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만화가 A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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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카메라, 만화가 A의 경우


 

사고실험에 앞서 

 

나는 아래의 사고실험에 앞서, 실험의 이해를 돕는 두 단어인 ‘표상’과 ‘표현’을 구분하고 그 정의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요컨대 우리가 머리에 어떤 형상(시각적 상, 청각적 상, 산수적 상)을 그리는 것을 ‘표상’이라 이르며, 이 같은 표상을 가능케 하는 ‘표상 공간을’ 머리 속에 가진다. 이것의 개념적으로 상세한 부분을 모두 걷어내고 이해키 쉬운 형태로 도식화하여 ‘표상 공간’이 아래와 같은 3차원 공간을 가진다고 가정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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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 공간>

 

이 같은 ‘표상 공간에 표상됨’을 외부 환경에 표출하는 것을 ‘표현’이라 이른다. 기능적 측면에서 보자면 ‘표상’은 일종의 ‘입력’이라 간주할 수 있으며 ‘표상 공간’은 ‘입력 공간’, ‘표현’은 ‘출력’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즉, 인간은 내부에 표상한 바(내재적)를 외부에 표현(외재적)할 수 있다. 이같은 표현(이 표현 방식은 내가 머리에 그린 것이다)이 가히 물리적이거나 비인간적인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면 더 쉬운 표현을 들 수 있다. 예컨대 ‘당신이 머리에 그린 무언가’를 신체의 부분이나 전체를 활용하여 바깥 세계에 표할 수 있다. 더나아가 어떤 그림의 전문가들은 흑연 연필이나 유화 물감과 같은 갖은 미술 도구를 활용해 ‘그의 표상’을 외부 세계에 뚜렷한 형태로 능히 내보일 수도 있겠다. 나는 이 단락에서 두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명확히 했으므로,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표현’이 ‘표상’의 ‘완전한 복제본’이 아님을 염두에 두며 이 담론을 지속해보자.

 

두 만화가 지망생

 

여기, 만화가 지망생 A와 만화가 지망생 B가 있다. 두 만화가는 정식으로 만화를 연재해본 적이 없는 아마추어들이지만 당장에 상업 만화가로서 활약한들 이견이 없을 만치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B의 작화적 수준은 A의 경우보다 높다. 물론 두 만화가의 작화적 수준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가늠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제기 될 터이므로 지망생 B의 그림이 A의 그림보다 밀도가 더 높다고 전제하자.(실제로 그림의 관람자가 그림에 대한 이론적, 기술적 이해가 낮을 때는 비교적 더 높은 밀도를 가진 그림을 더 잘 그린 그림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예컨대 그림에 나오는 인물이 해부학적으로 얼마큼 옳은지, 인체 비율은 어떠한지, 그의 동세가 실제의 인체 역학을 지키고 있는지 등은 일반인 관람자에게 대개는 고려 대상이 못 된다. 추정하건대, 이는 밀도가 높은 그림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은 정보량을 수렴하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한데, 지망생 B는 만화 내의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을 조작하는 데 아주 서툴다. 여기서 얘기하는 조작이란 컷과 컷에 그려넣어야 하는 등장인물들의 주시 방향이나 그들을 조망하는 시점(로우앵글, 하이앵글 등), 신체 동작(동세)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다. 조작은 이같이 ‘높은 이해에 기반한 시각 형상의 변형적 재주’를 망라한다.

예컨대 B는 등장인물의 정면을 아주 빼어나게 그려낼 수 있으나, 어떤 컷의 장면이 복잡성을 요구할 수록(즉 정면에서 멀어질 수록), 앞서 선보였던 정면 그림의 수려함을 유지 못한다.


이에 반해 만화가 지망생 A는 지망생 B의 경우보다 그림의 밀도가 낮은 까닭에 (그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수준이 낮은)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A의 그림실력은 B보다 상대적으로 낮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이지마는 A는 B의 경우와 다르게 만화 내에 출연하는 등장인물이나 배경을 능히 ‘조작’할 수 있다.

지망생 A는 거의 모든 시점에서 등장인물을 조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같은 차이는 과연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이쯤에서 위에서 가정하고 정의하였던 뇌의 ‘표상 공간’을 가져올 차례다. 지망생 A와 B가 동일한 어떤 대상을 그릴 때에 ‘표상 공간’에 ‘표상’되는 각각의 시각적인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이같은 표상들에 비의식적 표상과 의식적 표상이 혼재된다는 바를 염두에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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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B의 표상 공간>

 

지망생 A는 ‘어떤 대상’을 위의 도식과 같은 방식으로 ‘표상’할 수 있으며, 그것을 어느정도는 ‘다면적(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같은 이해를 활용하여 그 표상의 대상을 회전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즉 조작하는 것으로) ‘표상 공간’ 내에 ‘조작적 표상’을 ‘표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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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경우>

 

그렇다면 B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만화가 B의 경우에는 그 대상을 아래와 같은 수준에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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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의 경우>

 

