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장마, 비의 동물원

이곳에 있는 동안은 우리는 모두가 비를 맞았다.

한 번도 젖지 않은 적은 없고, 한 번도 피하지 않은 적이 없다. 오래된 모든 비는

여기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때로는 물이 되고, 술이 되기도 했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같은 비가 내린다.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우리는 세상의 여기와 저기 어딘가쯤인 동물원에 있었다.

동물원 따위는 예정에 없었고, 당장에 소나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뉴스에서는 장마와의 즐거운 이별을 전했지만, 우리를 향한 장마의 마음은 그렇게

가벼운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점심쯤 만나 재미없는 요기를 하고, 즉흥적으로 동물원 가는 버스에 탔다.

도착까지 말없이 창에 머리를 기대고, 드문드문 비치는 햇빛에 미간을 좁혔다.

프렌치 네일을 한 손을 왼손으로 잡은 나는 조금은 축축하다고 생각했다.

선잠에서 깨어 손을 뺐다.

멋쩍어진 나는 아직 남아 있을 것 같은 축축한 손의 냄새를 맡았다.

"바보 같아"

버스는 우직이 길을 갔고, 동물원에 도착했다. 안내를 보니 입구에서도 한참을 갈 요량이었다.

나는 노점에서 번데기를 샀다.

“징그러워"

그래도 우리는 사이좋게 나누어 먹고 사부작 걸었다. 개찰구를 지나

편의점에서 우산 같은 걸 샀고

우리는 드디어 나란히 코끼리 앞에 섰다.

“이름이 뭐 저래. 코가 길어서 코길이, 코기리, 코끼리잖아. 한심해.”

코끼리는 보란 듯이 한 무더기의 대변을 늘어놓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윽, 많이도 싸네"

코끼리의 똥 냄새를 뒤로하고 우리는 사자 우리에 갔지만 사자는 부재중이었다.

“뭐야 사자도 없고, 비 온다고 일도 안 하고, 나쁜 놈들"

다음은 기린이었고, 그다음 공작새였고, 원숭이 순이었지만 모두 부재중이었다.

“뭐가 이래!”

다음의 낙타는 비가 즐거운 듯 혀를 내밀고 비를 먹고 있었다.

“저거 타조?”

“쌍봉낙타. 모래 위에 살아"

“아 맞아 낙타, 뭘 먹는 거야"

“빗물 마시나 봐"

“하긴 자기가 살던 곳은 비가 없으니 신기하겠지"

나는 낙타 우리 앞에 알림판을 읽었다

“여기서 태어났대"

“전부 가짜야. 모조리"

우리는 거세진 비를 피하려 처마 밑에 서있었다. 견학을 온 유치원생들은 노란 모자를 쓰고

우리와 나란히 비를 피하고 있었다. 엄마 오리를 따라 줄지어 가는 오리떼처럼 보였다.

“처음에 비 올 때 생각나?”

“우리 만난 8월 26일?”

“아니 네가 태어나서 처음 본 비 오는 날"

“전혀"

“난 생각나. 유치원 버스에서 내렸을 때 비가 많아서 신발이 찰박찰박했거든.

발가락에 물이 찰랑찰랑. 너무 억울했어. 내가 좋아하는 구두였는데... 그때는 억울하다는 감정은

몰랐지만. 울면서 엄마한테 갔는데 구두랑 타이즈 벗겨주고 안아주면서 괜찮다고 해줬어.

나중에는 뽀송뽀송한 기분이었고, 비누냄새가 났어. 그리고 우리 이제 그만해"

“그래도 코뿔소는 보고 가자"

“왜?”

“ 뿔도 두 개나 있고, 피부는 장갑차만큼이나 두꺼운데 초식동물이야. 그리고 말목에

속하는데 이름은 코뿔소래.”

“우리 같네"

코뿔소 역시 부재중이었고, 가녀린 철창만이 우리를 가리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비를 맞으며

코뿔소를 기다렸다. 그녀는 몇 번인가 철창을 발로 걷어찼다.

알림판에는 '코뿔소는 아침과 저녁에 나뭇잎을 먹고 낮에는 그늘에 쉰다'라고 쓰여있었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 노을은 가까웠지만 코뿔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절기의 폐장시간은 7시였고, 30분 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예전에 얼마큼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코끼리 한 마리 정도는 훔쳐 올 수 있어. 게다가 코뿔소는 덤으로"

그녀는 반달눈을 만들며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하지만 끝나지 않은 장마에 , 오늘의 코끼리는 무심히 엄청난 똥을 쌌고,

코뿔소는 보이지도 않았다.

Smashing Pumpkins - Raindrops + Sunsh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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