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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
1. 지렁이의 탄생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후에 그로 인하여 남자 아이를 낳으니,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자칭했다"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서 이르기를,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함통 8년(867)에 이李씨로 태어나 훗날 견甄을 성씨로 삼았다. 아비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어먹고 살다가 광계(光啓) 연간(885~887)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에 거하며 장군을 자칭했다. 슬하 네 아들 모두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니, 세상 사람들 견훤을 두고는 '걸출하며 지략이 많다' 하였다."
三國史本傳云甄萱尙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光啓中 據沙弗城[今尙州] 自稱將軍 有四子 皆知名於世 萱號傑出 多智略
고기古記 에 이르기를, “옛날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며 딸 하나가 있었으니 자용이 단정하였다. 아비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제 침실에 와서 함께 자며 부부 간의 일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비가 말했다.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서 그 옷에 꽂아라.’ 그렇게 하고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실을 찾았다.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후에 그로 인하여 임신을 하고 남자 아이를 낳으니,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자칭했다
古記云 昔一富人 居光州北村 有一女子 姿容端正 謂父曰 每有一紫衣男到寢交婚 父謂曰 汝以長絲貫針刺其衣 從之 至明尋絲於北墻下 針刺於大蚯蚓之腰 後因姙生一男 年十五 自稱甄萱
─ 삼국유사
견훤이 막 태어나 포대기에 싸여있을때, 아비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미는 새참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 속에 두었더니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의 무리들이 이를 듣고 범상치않다고 여겼다. 커서 체모가 씩씩하고 빼어났으며 품은 뜻과 기개가 당당하여 비범하였다.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 삼국사기
함평 8년, 견훤은 이아자개라는 이름의 어느 농군, 혹은 상주 지역에서 대대로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대지주 세력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라는 아자개에게 있어서 대대손손 충성을 바친 조국이었으나, 이미 금빛 위세를 잃어버리고 쇠퇴한 지 오래였다. 그에 따라 아자개 가문의 위상도 위태로웠다.
서력기원 867년, 서양에서는 북구인들이 잉글랜드 전역을 침공하여 노섬브리아의 임금을 혈조(血雕)형으로 참살하는 등 위명을 떨치고, 술에 취한 농부 출신의 로마 황제 미하일 3세가 암살당했던 해였다.
동서양 할 것없이 난세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2. 버려진 자식이 되다
아자개는 15세의 견훤을 수도의 근위병으로 보내는데, 견훤의 동생들이 능애를 제외하고는 각각 보개, 소개, 용개처럼 개자 돌림을 쓰듯 이름이 확연하게 다른 것을 보면, 어쩌면 견훤과 능애는 이들과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 관계였거나 가문의 사생아 비스무리한 존재였을 수 있다. 지렁이 설화는 어쩌면 이것을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소년 견훤은 홀로 쓸쓸하게 수도로 상경해 군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의 전라도 지역 서남해안에서 해적들을 상대하게 된 그는, 착실하게 전공을 쌓으며 성장해나갔다.
종군하여 왕경에 들어갔다가 이내 서남 해안의 변방을 막게된 견훤은, 잘 때도 창을 베개삼아 적을 기다렸다. 그 용기는 항상 사졸들중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이로써 비장(裨將)이 되었다.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견훤은 그야말로 물불 안가리고 목숨걸고 종군했던 것 같다. 이 때 죽었으면 소년의 일생도 거기에서 끝이었겠지만, 견훤은 비장에서 계속해서 성장해서 서남해 지역의 상당부분을 평정하고 자기 세력권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 와중에 아버지인 아자개는 880년대에 신라에서 사실상 반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군벌이 되었다. 견훤도 서서히 그 길을 따라 889년, 혹은 892년에 거병한다.
