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의 여러 판본
『하멜 표류기』의 여러 판본
1668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1653년 타이완으로의 스페르베르호의 불우한 항해에 관한 일지 : 스페르베르호가 제주도에서 좌초된 이유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영토, 지방, 도시, 요새에 관한 특별한 묘사』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간된 후 하멜의 표류 기록은 미지의 나라 조선에 대한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여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에서 여러 판본이 경쟁적으로 출판되었다. 『하멜 표류기』는 이후 극동 아시아를 항해하는 서양의 선실에 비치되어 조선 근해 항해의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멜 표류기』가 열어 놓은 조선에 대한 관심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하멜의 보고서를 받아 본 암스테르담의 동인도 회사 최고 간부들은 바타비아에 있는 총독과 고문관에게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이에 대해 바타비아 상부에서는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에 설치한 무역관에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에 대해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바타비아 총독과 고문관은 이러한 지시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조선과의 교역이 별다른 실익이 없을 것으로 전제하였다.
먼저 “나라 자체가 무척 빈곤할 뿐 아니라 그들(조선인들)이 이방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배척심과 그로 인해 이방인들의 입국 허가를 극구 거부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조선과의 교역에서 별로 기대할 것이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언급한 나라(조선)에서 위세를 부리고 있는 종주국들”, 즉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모두 조선과의 교역에 네덜란드가 개입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에 적합한 무역항이 있는지 여부도 의문시하였다.
데지마 섬의 네덜란드 무역관
바타비아 상부의 지시에 대해 당시 데지마 무역 관장이었던 식스(Six) 역시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최대한 비밀을 보장하여 섬나라 꼬레아의 정세와 현황을 파악해 보았으나, 그 나라는 농업과 어업에 의지하여 연명하고 있는 빈곤한 주민들로 형성되어 있고, 다른 한편 서방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환영하지 않기 때문에” 교역의 의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막강한 두 군주 타르타르(청나라)와 일본의 천황이 조선국에 외국인들이 왕래하는 것을 순순히 응낙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조선과 교역하기 어려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 유럽인과 새로운 접촉을 하고 교역을 하였던 17∼18세기에 조선은 여전히 서양과 별다른 접촉 없이 ‘폐관자수(閉關自 守)’하였다. 이는 유럽인의 관심이 주로 중국에 집중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이 일본 남부 지방과 달리 국제 항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점도 유럽인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간된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이로써 조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유럽인이 구체적으로 조선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결국 직접적인 교류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나가사키항도(長崎港圖)
요약
1. 조선이 농업과 어업에만 의지해서 나라자체가 빈곤하다
2. 이방인들에 대한 배척심이 심하다
3.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교역을 원하지 않는다.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30_0060_0020_0020#ftid_255
쀎쀎
버럭코
년째숙성주
그리고 다들 깜빡하는건데 VOC내부 부패도 잊으면 안됨
당장 바타비아에서 조선 접촉 거부한게 자칫하면 지들 조사받을까봐였음
charlote
일본놈들 입장에서야 지들이 서양교역 독점중이니 조선 소개시키기 싫지 ㅋ 한반도 위치가 좀 폐쇄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