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자작 소설] 광역시 히어로 집단 2화

2화

 

버스 안에서 그녀를 만나지 2주일 정도가 지났다.

 

처음 얼마간은 버스에서 또 다시 그녀를 마주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별다른 일없이 지나갔고
나의 일상도 평범한 대학생의 생활대로 흘러갔다.

 

35℃가 넘는 더운 여름 날, 오후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나는 레포트를 쓰기 위해 동네 카페로 들어갔다.
집에서는 게임이나 TV에 정신이 팔려 집중이 안되기 때문에
평소 레포트를 쓸 때면 자주 찾던 단골 카페였다.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에서 기다린지 5분 정도 지났을 때
카페 정리를 하느라 바빴던지 카페 이모가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주문을 받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충전할 수 있는 한적한 자리를 찾는데,
그곳에는 얼마 전 버스에서 본 그녀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찾았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앞에 앉았다.

 

"여전히 기척을 잘 숨기네요.
 아주머니가 언제 주문을 받나 계속 지켜봤어요."

 

카페 이모가 바빠서 그랬던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걸 물어봐야 했다.

 

"제가 여기로 오는걸 어떻게 알았어요?"

 

저번에 만났을 때 연락처는 커녕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 신상을 알 수 있을리 없고
무엇보다 집에 가기 전에 버스에서 내려서 사는 곳도 몰랐을 텐데
그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내가 자주 다니는 카페에 앉아 있던 것이다.

 

'혹시 이 얘도 이 근처에 사는 걸까?'

 

이 동네는 아파트 등 주거단지가 많으니 우연히 마주친 것일 수도 있었다.

 

"저번에 말했잖아요. 저는 목표를 찾아내는 초능력이 있다고."

 

그녀는 퍽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활짝 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설마 2주 동안 나를 찾아다녔을 리는 없고
우연이라는 것은 때때로 정말 무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미리 시켜놓은 아이스티를 빨대로 마시며

"그래서 그동안 진지하게 고민해봤나요?"
라고 물었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지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왠지 더 귀찮아질 것만 같아서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그동안 제가 가지고 있다는 힘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능력이 있다는 건데
 이 능력이 정말 사회정의 실현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솔직히 눈에 잘 띄지 않는게 초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듣기를 바라며 결언하듯 한 박자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사회정의든 뭐든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필요해요.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걸로는 앞서 말한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려워요
 히어로는 커녕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기에도 벅차겠죠.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거에요.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초능력이 아니에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번 아이스티를 마셨다.
다 마신 아이스티에서 얼음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좀 놀랐어요."

 

그야 그렇겠지. 이렇게 예쁜 얘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수상한 사람과 엮이는 것은 위험하니까 어쩔 수 없다.

 

"자기부정이라니. 생각보다 클래식한 편이네요."

자기부정? 이건 뭔 소리라니.

"자신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은
 처음 자신의 능력을 자각했을 때 히어로들이 자주 느끼는 생각이죠.
 그냥 제 말을 믿으세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차피 믿기 어려울테니 지금 당장은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자신을 부정하는 당신을 제가 이끌어 줄게요.
 저는 네비게이터니까."

 

여전히 말이 안통하는 여자구만.
나는 다시 한번 지끈 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었다.

 

"사회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데요?"

 

그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자리에 옮겨 앉았다.
그리고 귓속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법 질서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어요.
 다만, 법이라는 성근 그물 사이로 빠져 나가는 나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우리는 그들이 행한 나쁜 행동에 대해 약간이라도 데미지를 주는 일을 할거에요."

 

자경단 역할을 하자는 건가?

 

"나쁜 초능력자랑 싸우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한 일을 하네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쁜 초능력자가 있다면 맞서 싸워야겠지만 아직까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의 능력은 아직 약한 수준이기 때문에 당장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죠.
 틈틈이 초능력도 개발해 나가면서요."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저는 정의심이 그렇게 투철하지 않아요.
 그리고 엄한 짓을 하다가 경찰서에 가는 것은 절대 사양이고요."

 

저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의 손을 덥썩 잡고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절대로 후회하지도 않을꺼구요.
 오늘 하루만 저와 함께 다닌다면 알게 될거에요."
라고 말했다.

 

--

 

우리가 카페에 나설 때는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녀의 제안에 수긍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하루 같이 다니는 것이
나에게 엄청난 해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맞잡은 손이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는 것과
새삼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이 예뻤다는 것이 동행을 거절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생긴 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조금 걷다보니 도착한 곳은 근처의 작은 공원이었다.
나무와 잔디 사이로 작은 산책로가 있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와
팔각정 등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하고 평범한 공원이었다.

그녀는 공원 안을 산책하듯 걸으며 말했다.

 

"목표는 OO고에 다니는 이 동네에서 꽤 유명한 불량청소년이에요.
 어느 학교든 불량청소년은 있기 마련이지만, 이 녀석은 정도가 좀 심하죠.
 상습적으로 약해 보이는 애들을 폭행하는데 '샌드백 1호', '샌드백 2호'라는
 멸칭을 붙인 다음 마구잡이로 발로 차는 녀석이에요.
 벌써 폭행피해자 한둘이 아니고 이대로 가다간 더 많아지겠죠.
 태권도를 오래했고 장차 진로도 이쪽으로 잡은 듯 한데
 자신의 실력을 믿고 주변을 괴롭히는 인물의 장래는 뻔해요.
 우리는 이곳에서 녀석을 혼내줄 생각이에요."

