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의 국제적 위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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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8월 송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入朝)하였다.
공부 시랑(工部侍郞) 최사량(崔思諒)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사은(謝恩)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송나라는 본국이 문물 예악의 나라라 하여 매우 후히 대접하였고, 사신의 하마소(下馬所)를 ‘소중화지관(小中華之館)’ 이라 제(題)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태수(太守)가 교외로 나와 맞았고, 전송(餞送)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안】《통고》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희령(熙寧) 9년 이후 고려의 시신이 많이 왔는데,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일찍이 영관(伶官 악공(樂工)과 광대) 10여 명을 바치면서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음악이 족히 볼만한 것은 없으나 국사(國史)를 윤색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황제는 그 나라가 글을 숭상하기 때문에 매번 조서(詔書)를 내릴 때는 반드시 사신(詞臣)을 뽑아 저찬(著撰)하게 하고 그 중 가장 잘된 것을 선택하였으며, 보내는 사신이나 서장관(書狀官)은 반드시 중서성(中書省)에 불러서 글을 시험에 본 뒤에 보냈다.
○<석림연어(石林燕語)> 에 이르기를,
“송나라가 고려에 대하는 예가 특히 후하였는데, 통과하는 주현(州縣)에서 모두 관(館)을 축조하고 별도로 창고를 지어 공장집물(供帳什物)을 비축하였으며, 도착할 때면 태수가 교외로 나아가 맞았고 전송할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하였다.
 
-동사강목 제7하 병진년 문종 30년(송 신종 희령 9년, 요 도종 태강 2년, 1076년)
 
박인량(朴寅亮)의 자는 대천(代天)이며 죽주(竹州) 사람, 혹은 평주(平州) 사람이라고 한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역임한 관직이 많았다. 요(遼)가 일찍이 압록강(鴨綠江) 건너편을 경계로 삼고자 배다리[船橋]를 설치하고 동안(東岸)으로 넘어와서 보주성(保州城)을 쌓았다. 현종(顯宗) 이래로 여러 차례 성을 파기할 것을 청하였으나 〈요가〉 들어주지 않았다. 〈문종〉 29년(1075)에 사신을 보내어 〈파기를〉 청하면서 박인량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이르기를, “온 천하가 이미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는데, 남아있는 작은 땅을 어찌하여 반드시 내 땅이니 내가 다스리겠다고 하십니까?”라고 하고, 다시 말하기를, “문양(汶陽)의 옛 땅을 돌려주었듯이 우리나라[弊邑]를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시면, 이와 같은 작은 나라[長沙之拙袖]도 태평성대에 박수치며 춤을 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요 임금이 그 글을 보고 일을 그치게 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고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옮겼다. 〈문종〉 34년(1080)에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과 함께 사신의 명을 받들고 송(宋)에 가다가 절강(浙江)에 이르러 맹렬한 폭풍[颶風]을 만나 배가 거의 전복되었다. 송에 이르자 조공할 토산물을 헤아려 보니 태반이나 망실되었지만, 황제가 왕에게 칙서를 내려 책임을 묻지 말도록 하였으므로 왕이 이에 유홍 등을 석방하였다. 김근(金覲)이라는 사람도 이 일행에 있었는데, 송인(宋人)이 박인량과 김근이 지은 척독(尺牘)·표장(表狀)·제영(題詠)을 보고 칭찬과 감탄을 마지않았으며, 두 사람의 시문을 간행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 이름 하였다. 〈이후 박인량은〉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숙종(肅宗) 원년(1095)에 상서우복야 참지정사(尙書右僕射 叅知政事)로 죽으니,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박인량은 문장이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송과 요[南北朝]에 〈보내는〉 고주(告奏)·표장(表狀)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일찍이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하여 비서성(秘書省)에 간직하게 하였다. 아들은 박경인(朴景仁)·박경백(朴景伯)·박경산(朴景山)이다.
 
