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를 든 기사》
제1화 - 백기의 기사
“백작 각하, 이건 군법 위반입니다!”
“이 자가 기사라뇨. 말도 안 됩니다!”
비난이 가득한 병사들의 목소리가 전쟁터 한복판을 뒤덮었다. 피투성이가 된 천막 안, 의자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피로한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손을 들어 사람들을 제지했다. 그가 바로 델로스 백작, 레오델 폰 델로스.
그 앞엔 우스꽝스럽게 무릎을 꿇은 한 병사가 있었다. 갑옷은 제멋대로 걸쳐져 있고, 검은 닳아 빠진 상태였으며,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와중에도 긴장된 듯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네 이름이… 뭐라 했지?”
“라이넬… 라이넬 마르, 라고 합니다. 그냥 마르라고 불러주십시오, 각하.”
“네가 나를 구한 병사인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하필 그 타이밍에 거기 있었을 뿐입니다.”
주위에서 숨죽인 소리가 들렸다. 전장의 참호가 무너질 때 백작이 매몰될 뻔했던 순간, 한 병사가 미친 듯이 돌진해 백작을 밀쳐냈고, 대신 어깨에 창이 꽂힌 채 실신했다. 바로 그 병사였다. 아무리 용감한 행동이었어도 그는 정식 훈련도 받지 않은 하급 보급병이었다.
레오델 백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같은 자는 검도 못 쓰겠지. 병법도 모를 테고, 말도 제대로 못 탈 것이다.”
“…사실 말 타는 건 조금 배웠습니다. 나귀지만.”
천막 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레오델이 이내 웃었다.
“그래도 네겐 무엇보다 귀한 게 있군.”
“…네?”
“지켜야 할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질 줄 아는 마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릎을 꿇은 병사 앞에 다가갔다.
“자네를 기사로 임명하겠다.”
“…!”
“엉터리 기사라고 놀릴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이 백작은 자네 같은 바보가 더 필요하다.”
그렇게 ‘엉터리 기사’가 델로스 백작가에 탄생했다.
“그러니까! 가르치지 말라니까요. 그건 틀린 검술이에요!”
“틀렸다고? 그건 네가 틀린 걸 아직 모르는 거지. 나는 실전에서 수십 번 이 자세로 살아남았거든!”
“그건 상대가 일부러 봐준 거예요!”
목초지 한켠에서 훈련을 마친 라일이 엉터리 기사, 마르에게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라일은 흙 묻은 나무검을 들고, 마르의 어정쩡한 자세를 따라하다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검술은 너 같은 귀한 재능에겐 안 맞는 건가…”
“검술이 아니라 반쯤 도박이에요. 저건 전술이 아니라 운이에요, 기사님.”
“그래도 나, 지금껏 안 죽었잖아?”
“제가 지켜줘서 그렇죠!”
“어이구, 이제는 날 보호하는 기사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진심이었다.
델로스 백작가는 아름다웠다.
평야를 넘어 이어지는 포도밭, 은은한 향이 감도는 와인 창고, 그리고 마을 중앙에 우뚝 솟은 흰색 탑. 백작의 부인은 광장에서 아이들에게 자수 놓인 옷을 나누어주었고, 그 곁에서 백작은 직접 아이들을 들어 안으며 웃었다.
“너희는 델로스의 미래란다.”
그 말에 아이들은 한껏 어깨를 펴고, 부모들은 고개를 숙였다.
델로스는 ‘힘’보다 ‘마음’으로 다스려지는 땅이었다.
그러나 그 따뜻한 풍경 너머, 검은 말에 탄 사내가 조용히 속삭였다.
“곧 사라질 미래로군.”
그는 왕실의 인장 위에 손가락을 문지르며, 타지 귀족 사절단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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