”

“알았다. 그리고… 그 피가 피해자게 아니면 최선을 다해 이겨라.”

두 형사는 서로 걱정이 가득했지만 홍형사는 최대한 여유있는 척 눈을 뜨고 빨리 가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김형사는 그에 한숨을 쉬며 핏자국을 따라 갔고 홍형사는 긴장되는 심장을 가라 앉히며 절벽앞에 서서 절벽 루트를 찾고 있었다.

‘맨손 등반이라. 갑자기 이런데서 도전하게 될 줄은 몰랐네. 참나. 이 참에 로망 채운다 생각하고 자신있게 가자.’

홍형사는 우선 피가 있던 자리는 미끄러울테니 자리를 피했다. 오른쪽으로 자리를 이동하고 첫발 첫손을 벽에 올렸다. 천천히 벽에 돌출된 돌들을 체크하며 올라갔고 다행인건지 절벽 아래에서 3/4높이 되는 높이에는 끊어진 밧줄이 정상까지 있어 적어도 저기까지 올라가면 됐다. 시간이 조금 흘러 1/4올라왔을까 홍형사는 더운 날씨와 지금까지의 산행, 긴장감으로 숨이 턱까지 올라왔다. 그럼에도 살아있을 수도 있는 피해자를 생각하며 한발 한발 올라갔다. 밧줄까지 도달하고 손을 뻗으려 할 때, 절벽 정상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름인 것을 잊을 정도로 깊고 낮으면서 날카로운 소리에 온 몸이 섬짓해졌다. 홍형사는 절벽 꼭대기에 손을 두고 천천히 얼굴을 위로 올렸다. 다행히 짐승은 없었고 눈 앞에 또 다른 벽을 발견했다. 희한하게도 덩굴이 벽면을 가득채웠다. 살인마가 말한 그 장소다. 오른쪽으로 조금 시선을 돌리니 덩굴은 바람에 살랑이고 있고 역시 마른 피가 묻어있었다. 그 피는 절벽에 있던 핏자국에 이어져 있었다. 이제는 허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장 입구로 향했다. 멀리서 볼 때보다 더 낮은 동굴은 좁았지만 사람 딱 한명 지나갈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바람은 부니 반대편에 출구정도는 있는 것 같고. 이건 처음인데 괜찮겠지…’

홍형사는 휴대폰을 들고 플래쉬를 켜 앞길을 비췄다. 바닥이며 천장이며 피가 잔뜩 묻은걸 보고 마음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의지대로 몸을 움직여 앞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앞으로 커브가 두번 꺾였다. 다행히 동굴 자체는 짧은지 멀리 출구가 보였다. 홍형사는 이건 동굴이라기 보다는 개구멍 아닌가라는 잡생각으로 긴장을 풀려했다. 드디어 출구에 도달했을 때 강렬한 햇빛에 앞을 잠시 보지 못하고 손을 올려 눈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눈이 서서히 그림자에 익숙해지면서 살인마의 아지트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작은 분지를 형성했다. 너비는 축구장 정도 되는 것 같다. 저 멀리 맞은 편은 나무가 작은 숲은 이루고 있고 왼쪽으로는 방 하나짜리 한옥이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밭이 갈려 있지만 무언가를 심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 가운데에는 앙상한 나뭇 가지로 무언갈 가르키는 것처럼 죽은 나무가 ‘ㄱ’ 자로 꺾인채 서 있었고 가로로 뉘여진 나무 몸통에는 밧줄이 매달려 있었다. 피로 얼룩진 발자국은 밧줄 아래 피 웅덩이를 시작으로 이 곳 동굴까지 이어져 있었다. 다행인건지 살인자의 말대로 매달려 죽어있는 사람은 당장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절벽이 꽤나 높아 그림자가 많이 져 어두웠다. 다만 나무가 특히 많은 곳만 그림자를 피해갔다. 더운 여름날씨와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습하기 까지 했다. 피부에 들러 붙은 수증기와 땀이 이곳에 들어오며 묻은 피들을 녹인 후 온몸을 타고 흘러 내려간다. 그 놈의 눈에서 느껴지던 질척이고 불쾌하던 느낌이 이 장소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ㅇㅇ경찰서에서 온 홍정우 형사입니다! 계십니까!”

홍형사는 혹시나 있을 피해자를 찾기 위해 수색에 나섰다. 집 쪽으로 향하려 몸을 돌리는 순간 숲 쪽에서 짐승이 튀어나왔다.

“컹! 컹컹! 크르르르르르르르르…”

검은 눈, 피에 물들여져 빨개진 털 (꼬리 끝 부분이 하얀 것을 보니 흰색 진돗개인 것 같다.), 날카롭게 갈린 이빨을 가진 들개 였다. 여기서 자라왔던 것일까. 저 까만 눈과 한껏 찡그린 상처가 난 얼굴을 보니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예감은 갔다. 이럴 때를 대비해 산짐승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을 배우긴 했으나 미친개를 상대로 통할지는 모르겠다. 눈을 마주치고 개의 움직임을 살폈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집방향으로 이동했다. 내 움직임에 맞춰 개도 나를 공격할 채비를 한다. 순간 조용해졌다. 집중력이 극한에 올라가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서로를 비비며 사부작 소리를 낼 때, 이 타이밍이다. 몸을 급하게 틀어 방 문을 향해 달렸다. 개도 반응해 곧장 쫓아오기 시작했다. 서늘하고 오로지 문 밖에 안보이는 상황, 소리는 사방의 벽을 타고 튕기며 온 방향에서 날카로운 짖는 소리가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뒤에서 물 것 같은 생각에 문만 보고 뛰다가 집 앞에 꽂혀있던 새하얀 천이 달린 깃발을 지나치니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문까지 도달하고 뒤를 돌아 봤을 때 개는 사라진 상태였다. 순간적으로 ‘내가 잘못 본 것인가’하고 착각할만큼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분지는 조용했다. 풀어진 긴장에 벽에 등을 지고 잠시 앉아서 쉬었다.

‘사람 구하려다가 내가 죽겠네. 이건 뭐라 표현해야 되나. 피 냄새랑 습한 냄새, 풀때기 냄새 다 섞여서 이씨... 들어올 때도 그랬지 입구서 부터 피 냄새는 진득하게 났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장소가 쉽게 발견되지 않은게 이상해. 등산로가 생기기 전에 몰랐다고 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장소만 오래된건가…’

일어나기 위해 벽을 짚었다. 손바닥을 가득채우는 한기에 늙은 뼈가 시려온다. 주변을 한 바퀴돌며 특별한 흔적이 있나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시 문 앞으로 돌아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 틈새로 작은 좌식 책상 하나, 그 위로 책들과 불투명한 유리병이 나열되어 있었다. 더 벌어진 틈새로 문 맞은편의 벽이 드러났다. 빨간색 한지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왼편은 나름 집이라고 주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같은 외형과 바깥분위기와 다르게 내부는 빨간 벽하나가 소름돋긴 하나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다행히 사람은 없었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기 위해 둘러보다가 집 뒷편에 작은 발전기 하나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확인해보니 기름은 조금이지만 있긴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힘껏 두어번 당기니 커다란 엔진소리와 케케한 연기 냄새가 났다. 그러자 빨간 도배지가 있던 벽의 창문은 빨간 램프위에 한지를 둔 것처럼 엷고 약한 빨간 빛을 뿜어냈다. 다시 돌아간 방은 분위기가 달랐다. 밝은 곳에서의 방 존재감은 제각기 다른 느낌으로 부조화를 이루었다. 주방은 현대식으로 전자레인지, 인덕션 등이 있었고 옆으로는 커다란 대야에 물은 한가득 담아놨다. 벽은 타일을 여러개 얼기설기 붙여놔 엉성하게 분위기만 냈다. 그에비해 반대편은 90년대 어느 가정의 작은 아들 방을 연사듯 구석에 좌식 책상과 독서용 램프, 꽃무늬가 화려한 도배지가 붙어있었고 옆으로 솜이불과 배게가 곱게 개어져 있었다. 문제의 중앙 벽은 빨간 도배지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불빛에 비춰보니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그림인가. 부적이라도 되는 걸까. 곳곳의 한지가 울고 있는 부분이 있어 뭔가 물감같은 것으로 칠한게 분명하다. 하지만 맨눈으로는 썩 의미있는 것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벽 수수께끼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다시 시선은 90년대 벽으로 향했다. 책상 위의 저 유리병, 저건 분명히 뭔가 있다. 불투명해 내용물이 보이지는 않으나 직감이 왔다. 뚜껑이 보기보다 강하게 잠겨있어 양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한번에 뚜껑이 열렸고 내용물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쉽게도 그냥 쌀이었다. 옆에는 2개의 유리병이 더 있었다. 하나는 팥이 들어있었다. 나머지 하나도 열었다. 눈이 들어있었다. 홍형사는 무표정으로 열었다가 욕설과 함께 유리병을 던졌다. 벽에 맞고 깨진 유리병에서 점도가 높은 액체와 약간 썩은 눈알과 비교적 싱싱한 눈알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갯수를 세지 않아도 이 미친놈이 많은 수의 사람을 해쳤다는 것은 알았다. 순간 놀라면서 화가난 홍형사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날이 살짝 저물어 그림자는 숲의 일부분도 가리며 어두워졌다. 무심코 던져버린 증거품을 생각하며 후회하던 홍형사는 김형사가 생각났다. 현장에는 없는 사람에 김형사가 피해자를 찾길바랬다.