 

"저기..."

 

그녀는 질문이 있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싸움같은 거 해본 적이 없어요. 
 상대가 고등학생이긴 하지만 혼내줄 자신같은 건 없는데요."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메고 있는 가방에 뭔가를 꺼냈다.
"물론 싸움 같은 걸 하지 않아도 혼내줄 방법을 준비했죠."

 

그것은 뚜껑이 개방된 대용량 음료수 캔과 고무 망치였다.
음료수 캔 밑부분에는 텐트를 칠 때 쓰는 긴 쇠말뚝이 달려 있었다.

 

"이게 뭐에요?"

 

설마 고무망치로 녀석의 머리를 후려치라는 것은 아니겠지.

 

"이 음료수 캔을 저기 보이는 길 바닥에 고정시켜주세요.
제가 말뚝을 달아놨으니 금방할 수 있을 거에요."

 

그녀가 가르킨 길은 잔디 사이로 평평한 돌들을 징검다리처럼 박아놓은 샛길이었다.
이 정도 말뚝이면 잔디에 고정시키는 것은 그다지 힘들 것 같지 않았다.

 

"저는 여기 벤치에 앉아 있을테니 고정이 잘 되었는지 꼭 확인하고 돌아오면 돼요."

 

나는 그녀에게 이상하게 생긴 캔과 고무망치를 건네 받았다.
캔은 생각보다 묵직했는데 밑에 달린 말뚝 이외에도 
캔 안에는 시멘트로 가득차 있었다.
아마도 말뚝으로 캔 밑부분을 관통한 다음 시멘트를 부어 고정시킨 모양이었다.

이게 뭐하는 걸까. 나는 그녀의 지시대로 잔디사이에 캔을 고정시켰다.
말뚝 중간까지는 부드럽게 잘 들어갔지만 예상외로 지반이 단단했던지
수 차례 두들기고 나서야 말뚝 끝까지 캔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굉장히 수상해 보일 수 있는 작업이었지만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공원 안에서도
특히 한적한 길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캔이 잘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자 
그녀는 잠시 벤치에서 쉬고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녀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이거 겉으로 보기엔 데이트 같아 보일 수도 있겠다라고 나도 모르게 흐뭇해 할 때쯤
그녀가 조그만 목소리로 '온다'라고 속삭였다.

 

자연스럽게 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풀어헤친 교복 앞섬에는 명품으로 유명한 티셔츠가 언뜻 보였고
친구와 통화 중인 듯 절반이 욕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껄렁한 걸음걸이가 행동거지를 볼때 질이 좋아보이는 학생은 아닌 듯 했다.

녀석은 통화를 하며 걸어가다가 내가 설치한 캔을 발견하더니
축구를 할 때처럼 있는 힘껏 캔을 걷어 찼다.

 

"아악!"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그자리에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떨어트린 스마트폰의 액정이 박살났는지 
깨진 유리조각같은 부스러기가 흩어졌다.
힘껏 쇠말뚝이나 다름없는 캔을 발로 찼으니
아마 박살난 것은 스마트폰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일어나죠."

 

그녀는 아직 비명이 들리는 길 쪽을 뒤로 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 걸었다.
나는 조금 뒤늦게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끝났나요?"

 

"네. 아마 발가락이나 발목 쪽이 부러졌겠죠."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내 표정이 어떨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주 나쁜 장난을 친 어린애처럼 심장이 쿵쿵 뛰는데?

 

"별로 어렵지는 않았죠? 위험하지도 않구요."

 

"더불어 사회정의가 실현됐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데요?"

 

그녀는 살짝 놀란 듯
"어머, 죄책감이 드나 보군요."
하고 말했다.

 

내 입장에선 나쁜 짓하는 것을 직접 본 것도 아닌데
한 학생을 다치게 한 것이니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이 정도 일이라면 당신 혼자서도 할 수 있지 않나요?
 솔직히 정의가 실현됐다는 보람도 느껴지지 않고
 저는 원래 담이 작아서 이만 빠졌으면 해요."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마치 연인처럼 손을 잡고 걸었다.

 

"오늘 같은 일은 물론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믿을 수 있는 동료가 꼭 필요해요.
 지금껏 혼자라서 할 수 없었던 일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리고 저는 확신해요. 
 지금부터 노력을 한다면 우리는 진짜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걸요."

 

나로서는 그다지 확신이 없는데..

 

"어쨌든 오늘은 이걸로 끝인거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네. 오늘은 이걸로 끝내죠.
 내일 아침 6시에 아까 본 벤치로 나와줄 수 있나요?"

 

"그렇게나 빨리요?"

 

"네. 히어로가 되기 위해서는 단련을 게을리 하면 안되니까요."

 

"단련이라면 어떤걸 말하는 거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기초체력이죠. 편안한 옷차림으로 오세요."

 

기초체력이라. 엄청나게 기본부터 시작하는 구나.
잠깐, 나는 계속하겠다고 한 적 없는데?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일 6시에 봐요라고 말하면서
손을 흔들고 마침 다가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2화 끝

1개의 댓글

2021.07.19

재밌어요~~ 한 가지 아쉬운게 있다면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약한듯 싶은데 다음화에 뭔가 나오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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