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너 법안이 통과되기 훨씬 전부터 콜롬비아 공화국과의 운하 조약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마침내 협정이 체결된 것은 1903년 1월에 이르러서였다. 협상에 직접 관여했던 이들에게는 이 과정이 그들의 직업적 삶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이자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세기가 바뀌던 무렵은 콜롬비아에게 불길한 시기였다. 1899년 가을, 자유당 장군들이 보수당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이후 "천일 전쟁"으로 알려진 파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마로킨은 자유당 군대와 전쟁 수행 방식을 둘러싼 보수당 내 분열에 직면했다. 설상가상으로, 폭력의 점점 더 혼란스럽고 일반화된 성격으로 인해 커피 산업이 붕괴하고, 정부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를 대량으로 발행하면서 국가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에 빠졌다.
카를로스 마르티네스 실바는 1901년 3월 처음으로 존 헤이 미 국무장관을 방문했다. 보고타로부터 받은 그의 지시는 미국이 파나마 노선을 채택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으며, 콜롬비아 정부가 언제든 미 국무부와 관대하게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성명을 미국 언론에 발표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1901년 5월 9일, 지협 운하 위원회는 새로 임명된 주미 콜롬비아 대사 마르티네스 실바에게 운하 조약 초안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
마로킨 대통령은 콜롬비아가 국가적으로 처한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협 운하와 관련하여 유리한 협상 위치에 있음을 깨달았다. 프랑스의 양허는 1904년에 만료될 예정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모든 자산이 콜롬비아 정부로 귀속될 예정이었다.
콜롬비아가 미국과의 협상을 단순히 지연하기만 한다면, 콜롬비아 정부는 프랑스 신 파나마 운하 회사가 약속한 4천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니카라과 운하 건설 가능성은 코스타리카의 반대로 인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마로킨 대통령의 전략은 지연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도나 선호를 완전히 비밀에 부치며 워싱턴에 있는 대표들을 방치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콜롬비아 수도와의 의사소통은 끔찍했다. 워싱턴에 있는 대사와 정부 간의 공식 서신 교환은 3~4개월이 걸릴 수 있었고, 보고타의 변덕스럽고 종종 모호한 입장은 콜롬비아 대사들에게나 다른 모든 관련자들에게 끝없는 좌절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마르티네스는 한계를 느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6개월은 제게 가상적 고문과 같았습니다. ... 저는 협상 결과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모든 지연 수단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이 균형을 유지하며 무한정으로 질질 끄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페이비언 전략은 큰 위험을 수반했다. 미국은 언제든 원하는 시기에 군사 개입을 할 수 있었으며, 마로킨은 새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의 전설적인 성급함을 간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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