같은 시각 김형사는 어두워지는 날에 절벽 앞에서 홍형사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발자국과 핏자국을 따라갔으나 중간 개울을 만나며 모두 씻겨내려갔는지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김형사는 주변을 추가로 수색하다가 흔적을 찾지 못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다만 수확은 있었다. 길가 나무에 있던 칼자국과 같은 자국이 강건너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국을 따라 가보니 산 속 폐건물이 있었다. 건물이라기 보다 컨테이너를 개조한 간이 집이었다. 문을 열어보니 많은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 흔적이 많았다. 양말, 속옷, 웃옷같은 의류나 이불과 배게가 10개 정도는 되었으며 간단한 조리도구와 가스버너 등이 어질러져 있었다. 그리고 희한하게 벽에는 일정 간격으로 고리가 박혀있었다. 절벽에서 본 그것과 같은 것으로 보였다. 지도에 위치를 표기해놓고 자국이 있던 길을 얼추 그려넣었다. 밖으로 나와 다시 돌아가려 할 때 건물 뒤로 토끼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 그 곳으로 갔더니 나무 표면에 있는 자국을 보았다. 여기가 길의 끝이 아님은 알았으니 그 뒤로 향하려 할 때 홍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두식아! 이거 덩굴 던질테니까 길이 잘 봐바!”

기다리던 두식은 홍형사의 목소리에 급하게 절벽으로 돌아갔다.

“무사하셨네요! 뭐 좀 찾으셨… 으악!”

홍형사가 던진 덩굴이 김형사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음. 길이가 되는 구나.” 홍형사는 이제야 숨을 편히 쉬며 한마디했다.

덩굴 여러개를 엮어 간단하게 만든 밧줄이라도 일회용으로 쓰기에는 충분히 튼튼했다. 덩굴 일부를 주변의 바위에 묶고 홍형사는 김형사가 있는 등산로로 내려갔다.

“그래서 뭐 좀 찾았냐?”

“사과가 먼저 아닙니까? 그것보다 가까이서 보니 선배님 꼴이 말이 아닌데요. 거기 누구랑 싸우고 왔어요? 그럼 절 부르시지…”

“싸우긴 뭘 싸워. 역겨운 것들이 많았을 뿐이야.”

둘은 지금까지 서로 얻은 정보를 교환했다. 김형사는 홍형사의 말을 믿기 어렵다며 언쟁을 벌이다가 마지못해 인정하고 다음에는 장비를 들고와 같이 올라가서 확실하게 조사하자고 얘기했다. 근처 개울에서 씼고 걸어가며 얘기하니 어느새 해는 사라진 상태, 다행히 초입까지는 도착해 어두운 산길에서 지금보다 더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이 바로 취조에 들어갈 생각만 가득한 두 사람이었다.

-ㅇㅇ경찰서-

“아무일도 없었어?”

“예. 그런데 바로 오신겁니까? 집에 가서 좀 쉬시지.”

“집에 가면 잔소리말고 더 듣냐? 일단 저기 그놈 취조실로 보내. 아 그리고 피해자 소식은 있나?”

“예 소방서 기관 3곳과 경찰서에서도 가능한 인원 차출해서 산을 수색 중인데 날이 금방 어두워지는 통에 커다란 진전은 없답니다. 그리고 그 놈… 말입니다만…”

“아무일도 없었다매 왜 뭐 잘못한 표정을 하고 있어?”

“자는 건지 명상을 하는 건지 건들여도 반응이 없어서요… 아무일도 없고 살아는 있는데요…저도 잘 모르겠네요…”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그냥 직접 보시는게 편할 것 같습니다.”

홍형사는 숙직실에서 쉬고 있던 김형사를 깨워서 살인마가 수감된 방으로 향했다.

쇠창살 너머로 그가 정좌자세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무릎에 대고 있었고 눈은 똑바로 뜬 채 우리를 직시하고 있었다. 저걸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걸까. 살아있는 시체가 된 것마냥 아무말도 없고 아무반응도 없었다.그러다 갑자기.

“아 오셨소이까.”

특유의 어두운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왔다. 시선은 고정한 채 모든 걸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홍형사님은 보셨군요? 그녀는 괜찮았습니까?”

“나와. 그 얘기는 취조실에서 한다.”

최대한 나오는 욕설과 화를 참은채 할 말만 한 김형사였다.

“우선 대답은 해주시지요. 그녀는 괜찮았습니까?”

“조용히 해. 니가 취조하는데 아니니까. 내가 하는 말에만 대답해라.”

조용히 눈만 깜빡이다가 한 마디했다.

“그게 이곳의 규칙이라면. 제가 따라야지요. 저의 궁금증은 얼마 안있어 밝혀질테니까요.”

갑자기 미소를 지어보였다. 입꼬리는 귀 끝까지 올라갔고 밀려나고 접힌 이상하게 주름이 많은 얼굴 가죽, 눈은 커다랗게 떠 검은자 대부분 노출되었고 그 곳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마치 탈을 쓴 것 같아 기괴해서 사람 얼굴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많이 해본 얼굴이라는 듯 얼굴에는 경련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생물로써의 공포가 이런 것일까. 어떤 짓을 하더라도 이 녀석이 한 끔찍한 일에서 못 벗어나고 곧 나에게 까지 마수를 뻗을 것 같다. 무심코 식은땀을 흘리며 멍하니 쳐다보다가 김형사가 어깨를 두들겨 겨우 시선을 뗄 수 있었다.

“이상한 표정 짓지마라. 진지하게 임해. 여기 너랑 수다떨러 온거 아니니까.”

“그…그래. 자 봐라. 여기가 너네 집 맞지?” 스마트폰 속 사진을 보여줬다.

“예. 맞게 가셨네요. 그럼 이제 대답해 주실래요?”

“이런데 집은 어떻게 지었나?”

“…”

“어떻게 지었냐니까?”

“가셨으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숲 뒤에 길이 있습니다. 제가 얘기한 길과는 다르게 커다란 문이 달려있죠. 실은 거기가 정문입니다. 착각해서 엄한데를 알려드렸네요.”

눈 깜빡하지 않고 형사들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김형사는 다시 화를 내려했지만 홍형사가 더 일찍 제지시키면서 다시 상황은 진행된다.

“집 안도 수색했는데 이런게 있더라.”

홍형사는 본인이 깨뜨려버린 유리병 속 눈알들의 사진을 들이밀었다. “아아. 타락한 자들의 눈알이군요. 조금 아깝긴 하네요.” 마치 ‘이게 무슨 문제라도?’라고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홍형사와 김형사는 이후 제시한 등산로 근처 컨테이너 집의 사진, 내부 여러 사람이 묵었던 흔적, 정체불명의 벽에 박힌 앵커 등에도 아무 반응이 없자. 오히려 심문당하는게 본인들 쪽 같았다. ‘여러 증거를 숨겨두고 왔으니 결정적이고 나를 흔들만한 것을 찾아와라.’라고 얘기하고 두 형사가 말 잘듣는 개가 된 것 마냥 하루 고생하고 시간만 낭비한 것이다. 결국 놀아나던 끝에 피칠갑을 한 바위와 피로 ‘너희들을 위해’라고 적힌 나무 겉 표면, 그리고 바위아래 백골이 된 시체들이 찍힌 사진을 보여줬다. 불길한 예상이 맞았던 것 같다. 그 놈이 흥분한 듯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사진을 더 가까이서 보겠다고 몸을 들썩거리며 앞으로 기울였고 가면같았던 얼굴이 조금 무너졌다. 과하게 반응하다보니 두 형사는 놈을 잡고 의자에 과격하게 앉히며 막 질문을 하려고 할 때,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잘 살아있군요. 잘됐어요. 잘됐어. 형사분들. 이 사회는 법에 의해 벌을 처벌받지만 저는 다르답니다. 저는 저에게만 내려지는 특별한 벌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고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날은 도적처럼 찾아오리니. 여러분이 아무리 애를 써도 막을 수 없을 거에요.”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놈을 보고는 이것에 무언가 있다고 확신한 두 형사, 그리고 생존자가 어딜 향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홍형사는 김형사를 시켜 급하게 산 속 피해자 수색을 중지하고 시내에 사람을 보내 행색이 수상하거나 특별한 사람을 찾으라고 시켰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녀는 다가오고 있어요. 저는 느껴집니다. 그 한기가. 그 날카로움이. 그 미소가… 죽음 앞에서 저도 다를 수는 없겠죠. 이제는 이 미소도 지을 일은 없어지겠군요.”

