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다 사이의 길 06. 기계의 시대

영국은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가장 강경한 영국 관리들조차 운하의 완공이 기정사실임을 인정했지만, 오랫동안 반대해 온 만큼 패배를 공식적으로 시인하기를 꺼렸다. 건설을 저지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방해 공작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레셉스와 이스마일은 일정 부분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스마일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더 많은 자치권을 원했으며, 중재 과정은 그가 술탄으로부터 추가 양보를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회사는 프랑스 정부의 명백한 지원을 받았다. 오직 방해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영국은 회사, 프랑스 정부, 그리고 누바르의 연합된 노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레셉스는 외교보다는 운하 건설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필수적이었다. 많은 논의가 오갔지만, 실제 물리적 공사는 거의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3년 말, 하르돈은 마침내 총괄 계약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수천만 프랑을 소비했으나 실질적인 성과가 거의 없었다. 또한, 회사에 50만 프랑이 넘는 청구서를 제출했지만, 레셉스는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고자 그를 내보내는 편을 택했다.
 
하르돈이 떠난 후, 부아장 베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이집트 지협의 산발적인 작업장을 현대적인 조직으로 변모시켰으며, 명확한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1864년 초, 회사는 인력 의존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는 이스마일이 부역(corvée) 폐지를 선언한 데 대한 논리적 대응이기도 했다. 부역 없이 수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을 초래할 것이었다. 또한, 회사는 수천 명의 팔라히(농민)들이 손으로 흙을 퍼내는 방식으로는 원래 예산에 맞춰 운하를 완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노동력이 두 배, 세 배로 증가하지 않는 한, 모래 제거량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해결책은 기계화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미국, 라틴아메리카에서 진행된 엔지니어링 프로젝트들은 점점 더 인간과 기계의 조합에 의존했다. 증기와 석탄을 동력으로 한 기계들은 터널을 뚫고, 광산을 깊이 파며, 항구를 준설하고, 잔해를 제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들 대부분은 특정 과업에 맞춰 맞춤형으로 설계 및 제작되었다. 운하 회사는 기계식 준설기와 엘리베이터 도입을 결정했고, 이들의 설계 및 제작을 감독할 전문가를 찾아야 했다. 부아장은 운하 완공을 가능하게 만든 두 명의 계약자를 선정하는 데 기여했다.
 
1863년 12월, 폴 보렐과 알렉상드르 라발레이는 "보렐, 라발레이 앤드 컴퍼니"라는 파트너십을 결성했다. 부아장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폴리테크닉 스쿨을 졸업했으며, 프로젝트 초기부터 강조된 진보, 산업, 문명이라는 이념을 흡수했다. 이들은 철도 건설 분야에서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으며, 기계 기술에 심취해 기차 엔진을 제조하는 합작 회사를 운영했다. 라발레이는 영국에서 수년간 견습생으로 일하며 특수 기계 설계 전문가가 되었으며, 금속공학과 최신 증기 기술을 연구하여 맞춤형 기관차에 적용했다. 그는 흑해와 발트해의 등대를 설계하고, 리투아니아에서 터널 굴착 기계를 개발했으며, 러시아 항구 준설 작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기술들은 수에즈 운하의 차기 건설 단계에 필수적이었다.
 
수십 가지 유형의 기계가 설계 및 제작되어 설치되었으며, 다수는 4~6가지 크기로 맞춤 제작되었다. 각 굴착 엘리베이터는 지형적 차이를 고려해 조정되었고, 기차 선로도 기계 운영에 맞춰 조정이 필요했다. 일부 준설기는 바지선에 장착되어 운하 바닥의 진흙과 모래를 제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다른 준설기는 운하 양쪽 둑에서 작업을 수행했다. 컨베이어 벨트의 각도와 엘리베이터의 깊이는 현장 조건에 따라 조정되었고, 버킷의 운반 용량도 이집트 지협의 지반 상태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 시제품들은 반복적인 개량 과정을 거쳤다. 새로운 기계가 현장에 배치될 때마다 조정이 필요했고, 일부 맞춤 제작 공정은 프랑스에서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진행이 지연되었으나, 결국 300대 가까운 기계가 도입되었다. 대부분은 석탄을 연료로 했으며, 일부는 증기로 작동했다.
 