서기 892년은 견훤과 동갑인 황제, 당나라 소종이 황위에 오르고, 진성여왕이 6년째 신라를 다스리던 시기였다. 중앙에서는 국정이 농단되고 총신들의 전횡이 극에 달했으며, 바깥에서는 아자개처럼 지방의 세력가들이 할거하여 신라의 지배영역에서 떨어져나갔으며 도적들이 횡행하여 길을 막았다. 자연스레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으니 병사들의 급여도 위태로웠을 것이다.
3. 독립하다
그리하여 견훤이 반역의 기치를 휘날리자 한달여만에 도당 오천여 명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그에게 목숨을 맡겼던 것이다. 견훤이 단순히 적진에 돌격하는 용기뿐 아니라 인망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신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사실상의 공백지, 또는 도적떼의 소굴, 그리고 지방 군벌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세력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군웅의 탄생이었다.
그는 이후 대담하게도 군을 이끌고 신라 왕실에서 파견한 무주 도독 김일을 격파, 무진주에 입성하여,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를 자칭하였다.
해풍이 불어오는 남쪽에서 견훤이 자리를 잡을때, 삭풍이 불어오는 북변에서도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라의 다섯개 소경小京 중에서 수도에서 가장 멀었던 북원경(지금의 강원도 원주)에 자리를 틀어잡고 웅거한 양길이라는 호족이 독자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휘하에 수많은 걸출한 인재들을 거느리며 강원도 방면을 향한 정복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궁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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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이 있는 채로 태어났다고도, 혹은 신라 왕실의 후손이라고도 하는 궁예는 명태조 주원장처럼, 한때 세달사의 중이었다고 한다. 태어날때부터 한쪽 눈이 멀었지만 담기(膽氣)가 있어 무예를 연마했고, 기훤의 휘하가 되어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아갔다. 일설에 따르면 어느날 그가 쓰던 공양 그릇에 까마귀가 상아로 만든 산가지를 떨어뜨리고 갔는데, 왕王 자字였다고 한다.
기훤이 그를 알아주지 않자, 궁예는 북원경으로 향했고, 양길을 만났다. 양길은 궁예를 부장으로 삼아 강원도 지역을 공략하라 하였는데, 궁예는 늘상 공평무사하여 사졸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 정복지는 동해연안 구석구석에 이르렀다. 이때가 892년, 견훤이 무진주에 입성할때였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견훤의 독립 소식을 듣고는 궁예도 기어이 김순식이 지키는 명주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이렇듯, 북쪽에서 양길과 궁예가 위세를 떨친다는 소식은 견훤에게도 전해졌고, 견훤은 그런 양길에게 겨우 비장의 직책을 내린다. 양길은 겨우 남쪽의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내린 비장 벼슬이 같잖았을 것이다. 자신은 북방의 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테니. 그러나 견훤의 시선은 더 먼 곳에 있었다. 그가 마침내 개국開國을 한 것이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나아 환대하였다. 견훤이 인심 얻은 것을 기뻐하며 좌우에 이르기를, "내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이 가장먼저 일어났고, 그 후에 혁거세가 흥했으니 고로 진변은 따라 흥한 것이다. 그러니 백제는 나라를 금마산에서 연지 육백여년이 됐는데 총장 연간에 당고종이 신라의 청을 받아 장군 소정방을 보내 13만 수군으로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 김유신도 역시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병과 함께 협공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어찌 완산에 도읍 세워 의자의 묵은 분노를 의로 갚지 아니하리?"
마침내 후백제왕을 자칭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 삼국사기
본격적으로 나라를 세우고 독자노선을 가게 된 견훤은 901년, 신라의 대야성을 침공하지만 깨트리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오는 과정에서 금성 나주 일대를 약탈하고 강제로 복속시킨 견훤은 이 지역의 민심을 잃었다.
같은 해, 북쪽에서는 마침내 양길의 수하인 궁예가 독립하여, 강원도를 넘어서 패서지역까지 정벌, 장악하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바야흐로 후삼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궁예가 패서지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왕륭이라는 이름의 한 패서호족이 투항하고, 자신의 영리한 아들을 궁예에게 소개한다.