복수심에 가득한 빨간 원귀가 되어버린 피해자가 본인의 미래를 버려서라도 사회에 존재하는 악마를 직접 손으로 처벌하기 위해 오고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광’, 이름이 없던 그에게 스스로가 지어준 이름이다. ‘악마처럼 미쳐라’

태어나서 부터 가족은 없었다. 처음 눈을 뜨고 희미한 엄마의 얼굴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경기도 소재의 보육원에서 자랐다. 이때 당시 이름은 ‘김도아’였다.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의미로 원장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그런 원장선생님을 만난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주변사람들은 따듯했다. 언제 어딜가든 같이 가주는 친구가 있었고 원장님은 그런 아이들을 좋게 봐주어 한달의 한번은 선물을 주려고 노력하셨다. 보육원 내 선생님들은 사회에 나가더라도 기죽지 말라며 교육에 열정적이셨고 특히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같이 놀러다니는 일이 많았다. 봄이면 꽃놀이를 가고 여름이면 근처 계곡으로 가을이 되면 낙엽을 쓸고 여름에 덥혀진 몸을 찬공기로 식히며 정말 열심히 놀았다. 그들에게 많은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이 할 수 있는 시간과 행복은 많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좋다. 그럼에도 도아(마광)는 얘기를 자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변은 항상 이해를 하지 못했다. 웃음을 표출한 적도 없었다. 입양을 하기 위해 어른들이 오더라도 그는 한결같았다. 어른들은 똑같이 ‘미안하지만 저 아이는 조금 무섭다.’라고 얘기했다. 그럴 때마다 원장님은 남몰래 화를 내주었지만 도아(마광)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이미 남들과 다르단 건 알고 있었고 평생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믿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그는 같은 보육원 친구들과 학교에 갔다가 오면서 한 아이가 맞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친구가 팔을 잡고 끌어 도망쳤지만 그의 가슴은 두근두근했다. 강자의 폭력에 대한 공포가 아닌 흥분, 폭력에 대한 갈망과 사랑이었다. 그냥 단순히 미친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안가 한 사람이 시간의 재촉에 못이겨 세상을 떠났다. 원장선생님은 일찍이 지병으로 시한부선언을 받았지만 적어도 3년은 더 사셨다. 창 밖으로 비가 쏟아지며 하늘이 귀한 사람을 위해 같이 울어주던 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이들한테 따듯한 한 마디를 해주셨다. ‘이 선생님은 이미 시간을 한참 미룬거란다… 하루라도 너희의 미소를 보기위해…그니까 웃으렴 웃어주렴…마지막까지 그 이쁜 얼굴들을 담고 싶구나…’ 김도아(마광)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육원에 있으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원장님은 그런 도아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떠나셨다. 보육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은 미소, 파르르 떨리는 입가의 근육들로 인해 눈물을 참는 것 처럼 보여 미소의 의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순수한 악의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 청소년 시절의 그는 조용한 아이였다.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지금 눈에 띄면 앞으로 자신의 진정한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주변에는 나름 보육원 친구들이 있었다. 제각기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학교도 달랐지만 항상 같이였다. 도아(마광)에게는 걸리적거렸지만 그럼에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행동을 못할 시기라면 어떻게든 시간은 보내야 했으니 겸사겸사라는 기분으로 같이 어울려 다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아(마광)가 질렸다고 생각했을 때, 나이는 18살이었다. 한 소녀가 그에게 고백을 했다. 같은 보육원 출신이고 일찍이 6살 때 입양갔던 아이. 고등학생이 되어 우연히 만났을 때 어릴 때와 달라진 도아(마광)의 외모(이때당시는 얄상한 얼굴형에 커다란 눈, 시원한 입, 평범한 코를 가지고 있어 꽤 잘생겨보였다.)와 특유의 차가운 성격을 보고는 스스로 그 까만 우물에 마음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도아(마광)는 그런 소녀가 귀찮았다. 아랑곳않던 소녀는 적극적이어서 집에 갈때나 쉬는 시간이면 항상 같이 있으려 노력했다.

순수한 악의의 줄기가 자라 꽃봉오리가 둥그렇게 말려있었다.

도아(마광)는 아직 본인의 자아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보육원에서 겪은 지극정성이 조금이나마 그를 선한 영지에 묶어두고 있었다. 머리 속으로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착하고는 이론적으로 알고는 있었기에 참으려고 노렸했다. 그가 19살이 되었다. 곧 성인이고 보육원을 떠나 혼자 사회에 내던져지게 된다. 소녀는 아직 그의 옆에 있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 소녀가 그저 일방적으로 구애를 계속할 뿐이었다. 도아(마광)은 정말 노력했다. 원장님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다. 귀찮았지만 차라리 사귀었다가 차면 나아질까 생각했다. 둘은 붉은 실이 이어졌다. 보육원 친구에게 얘기를 했더니 친구는 정말 크게 놀랐다. 그리고 연애에 대한 조언을 잔뜩 해대고는 ‘너 한테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야! 절대 헤어지지마!’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도아(마광)는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용케도 1년동안 만남을 지속했다. 사실상 공식적인 관계만 바뀌었을 뿐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따로 만나는 시간이 1~2시간 정도 더 많아진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녀의 일방적인 사랑과 도아(마광)의 차가움 때문에 시간이 지날 수록 붉은 실은 썩어가고 있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순수한 악의의 꽃은 개화했다.

도아(마광)는 이제 보육원이 아닌 서울에서 자취와 알바를 하며 직업을 찾고 있었다. 대학은 가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었고 특별한 꿈이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소녀는 서울 내 유명 대학에 입학했다. 그 덕에 둘의 인연 혹은 악연이 지속됐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다. 이제 둘이 만나는 시간은 적어졌다. 소녀는 신입생으로써 학과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아(마광)는 일하는 시간이 아니면 집에서 무언가를 계속 공부하거나 운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 소녀는 도아(마광)를 산 속 공원에 불렀다. 단 둘이 아무도 없는데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얘기했다. 사랑에 순수했던 그녀에겐 온전히 단 둘이라는 공간이 필요했다. 도아(마광)는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공원 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남녀 둘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사랑안하니? 그럴 거면 고백 왜 받아 준건데?’ 소녀는 얘기했다. 도아(마광)는 귀찮았다. 그냥 집에가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진자하게 단 둘이 사랑에 대해 논하던 자리에서도 전혀 온기를 주지 않는 도아(마광)에 소녀는 화가 났다. 소녀는 도아(마광)의 뺨을 얇고 가녀린 손으로 강하게 후렸다. 썩은 붉은 실은 끊어지고 그 위로 새로운 빨간실이 뚝뚝 떨어졌다.

순수한 악의의 꽃에서 빨간 꽃가루가 터지며 퍼졌다.

맞은 뺨에 돌아간 얼굴을 들었을 때 도아가 아닌 마광이 고개를 내밀어 소녀를 직시했다. 도아라는 이름을 버렸다. 이제 이 세상에 김도아라는 인간은 없다. 소녀의 얼굴은 주먹에 의한 멍이 가득했고 들을수도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퉁퉁 불어올랐다. 눈과 입, 코 어디서든 피가 흘러나왔고 그녀의 왼쪽 팔, 양 발목은 도망가지 못하게 꺾인 상태였다. 도아, 아니 마광은 온 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지난 날 보았던 폭력의 달콤함, 갈망, 이상적인 그 모습에 드디어 도달한 자신이 믿겨지지 않았다. 동시에 눈물이 흘렀다. 기쁨인가 슬픔인가 죄책감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피와 흙이 뒤엉켜 옷이 심하게 더러워진 그녀를 보며 마광은 떠올렸다. 죽음을 처음 목격했던 때를, 처음 미소를 지었던 때를, 마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씩 몸에 힘이 빠져가는 소녀를 보고서는 작은 모래 알갱이들을 치우며 지나간 눈물 흔적 끝에 있던 눈꺼풀이 닫히는 그 마지막까지 본인의 꼬여버린 어긋난 욕망과 순수한 본능을 마음껏 표출했다.

