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통치에서 영혼통치로
- https://www.pado.kr/article/2025032811448880046
(원문 주소: https://www.noemamag.com/from-statecraft-to-soulcraft/)
Noema에서 나온 "From Statecraft To Soulcraft"를 번역한 기사야. 많은 사람이 읽어보길 원해서 해당 기사에 대한 편집자주와 요약글을 읽판에 올릴게.
편집자주:
보통 근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가치에 중립적인 국가라고 부릅니다. 기본적인 약속인 헌법과 기타 법만 잘 지키면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고 믿으며 살든 국가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근대의 자유민주주의 즉 리버럴한 민주주의는 '좋은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구성원들이 어떤 '좋은 삶' '최선의 삶'을 살고 추구하는지엔 관심이 없고 최소한의 약속만 지키는 '최저의 삶'만 지키도록 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공허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고나길 '좋은 삶'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좋은 삶'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정치사상을 보통 공동체주의라고 하고 리버럴 민주주의처럼 헌법적 사회계약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쪽이 공화주의입니다. 공화주의자들은 하나의 '좋은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적 비전이 자칫 사회적 관용을 파괴하고 억압적인 형태를 띠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노에마 매거진 3월 4일자 에세이에서 필자인 알렉상드르 르페브르는 '좋은 삶'을 추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치체제가 역사상 더 긴 역사를 갖고 있고, 가치 중립을 표방한 리버럴리즘 정치체제는 근대에 나타나 짧은 역사를 가졌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한편의 에세이로는 르페브르의 입장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는 공동체주의적 관점,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및 사회에 대한 관점 기반 위에서 트럼프의 MAGA 운동, 푸틴의 러시아 등 리버럴하지 않은 정치 행태를 이해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는 솔직히 리버럴리즘도 사실 하나의 '좋은 삶'을 제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합니다. '나는 가치 중립적이야' '나는 리버럴해서 모든 것을 관용해'라는 태도 역시 하나의 가치이며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해지면 이 가치와 태도를 남에게 강요해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르페브르는 리버럴리즘의 관점에서 국내외의 이질적 공동체주의적 정치를 너무 적대시하진 말기를 권합니다. 어차피 모든 정치체제는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꼭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근대 리버럴리즘 자체가 더 이상 종교간 투쟁으로 피를 흘리지 말자는 '모두스 비벤디' 즉 타협의 산물이었는데, 또다시 가치의 차이로 피를 흘릴 수는 없지 않냐는 것이 르페브르의 지적입니다.
제미니 2.5 프로한테 부탁한 요약:
핵심 논지: 국가 운영술(Statecraft)을 넘어 영혼 조형술(Soulcraft)로
이 기사의 중심 주장은 현대 정치의 초점이 단순히 정치, 사회, 경제적 사안을 관리하는 전통적인 '국가 운영술'에서 벗어나, 특정 가치관과 '좋은 삶(the good life)'에 대한 비전에 따라 시민의 정체성과 인격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려는 '영혼 조형술'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특히 러시아, 중국과 같은 비자유주의 강대국들과 점증적으로 미국 내 특정 세력들이 이러한 영혼 조형술을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있음을 역설합니다.
비자유주의 체제의 '인간완성주의(Perfectionism)' 부상
저자는 중국, 러시아, 인도, 헝가리 등 여러 비자유주의 정권이 국가 권력의 연성 및 경성 수단을 동원하여 자국민에게 특정 형태의 인간적 번영(human flourishing) 모델을 적극적으로 주입하고 강제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는 단순한 권력 유지나 억압을 넘어, 각 체제가 신봉하는 가치(효, 조화, 민족주의, 종교적 신념 등)에 기반한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경향을 정치철학 용어인 '인간완성주의', 즉 국가가 인간 번영의 이상을 구체화하고 강제하는 실천으로 규정합니다. 특히 중국의 시진핑 사상 교육, 사회 신용 시스템, 신장 위구르 재교육 정책이나 미국의 '프로젝트 2025'와 같은 사례는 이러한 인간완성주의적 영혼 조형술의 구체적인 발현으로 제시됩니다.