1864년부터 5년 동안 보렐과 라발레이는 기계를 공급하면서 설계, 시험, 설치, 유지보수를 담당했다. 보렐은 파리 본부에서 운영을 감독했고, 라발레이는 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계약자와 회사 간의 협상은 흔히 적대적이지만, 보렐, 라발레이, 부아장, 레셉스는 서로 존중하며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운하에서 제거된 7,400만 입방미터의 흙 중 75% 이상을 보렐과 라발레이가 담당했으며, 주요 작업은 1867년에서 1869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새로운 기계들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데 몇 년이 걸렸지만, 1864년까지 레셉스와 회사 이사진은 보렐과 라발레이가 다른 이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보렐과 라발레이는 포트사이드 방파제 건설과 관련된 전문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 이 문제는 두소 형제에게 맡겨졌다. 마르세유 출신의 네 형제는 알제와 셰르부르에서 방파제 건설을 위한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했다. 석공업에 능했던 이들은 새로운 콘크리트 혼합 방법을 실험하며 이를 포트사이드 문제 해결에 적용했다.
 
1864년 말부터, 두소 형제는 바다로 길게 뻗어나가는 두 개의 방파제를 위한 거대한 블록을 제작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한 방파제는 약 2마일, 다른 하나는 1.5마일 규모로 계획되었으며, 운하를 드나드는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도록 550에이커 규모의 삼각형 항구를 형성할 예정이었다. 방파제에 사용될 각 블록은 20톤 이상의 무게를 지녔으며, 마을 근처 섬에서 일종의 조립 라인 방식으로 생산되었다.
 
기계식 엘리베이터는 모래를 원시적인 시멘트 공장으로 운반했고, 여기에 남프랑스 테일에서 수입된 석회가 소금물과 함께 첨가되었다. 혼합된 시멘트는 대형 나무 틀에 부어져 블록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두 달간 햇빛 아래에서 굳혀졌다. 이후 수력 크레인을 이용해 트럭에 실려 바지선을 통해 바다로 운반되었다. 바지선에서 고정 장치를 해제하면 블록이 차례로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최종적으로 3만 개 이상의 블록이 사용되었다.
 
물론 다른 엔지니어들과 계약자들, 하청업체들도 있었다. 윌리엄 에이턴이라는 영국인은 포트사이드 주변의 일부 굴착 작업을 감독했으며, 알퐁스 쿠르브라는 프랑스 사업가는 엘-기세르 고원의 굴착 작업을 도왔다.
 
그러나 1866년까지 보렐과 라발레이는 에이턴의 작업을 인수했고, 이후 프로젝트의 후반부 동안 사실상 총괄 계약자로서 부아장 베이와 레셉스에게만 보고했다. 그들은 운하 건설을 위해 유럽에서 가장 유망한 젊은 엔지니어들을 모집했고, 이들은 모험과 경험을 위해 모여들었다. 부아장은 또한 지역 수석 엔지니어들로 구성된 숙련된 팀을 조직했다. 그중 폴리테크닉 졸업생인 펠릭스 라로슈는 포트사이드에서, 유진 라루스는 수에즈 항에서 작업을 감독했다.
 
이들은 과학적 사고를 기계화 이상의 개념으로 확장했다. 기계가 여러 부품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조화롭게 작동하듯, 프로젝트 역시 공동 목표 아래 여러 부서와 하위 부서가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수에즈 운하 회사는 ‘과학적 경영’이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훨씬 전에 이를 구현한 조직이 되었다.
 
보렐과 라발레이, 그리고 두소 형제들의 등장으로 수에즈 운하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직업 중 하나가 되었다. 야심 찬 젊은 엔지니어들은 운하 프로젝트 경력을 쌓는 것이 미래의 명성과 직업적 성공에 유리할 것이라 확신했다. 부역이 폐지되면서 유럽 노동자와 감독자의 수요가 증가했고, 기계화는 견습생들에게 무한한 기회를 제공했다.
 
