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 밀항
김사량
거친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현해탄을 중심으로, 남조선, 제주, 대마도, 북규슈 등 사이에는 예로부터 전설에도 있듯이 주민의 표류가 자주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최초의 문화적인 교류라는 건 대체로 이러한 표류민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ㅡㅡ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문명의 오늘날에 있어서도, 표류라는 형태를 빌린 것이 또 상상 이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밀항이다.
그렇지만 밀항이라고 해도 그렇게 로맨틱한 것은 아니고, 그것을 결심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용기와 배짱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해탄을 사이에 둔 밀항이라고 하면 여행권이 없는 조선의 농민들이 절망적이 되어서, 동화마냥 경기가 좋은 곳이라고 믿고 있는 내지로 건너려고, 위태로운 목선이나 증기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것을 말하는 거니까, 배짱 운운할 게 아닌, 전적으로 목숨을 건 것 이상의 혹은 허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이 밀항에 관해서 나에게는 덧없는 추억이 하나 있다. 이 동안에도 조선인 밀항선이 현해탄에 난파해서 일행 2-30명이 고기밥이 되었다는 보도를 읽고, 사뭇 가슴이 먹먹해졌다.
실은 나도 한 번 부산에서 밀항을 시도해보려고 한 적이 있다. 그것은 18살 때 12월의 일인데, 어느 사정으로 당당히 연락선에는 올라탈 수 없어서, 매일처럼 부두에 나와 찬 바닷바람에 불리면서 어떻게 한다면 이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지만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젊은 나이이고, 거기에 마침 중학교에서도 막 내몰렸기에, 천천히 형세를 보거나 지혜를 짜낼 수는 없었다. 현해탄 저편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그 며칠간은 완전히 천국처럼마저 생각되고 있던 것일까.
그 날도 나는 부두에서 범선이나 작은 증기선이 부두에서 비죽비죽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 때 검은 테 안경을 쓴 내지인 남자가 지나가는 길에 혼잣말처럼, 바다를 건너고 싶다면 내일 아침 3시에 XX산 기슭에 오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놀라서 뒤돌아봤다. 하지만 남자는 휘몰아치는 진눈깨비 속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과연 나는 그 날 밤 여러가지로 고민했다. 마침 2-3일 전부터, 여관의 보이에게도 30엔 정도 내면 밀항시켜 주겠다고 끈질기게 권유받고 있던 차이기에, 과감히 마음먹고 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무서웠다. 이웃방에 손님 한 명이 왔는데 말이 아무래도 고향인 북조선계이다. 나는 그 밤중에 손님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밀항에 대해서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손님은 찬찬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그만두라우.”라고 일언지하에 반대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는 작은 입 위에 검은 콧수염이 있는 30대 남자로 눈을 계속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눈을 깜박거리면서 그는 밤새 밀항에 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도 내지로 간 적이 있었는데, 건널 때는 역시 여행권이 없어서 밀항을 했다는 것이다. 배는 작고 노도에 삼켜질 듯이 흔들리고, 개나 돼지처럼 뱃바닥에 포개어 쌓인 남녀 삼십여 명의 밀항단은 선원들에게 짓밟혀 벌레 목숨이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토사랑 신음 속에서 3일을 지내고 깜깜한 밤중에 짐짝처럼 내던져진 것이, 또 북규슈 연안의 방위도 이름도 모르는 산기슭이었다고 한다. 배의 녀석들은 결국 어디로라도 배를 대고 내리게 하고 나서, 들키지 않은 사이에 달아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때로는 녀석들은 내지에 왔다고 말하고, 남조선 다도해의 외딴 섬에 줄줄이 떨구고 모습을 감추는 일마저 있다고 한다. 어쨌든 내지로 건너오기는 왔지만 모두 심한 뱃멀미와 굶주림에 거의 반죽음 상태로 날이 샐 때까지 쓰러져 있었다. 그만은 열심히 기운을 다시 가다듬고 행선지를 살폈다. 