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km2PfKjcnUg
결국 그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였고 그 명분 중 하나로서 우크라이나인라는 개별 민족은 존재하지 않으며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모두가 하나의 러시아인이라는 주장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푸틴의 주장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독립된 의식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서방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며
본디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벨라루스는 고대 강국 키예프 루스의 후손으로부터 나온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러시아의 주장이 합당한 것일까요?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9세기 말에 설립된 루스인들의 국가, "키이우 루스"를 뿌리로 두고 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이에 위치 했던 루스는 양 지역 사이에서 무역으로 크게 반성하며 10~11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로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국가의 중심은 이름이 그대로 보여주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2세기 간 번성하는 국가도 결국 12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지중해 무역의 발달로 인한 흑해 교역로의 중요성 저하로 인해 점차 세력을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애초부터 지방 도시들 간 느슨한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던 루스는 국력의 쇠퇴 이후 지역 간 더욱 잦은 갈등을 빚었고,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여러 국가로 넘어진 루스는 사실상 느슨한 연합체로써 이름만 남게 되었고, 공국 간은 권력 쟁취를 위한 전쟁까지 벌어지고 했습니다
그러던 13 세기 중반, 가뜩이나 이렇게 쇠퇴하던 루스에 기름을 부어 버린 사건이 발생하고 맙니다
바로 그 시기 전 아시아를 휩쓸며 수많은 국가를 절망에 빠뜨렸던 몽골군의 대규모 침공이었습니다
1237년 첫 침공을 맞이한 라쟌 공국이 불과 5일 만에 초토화 되었고, 블라디미르 등 여러 공국들이 차례 차례 쓸려 나간 끝에 마침내 루스 수도인 키이우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몽골 군의 침공을 막지 못한 루스는 멸망에 이르렀고 연합을 이루던 공군의 대부분은 몽골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갈라지게 되는 부분입니다
본디 루스의 변두리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는 아이러니하게도 변두리라는 그 특징 덕분에 몽골의 피해를 가장 적게 받았으며, 이로 인해 향후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발전하여 몽골의 지배를 물리치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현 우크라이나 지역 또한 몽골의 침공 이후에도 몽골의속국으로써 여러 공국들이 유지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서쪽에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급속하게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고, 결국 우크라이나 지역의 공국들은 두 강국 간 세력 경쟁 과정에서 모두 침공 후 땅따먹기 당하는 결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러나 결국 세력의 균형은 점점 강대 해지는 폴란드로 넘어가고 있었고, 결국 1569년 리투아니아는 사실상 폴란드의 주도로 연합이 이루어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크라이나 지역의 공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러시아는 끝까지 루스의 명맥을 이어간 자신들이 진정한 루스의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러시아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고대 루스의 멸망 이후 흩어졌던 러시아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죠
그러나 이에 대해서 우크라이나의 입장은 다릅니다
모스크바는 온전한 슬라브인이 아닌 루스 시절 변두리에서 지배 당하던 소수 민족에 불과했고, 다른 공국들이 몽골에 의해 죄다 피해를 입었을 때 기회를 꾀차 자리를 차지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양측이 결코 역사적 논쟁에서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맥락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주장대로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이 없는 것이라 여겨지다면 우크라이나는 말 그대로 러시아의 민족 구성원 중 하나에 불과해 버리게 됩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의 주장대로 간다면, 러시아의 선조는 고대 강국 루스가 아닌, 루스의 일개 변두리 민족 중 하나에 불과해 버리게 되는 것이고요
이를 보면 왜 양국이 그토록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서로의 근본이 걸린 싸움이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논쟁은 차치하고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지배 하에 들어간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무렵 우쿠라이나 일대에는 토양이 비옥하고 물에는 물고기가 가득하며 들판에 새들이 낳은 알이 열려 있던 소문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며 점차 타 세력의 습격이 잦아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타 민족의 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독자적으로 무장을 해나가야만 했으며 이 세력이 점차 거대 해져 16세기 무렵 우크라이나에는 '코사크'라고 불리는 슬라브계 군사 조직이 형성되기 이릅니다.