자유주의의 '중립성'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
이에 반해, 자유주의는 국가가 특정한 '좋은 삶'의 개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개인의 자율성 존중, 다원주의 수용, 그리고 모든 시민에게 공평하게 정치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이유로, 국가는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얇은(thin)' 도덕 개념에 기반하여 사회를 운영하려는 시도로, 형이상학적이고 심리적인 내용이 풍부한 '두꺼운(thick)' 영혼 조형술과는 대조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자유주의의 중립성 주장이 위선적이거나 자기기만적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비판가들의 시각을 빌려, 자유주의 역시 자유, 공정성, 관용과 같은 특정 가치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이러한 가치를 정치 영역을 넘어 문화, 교육, 사생활 등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켜왔다고 주장합니다. 즉, 자유주의 또한 암묵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인간형(개인주의적이고 자율적인 주체)을 조형하는, 그 자체의 영혼 조형술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영혼 조형술은 때로 공동체 의식, 명예, 자기희생과 같은 전통적 가치를 약화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영혼 조형술의 역사적 보편성과 현대적 재부상
저자는 플라톤의 '국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정치사상의 오랜 전통 속에서, 정치체제가 시민의 성격과 개성을 형성하는 '영혼 조형술'이 오히려 역사적 규범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귀족정, 금권정, 민주정 등 각기 다른 정치체제는 그에 상응하는 독특한 인간 유형을 길러낸다는 플라톤의 통찰은, 국가가 시민의 영혼을 돌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업으로 여겼음을 시사합니다. 자유주의가 국가의 이러한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 예외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비자유주의 정권들은 이러한 역사적 규범으로 회귀하며, 강력해진 현대 국가의 역량을 활용하여 더욱 야심 찬 영혼 조형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결론: 이해와 대화의 필요성
이 글은 자유주의자들이 비자유주의 경쟁 체제들의 부상을 단순한 권력욕이나 압제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대신, 이들 체제가 제시하는 '좋은 삶'에 대한 비전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비록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문제가 있을지라도)가 지닌 인간적 매력과 호소력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저자는 장 보댕의 '일곱 현자의 대화'를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가상의 콜로키움을 제안하며, 서로 다른 가치 체계를 가진 이들이라도 서로를 '닮은 존재(semblables)'로 인식하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대화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인 정치적 질문은 단순히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statecraft)를 넘어, 어떤 삶이 가치 있으며 누가 그것을 정의할 것인가(soulcraft)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글을 맺습니다.
요약: 이 글은 현대 비자유주의 국가들이 단순한 권력 유지를 넘어, 국가 권력을 이용해 자국민에게 특정 '좋은 삶'의 비전을 적극적으로 주입하는 '정신 형성술'에 몰두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중국, 러시아, 인도, 헝가리, 그리고 미국의 포스트-리버럴 우파(특히 '프로젝트 2025')를 사례로 들며,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진정성과 매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자유주의 역시 암묵적으로 '정신 형성술'을 수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소개하며, 미래의 정치적 갈등은 '좋은 삶'을 정의하려는 다양한 '정신 형성술' 간의 경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따라서 자유주의 진영은 경쟁자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제언합니다.
뀨웅뀽
여기에 지젝 아재가 경고한 “연성 파시즘”의 유행을 섞으면, 대중이 원하는 나라로 가려면 행정 사회가 더 고도화되서 좀더 중장기정책을 연구하고 의견개진할 수 있는 권력집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음
코로나의 대응에서 부터, 중장기 정책까지 민주공화정보다 파시즘이 더 유리한 형태일 순 있으나
문민통제의 이점과 인간 근본의 자유갈망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파시즘의 본질적 고민은 여전한 것 같음 ai가 그걸 해결해줄련지..
암튼 민주주의사회의 구성원들도 이 글에서 말하는 좋은 삶을 위해선 권력집중을 좀더 중장기화 해야하는 실험에 맞닥뜨린것 같음
charlote
특정 '좋은 삶'의 비전에 동의못하는 집단이 상당수 있으면 갈등이 생길텐데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서 파시즘과 리버럴리즘의 차이가 있는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