 
중국 송나라 조정에서 자국에 입조를 해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서역[서양]의 대표적인 국가들인 천축국[인도를 위시한 남아시아권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통칭], 대식국[백의대식국, 흑의대식국, 이슬람 왕조 곧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층단국[터키의 셀주크 왕조 곧 셀주크 터키], 불름국[불림국, 대진국, 로마-동로마]까지도 모두 중국 송나라 조정에 입조해 중국 송나라 조정을 섬겨왔지요. '송사 외국열전' 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중 오직 고려국의 사신단의 숙소 이름만을 소중화지관(소화관, 소중화관)으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 가장 선진적인 곳이 동양문명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여왔는데, 이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최상위 선진국을 두고 '중화' 라고 언급해왔습니다. 소중화는 말 그대로 중화와 문물과 예의의 구현 수준 곧 선진화 수준의 높낮음을 가리는 용어가 아니라, 말 그대로 덩치, 체급의 크고작음을 구별하는 용어일 뿐이므로, 중화나 소중화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중화에 묶인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오직 고려만은 (거란[요]에) 굴복하지 않았으니, 스스로 백이와 숙제[夷齊]의 후예라고 말하며 삼한의 오랜 나라는 의 문화가 중국보다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관수찬(史館修撰) 증공(曾鞏)이 말했다. “삼가 이전 역사를 살펴보니 고구려는 주몽 시기부터 흘승골성(紇升骨城)을 얻어 거주하며 국호를 고구려라 했고 이로 인해 고씨를 성으로 삼았습니다. 한을 지나 당 고종 시대에 이르자 그 왕 고장(高藏)이 나라를 잃고 국내로 이주했습니다. 성력(聖曆) 연간에 고장의 아들 덕무(德武)가 안동도독이 되었고, 그 후에 점차 스스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원화(元和) 말기에 일찍이 악공(樂工)을 바쳤지만, 이때부터 다시 중국을 알현하지 않았습니다. 오대(五代) 동광(同光), 천성(天成) 연간사이에 고려의 군주 고씨가 다시 내공했는데, 그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장흥(長興) 3년(932)에는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한 왕건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받드니 이에 왕건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왕건의 아들 왕무, 왕무의 아들 왕소, 왕소의 아들 왕주, 왕주의 동생 왕치, 왕치의 동생 왕송, 왕송의 동생 왕순이 서로 잇달아 즉위했습니다. 대략 주몽으로부터 고장에 이르기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1성(姓) 900년이고, 21명의 군주가 이어지다가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스스로 국가를 세웠지만 이름 및 세차(世次)가 흥하고 없어진 본말(本末)과 무릇 왕건의 시작은 모두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왕씨는 왕건으로부터 왕주에 이르기까지 4명의 왕이 모두 아들에게 이어졌고 왕치부터 왕순에 이르기까지 3명의 왕은 모두 동생에게 이어졌습니다. 왕순이 천성(天聖) 8年(1030)에 내공한 이후로 희녕(熙寧) 3年(1070)에 현재 왕인 왕휘가 내공하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알현하지 않은 것이 대략 43년입니다. 지금 폐하의 어진 덕, 밝은 지혜, 문무(文武) 및 성교(聲敎)의 성대함이 동쪽으로 바다 밖에 퍼지면서 왕휘가 보낸 사신이 이제 궐 아래로 모였습니다. 대개 고구려는 문자를 아는 나라이니 그 사신은 마땅히 그 국가의 임금이 흥하고 무너지게 된 본말과 이름 및 세차를 알 것이므로 전객(典客)의 신료에게 조서로 타일러서 (다음과 같이) 물어보시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덕무로부터 동쪽에 있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는가? 왜 다시 나라를 잃었는가? 일찍이 몇 명의 군주가 이어졌는가? 그 이름과 세차는 헤아릴 수 있지 않은가? 왕건이 흥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 흥한 것이 왕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왕건의 선대에 이미 흥한 사람이 있는가? 천성에서 희녕까지 43년의 간격이 있고, 왕휘가 다시 중국을 알현하였는데 왕순을 계승하여 즉위한 것인가? 그 중간에 또 왕순을 계승한 자가 있는가? 왕휘는 왕순과 어떤 관계인가?’ 이 말과 같이 한다면 순서를 논할 수 있고, 이전 역사의 누락을 보완하기에 충분합니다. 폐하의 밝은 덕이 만리에 이르러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이전 세대에는 이르지 못했던 자들이 의를 사모하여 조정에 오고 있기 때문에 능히 사이(四夷)의 일을 탐구하여 알게 되면 성교를 입은 자들이 멀어서 여기에 오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조서를 필중연(畢仲衍)에게 내렸다.

 

필중연(畢仲衍)은 사신 최사제(崔思齊), 이자위(李子威)와 나눈 말을 와서 상주했는데, 증공(曾鞏)의 논저에서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기(紀)로 남길 수 있는 것은 신라와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왕건이 마침내 삼한을 통합했고, 고씨의 성을 바꾸었다는 점과 왕송은 왕치의 먼 친족이고 왕휘는 왕순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또 말했다. “고씨의 성력(聖曆), 원화(元和) 연간의 일은 모두 기(紀)에 적혀 있고 삼한 스스로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화 연간에 두 부류의 악(樂)을 바쳤는데 아마 당악(唐樂)과 향악(鄕樂)일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만이(蠻夷)가 중국에 귀부하는 것은 진실로 적지 않은데, 만일 고려처럼 풍속이 문을 숭상하고 국가의 군주가 자못 예의를 알고 있어 비록 멀리 바다 밖에 있더라도 중조(中朝)를 받들고 섬김에 있어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다면 조정은 예우를 내려 모두 제국(諸國)의 위에 놓을 것이다. 최근에 악인(樂人) 10여 명을 바쳤는데, 또 오랑캐의 음악에는 취할만한 것이 없다고 해서 단지 국사를 풍부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안도 등이 그 국가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 접대 관원은 상절(上節)과 함께 조정에서부터 서로 허리를 굽혔는데 대개 그 국가의 군주와 안도가 대등한 예를 행했기 때문이었다.