1863년까지만 해도 수만 명의 팔라히와 몇 천 명의 유럽인만이 있었지만, 1860년대 중반에는 운하 주변의 마을과 정착지에 약 1만 명의 아랍인과 이집트인 주민이 거주하게 되었으며, 유럽인도 8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유럽인이 아닌 노동자들은 팔라히, 베두인,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 출신, 그리고 시리아인들이었다. 이들 중 몇 천 명은 회사에 직접 고용되었고, 다른 이들은 상점과 커피하우스를 운영하며 노동자들의 생활 필수품을 공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은 가족을 동반하기 시작했고, 이주민 사회에는 유럽인과 비유럽인의 배우자 및 자녀들도 포함되었다.
 
레셉스와 같은 시대의 저명한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와 같은 비전을 가진 야심 찬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다수는 유럽이 지나치게 경쟁적인 곳이라고 판단하고,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영국의 인도, 남아프리카, 극동 지역 등으로 이주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출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주요 인물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었으며, 1860년대 중반의 수에즈 운하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비용이 많이 들며, 가장 주목받는 엔지니어링 프로젝트였다.
 
20대의 석공이나 기계공, 30대 초반의 수리 엔지니어나 금속공학자는 철도, 다리, 터널 건설을 감독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었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과 저명한 엔지니어들과의 네트워킹, 그리고 경험을 통한 명성 쌓기가 필수적이었다.
 
운하는 이러한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엔지니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운하는 회계사, 상인, 사무원, 의사, 목수, 측량사, 지형학자, 바지선 선장, 대장장이, 석공, 돌 절단기, 기차 운전사, 요리사, 전신기사 등 수백 명의 관리직 노동자들에게도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회사에 합류하는 것은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의 농촌 출신 노동자들에게는 대담한 결정이었다.
 
프로젝트의 규모, 사막이라는 이국적인 배경,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전략은 회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순히 역사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명예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높은 급여 때문에 끌렸다.
 
작업이 점점 더 기계화되면서 인력에 대한 필요는 감소했고, 곧 회사는 이집트 정부의 지원 없이 노동자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스마일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부역을 폐지했지만, 오히려 운하 지역에서 그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부역이 유지되는 동안 정부 관리들은 회사와 협력하여 노동자들을 감시할 수 있었지만, 부역이 폐지되자 이스마일의 요원들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양허 조항에 따라, 회사는 건설 기간 동안 해당 지역을 사실상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정부 관리들은 일부 지역에서만 영향력을 유지했다. 
 
부역 폐지 이후, 회사는 점점 더 자치적인 국가처럼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이스마일이 이를 제어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운하 도시들은 회사에 의해 건설되었고, 상점들은 회사 소유였으며, 철도 연결망도 회사가 자금을 대고 소유했다. 최종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회사는 스위트워터 운하와 카이로로부터의 모든 물류를 통제했다. 운하 도시와 정착지의 인구가 2만 명을 넘어서면서 회사는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고 공공 질서를 관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회사 관리자들은 이집트 관리들의 권한을 점차 무력화하며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854년, 레셉스는 단지 하나의 계획을 가진 민간인이었으나, 10년 후 그는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국제 정치와 금융의 중심에 선 다국적 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그가 더 많은 권력을 얻을수록, 이스마일과 협력하려는 의지는 약해졌다.
 
운하가 완공되기 훨씬 전에 무하마드 알리의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다. 강력한 유럽 정부의 지원을 받는 유럽 회사가 이집트의 자치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업권 문제는 사소했지만, 레셉스가 이집트의 주권을 무시하려는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어업권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으나, 만잘라 호수에서 시작된 일이 몇 년 후에는 부총독의 유배, 국고의 파산, 회사의 엄청난 부 축적, 그리고 이집트가 외국 세력에 의해 통치되고 점령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술탄은 회사와 이스마일이 서명한 새로운 협정을 비준했다. 이 협정은 황제의 중재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더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운하 지역에서 이집트 정부의 특권을 명확히 했다. 여기에는 우편 및 전신 서비스 설치, 운하 도시와 정착지의 비유럽인을 위한 관리자 임명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이 협정은 지협에서 비운하 육상 교통에 대한 세관 수입을 정부가 징수하도록 했으며, 이집트 정부와 회사 간의 분쟁을 중재하는 절차를 규정했다.
 