그렇게 우크라이나 일대에 세력을 형성한 코사크는 점차 귀족의 착취를 피해 도망은 수많은 농노와 그들의 욕맹함에 매력을 느낀 타 민족의 유입 덕분에 폴란드 전체 위협이 될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타 국가로부터 폴란드 침략을 방어해 주고 폴란드를 도와 모스크바 공국을 함께 공격하기도 하며 폴란드 내에서의 영향력을 늘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코사크의 세력은 더 강대해져갔고 어느 시점에 흘러 폴란드 정부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코사크의 통제에 점차 부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코사크의 폴란드에 대한 반란을 우려한 폴란드 왕은 그들에게 정규군처럼 급료를 지급하고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헤트만'이라는 칭호로써 그들만의 지도자 선출을 용인하는 등 막대한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세력을 공공히 해 나가는 코사크들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점점 더 짙어져 갈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민족주의는 결국 우크라이나의 온전한 독립 갈망으로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620년대부터 폴란드에 대한 코사크의 수차례 반란이 이어졌고, 폴란드는 이러한 반란을 계속해서 찍어 누르며 코사크의 기세를 꺾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1638년 마지막 반란의 제압을 끝으로 폴란드는 코사크에 대한 자치 급격히 제안해 나갔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한 폴란드 귀족들의 착취는 정부의 용인 하에 더욱 극심해져갔고 이에 따라 코사크들은 다시금 반란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650년대 폴란드와 코사크 간 대규모 전투가 또 다시 발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이 싸워 주기로 했던 근처의 타타르 족이 폴란드의 매수에 넘어가 코사크를 배신하고 전장을 떠나 버렸고, 독자적인 힘만으로 폴란드에 대응하기 힘들겠다고 느낀 코사크는 또 다른 외부 세력 지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접촉한 외부 세력이 바로 이웃 국가이면서 동시에 오늘날의 철천지 원수로 변해버린 모스크바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코사크의 요청을 받은 모스크바는 자신들이 과거 폴란드에게 빼앗긴 영토도 회복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을 완충 지대로 삼기 좋겠다고 판단하며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1654년 모스크바와 코사크는 조약을 맺어 모스크바가 군사적 지원을 이행하는 대신, 우크라이나 인들은 차르에게 충성하며 모스크바의 통제 하에 자치를 이행할 것을 약속하게 됩니다
이후 모스크바는 코사크를 도와 폴란드와의 전쟁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으니, 곧이어 전혀 뜻밖의 세력이 이들 간의 전쟁에 개입하며 세력 균형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치닫게 됩니다
바로 북방의 제국 스웨덴이 폴란드가 코사크와와 전쟁을 벌이느라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 것입니다
또한 스웨덴은 코사크와 접선하여 모스크바 놈들은 향후 당신들의 뒤통수를 치고 우크라아니 전체의 자치권을 박탈할 것이다라고 경고하며 자신들과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경고와 같은 설득에 코사크 여론은 점차 스웨덴 측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는데, 코사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모스크바는 전쟁을 벌이던 폴란드와 1656년 평화 조약을 맺고 곧바로 스웨덴에 반격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1660년 종결 되었으나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우크라이나, 즉 코사크의 운명은 무사할 수 없었습니다
1667년 폴란드와 모스크바는 안드루소보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나눠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이렇게 우크라이나는 또 다시 독립 국가로 나아가지 못한 채 양 국가의 영토로 찢어지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폴란드는 코사크 제도를 폐지시키며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자치권을 제거해 버렸고
모스크바는 자국 내 우크라이나의 자치 정부를 용인해 주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치 정부의 약화를 유도하며
우크라이나를 자국에 동화시키고자 했습니다
특히 표트르 대제 러시아 제국 선포와 후대 예카테리나 2세의 중앙 집권화 정책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자치권을 박탈 당하며
러시아 일개 지방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한편, 점차 국력이 약해진 폴란드 또한 주변국인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시작했고,
1772년 1793년 1795년 3국 간 세 차례 분할 과정을 거치며 국가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분할 과정에서 폴란드에 속해 있던 우크라이나 지역의 대부분은 러시아가 가져가게 되었고
일부 지역은 오스트리아가 뜯어가며 우크라이나도 폴란드와 함께 지도상에서 종적을 감추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는 기존 러시아인을 대러시아인이라 칭하고
우크라이나 인은 소러시아안으로 정의하며, 우크라이나인 자체를 러시아 인의 일부로써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성향을 잠들기 위해서
우크라이나어 교육을 금지시키고 문화 부흥을 탄압하며 오랜 기간 러시아인으로 동화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당시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에 반발한 우크라이나 지식인의 상당수는 오헝 제국 소유의 지역으로 넘어가
언어 연구, 문화 운동, 나아가 우크라이나 민족 정당까지 창설 하며 민족 주의의 불씨를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20세기 초 러시아의 내부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러일 전쟁 패전과 러시아 혁명 촉발, 그리고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너무나 거대한 땅덩이가 가졌던 러시아는
자국의 모든 지역을 통제하는 데 부침을 겪고 있었습니다
오헝제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의용군을 꾸려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에 끼어들기 시작했고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인들도 계속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 국가 건설 노력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18년 2월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 세력은 내정 추스리고