 

-속자치통감장편 신종(神宗) 고려의 내공(來貢) 역사에 관한 증공(曾鞏)의 상주(上奏)

 

이는 고려국의 제 11대 임금인 문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082년경 당시 중국의 송나라 조정에서 고려국에 관련해 의논한 기록인데요. 중국의 송나라 조정에서는 우리나라의 고구려국이 900여년을 갔다고 간주하고 있음이 흥미롭습니다. 고구려국의 건국자, 초대 임금인 동명성왕 고주몽으로부터 마지막 임금, 제 28대 임금인 보장왕 고장까지 700여년이 나오는데, 중국의 송나라 조정에서는 900여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만이(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만국', '만방' 이라고도 하지요.)가 중국 조정에 입조해 중국 조정을 섬기는 것은 진실로 적지 않은데, 만일 이들이 고려국처럼 풍속이 문(문자, 글자, 문헌)을 숭상하고 국가의 군주(임금)가 자못 예의(전근대 곧 전근현대[근현대사 이전 시대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내내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동양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곳이여왔는데, 동양문명권에서 고급문화, 고급철학을 두고서 예의, 인의 이렇게 언급해왔지요.)를 알고 있어 비록 멀리 바다 밖에 있더라도 중조(중국 조정)를 받들고 섬김에 있어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는다면 중국의 송나라 조정은 모두 제국(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통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사 외국열전' 을 보면, 서역[서양]의 대표적인 국가들인 천축국[인도를 위시한 남아시아권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대식국[백의대식국, 흑의대식국, 이슬람 왕조,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층단국[터키의 셀주크 왕조, 셀주크 터키] 그리고 불름국[불림국, 대진국, 로마-동로마] 역시 중국의 송나라 조정에 입조해 중국의 송나라 조정을 섬겨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의 위에 놓는 극진한 예우를 해줄 거라고 당시 중국의 송나라 제 6대 임금인 신종이 언급한 것도 흥미롭지요. 즉,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고려국을 모범으로 삼도록 종용한 것이니까요. 이는 그만큼 고려국 포함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 대대로 굉장히 높아왔기에 가능했던 언급인 것이지요.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판응천부(判應天府) 장방평(張方平) 이 말하기를, “고려 사신이 궐에 나아갈 때의 의례 제도에서는 지나는 경(京), 부(府), 주(州), 군(軍)에서 지주(知州)와 통판(通判)이 예에 따라 성을 나와 맞이합니다. 삼가 보건대 거란의 사신이 북경(北京)을 지날 때는 단지 통판이 소윤(少尹)을 대신하여 나와 맞이합니다. 고려는 외번(外蕃)이니 그 사신은 배신(陪臣)인데, 선휘사(宣徽使)의 품급은 이부(二府)와 같으니 성을 나와서 맞이하는 것은 그 예법이 도리어 거란보다도 중합니다. 이는 국체를 존숭하여 위엄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단지 통판으로 하여금 맞이하고 만약에 사신이 와서 만나면 곧바로 돌아와 알리게 하였으며 양주(揚州)는 이에 따르라고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 신종(神宗) 고려국 사신이 지체되지 않게 하라는 황제의 비답(批答)

 

조서를 내려 고려 (국신사) 안도 등이 오늘 출발하여 문을 나가게 했고, 영녕원(永寧院)에서 황제가 직접 연회를 베풀었다.

 

-속자치통감장편 신종(神宗) 고려사(高麗使)와 부사(副使)를 요나라 사신의 예에 따라 접대하라는 황제의 조서(詔書)

 

조서를 내려 명을 받아 고려로 가는 고려사(高麗使 정사)와 부사(副使)가 지나가는 주(州)와 군(郡)은 마중과 접대를 요나라로 가는 사신의 에 준하게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 신종(神宗) 서장사(書狀司)의 충원을 요청하는 안도(安燾)의 상주(上奏)

 

조서를 내렸다. “지금부터 동문관(同文館)은 고려인이 밖으로 나와 사들인 물건이 도착하면 모두 규칙을 어기거나 잘못된 것이 있는지 살피고 검사하여 바로 예쁘고 규칙에 맞는 것은 받아들여 놓고 나머지 잡품은 돈으로 값을 돌려준다. 만약 시정의 논의에 관계되거나 말이 변방의 내용을 담은 문서라면 바로 원 구매처를 물어서 개봉부가 검사하고는 법령을 받들어 깨우치게 하라. 진봉인(進奉人)이 궐에 도착하면 관사(關司)와 녹사(錄司)는 사신 일행을 가르치되, 진정으로 장차 물건을 객관에 들여와서 교역하기를 원하면 그대로 성명을 갖추어 적고 본관(本館)과 관계하는데, 조사하는 감문은 절차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날마다 10인씩 차례를 나누어 객관을 나가 관광을 하고 매매하는 것을 허락하는데, 각기 친사관(親事官) 1인을 보내 따라다니게 하라. 말을 타기를 원하는 자는 제사(諸司)의 인마 내에서 각기 1필과 말을 기르는 병사 1인을 빌려주고, 신시(申時)까지 돌려주게 하라. 그리고 말과 사람이 간 곳을 보고하게 한다. 진봉사가 기예인을 보내 교습해주기를 원하면 보고하여 조정의 지휘를 받으라.”