순수한 악의는 만개하고 중앙에 위치한 맑고 까만 우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마광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새벽 숲 속의 차가운 공기가 땅으로 스며들며 연한 안개가 피부를 적실 때, 태양이 떠오르며 새파랗게 나기 시작한 나뭇잎과 나뭇가지 사이로 소녀를 비추었다. 어둠이 지며 찾아온것은 태양만이 아니었으니 한 할머니의 신고로 마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보육원에서 나와 잠깐의 자유를 느끼고 그는 다시 교도소로 향했다. 그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무표정에 시선은 사람에게 향하는 법이 없었고(사냥감이 아닌 이상) 대화를 일절 하지 않았다. 교도소 내에서도 그가 한 것이라고는 일과 중 노동과 독서 뿐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만의 공상으로 가득채웠다. 마광에겐 그 곳이 집이 될 터였다. 순수하게 폭력만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 고인이 사망한 이후에 시체를 유기하는 것도 아닌 공공장소에 방치한 채 관찰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고 단순 쾌락을 위한 살인으로 판단된다는 이유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그에겐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이 인생은 남들과 너무나도 달라 적응하고 살기란 어려울 것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불공평했다. 교도소에 화재가 발생해 소란이 났다. 당시 다른 죄수들과 있던 마광은 아무 의미도 없던 인생 여기서 끝나나 비루하게 더 사나 차이가 없어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은 죄수들의 죄를 잡아먹기 위해 오기라도 한 듯 전 구역을 휩쓸었고 마광의 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이 쇠로된 문과 창살을 달굴 때, 화재 발생 시 대응이 늦어져 그 때서야 감방의 잠금이 해제되었다. 다른 죄수들은 살기위해 빠져나갈 때,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마광은 눈 앞에 검은 머리를 천장에 휘날리는 빨갛게 빛나는 신을 목격하게 되었다. 무언가 계시라도 받은 걸까 다른 이들과 반대로 불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온 몸이 불에 휩싸인 채 마광은 밖으로 향했다. 그를 발견한 소방관은 급하게 몸에 붙은 불을 껐지만 전신이 3도화상으로 생명을 부지하지엔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세상은 불공평하다. 순수하게 환자를 차별하지 않는 의사 덕에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다만 숨만 붙어있었지 양호한 상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전신화상에 의해 이식할 피부도 없고 기증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해줄 사람도 없었고 병원에서도 거기까지의 아량은 베풀지 않았다. 중환자실 구석에서 기계에 의존해 숨쉬고 있는 마광에게 남은 것이라곤 화상으로 짓물려진 몸과 화재 이후로 피부에 눌러붙은 기묘한 신앙밖에 없다. 마광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태어난 이유, 남들과 다른 이유, 죽음 앞에서 대항하여 밝게 빛나야 하는 존재, 떠나는 길 웃음으로 마중가야 하는 존재, 불로써 과거를 불태우자.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겟는가. 이미 흘린 눈물 어쩌겠는가.’

시간이 지나 대략 해가 정상을 찍고 내려가던 때에 한 앰뷸런스가 한 범죄자를 태우고 교도소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시간이 지나 달이 정상으로 가던 때에 같은 길을 경찰차 서너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무전에서 ‘현장에 출동한 인원들은 앰뷸런스 발견 시 범죄자의 신상부터 파악하도록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새어나왔고 얼마안가 경찰차 전조등 끝에서 나무에 처박힌 구급차 한대가 비춰졌다. 현장은 빨간색과 파란색 빛이 짧은 시간 내에 교차되어 비춰지며 눈이 어지러웠다. 어두운 숲속을 휘젓고 있는 다수의 빛 줄기가 사라진 범죄자를 찾고 있었고 앰뷸런스 안에는 이미 사망한 시체 두 구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둘다 교통사고로 인해 죽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눈꺼풀이 사라진 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두 눈이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사라진 이후 산 속을 한달 동안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 산에 있던 암벽등반 명소가 폐쇄되었다. 그 이유는 잦은 사고 발생과 인명 피해로 인해 구청에서 급히 폐쇄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등산 동호회 사람들은 이전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을 밝혀달라 촉구했으나 인력부족과 이미 충분한 조치를 취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며 답변하기를 피했다. 사실상 본인 부주의로 인한 안타까운 사고로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모양새였다. 한참의 실랑이는 있었으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지는 오래 전이다. 사건은 그렇게 무마되어 조용히 흘러갔다.

경찰서에 있던 인원 절반이 수색에 나갔음에도 내부는 시끌벅적했다. ‘설마 단신으로 경찰서까지 들어와 사람을 죽이려하는데 우리가 못 막는게 이상한 것 아니냐’, ’너무 과잉 대응하는 것 아니냐.’는 등 별별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홍형사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 상가와 골목길은 물론 두억산과 이어진 도로는 모두 통제되어 불시검문을 실시했지만 한 동안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생존자가 언제 탈출해서 움직였든 진작에 이 근처에는 도착해 있어야 했다. 점점 모두가 피곤에 찌들어 집중력이 흐트려질 때 쯤 무전에서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와 비명, 노이즈가 귀를 찌르듯이 들려왔다. 그로 인해 벌어진 서 내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마광은 입꼬리가 다시 잔뜩 올라갔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내게서 흘러나온 신기가 너에게로 흘러갔구나. 그 뜨거운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빨간 용암들을 주체할 수 없다면 와라. 내게로. 내게서 용암 뿐만이 아니라 차가운 냉기까지 가져가라. 너에게 남을 품는 자비심따위는 필요없다.’

“두식아 이건 진짜 일났다. 이러면 피해자고 뭐고 그냥 똑같은 살인자가 됐잖아. 이 이상은 안된다. 이 이상은 안돼…”

홍형사는 급하게 무전기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해당 위치를 파악하고 그 중 가장 가까운 길목으로 향했다. 김형사는 홍형사의 눈치를 본 다음 어느새 건물 밖으로 나가 차를 대기시켜놨다. 더이상 무고한 피해자에서 잔악한 살인자가 된 그 사람의 죄가 커지는 것은 볼 수 없었다.

달이 정상에서 벗어나던 가장 어두운 시간, 한 골목에선 쓰러져 있는 남성 두명과 한 여성이 있었다. 유일하게 가로등에서 나오는 빛 끄트머리에서 그들 일부씩만 비추고 있었다. 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 방울은 남성들이 쓰러진지 얼마 안됐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내 골목안으로 부는 바람에 서있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피가 서린 눈이 죽어가는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은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벽 한두개를 두고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마광이 만들어낸 마광을 죽일 집행자. 억울한 영혼들을 모아 한 육체에 집어 넣은 그 여자는 끌림에 의해 몸을 움직였다. 불쌍한 두 남성에겐 무슨일이 있었는가 잠깐만 되돌아본다. 그 일의 시작 자체가 곧 비극이었다. 그들은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골목을 혼자 걷는 여성에게 순수한 목적으로 경고를 해주려 했다. 한 경관이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가로등 불빛이 조금씩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가락에 의해 여기저기 난반사되면서 골목의 공기는 순싯간에 무거워졌다. 경관은 스턴건을 겨냥한 채 손을 들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명령대로 손을 들고 천천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깨와 목둘레를 덮는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ㅎ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녀의 헝클어진 앞머리 사이로 눈이 보이는데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끝이 안보이는 깊은 우물이었다. 경관은 당장 행동을 해야 함을 머리로는 인지했지만 압도되어 움직이지를 못했다. 손을 들고 다가오는 그녀는 섬뜩했다. 팔을 든 이유가 비무장임을 알리기 위함이 아닌 하늘을 가르킨 저 손끝으로 본인을 죽이기 위함인 것 같았다. 뒤를 돌아 얼굴에 그림자가 졌음에도 그녀의 눈은 더더욱 어두워 구별이 가능했다. 코 앞에 있다. 이미 스턴건이 손에서 떨어진 것은 오래이다. 경찰차에서 구경하던 경관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달려왔지만 상황은 순싯간이었다. 그녀는 팔을 휘둘러 얼굴을 할퀴고는 원피스 치마부분을 들어 허벅지 안쪽에 숨겨놓은 식칼을 꺼내 그대로 목을 그었다. 그 후 뛰어오던 경관에게 목이 그어진 남성의 축 처진 몸을 던진 후 경직된 그 순간에 그 경관의 목 또한 그었다. 그녀의 우물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바라보던 두 남성의 몸 위로 한 두 방울 떨어뜨리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같은 시각 홍정우 형사와 김두식 형사는 차를 타고 경찰서에서 나와 우회전 후 세개의 횡단보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내 두 개나 되는 횡단보도의 신호를 무시한 채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사거리 진입 직전 상가 사이 골목으로 우회전해 들어갔고 천천히 좌우를 살피며 차를 움직였다. 간간히 깜빡이는 가로등을 제외하고 빛이라곤 없을 정도까지 깊이 들어왔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홍형사가 코너에 있던 슈퍼마켓을 지날 때, 멀리서 경광등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경찰차는 비스듬이 주차되어 있고 문도 활짝 열려있었다. ‘여기다…!’ 두식은 당장 우회전했고 전조등은 텅빈 차량만 비췄다. 둘은 내린 후 침착하게 천천히 다가갔다. 경찰차 내부를 확인 후 그 건너에 시선이 향했다. 약간 떨어진 거리의 가로등 아래. 몸 속을 돌며 따듯한 에너지를 나누던 피가 차갑게 식은 채 퍼져있었다. 허망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는 홍형사는 본부에 그 소식을 알렸다.