1차 세계대전의 혼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독일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핀란드 등 서부의 광범위한 땅덩어리를 모두 독일에게 넘겨 버립니다
이후 독일로 넘겨준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독일 제국에 의해서 괴뢰국가인 "우크라이나국"이 설립됩니다
그러다 독일이 패망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다행히도 독일군의 지배에서 벗어나 온전한 독립국가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선포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쪽에 우크라이나에서는 1918년 11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뒤이어 독립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우크라이나는 국가 없는 민족 이라는 설움을 떨쳐 내고
그들만의 온전한 국가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육강식의 냉혹한 국제 정세는 우크라이나의 가혹한 운명을 호락호락하게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우크라이나가 설립된 지역에는 우크라이나인만큼이나 폴란드인도 상당수 함께 살아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를 선포한 것에 대해서 대대적인 반발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함께 독립 했던 폴란드도 이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아야 겠다는 야욕을 드러내며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승전국 중 하나였던 프랑스는 폴란드가 강대 해지면 세력 균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독일의 팽창을 억제해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고, 이렇게 폴란드의 서우크라이나 합병을 용인해 주게 됩니다
결국 서우크라이나 구성원들은 폴란드에 밀려나 동쪽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이 우크라이나도 심각한 안보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독일의 패망 이후 다시금 우크라이나를 집어 삼키고자 군대를 이끌고 수차례 침공을 감행했고,
폴란드 또한 우크라이나의 영토의 눈독을 드리고 있었으며,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러시아의 반혁명 백군과 그 지원군인 프랑스까지 모두 우크라이나의 집결해
말 그대로 개판 오분 전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전쟁 끝에 폴란드와 볼셰비키는 1921년 리가 조약을 맺어 우크라이나를 또 다시 양분하여 나눠 가진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됩니다
이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써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 되어
또 다시 러시아와 지독하도록 엮여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스탈린의 집권 이후 그는 각 농촌의 농업 집단화 정책을 강제 시행 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각 지역의 농업 효율과 생산량의 급격한 저화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1930년대 초 대기근으로 이어져
우크라이나에서만 약 300만 명이 넘는 아사자를 낳게 됩니다
또한 스탈린은 대숙청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산당원의 37%에 달하는
17만 명이 숙청 당했으며 이 기간 동안 스탈린은 대기근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의 당원들에게 전가하며
숙청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한편 소련 전체에 대한 일률적 교육 정책이 시행되며 우크라이나에서도 러시아어 교육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졌고
이 시기 동안 우크라이나어의 알파벳, 어휘, 문법은 러시아와 유사 하도록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간 러시아와 한 몸으로서 소련을 구성해 왔던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이 분열 되던 시기,
소련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며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으며
당시 국민 투표의 독립 찬성률은 무려 92.3%에 달했습니다
이후 독자 노선에 나선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위성국 중에서도 가장 러시아의 반감이 강한 국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키이우 루스에서부터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역사였습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독립된 민족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고 있지만
실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러한 푸틴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선조들이 루스의 멸망 이후 지켜온 언어와 문화 그리고 민족성은 10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살아남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먹이를주지마시오
우크라이나는 대만이랑 비슷하네
군붕쿤
애초에 서구에서 민족이라는개념은 19세기에 생긴거고
우크라이나 민족이라는것도 잘못된 개념이긴함
우크라이나의 땅안에 수많은 민족들이 있는데
다문화국가로 출발했지만 같은 사상을 공유하지도 못하고 우크라이나 민족만을 위한 사상을 가지고
타민족을 배타하면 멸망하는거지
마일스톤
러시아, 폴란드에 뒤통수 맞으면서 1천년을 버텨왔네
전쟁 잘 마무리해서 나토 eu 가입하길
Cal
우크라이나 민족성을 부정하는 러시아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지만 돈바스, 크림반도와 같이 러시아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러시아와 역사적으로 더 얽혀있는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에 통합되기 싫어하는 여론도 존재하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갈라지고 남남이 되는 편이 나을 듯.
Alpengold
현우크라이나지역에서 우크라이나민족이 주류가 될 수 있었던 큰 요인중 하나가 2차대전 당시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을 싸그리 절멸시켰던 것이였음
우크라이나 지역은 다른 유럽처럼 여러민족이 살았고 영토의 주인이 계속 바뀌었지 저 영상의 내용처럼 뭔가 우크라이나만의 정통적 지역이 절대 아니였다
우크라이나라는 지리적 개념은 12세기부터 등장하지만 민족적으로 우크라이나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세기부터임
우크라이나의 시작을 어디서 볼지는 매우 애매한 문제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