 

이보다 먼저 어사중승(御史中丞) 소철(蘇轍)이 말했다. “신이 삼가 보기에, 고려는 북으로는 거란과 접하고 남으로는 넓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중국과는 땅이 떨어져 끊어져 있으므로, 이해관계가 본디 서로 미치지 않습니다. 우리 조정은 처음에 고려의 입공을 허락하였으나 여러 황제께서 무익함을 알고는 관계를 그만두고서 통하지 않았습니다. 희녕(熙寧) 연간에 나증(羅拯)이 비로소 해상을 모집하여 (고려로) 하여금 조근하도록 달래었으니, 그 뜻은 먼 곳의 오랑캐를 불러들여 태평성대라 꾸미고 거란과 기각지세를 이루어 전쟁하는 데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통한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려 사신이) 여러 차례 왔지만 실로 무슨 이익이 있었습니까? 다만 회, 절 지역의 1천리 지역이 수많은 대접에 수고롭고 경사의 모든 관사가 응대하는데에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가는 곳마다 관광하고 송의 허실을 엿보며 지형을 베껴 그려서 거란의 이목이 되었습니다. 혹은 거란이 항상 사신을 보내 고려의 사신단 중에 숨어 있어서, 고려가 몰래 (송의) 사여물을 나누어주고 돌아가서는 거란이 거의 태반을 가져간다고 말하기도 하여, 조정의 수고와 비용이 도움이 되지 않고 얻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매우 애석합니다. 지금 고려 사신이 다시 오는데, 이미 조정은 갑작스럽게 관계를 끊고자 하지 않으면서 백성의 고통이 더해지는 것을 살피고 줄여서 (고려 사신으로) 하여금 큰 이익이 없게 하면 반드시 오는 것이 뜸해져서 우리는 편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보건대 최근에 조지(朝旨)가 내려졌는데, 명주부터의 주군(州郡)이 대우하는 예절은 모두 예전보다는 감하였으나 경사에서의 모든 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신은 조정이 사방의 오랑캐와 교류하고 만나는 데에 거란(요)와 서하만큼 중요한 나라는 없다고 여기는데 눈 앞에서 고려를 대우하는 것이 두 나라에 비해 많거나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비단 우리 조정에 대한 일도 불편한데 만약 두 나라가 알게 된다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고려는 거란에 위아래로 서로 떨어져 군신의 구별이 있으니, 지금 객관에서의 대접하는 예법, 출입하는 절차가 혹여 모두 같거나 거꾸로 과하거나 후하다면 양국을 대하는 일의 법도에 실로 옳지 못합니다. 신은 (고려 사신에 대한) 객관에서의 대우와 영송의 선물은 모두 헤아려서 억제하였으면 합니다. 그들이 출입하는 것은 서북의 거란과 하의 사신의 관례에 의거하십시오. 그들의 체류 기간은 변수(汴水)의 물이 통하지 않을 때가 아니면 그대로 기한을 세우십시오. 이와같이 시행한다면 고려 스스로 박하다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첩황에 이르기를, “고려 사신이 지금 절강로(浙江路)에 이미 도착하였으니, 정해져서 삭감된 조약은 바라건대 성부가 간여하지 말고 단지 조정의 명령으로 일이 느려지거나 예법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고려 사신이) 도착하니, 소철이 다시 말하기를, “신이 최근에 동문관(同文館)이 고려를 접대하는 법규를 덜어 낼 것을 바라는 주청을 하였는데, 근래 성지를 내리시어 대체로 시행된 것 외에도 절일에 (사신 일행) 20인이 번을 이뤄 하례로 객관에 나아가 매매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을 허락하는 한 항목이 있는데, 다만 인원을 줄여 10인으로 삼았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오랑캐들은 마음으로는 간사하게 속일 생각을 품고 사람됨은 알 수 없습니다. 도성을 유람하도록 허락하면 크게는 우리의 허실을 살펴 조사하고 궁궐과 창고, 영방, 거리의 길이 굽었는지 하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 상황이 매우 옳지 못합니다. 작게는 법으로 금지된 물건과 기밀 문서를 구입하여 잘못된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를 다스리면 황제의 은혜에 손상이 가고 다스리지 않으면 국가의 일을 해치게 되니, 사신의 출입을 하나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옛 법에 비록 황제께서 몸소 관가에 대한 감시를 직접 한다 하더라도 소인이 이익을 탐하여 아주 조금 남기니 어느 곳에서 따르지 않겠으며, 그 실익도 없습니다. 만약 조정이 완전히 앞서의 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20인으로 하여금 출입을 허락할 만하며, 만약 생각해볼 만하다고 여긴다면 단지 10인만을 허락한다고 하여도 실로 또한 옳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성지를 내리시어 완전히 금지시켜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 철종(哲宗) 고려인이 산 물건을 검사하라는 조서(詔書)와 고려의 입공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어사중승(御史中丞) 소철(蘇轍)의 상언

 

이는 중국 송나라에서 자국에 입조해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고려국을 거란족의 요나라, 티베트 방면의 서하국보다도 높은 제 1위의 우대를 해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정확히는 고려국의 제 13대 임금인 선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090년경의 일인데요. 중국 송나라 조정에서 고려국에 대한 예우가 거란족의 요나라, 티베트 방면의 서하국보다 높은 것을 보고 이에 대한 시정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이지요. 애초에 중국 송나라 조정 차원에서 고려국을 굉장히 우대하느라 감당해야 하는 게 너무 많을 뿐더러, 요나라와 서하국이 보더라도 의전상 문제가 되지 않겠냐는 언급이기도 하지요. 그럼,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 중국 송나라의 역대 임금들은 과연 어떻게 조치를 취하였을까요?