“본부 여기는 홍정우 형사, 강옥 슈퍼 앞 골목 연락이 중단된 경관 둘 발견. 이미 목숨은 끊어진 상태. 날붙이를 이용한 듯한 목의 자상으로 보아 용의자는 현재 흉기를 소지한 것으로 파악됨. 현장으로 구급차 요청함. 이상…”

‘시발… 이래선 안됐어…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안됐던 거라고…’

두식은 침울한 표정의 정우를 보고는 되려 침착해졌다. 항상 의지만 하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여자의 피묻은 식칼에서 떨어져 생긴 흔적을 발견하고 당장 보고했다. 정우의 힘풀린 동공이 바닥에 떨어진 경관의 붉은 다잉메시지를 보았다. 그러고는 그 메시지가 이끄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목적지는 경찰서로 뻔했으니 도달하는 몇 안되는 길목, 피해자이자 용의자가 되어버린 그녀보다 빨리 도착해야 했다. 둘은 나뉘어 움직였다. 경찰서에 있는 출입구는 이미 서 내 인력이 지키고 있을테고 동쪽을 둘러싼 울타리는 고도차로 자연스레 높은 벽을 형성해 있었다. 서쪽으로는 비교적 낮으나 넓은 주차장이 있어 눈에 띄기가 쉬우니 갈 곳은 한정적이었다. 두식은 담장이고 집이고 무시한 채 급한일이라는 용무로 직선에 가까운 코스로 주차장 방향으로 향했다. 정우는 마광에게 갈 생각이었으나 순간적으로 두억산 암벽등반하던 코스가 생각이 났다. ‘설마 그 피웅덩이는…’ 정우는 무전기를 통해 아직 용의자가 발견되지 않았는 것을 듣고는 골목을 내달리다가 대로변으로 나가 경찰서 정문을 지나치고 동쪽 울타리로 향했다. 바로 앞 골목길에서 꺾어 들어간 다음 허벅지에 힘을 잔뜩 주며 내리막길을 평지처럼 내달렸다. 그리고 저 멀리 분홍색 꽃이 만개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잔뜩 성난 허벅지 근육을 쥐어짜며 급하게 정지하고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다가갔다.

“피해자분. 지금 당신은 경찰을 살해한 용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더이상은 안됩니다. 당신은 그 살인마처럼 변하면 안되요. 지금이라면 납치 된 후 생긴 트라우마와 쇼크로 정신질환 감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한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죄를 당신 혼자 뒤집어쓰게 만들 수는 없어요.”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가려지지 않은 한 쪽눈으로 홍정우 형사를 쳐다봤다. 이미 사람이길 포기한 눈. 저 옆 건물 안에 있는 그 남자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눈이 향하는 곳엔 아무도,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오로지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극악한 본능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홍형사를 무시하고 경찰서 동쪽 울타리 밑 벽을 타기 시작했다. 홍형사는 손이 옆구리에 찬 리볼버총으로 향했지만 차마 겨냥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녀가 변한 것도 알고 지금 막지 못하면 더한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도 알지만 떨리는 그 손으로는 차가운 화기를 잡을 수 없었다. 대신에 무전기를 들고 보고했다.

“본부 여기는 홍정우 형사, 현재 용의자가 경찰서 동쪽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중, 일부 병력을 이곳 울타리 아래로 출동시켜주십쇼. 저는 올라가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병력에는 비살상 무기만 허가 부탁드립니다. 이상.”

여자가 울타리를 넘었을 때 수많은 경찰이 그녀를 겨냥하고 있었다. 두명은 테이저건을 들고 있었고 대여섯명은 실탄이 장전된 리볼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치고 있었다. 우선은 투항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도 그녀는 듣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에 경찰은 그 자리에 멈추고 손을 들라고 명령했다. 그럼에도 행동에 변화는 없었다. 같이 뒷걸음질치며 거리를 유지하던 차에 여자는 옆에 있던 나무 뒤로 숨어들어갔다. 동시에 테이저건과 총알이 발사되었으나 그녀에 몸에 닿지 못했다. 아직 리볼버 실린더에 총알 몇발이 남아있지만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어갔다. 테이저건을 재장전하기 위해 카트리지를 딸칵 빼는 소리와 함께 여자는 한 손에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남은 총알 중 한개가 그녀의 오른팔에 맞아 그만 칼이 떨어졌다. 하지만 손톱과 이빨이 남아있어 아까와 같이 할퀴려 달려들었다. 아직도 불타오르는 정신과 다르게 이미 재가 되어버린 그녀의 체력은 버티질 못했다. 둔한 움직임에 테이저건이 그녀에게 적중했다. 이미 풀린 동공은 유지한 채 그녀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녀가 입은 옷에서는 마르지 않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순직한 경찰관들의 피일까. 의문을 해결하기 전에 여자를 옮기기로 했다. 아쉽게도 그녀와 홍형사가 얘기하게 된 공간은 경찰서 야외의 긴장이 넘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곳이 아니라 쇠창살로 철저히 막혀 일이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는 유치장이었다.

“당신도 이상한 자세로 지내는 군요… 허리는 괜찮으십니까?”

허리를 꺾어 다리 사이로 머리를 넣은 자세로 있었다. 당최가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마광이랑 관련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피해자시잖아요. 그런데 이미 경찰관을 두명이나 해치셨어요. 그들은 오히려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이었다구요.”

그 말을 듣고는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푸석푸석하고 뒤엉킨 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피투성이였던 옷은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갈아입어 평범해보였다. 30초는 그냥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랑 그 악마랑 만나게 할 생각은 있어요?”

그녀를 가득채운 것은 마광이었다.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는 정당하게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당신은 더이상 죄를 무겁게 만들 수 없어요. 당신은 피해자였습니다. 당연히 이해를 받아야하고 당연히 저들과는 다르게 살아야해요. 만일 당신이 복수에 눈이 멀어 저… 악마처럼 변한다면 당신의 세상은 그때야 말로 그 악마의 뜻대로 무너지는 거라구요. 제 눈 앞에서는 절대 그런일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더이상은 말이죠.”

홍형사는 단호했다. 억울한 마음도 분노도 알지만 그것은 오히려 여자를 집어삼킬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상 밑으로 떨어지는 그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또 그 소리군요. 제 세상은 이미 무너졌어요. 그 악마를 만나기 이전부터요. 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잖아요. 제가 선량한 시민 같아요? 이제와서 악마를 죽인 악마가 되지 말라는 건 가혹한 소리에요. 그리고……당신 거기 갔었죠? 그런데도 정의로운 소리가 잘도 나오고 참 부럽네요. 다시 가요. 다시 갔다와서 얘기해요. 집이 중요한게 아니니까.”

그녀는 마치 힌트를 주듯이 얘기했다. 그녀에게 마광에 대한 것을 캐물으려던 홍형사는 말문이 막혔다. 무엇보다 자신을 마광의 은신처부터 감시한게 아닌가 하며 소름이 돋았다.

“집이 중요한게 아니라뇨? 거기에 다른 것이 있나요? 혹시 중요 단서라도?”

여자는 다시 쳐다보기만 했다. 자신이 한 말을 마지막으로 정말 다시 갔다오기 전까지는 대화를 일체 하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홍형사는 나가기 전 절대 그 둘을 만나게, 아니 마주치는 상황도 만들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면서 자리를 나섰다. 그 와중 김형사는 늦게나마 도착해 소식을 듣고 마광한테 가 있던 상태였다. 홍형사가 도착했을 때 둘은 대화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희한하게 김형사가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난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서 온거지 내가 너를 왜 보호하러 달려오겠어.”

마광은 김형사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을 했다.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그거면 됐습니다. 저에겐 그거면 충분해요. 당신은 모르면 됩니다.”