그가 바로 왕건이었다. 왕륭, 왕건 부자는 항복했지만 패서의 호족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고, 왕건은 특출난 지휘관이기도 했다.
나머지 호족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신임을 받은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후방인 금성 나주 일대를 점령하는 군공을 세우는데, 이 지역은 일전에 견훤이 대야성 공략 과정에서 잔인하게 약탈한 지역이었다. 왕건의 점령으로 인해 견훤은 두고두고 근심하게 된다.
견훤은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적으로 신라의 세력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던 자신의 옛 고향, 상주 일대의 요충지에 진출하여 그곳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주 일대는 여전히 왕건의 수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고, 견훤은 나아갈 때마다 그에게 패하여 한 때는 도읍인 무진주마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궁예가 민심을 잃었다.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갈아버린 궁예는 예전의 궁예가 아니었다. 그는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민중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덕은 있었으나 먼 곳을 내다보는 능력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에게 있어서 기존의 정치세력이나 귀족들은 제거해야할 적에 불과했고, 이는 호족들의 연합세력에 가까웠던 그의 나라를 속에서부터 서서히 붕괴시켰다.
수많은 음모와 세력들의 합종연횡 속에서 왕건이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그는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략이 뛰어났고, 군공으로 대표되는 커리어 또한 출중했다. 왕건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 이름을 다시 고려로 바꿨고, 견훤은 그에게 부채와 화살을 선물했다.
한차례의 역성혁명으로 인해 고려가 어수선해진 틈을 타 견훤은 920년, 다시금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에 진출하여 비로소 그 성을 깨트리고 취했다.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또한 마침내,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에까지 진출했으니 이제는 정말로 옛 백제의 영광이 손에 잡힐 듯 하였다. 그러나 고려도 만만치 않았다. 924년 견훤이 아들을 보내 조물성을 쳤으나 애선만 살해했을뿐 꺾지 못했고, 청주시를 비롯한 충청도 일부지역을 고려에게 내줘야만 했다.
그러나 견훤은 화의를 통해 신라로 향하는 길을 사실상 보장받을 수 있었다. 파죽지세로 경상남도 일대를 짓밟은 견훤의 군대는 옛 금관가야 지역을 포함하는 경남 대부분의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게된 것이다. 고려와 백제 사이의 싸움에서 이미 금빛을 잃어버린 신라는 그저 국토가 짓밟히는 광경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경남 일대를 차지하고 국력을 불린 견훤은 다시 군을 이끌고 고려, 신라 양국과 전쟁을 벌여 웅주(청주를 포함한 충청도 지역 일부), 문경, 칠곡 등 수많은 거점들을 함락시키며 그 영토를 넓혔다.이때는 바야흐로 927년. 견훤은 어느새 15세의 청년에서, 환갑에 가까운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견훤의 눈은 아직 총기를 잃지 않았고, 시대를 관통한 승부수를 띄우게 된다.
4. 군은 서라벌로 향하고
친정하여 직접 문경을 함락시킬제,(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견훤은 군대를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돌린다. 남쪽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는 15세에 홀로 상경하던 때를 떠올렸을 것이다. 열 다섯살의 근위병은 어느새 당당한 일국의 왕이 되어있었고, 대대로 섬기던 나라는 짓밟을 대상이 되어 있었다.
견훤의 군대가 서라벌에 들이닥칠 때, 신라의 임금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혹자는 신라의 임금이 후궁을 끼고 춤을 추며 놀고 있었다고도, 혹자는 그 술은 복주福酒이며 신라 임금은 애닲프게 천지신명에게 나라를 구해주소서하며 읍을 하고 있었다고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살해당하거나, 적어도 죽기를 강요받았다는 사실이다.