 

○원풍(元豐) 원년(1078년, 문종 32년)에 경동(京東)과 회남(淮南)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의 정관(亭館)을 짓게 하였는데, 아주 장대하고 화려하게 하였으므로 밀주(密州)와 해주(海州) 두 주에 소요가 생겨 도망치는 자가 있었다. 

 

-《동파집(東坡集)》 ○ 《화만록(畫墁錄)》에, “하북(河北)에 오도창(五都倉)을 설치하였는데, 고려와 강화(講和)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역을 다 마치기도 전에 황제가 죽었으니, 이는 하늘이 연계(燕薊)의 백성들을 중국에 귀속시키지 않으려는 것인가 보다.” 하였다.

 

고려 사신의 관소(館所)는 양문(梁門) 밖 안주(安州)의 동문관(同文館)에 있다. 오직 대요(大遼, 요나라)와 고려의 사신에 대해서만 관소에 나아가서 잔치를 베풀어 준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정화(政和) 연간(1111년~1118년)에 <고려의> 사신을 올려 국신사(國信使)로 삼고 예우(禮遇)를 서하(西夏) 보다 위에 두고, 요(遼)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과 압반관(押伴官)도 고쳐서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등의 제기(祭器)도 하사하고, 예모전(睿謨殿) 안에서 고려 사신에게 연회(宴會)를 베풀기까지 하였다.
 
-중국사서 고려·발해유민 기사>송사>『송사』권487 열전246>고려 사신을 국신사로 올리다
 

객성(客省)의 사(使)와 부사(副使)는 각 2인이다. 국신사(國信使)를 만나고 헤어질 때의 연회 및 하사[見辭宴賜], 사방의 진봉(進奉)과 사이(四夷)의 조공78朝覲貢獻]에 관한 의례를 관장한다. … 정화(政和) 2년(1112년)에 무선계(武選階)를 새롭게 고치면서, 이에 객성(客省). 사방관(四方館), 인진사(引進司), 동서상합문(東西上閤門)의 소관 업무에 대한 법규정을 모두 상서성(尚書省)으로 하여금 갖추어 올리도록 조하였다. 또 조(詔)하여 고려의 사신을 이미 국신사(國信使)라 부르니, <고려 사신에 대한 일을> 객성에 고쳐 예속시켰다.

 

-중국사서 고려·발해유민 기사>송사>『송사』권166 지119 직관(職官)6>객성의 직장과 고려사신

 

 

중국 송나라 조정에서는 자국에 입조해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거란족의 요나라를 제 1위의 반열에, 우리나라의 고려국과 티베트의 서하를 공동 제 2위의 반열에 두었는데, 이렇게 기원후 1110년대부터는 고려국 사신단을 국신사 자격으로 승격시켜서 그 예우가 서하의 사신단보다도 높았고, 거란족의 요나라와 공동 제 1위의 반열에 배석되어, 거란족의 요나라 사신단과 함께 추밀원(현 대통령 관저 국가안보실에 해당)에 예속되었고, 기존에 고려국을 대할 때 쓰던 인반관, 압반관을 고쳐서 접관반, 송관반이라고 칭했을 정도였죠. 그 외의 극진한 우대는 말할 것도 없었죠.

 

사이(四夷, 전세계 곧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통칭)의 군장(君長)들이 흔히 산과 계곡을 의지하거나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수시로 옮겨다니기를 편리하게 여겼으므로, 원래부터 나라에 도읍 제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역(西域)의 거사(車師)ㆍ선선(鄯善) 등 나라가 겨우 담장을 쌓아 거성(居城)으로 만들 줄 알았으므로, 사가(史家)들이 그것을 가리켜 ‘성곽 제국(城郭諸國)’ 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특이함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같은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고을과 마을을 만들고, 높은 성첩(城堞)을 둘러 쌓아 중화(中華)를 모방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은 기자(箕子)가 봉작(封爵) 받은 옛땅이라서 중화의 전해 오는 풍속과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정에서 간간이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위무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경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이제 그 나라를 세운 형세를 모두 파악하여 그림으로 그린다.

(중략)

신(臣)이 우러러 생각하건대 신종황제(神宗皇帝)는 중국의 문물제도를 크게 베풀어[誕敷文敎] 먼 나라까지 감싸 안았다. 그래서 보배를 공물로 바치며 중국[內]으로 향하는 자들이 배를 타고 계속 이르렀다. 그런데 고려에 대해서는 특별히 예우하였으므로, 근시(近侍)를 파견하여 천자의 명대로 그들을 위무하면서 천자의 뜻[睿旨]을 베풀었던 것이다.