왠일인지 김형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고민에 빠지 듯 마광을 무시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면서 홍형사와 마주치고 소스랗게 놀라더니 말을 더듬다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 김형사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홍형사 생각에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홍형사는 본인 락커에서 등산복과 플래쉬, 건전지 두어개를 꺼내 가방에 챙기고 바로 떠났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각이지만 도저히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어둠속에서 더 잘이보이는 것도 있는 것이다. 한편 홍형사 눈에서 사라진 김형사는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다. 두 경찰관이 흘린 피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고 하얀색 스프레이로 시신의 자세를 묘사하고 있었다. ‘모른다.’, ‘어수룩하다.’ 형사일을 해오며 수없이 들어온 잔소리였다. 통찰력이니 지식이니 모자라도 열정하나로 달려온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마저 꺾인다면 이 일은 정말로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후회 속에서 그는 마광의 말이 머리를 맴돈다. 언제까지 모른채로 살 것인가. 언제까지 홍형사가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는 건가. 존재에 의구심이 드는 김두식이었다. 슬픔에 잠겨 행한 객기일까 현장을 지키던 순경들을 보내고 자신이 현장을 다시 조사해야겠다고 말을 했다. 혼자 남은 그 장소에서 김형사는 골똘히 여자의 지난 행적을 상상했다. ‘흔적이 끊겼던 강, 그 강이 지나는 곳, 왜 신고자는 없는 것인가. 애초에 그 곳을 떠난 것이 아니라면 그럴싸한 추리가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산을 떠나기 전 버려진 등산로를 걷는 자기들을 보고 미행하기 시작했다면, 그 후로 오히려 우리가 그녀를 이 곳까지 데려온 것이라면……결국 내 잘못이란 건가… 그렇게 둘 순 없지.‘ 김형사는 자기들이 타고 왔던 차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도착한 김형사는 차량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홍형사 혼자서 다시 두억산 마광의 아지트로 향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이 양반이… 혼자 위험하게…’ 김형사는 머리로 걱정하면서 심장으론 서운했다. 곧 뒤따라 두억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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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어두운 새벽 4시 홍형사가 도달한 곳은 절벽이 아닌 골짜기 반대편 컨테이너였다. 김형사의 얘기로는 컨테이너 너머로 길이 있었던 것 같다고 들었을 때 어느 예감이 들었다. 확인하기 위해 옮긴 발길 끝에는 나뭇잎이 가득 쌓인 길이 보였다. 어쩌면 낙엽이 가득 쌓인 것일 뿐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묘한 느낌의 확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디선가 주워온 기다란 나뭇가지를 한손에 들고 길을 비추며 가고 있었다. 바닥을 푹푹 찌르며 바닥으로 끝없이 꺼지는 것 같은 낙엽을 피해 걸어갔다. 앞으로 향할 수록 클라이밍 절벽이 있는 봉우리와의 사이를 가르던 골짜기가 가파르게 좁아져갔다. 온 몸의 긴장으로 낙엽 사이사이에 있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들이 귀옆에 있는 것 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그 때 덩치가 있는 생물로 인한 부스럭 소리가 앞에서 났다. 희미하고 커다란 도넛 모양의 빛은 반대편 봉우리로 뉘여진 나무를 비췄다. 나름 줄 서너개가 연결되어있고 윗판이 평평하게 깎여있는 것으로 보아 다리로 사용된 것 같았다. 하지만 속이 썩어있을 수도 있고 길이도 4~5미터는 되어 건널 수 있다는 확신은 안들었다. 천천히 발을 올렸다. 발끝부터 천천히 내려 뒷꿈치가 닿을 때 느껴지는 나무의 진동이 뼈를 통해 느껴졌다. 땅을 디디던 발을 들어올리자 체중이 실린 나무가 크게 끼익대는 소리를 냈다. 그대로 몸을 멈춘 홍형사는 빠르고 신속하게 생각했다. 이마를 타고 눈썹을 지나 속눈썹에 맺힌 땀이 눈동자에 닿으려할 때 격렬한 머리움직임으로 인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발을 디딜 때 마다 들리는 소름끼치는 나무의 삐걱임 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왔지만 그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절반을 지나고 나서 본 나무기둥은 끄트머리가 정강이 쯤 위치한 것 같았다. 잔뜩 예민해진 피부에 옷 안감이 마구 부딪혀 쓸리 듯 고통스러웠지만 앞으로 전진했다. 이제 막 2/3 위치에 발이 닿을 때 나무는 한계가 왔음을 알렸다. 끊어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쩌적’, ‘쩌저적’ 그리고 마지막 발이 닿는 순간 나무는 갈라지고 몸이 공중에 뜨는 기분이 들었다. 몸을 앞으로 숙여 땅을 디뎠을 때 나무는 묶여있던 밧줄에 의해 벽에 충돌하며 큰 소리를 냈다. 소란이 잦아들고 모든 동물, 벌레들이 조용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신음소리 하나만 들렸다. 홍형사가 오른쪽 다리를 붙잡고는 쓰러져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끊어져 채찍처럼 홍형사의 다리를 강타한 것이다. 지름 2.5센티미터로 두께가 있던 밧줄이라 충격량이 꽤나 컸던 모양이다. 고통에 한동안은 제대로 걷기 힘들어 보였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홍형사는 반짝거리는 빛을 등진 채 숲 속으로 들어갔다.

김형사는 홍형사를 뒤따라 왔다. 전과는 달리 등산화 정도는 빌려서 신고왔다. 홍형사보다 대략 30분 차이로 늦게 출발했지만 열정은 그 차이를 채우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가 샛길 경고판을 넘어갈 때 멀리서 큰 충돌소리가 들렸다. 그가 유추할 수 있는 장소는 두군데 밖에 없었다. 절벽과 컨테이너. 절벽에 갔을 때는 그럴싸하게 소리를 낼만한게 없었다.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아직 가지 않은 곳이 한 곳 있었다. 신경이 쓰일 때 확실하게 확인하고 왔어야 했던 것인데 그게 사고를 낸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조바심이 들었다. 얼른 뛰어갔다. 손전등이 다음 길을 비추기도 전에 다리가 앞을 향해 뻗어있었다. 컨테이너에 도착하고 그 뒤로 향했다. 바닥의 낙엽이 헤집어진 것을 보고 그제서야 확신이 들었다. ‘여기구나’ 거침없이 앞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다리가 깊숙히 빠지더라도 유연하게 다리를 쭉뻗어 지탱하고 다시 올라와 겁없이 전진했다. 좁아지는 골짜기를 보면서 김형사도 얼추 감이 왔다. ‘이 곳으로 가면 그 미친놈이 말한 곳이 나오겠구나.’ 그런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은 골반 쯤 오는 높이에 있던 밧줄이었다. 팽팽하고 단단한 것이 보통 물건을 묶어놓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플래쉬에 비친 하얀 대각선을 따라 내려가니 나무 통나무가 매달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반대편을 비추니 마찬가지로 통나무가 매달려 있었다. 대신 한쪽 밧줄 하나만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곳으로 홍형사가 지나갔는데 길이 없으니 넘어갈 수가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러다 남은 선택지가 떠올랐다. 암벽등반한 곳에는 홍형사가 설치한 밧줄이 있었다.

홍형사는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고통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붙잡고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방향도 모른채 앞으로 가던 홍형사는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발목에 닿는 것을 느꼈다. 순간 소름돋는 그 느낌은 이전에 왔을 때 그 장소에서 느낀 것과 같았다. 주변에 있다. 공기가 발목을 스치는 방향으로 유추하여 다시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갔다. 나아갈 수 록 나무 간 거리가 듬성듬성해졌다. 덕분에 나무 사이를 옮겨가며 이동하는 것은 힘들어져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주변에 쓸만한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된 홍형사는 나무에 기대 앉아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 주변 나뭇가지 여러개를 다리에 대고 압박하여 묶었다. 응급처치는 했으나 앞으로가 문제였다. 일이 풀리지 않아 하늘을 보며 신세한탄을 하고 있을 때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정면으로 내리고 눈을 크게 뜬 홍형사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고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방향을 잡은 홍형사는 나무를 잡고 일어나 소리를 향해 다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온 몸을 공기가 짖누르는 장소에 도착하니 반원의 공터가 있고 반원의 중심점에는 성인 어른 키를 조금 넘는 문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문 주변에 벽이나 울타리도 없었다. 지름 끝점에서 멀리 이어진 높은 벽은 옳게 온 것을 인증해주었다. 아까부터 들리던 개가 짖는 소리와 함께 이제는 소리 하나가 같이 들렸다. 사람 소리인데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두식이!’ 김형사가 와있다는 것을 알게된 홍형사는 도와주기 위해 문 옆으로 지나가려 했다. 밤에는 까맣게 보이던 그 개는 놓치지 않았다. 바로 뒤돌아 홍형사가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김형사는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개가 향하고 있는 곳에 홍형사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나 다친 것을 몰랐다.