법적 관할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후 10년 동안 누바르와 이스마일은 전반적인 사법 체계 개혁을 위해 싸웠다. 그 사이에 회사는 주권적 권한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갔으며, 이집트 정부는 비유럽인을 통치하는 역할에 국한되었다. 회사는 포트사이드, 이스마일리아, 그리고 수에즈의 유럽인들을 통치했고, 이집트 정부는 나머지 지역을 관리했다.
 
이 기간 동안 레셉스는 운하 지역에 머물며 매일 작업을 점검했고, 엔지니어들과 도면을 검토하는 것을 즐겼다. 프랑스에 있을 때는 그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상세한 보고서를 요청했다. 사소한 사항까지 그의 관심을 끌었으며, 회사의 문서는 지역 관리자, 감독관, 현지 감독관들에게 보내는 그의 지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작업이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했으며, 회사의 사업 운영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재정을 철저히 감시했다.
 
1865년 여름,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발생했다. 콜레라가 발발한 것이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레셉스는 광범위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의료 서비스를 유지하도록 강조해왔다. 콜레라는 부적절한 수원에서 항상 위험이 존재했으며, 이집트 지협에는 일관된 담수원이 없었다. 콜레라 전염병은 투자자와 노동자들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고, 공사의 진전을 크게 저해할 수 있었다.
 
전염병은 6월과 7월 대부분 동안 지속되었으며, 격리 조치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질병의 치명성을 고려할 때, 사망자 수는 비교적 적었다. 수백 명의 유럽인이 목숨을 잃었고, 부아장 베이의 아내도 그중 하나였다. 아랍인과 이집트인 1,5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이는 운하 건설 10년 동안 가장 큰 인명 피해였다.
 
몇 달간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손자가 사망했고, 레셉스의 이름을 딴 자손이 또다시 세상을 떠났다.레셉스에게 유일한 위안은 그의 숙적 팔머스턴 경이 결국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회사의 피해 통제 노력은 혼합된 결과를 낳았다. 작업에 심각한 지연은 없었지만, 레셉스와 회사 관계자들은 전염병 관련 적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한 저널은 이번 발병을 빌미로 회사를 비판하며, 레셉스가 건강 상황의 심각성을 투명하게 알리지 않은 것은 더 큰 기만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이 저널은 회사가 상당한 예산을 초과했으며 자본이 부족하고, 작업이 주장만큼 진행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레셉스가 공적으로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재정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보렐과 라발레이의 기계들은 훌륭하게 설계되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다. 회사는 황제의 중재에 따라 부여된 배상금이 필요했다. 이스마일이 부역을 종료했지만, 술탄이 합의를 확인하기 전까지 나머지 배상금 지급은 지체되었다.
 
회사는 현재의 재정 상태로는 운하를 완공할 수 없었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기계들이 고장 나지 않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작업이 1868년 중반에 완료되는 것이었다. 회사는 보유한 자금과 지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었다. 매년 주주 총회에서는 각 준설기, 각 굴착 계약, 그리고 포트사이드의 방파제 블록에 지출된 금액을 보고해야 했다.
 
1867년 어느 시점에서 회사는 현금 주입이 필요해졌다. 주식을 추가 발행하거나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추가 자금 조달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는 반쯤 파인 도랑, 수천 명의 분노한 주주들, 그리고 운하만큼이나 인상적인 실패로 남게 될 것이었다.
 
레셉스는 수년간 낙관주의를 유지했다. 프로젝트는 언제나 고귀했고, 작업은 언제나 훌륭하게 진행되었으며, 성공은 언제나 눈앞에 있었다. 무능한 계약자들, 영국 총리의 완강한 반대, 포르테의 음모, 비용 초과, 그리고 콜레라는 불편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운하 완공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세부 사항들은 성가실지 몰라도 결과는 확실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태도는 한동안 회사에 도움이 되었다. 장애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고, 목표에 대한 끊임없는 집중은 불안한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회사는 결국 돈이 다 떨어졌다.
 