(중략)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크게 문교(文敎)를 펴 먼 나라에까지 미치매, 보물을 바치고 알현(謁見)하려는 사람이 바다를 건너 답지하였다.
그 가운데 고려에게만 더욱 예우(禮遇)하여 주고, 따라서 근시(近侍)를 사신으로 보내어 위무하였으며, 일찍이 예지(睿旨 황제의 분부)를 내렸다.

(중략)

황제(皇帝)는 천지와 같은 덕업(德業)을 베풀어 만국(萬國)을 모두 내조(來朝)하게 하였다. 고려를 돌보면서 신성한 은혜를 입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조정에서 인재를 엄격히 선발하여[遴擇在廷] 〈고려에〉 위무(慰撫)와 하사(下賜)를 명령하였으니 그 융숭한 은혜와 두터운 예의는 전에 없던 일이다.

(중략)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고 했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를 봉했을 때부터 이미 농사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의관(衣冠)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중략)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가 가장 왕성하다.

(중략)

여러 오랑캐 나라는 비록 임금이 있으나, 그 출입에는 정(旌 깃대 끝에 오색 깃털을 단 기)과 전(旃 깃대끝이 굽고 장식이 없는 기) 십여 개가 따르는 데에 불과하여 신하들과 거의 뚜렷한 분별이 없다. 다만, 고려는 본래 조빙(朝聘)을 통하여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군신 상하가 거동할 적에 예문(禮文 예법의 명문)이 있으니, 왕의 순행(巡行)에 각기 의물(儀物)과 신기(神旗)가 있어, 선구(先驅)하는 갑사(甲士)가 사람이 오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육위(六衛)의 군대가 각기 그 의물을 잡고 가니, 비록 다 전례(典禮)에 맞지는 않으나, 다른 여러 오랑캐에 비하면 찬연히 빛나 볼 만하다. 이것이 공자(孔子)가 살고 싶다 하고 더럽다 하지 않은 이유이다. 더구나, 고려는 기자(箕子)의 나라인데다가 성조(聖朝 송을 일컬음)의 권회(眷懷)함이 두터운 터이니 더욱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제 아울러 그 의물을 아래에 그린다.

(중략)

 

여러 만이(蠻夷)의 나라들은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다리를 꼬아 앉고 머리를 풀고 몸에 문신을 하고, 승냥이와 이리와 같이 살고 사슴과 더불어 논다 하니, 어찌 또 관원과 서리를 두는 법을 알겠는가? 오직 고려는 그렇지 않아, 의관(衣冠)과 예의(禮儀)며 군신 상하에 찬연히 법도가 있어서 그렇게 서로 접(接)한다.

(중략)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서 문물(文物)과 예의(禮義)를 갖춘 나라라 일컫고 있다. 그 음식은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문자는 해서(楷書)와 예서(隷書)에 맞춰 쓰고, 서로 주고받는 데 절하고 무릎을 꿇으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이 있다.

(중략)

동이(東夷)는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가 끊기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땅에서는 본래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잘 알아, 그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고, 음식은 두변(豆籩 두와 변. 모두 법도에 맞게 쓰는 예기(禮器))을 쓰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양보한다. 그리하여 만맥 잡류(蠻貉雜類)들이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발에 굳은 살을 지우며 변발(辮髮)에 횡폭(橫幅 오랑캐의 복식 이름)을 두르고, 부자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친족이 관곽을 같이 하는 따위의 편벽하고 괴이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해서부터는 신첩(臣妾)으로 내속(內屬)하여 중화의 정치 교화가 점차로 미쳐갔던 것으로 비록 위(魏)를 거치고 진(晉)을 지나면서 시대의 기복에 따라 잠시 이탈했다 잠시 합쳤다 하기는 하였으나 의리가 마음속에 뿌리박은 것은 없어진 적이 없었다.

(중략)

고려인들은 예서법(隷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의 것으로 바로잡으며, 화폐의 글자와 부절과 인장의 각자에 이르러서는 감히 망령되이 자체를 증손(增損)하지 않으니 문물의 아름다움이 상국(上國, 중국 송나라)과 맞가는(맞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기원후 1123년경 기록.) 기록 중.

 

이는 고려국의 제 17대 임금인 인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123년경때 중국 송나라 사신단 정사로써 고려국에 파견된 서긍이 고려국에 대해서 저술한 이른바 '선화봉사고려도경' 입니다. 가장 주목되는 언급은 중국 송나라 조정에 입조해와서 중국 송나라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송사 외국열전' 에서 보듯이, 천축국[인도를 위시한 남아시아권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통칭], 대식국[백의대식국, 흑의대식국, 이슬람 왕조 곧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층단국[터키의 셀주크 왕조 곧 셀주크 터키], 불름국[불림국, 대진국, 로마-동로마] 역시 여기에 포함됨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중 오직 고려국만을 일등 더 나아가 특등, 특별 예우를 해줘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화(宣和) 말에 고려가 조공하였다. 사신이 지나가는 곳마다 배를 모는 선원[調夫]이 배를 운행하는 데에 소란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손부(孫傅)가 “백성의 힘을 쓰면서 농사일을 방해하고 중국에 터럭만큼의 이익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재상이 그의 주장이 소식(蘇軾)과 같다고 하여 폄출하여 기주(蘄州)에 안치할 것을 아뢰었다. 급사중(給事中) 허한(許翰)은 손부의 논의가 비록 소식과 짝을 이루어 부합하나 의도는 또한 그와 같지 않으며, 직사(職事)로 일을 논한 것인데 책임이 지나치다 하였다. 허한 또한 파직되었다.