견훤이 갑자기 신라왕도에 이르니 그때 왕이 비빈을 거느리고 포석정에서 술상 펴놓고 놀고 있더라. 적이 이르자 낭패하여 몸을 어디에 둘지 알지 못했다. 임금은 부인과 함께 남쪽 이궁으로 돌아갔고 따르던 신하들과 시종들 궁녀 동관 영관들은 모두 난군에게 잡혀 죽었다. 견훤이 군을 풀어 크게 약탈했다. 사람을 시켜 왕을 끌어내 죽였다. 곧바로 궁중에 거하여 부인을 강제로 범하고 왕의 족제인 김부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5. 활을 평양성 문루에 내걸고...
왕건은 군사를 보내 견훤의 뒤를 막았다. 마침내 서라벌에서 빠져나오는 견훤의 군대는 공산에서 왕건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이것이 바로 훗날 팔공산의 유래가 된 공산전투이다. 견훤은 이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후삼국의 패권을 잡는다.
신숭겸과 김락이 죽어, 왕건은 팔다리가 찢겨나가는 고통이라며 울부짖었고, 그 자신도 단기로 몸을 내뺄 수 밖에 없었다. 견훤은 왕건의 군량을 불태우며 경상도에서 왕건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버리고는 "활을 평양성 문루에 내걸고, 말에게 패강 물을 먹이고 싶다"고 하는 국서를 보내기까지 한다.
6. 가여운 완산(完山) 아이 아비 잃어 울고 있네
그러나 견훤은 늙었고, 그의 아들들은 사이가 안좋았다. 기세를 타고 고창에 진격한 후백제 군은 고려에 참패하여 풀이 꺾였고, 운주성 전투에서의 결정적 패배는 휘하 장수들의 투항을 가속화시켰다. 상황이 급변하여 안좋아지기 시작하자 내분은 격화되었다.
견훤은 늙었지만 항상 멀리보는 사람이었다. 맏아들을 비롯한 신검, 양검, 용검 형제들은 급진파로서, 계속해서 기세를 타고 고려를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총명한 금강은 달랐다. 그는 여러 차례 전쟁에서 군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아버지처럼 넓은 식견을 보여주어 견훤의 총애를 받았다.
맏아들 신검은 아버지가 후계자를 금강으로 세웠다는데 격분, 기어이 반역을 저질러 제 아비를 폐위시키고 금산사에 유배보내버린다. 그러나 신검이 반역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이지는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난세의 많은 자식들처럼, 기실 자신 주위를 둘러싼 종사단의 장막에 떠받들렸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견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완산아이 신검은 아비를 잃었고, 완산아이 견훤은 대업을 잃었고, 완산아이 백성들은 임금을 잃게 되는 것으로.
* 어릴 때 썼던 견훤의 이야기인데 우연히 찾아 올려봅니다.
원래쓴곳(퍼가실 때엔 출처를 남겨주세요)
킴취워리오
구렁이도 아니고 지렁이로한 이유가멀까
ㄷㄷㄷㄷㄷㄷㄷㄷ
후백제를 세우면서 설화만든거 같은데
지렁이를 한자로 바꾸면 토룡임
역사는 결국 승자의 역사다 보니
지네에서 지렁이로 바뀐걸수도 있고
원랜 용인데 토룡으로 낮춘걸수도 있음
ㄷㄷㄷㄷㄷㄷㄷㄷ
전후무후한 업적
자기가 만든 나라 자기가 멸망시킴
디럭스초코햄버거
또졌어!!!!!!
NF쏘나타
수달이가 죽었어!
깊고푸른밤
재밌다 재밌네
프라이먼
동방의 피로스라고 평하던데. 꼬라박은 정치력이 비슷한 듯 하지만 견훤이 더 식견이 넓은 듯.
aebaeb
탄생설화는 당시에는 용이었을 건데 후대에 지렁이로 '검열삭제' 당했을 듯 ㅋㅋㅋㅋ
김탁봉18세
수달이가 죽었어!!!!!
백종원의피스톨
알아보기ㅣ싫음
베댓전문가
저 시대에 원추리 훤 萱을 이름으로 쓰던 군벌이 셋이나 되던 거 같던데
당시 원추리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던건가 궁금해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