문제는 자본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였다. 주식은 이미 공모가인 500프랑 아래에서 거래되고 있었고, 추가 발행은 주식 가치를 더욱 희석시킬 것이었다. 회사는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로 결정했다.
 
대출이 아무리 신중하게 제시되더라도, 회사는 부정적인 여론이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제 수에즈 운하 회사는 국가의 위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조직적 실패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이미지에도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었다. 운하는 유럽 전역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떠올랐다. 레셉스가 바라던 일이었지만, 이제 그는 회사의 이사들과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조용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운하는 국내외 언론의 면밀한 감시를 받았으며, 대출 발표는 주요 뉴스가 되었다.
 
레셉스는 대출 발표의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발표 시점을 다른 주요 사건과 맞추기로 했다. 1867년 봄과 여름, 파리는 예술과 산업의 세계 박람회를 개최했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한 행사였다.
 
박람회에서 수에즈 운하는 큰 찬사를 받았다. 디오라마는 기술적 숙련도와 미적 감각을 인정받았으며, 기대했던 효과를 거두었다. 레셉스와 회사는 모든 투자자와 여론 주도층을 이집트 지협으로 데려갈 수 없었지만, 대신 운하를 파리 중심부로 가져와 모든 이가 직접 볼 수 있도록 했다.
 
세계 박람회의 주요 주제는 과학과 오리엔트였지만, 대부분의 전시물은 둘 중 하나에 집중했다. 이집트 전시관은 이 두 요소를 결합했다. 기계식 준설기가 고대 신들과 나란히 놓였고, 미라는 미니어처 모스크 옆에 전시되었으며, 수에즈 운하 디오라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원처럼 꾸며진 건물에 설치되었다. 이집트 전시물은 박람회에서 가장 인기 있고 호평받은 부문 중 하나였다.
 
이 전시물은 대출 자금 조달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회사가 구독을 발표하자, 프랑스 언론은 점점 독립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부 신문은 회사의 재무 보고서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대체로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관심이 모든 이에게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입법부는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황제나 모르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관이 아니었으며, 에밀 올리비에의 주도로 수에즈 대출 문제가 논의되었다. 회사의 재정이 프랑스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는 원칙에 따라, 이 문제는 공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올리비에는 회사가 대출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9월, 첫 번째 공모가 마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채권이 팔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회사는 채권에 경품을 제공하는 복권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1830년대에 제정된 대출 관련 법률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올리비에의 주도 아래 1868년 하원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일부 의원들은 회사가 지출 내역을 보다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들은 회사가 프랑스 투자자들에게 추가 자금을 요청하기 전에 미래 수익을 더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언론이 제기한 질문을 반영하듯, 다수의 의원은 프로젝트를 지지하면서도 레셉스와 회사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입법부 개입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도 벌어졌다. 일부 의원들은 입법부가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에 충격을 받았다. 랑주네 자작은 정부가 개입할 법적 권한도, 명분도 없다고 주장했다. 
 
쥘 파브르는 수에즈 운하 프로젝트가 사적인 사업인지, 아니면 이제 프랑스 국가의 명예와 결부된 사안인지 반문했다. 파브르는 운하와 회사의 지위 변화에 대해 처음으로 인식한 인물 중 하나였다. 운하는 처음에는 원대한 꿈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국제 경쟁의 중심이 되었으며, 대형 주식회사의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공학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이제 운하는 프랑스 국가의 위신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운하는 프랑스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입법부 또한 이를 지지했다. 며칠간의 논의 끝에 하원과 상원은 회사가 복권을 활용해 대출을 공모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운하의 중요성이 커지는 동안, 제2제국은 점진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가 나이를 먹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의 야망은 점점 좌절되었다. 그의 해외 원정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으며,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 강화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서유럽 정치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던 시도 역시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패퇴시키고 성장하면서 무산되었다. 1850년대의 경제 성장기는 1860년대 들어 인플레이션과 사회적 불안으로 바뀌었으며, 황제가 권력을 분산시킬수록 프랑스는 점점 더 많은 개혁을 요구했다.
 