 

-중국사서 고려·발해유민 기사>송사>『송사』권353 열전112(1125년)>손부가 고려 사신 접대의 번잡함을 지적하다

 

허한(許翰)의 자(字)는 숭로(崧老)이고, 공주(拱州) 양읍(襄邑) 사람이다. 원우(元祐) 3년(1088년) 과거에 합격하였다. 선화(宣和) 7년(1125년)에 불려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 고려가 조공하러 들어오자 백성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느라 민간이 시끄러웠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손부(孫傅)가 고려가 나라에 도움이 없다고 하면서 큰 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니, 손부는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 허한 손부의 파직은 부당하고 말하니, 당시의 재상이 화가 나서〈허한도〉파직하고 강주태평관(江州太平觀)을 맡게 하였다.

 

-중국사서 고려·발해유민 기사>송사>『송사』권363 열전122(1125년)>허한이 고려를 비판한 손부를 옹호하다 폄출되다

 

중국 송나라 조정이 고려국에 대해 극진한 우대를 해주느라 중국에게 있어서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또 중국인들이 동원되어 운하를 파느라 민간이 시끄러웠으며, 이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송나라에 도움이 안 된다는 문제를 중국 송나라 조정의 허한, 손부가 당시 재상(승상)에게 제기하자, 당시 재상이 화내면서 이 주장이 소식과 같다면서 허한(허한은 손부의 주장을 옹호해주다가 손부와 덩달아 파면되었지요.), 손부 둘을 파면해버렸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귀국(고려)은 해동(海東)에 있으면서 가장 큰 나라로 알려져 있고 대대로 충순(忠順)함을 드러내어, 사절이 통교한 이래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귀국을 대우하는 데에 은혜를 베풀고 예우하기를 두텁게 함이 처음부터 조금도 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요즈음 괴롭고 고생스러운 때를 만나서 국가에 일이 많더니 뜻밖에 오랑캐가 속임수를 부려 마침내 두 성인(聖人)이 멀리 가 계시는 괴로움에 상하가 근심과 걱정으로 평안히 있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거듭 생각하건대 귀국은 예의를 지키고 의를 중히 여겼고, 또 우리나라가 극진히 대우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으니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고려사절요 권별보기 > 고려사절요 권9 인종공효대왕(仁宗恭孝大王) > 인종(仁宗) 6년 6월 > 송에서 사신이 오다

 

이것은 잘 보시다시피, 중국의 송나라 조정측에서 고려국 조정에게 각종 물품들과 서계(국서)를 하사해준 기록인데요. 서계의 내용을 보면, 고려국을 두고서 해동(동방. 만주대륙-한반도-일본[왜]열도-유구[류큐, 현 오키나와]열도)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전세계의 다른 나라들(송사 외국열전 기록들을 참조하면, 서역[서양]의 대표적인 국가들인 천축국[인도를 위시한 남아시아권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인도의 남부 방면인 남인도 방면을 본거지로 삼은 해양 왕조인 촐라 왕조는 '주련국' 으로 기록이 되어있고, 역시 중국의 송나라 조정에 입조해서 중국의 송나라 조정을 섬겨왔습니다.], 대식국[백의대식국, 흑의대식국, 이슬람 왕조,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층단국[터키의 셀주크 왕조, 셀주크 터키], 불름국[불림국, 대진국, 로마-동로마]까지 모두 중국의 송나라 조정에 입조해 중국의 송나라 조정을 섬겨왔음을 알 수 있죠.)이 비할 바가 못된다고 언급했죠.

 

