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단편] 집수리 정사장의 소확행

새벽 바람이 찬 와중 조용한 구식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 차량불빛과 엔진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 시간이면 시계를 안 봐도 시간이 대략 4시겠거니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거나 화장실에 갔다오곤 한다.

 

연식이 꽤 돼 보이는 차는 엔진 노후 때문인지 경운기 소리가 난다. 항상 정사장이 차를 몰기 때문이다.

 

정 . 재 . 훈

 

OO아파트에서 정재훈 사장 모르면 간첩이란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그는 이 아파트 유명인사 터줏대감이다. 항상 연중무휴 새벽4시엔 그의 구형 마티즈 경

 

차의 시동음이 울리기 때문이다. 어디든지 불러주세요. 집수리 시설보수 상담 글자가 씌여진 그 글자의 색이 약간 바랜 스티커를 마티즈 주변에 두르고

 

그의 차는 오늘도 어김없이 정직한 시간에 시동음이 걸린다. 오늘의 행선지는 멀지 않은 곳 연립주택이다.

 

"네 감사합니다. 정재훈입니다. 예 사모님 걱정하지마세요. 벌써 다 왔습니다."

 

 예약이 밀려있다보니 새벽에 일어나도 그는 한 순간도 여유를 부리지 못 한다. 운전석 관물함 위에 놓여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의 하루 시작 루틴이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거의 다 녹아 연해져버린 커핏물만 남은 채로 연립주택에 도착한다.

 

"어... 사모님 제가 정확한 견적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말씀드린 수도관 관련해서는요....................."

 

늘 있던 일인 듯 바로 싱크대 아래 서랍을 열러 수도관을 일일이 풀어 확인해보니 오래된 녹과 기름때로 물이 내려갈 공간 자체가 없었다.

 

사모님이라 불렀지만 어디까지나 20대 중후반의 미혼의 혼자 사는 여성이었고, 정 사장은 항상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던많던 고객을 위한다는 자세에서

 

그의 말버릇인 다른 사람을 부를 때는 남녀노소 불문 남자 고객은 사장님, 여자 고객은 사모님이라 불렀다. 말은 그렇게 해도 상황을 보니 뻔했다.

 

 혼자 사는 사회초년생 여자가 배관을 일일이 해부해서 들여다보긴 좀 무리가 있었겠지 싶으면서 늘 정해진 보수표를 머리 안에서 계산해가며

 

견적을 부른다.

 

 "에이 아저씨. 그렇게나 많이 나와요?" 정형화된 대답이다.

 

정 사장에겐 늘 듣던 18번 대답이라 놀라거나 일말의 기다림없이 바로 상투적인 말 내용이다. 기술 유무를 따지기 전에 손님과의 가격 협상이 어쩌면

 

하는 일의 6~7할은 차지하는 것 같다. 늘 있던 대로 메뉴얼의 대답을 해준 후 가격을 약간 1만원 가량 깎아줬다.

 

 아마 정 사장 나이즘 돼면 귀여운 조카뻘의 여자라 예약이 꾸득꾸득 밀려있는데도 인내심을 발휘해 돈을 깎아주고, 차 안에 실어두었던 신품 배관으로 교

 

체하고 서비스 개념으로 개수대 배관 체크까지 해주고, 일을 마무리지었다.

 

 20대 중후반의 여성은 만족한 듯 보였고 정 사장은 인사하고 문을 여는 순간 가냘픈 목소리가 등 뒤를 때렸다.

 

"아저씨?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정 사장은 순간 흠칫한 듯 보였다. 이제까지 고객들을 상대할 때 굳이 이름까지 묻던 고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제일 많이 듣던 1번이 아저씨, 2번이 사장

 

님, 3번이 삼촌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2,3번은 의미가 거의 없을 정도로 거의 지분이 없었고 단연 아저씨이고 정 사장 역시 나이가 그 정도론 꺾였기

 

때문에 짐짓 넘길 뿐이었다.

 

"정재훈인 데 왜 그러시죠? 고객님?"

 

"제가 집수리를 처음 불러보는 데 되게 꼼꼼하게 잘 해주셔서요. 앞으로도 일이 있음 부를께요."

 

"네 감사합니다. 명함 드릴께요." 명함 디자인은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옛날 로케트 건전지에 나오던 그 캐릭터를 적당히 오려붙여넣기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주택을 나온 뒤로 요상한 일이 생겼다. 예약된 장소에 출장갈 때 문득 이상하게 여성 고객이 더 많아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일주일 뒤에 뜬금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저녁에 OOO 방송사에서 방송 출연 의뢰가 들어와서였다.

 

 일주일 중 평일에 매일 방송하는 일종의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정 사장을 "우리 동네의 달인" 코너에 출연하길 바라는 전화였다.

 

방송 내용은 이미 예약된 집 중에서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를 지닌 집수리 업계에선 단연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집 안의 전기 설비 보수를 다루기로

 

정하였다.

 

 녹화 당일 정 사장은 잠시 눈을 비볐다. 불과 얼마 전에 본 손님이었던 싱크대 배관을 갈아줬던 그 아가씨였기 때문이었는 데 알고 보니 정 사장의 나름

 

숙련된 보수 기술과 덧붙여 그의 고객 응대 언변과 열심히 사는 걸 보여주는 일하는 남성의 얼굴의 멋짐을 느낀 그 아가씨가 방송 작가였고 나를 

 

그 프로그램 코너에 출연하길 푸쉬를 넣은 것이었다. 그 전에 동료 여성들한테 집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정재훈 사장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건 덤이었다.

 

 인사도 잠시 바로 녹화로 들어가고 마지막엔 웃으면서 마무리 멘트를 넣고 끝냈다.

 

 "저보다도 더 뛰어난 기술을 지닌 분들이 이 업계엔 많습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고 고객의 마음까지 감동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스태프, 작가들과 스몰 토크를 하다 그 아가씨하고도 말을 섞게 되었다.

 

 "제가 운이 좋네요. 평생 카메라 볼 일은 없을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제가 볼 때 정 사장님은 앞으로 더 크게 되실 분 같아요. 일 잘 하시고 겸손하시니까요. 다음에도 저희 집에 문제 생기면 꼭 봐주세요."

 

방송이 나가고 난 뒤 1달도 되지 않아서

 

정 사장은 자가용 한 대로만 집수리를 하기엔 일감이 너무 많아 집과 차에만 기물들을 싣고 다니는 데에 부족함을 느껴

 

집수리 인테리어 사무소를 따로 차렸다. 서로에게 도움을 준 방송 작가와는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생전 여사친이란 개념이 생소하던

 

그에게 방송 작가와 그 작가의 친구들이 사무소에 놀러오게 된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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