“선배님! 그 녀석 선배님한테 갑니다!” 소리 친 김형사는 곧장 개를 뒤쫓아 갔다. 희미하게 들린 소리에 문 옆에서 멈춘 홍형사는 어두운 숲 아래에서 나뭇잎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나는 것을 들었다. ‘아 정말 나한테 왜그래.’ 아픈 다리를 들고 뒤로 돌아 팔과 다리를 열심히 휘저었다. 눈물이 고이고 심장소리는 커져 상황파악이 힘들었다. 동시에 짖는 소리가 점점커지더니 기어이 뒤에 붙어있는 것 처럼 커졌다. 마지막 용기로 뒤를 돌아 본 홍형사. 오른쪽 다리에 고통이 한번에 몰려와 주저앉아 붙잡고는 한 곳을 응시했다. 개는 문 옆에 멈춘 상태로 짖고 있었다. 왜인지 더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개를 뒤쫓던 김형사는 자빠진 홍형사를 보고서는 개를 제압하려 했다. 몸을 낮추고 천천히 짖는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몸을 던져 모가지를 제압하려 했더니 귀신같이 알아채고 몸을 틀어 피했다. 그러고는 바로 공격하지 않고 뒤로 돌아 자신의 위치를 안쪽으로 김형사를 바깥쪽으로 놓았다. 마치 김형사를 내쫓으려는 것 같았다. 둘의 간격은 유지되었다.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김형사가 문 옆을 지나니 개는 그제서야 그 자리에 멈춰 짖기 시작했다. 홍형사는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문만 덜렁 있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하고 말이다. 개가 벽이자 울타리였다. 그래서 저 개의 털이 새빨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문은 개가 지키고 있고 다리를 다쳐 밧줄을 타지도 못한다. 앞뒤가 막힌 상황에서 김형사가 문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선배님. 저 개가 여기를 지킨다고 치면 문이 대체 왜 필요하죠? 사이비에 빠진 것 같으니 이것도 종교적인 부분으로 해서

홍형사는 솔깃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뭔가 심하게 의미를 두긴하더라. 집안 인테리어며 이상하게 기역으로 꺾인 나무. 그리고 배치가 뭔가를 연상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해.”

김형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향해 다가갔다. 홍형사는 차마 큰소리는 내지 못해 억눌린 목소리로 김형사를 불렀다. 듣는 기색도 없이 문 앞에 선 김형사는 문 옆에 자세를 한껏 낮추고 날카로운 이빨과 잇몸을 드러낸 빨간 털의 개와 불과 1m 떨어져있었다. 묘한 확신이 있었다. 이 녀석은 분명히 저 안에서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지금은 코앞에 있는데도 위협만한다. 이 개는 철저하게 훈련받은 것이다. 김형사는 떨리는 개의 잇몸처럼 떨리는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소름돋게 철이 마찰되는 소리 뒤로 낙엽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나무밖에 없었다. ‘문을 통과하면 주인으로 인식하는 구나!’ 김형사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홍형사를 부축하고선 문을 통해 진짜 마광의 은신처로 향했다. 홍형사는 재채기를 하려다 실패한 느낌이었지만 웃음을 모두 숨기지 못하는 김형사를 보고서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문을 지나고 나서는 커다란 우물에 들어선 것 처럼 습하고 뭔가가 썩은 냄새가 났다. 햇볕이 뜨거웠던 그 날과 달리 달도 사라진 지금, 마치 지켜만 보던 하늘이 이제서야 진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거친 숨소리와 야생동물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서 들리는 것만 같다. 어두운 숲속을 플래쉬하나에 의존해 가던 중 구름에 난 구멍사이로 달이 떠올랐다. 달빛은 숲을 통과한 형사들에게 마당을 보여주었다. 둘은 마광의 집으로 향했다. 우선 홍형사의 다리부터 봐야했다. 임시로 덧댄 나뭇가지들은 이미 모두 부러져 있었다. 서로 엉킨 나뭇가지들과 붕대를 제거하고 옷을 들춰보니 밧줄모양으로 멍이들고 부어있었다. 홍형사는 그 순간 종아리 안쪽에 칼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김형사는 보이는 양동이에 물을 받아와 우선 다리를 씻어냈고 덧댈만한 것을 위해 나무 가구를 부쉈다. 그 중 종아리 길이만한 토막 두개를 줏어서는 홍형사 손에 쥐어주었다. 나무토막을 받은 홍형사는 저번 수색당시 주방 위에 달린 서랍에 구급상자로 보이는 것이 있던 것을 말했다. 김형사는 바로 꺼내 옆에다 놓고 하얀색 뚜껑을 열었다. 의료용 가위, 메스, 붕대, 의료용 바늘과 실, 말라붙은 눈알 3개, 반창고, 연고가 들어있었다. 무언가 낯선 것을 보고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오리란 사실 쉽지 않다. 마광에게는 설계하지 않아도 쉽게 불러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아니 대체 왜! 눈알을! 여기저기 보관하는 거냐고!”

김형사는 바닥에 화풀이를 하고선 붕대를 빠르게 집고 뒤로 돌았다. 그러고선 나무토막 두개를 더 집어 홍형사 다리에 덧댔다. 확실히 단단한 부목으로 지지하니 괜찮은 모양이다. 하지만 혼자서 걷기에는 고통이 강한지 밖에 있던 빨래건조대를 목발 대용으로 사용했다. 김형사는 홍형사가 걷는 것을 잠깐 지켜보더니 이내 밖으로 향했다.

“선배님. 말씀하신 밭에 가서 땅 좀 파볼게요. 뭐라도 나오겠죠. 괜히 무리 하시진 마시고 증거만 잔뜩 찾아와요.”

김형사는 걱정이 컸는지 괜한 말을 던지고 밭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홍형사는 눈 앞의 광경이 선명해짐을 느꼈다. 빨랫건조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좀체 소리가 잦아들지를 않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찢어진 벽지들과 장판들 사이로 회색 가루와 시멘트냄새가 흘러나왔다. 밖으로 나온 홍형사는 자연스레 마당 중앙에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보기만해도 머릿속으로 상상이 됐다. 나무에 묶인 밧줄, 붉게 물든 밧줄 끝에서 떨어진 피, 그 아래에 있는 피웅덩이. 역겹다. 그녀에게 생겨난 복수심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자신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고 생각했다.

두 형사가 마광을 다시 사회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 그들의 만남은 성사되었다.

분명히 홍형사가 몇번이고 강조했지만 다른 간부들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이미 경찰 둘이 죽었다. 날이 밝으면 이리저리 소문이 날 것이 뻔하다. 기자들이 몰려들고 지역이 흉흉하다는 소리가 나돌면 본인들의 위치가 위험해질 것은 뻔했다. 이미 용의자 둘이 본인들 손에 있는데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둘의 취조는 동시에 이뤄졌다. 빈 방 하나만이 둘을 가르고 있었다. 아무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싯간에 눈치챘다. 그 때 그곳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묘한 일이었다. 실제로 방 하나를 사이에 뒀음에도 둘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영적인 연결은 가운데 방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 속에서 둘은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홍형사가 서있던 자리에는 마광이 있었다. 홍형사 앞에 있는 밧줄에는 그녀가 묶여있었다.

마광은 자리를 잠시동안 비웠다.

잠시 후 나타난 마광은 나무에 매달린 그녀 앞에 낮은 의자를 끌고와 앉았다. 그녀의 땅을 향한 고개와 마광의 올려다보는 고개가 절묘하게 맞아 둘의 시선은 어떻게든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동공으로 여기저기 쳐다보지만 영혼이라고는 볼 수 없는 미소와 검은 눈동자에 빨려들어가 듯 떨림은 진정되었다.

“그겁니다. 저의 미소로 안정을 되찾으세요. 저는 항상 고민한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마지막 가는 길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까. 이게 그 고민의 결과에요. 멋지지 않나요? 마지막을 미소와 눈맞춤으로 끝낸다니. 이런 죽음만큼 아름다운 건 없습니다.”