나폴레옹의 위상이 점차 약해지는 가운데, 레셉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그는 항상 엘리트 계층 내에서 활동했으나, 1급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람회와 대출 과정에서 그는 사업가에서 공적 인물, 나아가 귀족으로 성장했다. 
 
그의 성공은 야망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세계 상업과 정치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더 많은 강연 초청을 수락하고, 자신의 명성을 기리는 찬사와 축배를 즐겼다. 일부 관찰자들은 그를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아를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이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단연코 페르디낭 드 레셉스다. 수에즈 운하 건설을 고집스럽게 추진한 이 불굴의 인물에게는 단 하나의 결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위대함이 너무도 강렬하여, 주변 사람들을 그의 그림자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파라오와 비교하며, “역사를 바꾼 초인” 중 하나로 보았다.
 
이와 동시에, 이스마일 또한 변화하고 있었다. 세계 박람회는 이집트의 유일한 케디브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폴레옹과 오스만이 개조한 파리를 본 그는, 이집트로 돌아가 카이로를 유럽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현대적인 수도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때 신중하게 지출했지만, 이제는 목표 달성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개조하는 등 새로운 공공사업을 승인했다. 이 프로젝트들은 추가적인 외채, 즉 공공 및 민간 대출을 필요로 했으며, 이는 면화 수익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던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미국 남북전쟁 종전으로 미국의 면화 수출이 재개되면서, 1865년과 1866년 면화 가격이 심하게 변동했다. 결국 가격은 안정되었지만, 경쟁이 심화되면서 하락세를 보였다. 이집트는 경작 면적을 확대해 1860년대 후반까지 수익을 유지하고 심지어 증가시킬 수 있었지만, 면화 수익만으로는 공공사업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스마일은 또한 설탕 생산을 강화하기 위해 고비용의 정제소 건설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국가를 더욱 깊은 부채에 빠뜨렸다. 일부 프로젝트는 장기적으로 경제적 타당성이 있었지만, 카이로를 ‘나일강의 파리’로 만들려는 계획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받은 환영을 재현하고 싶었지만, 그의 사치는 결국 이집트에 부담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이집트 경제를 개선하고 정부를 개혁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도로, 운하, 전신, 철도, 다리 등은 독립국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궁전, 정원, 넓은 대로, 화려한 장식들은 유럽 왕실의 일원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실질적인 국가 발전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그는 필수적인 사업과 사치스러운 프로젝트를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 높은 이자의 대출을 점점 더 많이 받았다.
 
그의 연간 수입을 고려할 때, 채무를 갚을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수에즈 운하였다. 재위 초기 몇 년 동안 운하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이스마일은 운하의 성공에 자신의 미래를 걸었다.
 
1860년대 후반까지, 이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운하는 국제 상업의 패턴을 바꾸고, 이집트와 회사를 부유하게 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스마일은 최대 주주였으며, 주식 배당이 시작되면 큰 이익을 볼 것으로 기대되었다. 원래 양허 조건에 따라, 이집트 국가는 순이익의 15%를 받을 자격이 있었고, 관세 수입에서도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레셉스와 갈등을 빚어온 이스마일은 이제 그를 동맹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레셉스에게 케디브는 더 이상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몇 년 사이, 이스마일은 운하의 결과를 좌우하는 핵심 인물에서 단순한 이해관계자 중 한 명으로 전락했다. 레셉스는 이스마일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특별히 환심을 사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더 시급한 문제들에 집중했다. 운하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며, 지협의 도시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레셉스는 작은 왕국의 사실상 군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회사는 통행료를 책정해야 했고, 선주들을 설득해 기존의 항로보다 수에즈 운하가 더 유리하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했다. 완공까지는 약 2년이 남아 있었지만, 레셉스는 이미 개막식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조용히 사이드의 텐트에서 시작되었지만, 파리 박람회에 버금가는 성대한 축제로 끝날 것이었다.
 
Zachary Karabell, Parting the Desert: The Creation of the Suez Canal, Vintage Books, 2003, Chapter 16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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