정해 왕이 단(壇)을 설치하고 책명을 받았다.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짐이 덕이 적으나 외람되게 대업을 이어 받아, 선대 황제[六聖]가 남긴 업적에 힘입어 팔방을 모두 다스리는 데 이르렀다. 최근 여러 신하의 간청에 따라 삼가 성대한 이름을 받게 되었다. 무릇 나의 교화(敎化)가 미치는 곳에서는 경사와 상(賞)이 모두 같아야 한다. 경은 대대로 성교(聲敎)와 정삭(正朔)을 흠모하며 자신의 영토를 계승하였고, 깊은 바다 건너 제후 직무의 의례를 다하며 큰 나라를 섬겨 신하의 절개를 다하였다. 마침 조정의 경사스런 의례가 펼쳐져 이장(彛章)을 거행하니, 특별히 품계[秩]을 올려주는 은전을 베풀고 아울러 풍성하게 공적에 보답하고자 한다. 지금 정사(正使) 좌감문위상장군(左監門衛上將軍) 소신미(蕭愼微)와 부사(副使)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한소문(韓紹文)을 보내 부절(符節)을 지니고 예를 갖추어 책명(冊命)한다. 아울러 수레, 의복, 관(冠), 검(劒), 인수(印綬) 및 국신물(國信物) 등을 보내며, 자세한 것은 별록과 같으니 도착하는 대로 공경히 받으라.”
라고 하였다.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짐이 하늘[穹旻]의 맡김에 응하여 조종(祖宗)이 닦은 업을 이어받으니, 사방의 나라가 인(仁)에 귀의하여 전쟁의 깃발[靈旗]을 거두어 패제후(覇諸侯)를 정하고 백관(百官)이 예(禮)를 살피므로 보책(寶冊)에 아로새겨 존호를 더한다. 멀리서도 황제와 신하를 돌보고 각 나라를 열어서, 바다를 건너는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영원히 공존하자는 맹세[帶河之誓]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마침 제왕의 중대한 의례[覃慶]가 있으니 마땅히 은전을 내려 먼 곳까지 미치게 하고자, 아름다운 규범을 따라 특별한 은총을 주려 한다.
아! 그대 수충보의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輸忠保義奉國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保 兼 侍中 上柱國 高麗國王) 식읍(食邑) 7000호(戶) 식실봉(食實封) 1000호의 왕형(王亨)은 세상에 드문 영철(英哲)함을 지니고 인자함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황제의 영토를 넓혔으니 해가 뜨는 곳에까지 경기[圻]를 나누고, 천조(天朝)를 존숭하고 도왔으며 제왕을 우러러 정성을 보냈다. 순(舜)을 모시면서 필성(弼成)의 업을 세우고 주(周)를 바로잡은 협보(夾輔)의 공훈을 모범으로 삼은 것 같으니, 〈그대의〉 덕화가 변방의 하늘[蒼隅]에 미치고 명성이 동방의 오랑캐[靑畎]에게 퍼졌다.
짐이 지난 번 수레를 정비하여 경기(京畿)를 순행하며 위무하였는데, 지방 관리[邦尹]들에게는 열심히 준비한 의식을 펼쳤고 도읍 사람[都人]들에게는 와서 소생시켜 주리라는 희망에 부합하였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송사(訟事)와 교역(交易)을 공평하게 하니, 여러 지역에서 의로운 풍속을 사모하여 옥과 비단을 들고 서로 달려오며 이웃 나라에서 위덕(威德)을 경외하여 금과 비단을 더 바치고자 하였다. 마침내 태평성대가 계속되는 시절에 이르러 마침 헛된 이름의 책호(冊號)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황제의 은택을 내림에 고려[王藩]에 가장 먼저 이르게 하니, 〈그대를〉 다른 사람과 같이 앉지 않은 높은 자리에 올리고 전용 수레를 타는 높은 품계에 두려고 한다. 이에 밭에서 나는 부(賦)를 더하고 아름다운 호(號)를 내려 공(功)을 포상한다. 그리하여 정사 소신미와 부사 한소문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부 겸 중서령(守太傅 兼 中書令)으로 삼고,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더한다. 그리고 동덕치리(同德致理) 4자(字)의 공신호를 하사하며, 산관(散官)과 훈작(勳爵)은 예전대로 하라.
아! 〈그대는〉 군자국(君子國)을 지키는 제후왕(諸侯王) 가운데 으뜸이다. 왕도(王道)를 논하여 주(周)의 태사(太師)가 되었듯이, 공을 떨쳐 한(漢)의 재상(宰相)에 올랐듯이 신하로서의 절개를 견고히 하여 황가(皇家)에 보답하라. 태평한 시절에 부귀를 누리고, 먼 훗날까지 공명(功名)을 전하여 역사서[竹素]에 길이 빛날 것이니 영원히 공경하라.”
라고 하였다.

 

-고려사 > 권별보기 > 권6 > 世家 세가 권제6 > 정종(靖宗) 9년 > 11월 > 거란이 왕을 책봉하다

 

이는 잘 보시다시피, 거란족의 요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거란족의 요나라 조정)에 입조해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중국의 송나라를 제외한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고려국을 으뜸으로 간주하였으며, 이에 걸맞는 일등 예우를 넘어 특등 예우, 특별 예우를 베풀어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참조:중국의 송나라와 거란족의 요나라는 상호간 대등한 예로 통호하였는데, 서로를 남북조로 지칭했지요. 중국의 송나라가 남조, 거란족의 요나라가 북조로 지칭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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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gdrip.net/index.php?act=dispMemberOwnDocument
 

전세계의 최강대국인 중국의 송나라, 거란족의 요나라는자국(중국의 송나라, 거란족의 요나라)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우리나라 곧 고려국만을 가장 높게 대접해왔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고려국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에게도 해당되는 사례이기도 하지만요. 유익한 참조가 되어드렸으면 해요. ㅎ

2개의 댓글

사료를 그대로 복붙하지 말고

정제해서 가져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읽을거리판이니

딱딱한 학술정보 글이 올라올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한들 글자크기는 들쭉날쭉하고

색깔까지 입혀서 정신 사나운데다가

줄바꿈이나 문단 나누기도 안 되어있는 글은

아무도 읽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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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극과극은통한다

네. 조언 감사합니다. 다음 게시글 작성을 할 때 적용해도록 하겠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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