미쳤다. 순수하게 인간과는 다른 종이다. 본인의 아름다움이라는 철학을 이행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는다. 죄악감은 없고 오히려 숭고함, 본인의 행위가 신적인 행위라 생각하는 듯한 표현과 말투가 너무나 역겨웠다. 마광은 해가지면 집에 들어가 자고 해가 뜨면 다시 나와 본인의 얼굴을 들이민다. 이러기를 피해자가 죽을 때까지 몇날 몇일이고 반복한다. 피해자는 결국에 미쳐 마광에 동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광은 되려 화를 내며 ‘당신은 타락했어’라며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는 “죽을 때는 웃으면 안돼. 웃는 것을 바라보며 영혼을 멀리 떠나보내야 되는거야…”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시체를 처리한다. 마치 장인이 작품을 실패하면 가차없이 깨버리는 것처럼 본인을 그 쯤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마광을 받아들였다. 미치지도 않았다. 웃음기도 없었다. 표정에는 아무것도 남지않았다.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마광이 보낸 다른 종의 영혼. 마냥 미소만 짓던 마광도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정색을 하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둘의 눈맞춤은 해가 지고도 계속되었다. 다시 해가 떴을 때 그 자리에는 ‘ㄱ’자로 꺾인 나무와 끊어진 밧줄, 아래로는 피웅덩이만 남고 모든 주연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홍형사가 나타났다. 그는 바닥에서 뭔가가 음푹 패인 흔적을 보았다. 마광이 앉아있던 의자가 있던 그 자리다. 의자의 흔적만 있고 의자는 없다. 홍형사는 섬짓한 느낌이 들었다. 김형사는 무언갈 찾았다며 홍형사를 불렀다.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린 홍형사는 깔끔하게 잘린 단면을 가진 밧줄과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구덩이 옆 흙 고구마가 줄기에 매달려 흔들림을 주고 있었다.

“선배님. 표정이 너무 심각한대요. 제가 찾은게 뭐 있는거에요?” 의아한 김형사에게 홍형사는 말했다. “그 놈 그거… 자살했어. 그런데 실패한거야. 아니 여자가 살려준거야. 왜인지는 나도 몰라. 그런데 둘이 가까이도 있으면 안돼. 우리가 하도 둘을 못보게 가로막으니까. 우릴 내보내려고 암시를 주듯 던진거야.”

홍형사는 아차 싶다는 표정을 짓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부러진 다리를 보면서 웃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전화소리가 울렸다. 두 형사의 것은 아니었다. 집 안에서 나는 듯 했다. 홍형사를 어깨에 매단 듯한 둘은 방 구석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전선을 내보인 전화기를 발견했다. 홍형사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남성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옳았어…내가…옳았어…”

소리를 듣겠다고 수화기에 귀를 갖다댄 두 형사는 대답을 할 생각조차 못했다.

홍형사는 꺼림칙했다. 마광이 옳았다고 말하면서 썩 기분이 나쁘다는 듯한 목소리여서 그런 걸까.

조용한 적막 속 수화기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먼 거리에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오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안심이었다. 형사로써 처음드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추악한 범죄자라도 법의 심판까지는 받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 놈은 예외다. 오로지 즉각적인 죽음만이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고 정의가 존재함을 알리는 것이다.

“가서 욕봐라. 너 때문이라도 사후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홍형사의 말이 끝나자 마자 대답이 돌아왔다.

“너희가…마지막이야…”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홍형사는 급하게 주변에서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손에 들었다. 김형사는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들었다. 개 짖는 소리가 잦아들다가 이내 정적을 되찾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공기가 뜨거워져 골짜기 내에선 바람이 꽤나 불었다. 바람에 의해 부딪혀 나는 나뭇잎소리가 다른 것을 모두 덮었다. 바람과 함께 다가옴을 알고 있어도 어디있는지도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친다리에 덧댄 부목을 앞으로 내민 홍형사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뒤 창문으로 향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해가 숲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뜨거운 한 여름의 태양은 공기를 금방 뎁혔고 숲에서 집이 있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곧 떨어져 나갈듯 매달려 있던 문이 비명소리를 내면서 분위기를 더 소름돋게 만들었다. 두 형사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깥을 안 볼수가 없었다. 고개를 내민 김형사가 본 것은 나무에 칼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상처난 목이 보였다. 바람이 가하는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얇은 팔다리는 공기를 가르고 나무에 상처를 주었다. 그녀 허리쯤 되는 높이의 나무껍질은 전부 사라졌다. 연한 갈색의 속살을 드러낸 나무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때 그녀는 손목을 그었다. 그 모습에 놀라 김형사는 뛰쳐나왔고 홍형사도 절뚝거리며 뒤따라 나왔다.

“잠깐만요! 이젠 정말 진심입니다. 제발 멈춰주세요. 이미 끝났잖아요. 마광은 이미 죽었잖아요. 좋아요. 당신이 옳았어요. 그 놈은 마땅히 죽음으로써만 죄값을 받을 수 있는 놈이에요. 하지만 당신은……대체 뭐가 되신것죠…? 이젠 정말 모르겠으니까 제발요! 알려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구요!”

홍형사는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묻…어……야돼” 거친 목소리로 작게 속삭인 한마디는 바람소리에 묻혔다. 홍형사에겐 바람에 휘날리는 커텐 사이로 햇빛을 보듯이 유독 명확하게 그러나 다채롭게 보였다. ‘죽…어……야돼?? 젠장.’ 말리는 김형사를 뿌리치고 달려갔다. 이미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은 잊었다. 눈은 나무에 피로 무언갈 그리는 그녀에 집중되었고 귀는 심장소리로 가득했다. 그녀에게 도달할 때쯤 나무에 무언가를 쓴 그녀는 홍형사를 향해 그대로 피를 뿌렸다. 눈에 피를 맞은 홍형사는 동시에 뼈가 다리 근육을 찌르는 고통을 느꼈다. 그대로 넘어진 홍형사. 홍형사에게 다가가는 그녀였지만 김형사와 대척하게 되었다. 고통에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진 홍형사와 그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김형사와 그녀. 햇빛는 이제 마당까지 도달했다. 어디선가 굉음이 났고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무가 우지끈하는 소리가 났다. 폐가 답답해지는 기름 냄새가 났다. 김형사는 아차 싶었다. 마냥 트라우마에 갇혀 가해자가 된 피해자인줄 알았으나 아니었던 모양이다. 벽을 따라 좁게 난 길로 포크레인이 거대한 바위를 들고 나타났다. 그 뒤로 허리가 꺾인채 기괴하게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걷는 여성들 서너명이서 기름을 뿌리고 있었다. 서서히 마당으로 나오며 그들의 얼굴을 명확하게 드러났다. 고개를 든 그들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마치 세상이 전보다 잘 보인다는 듯이 잘만 걸어다녔다. 게다가 한껏 들어올린 입꼬리는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거침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위아래로 정신없이 덜그럭거리는 포크레인 앞에 있던 유리는 햇빛을 반사했다. 반사된 햇빛은 포크레인이 향하던 방향으로 뻗어 가다가 김형사 눈에 안착했고 그만 균형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자세를 낮추고 몸을 던졌다. 그리고 김형사의 아킬레스건을 노려 칼을 뻗었다. 찢겨나간 힘줄은 단단한 허벅지를 가진 김형사를 지탱하지 못했다. 홍형사 옆에 쓰러진 김형사. 둘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 사이 포크레인이 가져온 바위는 두 형사와 불과 1m되는 거리에 있었다. 기름을 뿌리던 여성 네명은 두명씩 형사를 한 명씩 맡아 자리를 옮겼다. 피로 그어진 빨간 글씨 앞에 놓인 둘. 바위는 바로 위에 있었다. 그녀는 포크레인에서 내린 여성에게서 성냥 하나를 받았다. 그리고 숲을 향해 걸어갔다. 단테 신곡 지옥편 삽화에 나올만한 장면이었다. 저 온몸이 굽이치는 여성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여름에 나무들을 붉게 물들일까. 앞도 뒤도 막힌 이 상황에 포크레인이 큰 엔진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유압식 기계팔이 힘겹게 들어올린 바위는 두 형사 위에 놓여졌다. 이게 끝이구나 생각했다. 이틀인가 하루인가 시간이 흘러간 길이를 가늠할 수 가 없었다. 피곤한 정도로 봐서 이틀인것 같았다. 잠들고 싶었다. 저 바위가 영원한 비석이 되어 흔적을 남겼으면 했다. 그녀는 팔을 들고 손목을 아래로 꺾었다. 바위는 잠깐 하늘로 솟았다가 서서히 미끄러져 땅으로 떨어졌고 빨갛게 물들었다. 하늘로 치솟은 두 눈은 용케 그 자리에 있었고 그들을 마주하러 온 그녀는 손을 가슴 앞에 두고 수인을 지었다. 차마 마지막까지 밝고 맑은 하늘을 보던 눈에 손을 뻗어 어둠을 선사했다.

그녀는, 그녀들은 자리를 지켰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불은 여름 속 사우나처럼 분지를 뜨겁게 달궜다. 까만연기는 도망치듯이 그녀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1개의 댓글

MrJ
2022.11.15

몇만자야?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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