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ist, Spirit은 정신이라고도, 영혼이라고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철학이 썼던 모든 단어와 그로 인한 결과를 현전의 형이상학의 종점이라 취급한 하이데거는 정작 "정신"은 물음을 던진 적이 없다.
존재와 시간에는 정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본문에는. 이 비판자인 데리다답게 그는 수많은 주석에서 정신이 그대로 쓰이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마침내 본문에서 정신이 나오는데 그 때가 바로 존재와 시간 82절, 끝자락, 끝에서 두 번째 절이다.
그리고 이 작품 뒤 1933년 하이데거의 흑역사인 총장취임강연이 나온다. 현존재는 정신적-역사적이라고, 세계는 역사적-정신적이라고 정신이란 단어에 아주 몰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당시에 하이데거가 몰두한 것은 단어보다 더 큰 그 무언가였다.
그의 또다른 흑역사로 통하는 1935년 형이상학 입문. 정신이란 단어는 없지만, 바로 그 "정신"에 몰두한 글이 그의 컬트적인 지정학적 구분으로 나오게 된다. 애초에 그의 정신은 후설이 말하는 정신과도 발레리가 말한 정신과도 달랐다. 다를 수밖에 없다.
총장취임강연은 그저 일탈이 아니었고, 1935년의 강의는 뒤에 출판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프로토타입이 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뗄레야 뗄 수 없이 그의 삶과 연관되어 있었다.
하이데거는 침묵한다. 20년이나. 1953년 "언어로의 도상에서" 책에서 트라클을 뽑으며 정신을 다시 들이밀기 전까지, 그는 정신에 대해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데리다에겐 하이데거의 저작은 그렇다치고, 하이데거의 이상할 수준의 독일어의 찬양은 정말 이상했다. 너무나 엄숙하고, 진지하고, 폐쇄적인 독일어의 찬양은 데리다에 있어서는 나보코프의 소설 "창백한 불꽃"에서 나온 해석자만큼이나 괴이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일이었다.
하이데거는 이 세상을 속이지 않고 그대로 살아온 자, 트라클을 해석하려다 창백한 불꽃 수준의 자뻑을 하고 만다 - "나는 정신이라고 하는 Geist, geistig는 번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트라클과 횔덜린이 정말 그때의 그리스도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것일까. 평생 프로테스탄트는 거부하면서도 카톨릭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변절한 카톨릭 신자, 하이데거의 잘못이 아니었을까.
데리다는 그저 사도 바울조차 둘 다 정신에 해당하는 프네우마와 프시케를 분리했다는 정도로만 이 기이한 해석을 정리하려 한다. 어쩌면 이것의 분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사람이 그의 친구, 불트만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게오르그
남 읽으라구 써놓은 글이 아닌데 왜 읽을거리판에 씀?ㅋㅋ
걍 name drop 만 하고 아무말도 안하는 스킬 자랑하기 뭐 이런건가
물론 난 데리다 석사따리라서 박사님이시면 닥치겟음
김옥지
혹시 이거 원본 쓰신 분이심?
재정
이 글 어디에 데리다가 있지? 라는 생각밖에 안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