그리고 등이 얼룩덜룩 켜져 있는 작은 마을 쪽을 향해서 기어가듯이 산을 넘어 도망친 것이었다. 너덜너덜해도 양복을 입고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른 일행은 흰 옷을 입은 채 무리를 짓고 떠돌아다니다가 발견되어 다시 송환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결국 밀항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지도 불경기고, 넝마주이도 안된다, 내지에 가는 건 포기하는 게 낫다우”라고, 그는 끝맺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역시 너덜너덜한 양복으로 작은 보따리를 하나 안고 부산진이라는 역에서 출발했다. 나는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그를 부모라도 보내는 듯한 기분으로 멀리서 손을 흔들며 배웅했지만, 이 작은 콧수염을 지닌 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 뒤 나는 북규슈의 어느 고등학교에 학적을 두게 되었는데, 이 지방의 신문에는 매일처럼 조선인 밀항단이 발견되어 잡혔다는 기사가 실린다. 그것을 읽고 있을 때는 뭐라고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연안의 주민이 대단히 훈련을 받고 감시하기 때문에, 드문 경우가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저쪽은 목숨을 건 모험 상륙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쪽은 또 이쪽으로 필사적으로 상륙시키지 않겠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 불과 8살의 소학생이 학교에 가는 도중에 밀항단을 발견하고 주재소에 고발해 표창을 받았다는 요란한 기사도 드물지는 않았다. 그것을 읽고 있으면 나는 나조차도 올 수 없는 곳으로 와서 감시 당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 나빠지는 일이 간간히 있었다. 그 때문이라도 아니겠지만, 나는 규슈 시절 아리아케 해도, 가고시마 해안도, 벳푸의 태평양도 상당히 익숙했었지만, 눈과 코 앞의 현해탄의 해변에는 그다지 놀러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 치더라도 졸업하는 해 초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딱 한번 고향의 어느 학우와 카라츠에는 간 적이 있다. 파도가 조용한 해질녁으로, 해변에는 파선만이 하나 둘 물가에 끌어올려져 있었지만, 바닷속으로 멀리 내밀고 있는 소나무숲에는 갯바람이 불어와 시원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때 문득 우리들의 눈에는 흰 옷을 입은 여자들 네다섯 명이 멀리 모래톱을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저녁놀 무렵이 되어, 그것이 무척 아름답게 비추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움찔해서, 혹시 뿔뿔이 흩어진 밀항단의 일부는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들이 가까이 온 곳을 보니 근처 해변에 살고 있는 이주민의 부인들 같았다. 젊은 아낙네들이 나막신을 손에 들고, 때때로 허리를 굽히고 사장의 조개껍질을 줍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 무렵의 고등학교 노래에,
“夕日や 燃ゆれ, 吉井浜, 天の 乙女が ゆあみする(요시이하마의 불타는 석양, 하늘의 처녀가 멱을 감네)”이라 구절이 있었다.
나는 노래 같은 건 좀처럼 부른 적이 없지만, 그 때는 잠깐 그러한 문구를 마음속에 떠올렸다.
- 문예수도(文芸首都) 1940년 8월호 첫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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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1914~1950)
평양출신 일본어/한국어 소설가로, 재일한인문학의 선구자격 존재.
소설처럼 1932-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가고등학교(현 사가대학교)에서 유학/문예 생활을 시작함
1940년에는 중편소설 <빛속에>를 발표해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2차대전이 터지고 프로파간다 활동을 강요받음
그러다 중국으로 파견된 틈을 타파견단에서 탈출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에 합류하여 활동함
이후 고향인 평양-북한에서 활동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종군작가로 남하했다가 병으로 급사함
여러모로 경계선적인 작가라 남북한 및 일본으로부터 재평가 받는데에 오래 걸린 작가임
후루룰빵
좋은 글 소개 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