두 만화가 지망생은 (인간이므로)표상 공간을 동일하게 가졌으나 놀랍게도 B가 표상하는 바는 다면적 수준이 아닌 단면적 수준에 그친다. B가 단면적으로 이해하는 대상의 측면과 반측면을 그리고 싶다면 그에 해당하는 단면(측면 정보와 반측면 정보)을 일일이 습득해야만 한다. 이를 두고 혹자는 단지 B가 A보다 대상을 입체화 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의 변주 아니냐는 의구를 제기 할 수 있으나, 이 사례의 주안점은 두 양자가 만화라는 동일한 시각 매체를 다루면서도 전혀 다른 인지 체계(표상 공간)를 가지고, 그것을 통해 ‘표상’하고, ‘표상’한 바를 ‘표현’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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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의 표상 공간은 마치 A의 다면적 표상 공간을 도막내어 만든 얇은 단면과 같이 여겨진다>

 

우리는 이 사례에서 만화가 지망생 A와 B에 전제 한 가지를 더 추가해볼 수 있다. 여기서 두 만화가가 성장간의 특수한 환경을 까닭으로 포유류인 기린을 직간접적으로 맞닥뜨린 적이 없다는 전제를 추가해보자(기린이 살고 있지 않은 평행 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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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린 그린 그림이에요>

 

그 때문에 둘은 기린이란 게 도무지 어떻게 생겨먹은지 알 수 없다. 그 이후에 A에게 기린의 두상에 해당하는 전면 정보와 측면 정보를 제공하고나서 기린 두상의 반측면을 그리게 했을 때, 그 결과물은 과연 어떠할까?  A는 두 시각 정보로하여 (B 보다는)기린의 반측면에 가까운 형상을 시각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을 터이다. 물론 A가 아무리 시각적 추론 능력이 높은들, 그가 표상하고 표현하는 것은 ‘기린인 셈’이다.

B의 경우는 어떨까? B는 기린의 두상에 대한 반측면 정보를 습득하지 못하는 때문에 결코 그럴듯한 (A의 경우보다)기린 두상의 반측면을 그려낼 수 없다. 두 양자는 어떤 형상의 표상을 가능케하는 표상 공간(표상 도구)을 가지고 있으나 그 도구의 만듦새는 각각 다르다.

 

즉 만화가 지망생 A는 시각적 대상을 연역하여 그 대상에 다면적인 조작을 가할 수 있으며, B의 경우에는 (마치 카메라와 같이)머리에 표상되는 여러 단면 정보들을 귀납하여 만화를 그린다. A가 훌륭한 추론 기계라면, B는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이다.

 

두 만화가 지망생, 주간 연재 만화가가 되다

 

만화가 지망생 A와 B는 일본 출판사에서 공모하는 만화 공모전에 입상하여 같은 시기에 정식 연재 자격을 획득한다. 둘은 자신들의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았음을 입증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 설명했던 표상 공간(인지 체계)의 양태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시각적 대상들에 높은 이해를 가진 A와 모든 시각적 대상을 단면 정보에 의존하는, 즉 낮은 이해를 가진 B가 주간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일정한 작화 수준을 유지하고 연재 기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어느 쪽이 될까? 우리의 이해에 대한 통념을 따르면 연재간에 만화가 A가 B를 압도하는 모양새를 띨 터이므로(그의 인지 체계가 높은 이해에 기반돼 있으므로) 대개는 이 경우에 A의 승리를 점칠 터이다. 그러나 이 사고 실험의 결과는 무어라 확언할 수 없다에 가깝다. 이 사고실험에서 쓰이는 표상 모형이 실재하는 표상 모형의 상당한 축약된 버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머리에 표상할 때에는 얼마큼의 인지력을 소모한다. 이는 더 복잡한 형태를 표상할 때, 이를테면 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고 ‘추론’할 때 보다 많은 인지력이 사용됨을 증거한다. 그러나 비의식적으로 습득된 단면적인 시각 정보를 불러내는 것은 전자의 경우보다 낮은 인지력을 사용한다. 때로는 ‘1+1’에서 ‘2’라는 답을 추론해내는 것 보다 ‘1+1=2’라는 공식을 통째로 암기하는 편이 더 빠르게 과제를 수행하는 방도일 수 있다(더불어 머리를 적게 사용한다). 위에서 가정했듯이 전적으로 시각적 추론 능력에 기대는 만화가 A는 B의 경우보다 더 많은 인지 부하를 겪고 있으며 이 부하가 A로부터 누적되면 인지적인 피로를 유발한다(인지적 과부하). A는 이로 인해 추론 능력의 질적인 저하를 겪을 것이다.

주간연재를 하는 만화가에게 있어 체력이 매우 중요한 가치임을 상기했을 때 이는 상당히 뚜렷한 결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위의 설명하는 바를 더 간명히하기 위해 문을 열 때마다 문답 과제를 내는 잠금 장치(도어락)를 상상해보자. 도어락이 내는 문답의 난이도는 그다지 어려운 편은 못 되지만 일정 수준의 추론력을 요구하며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문답이 바뀐다. 문제는 15 항 가운데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서 내고 여는 이는 이 문제를 풀어야만 문을 개방할 수 있다. 여는 이 A(만화가 A와 똑같은 인지 체계를 지녔다)는 각각의 문제를 추론하여 문을 열고 B(만화가B와 마찬가지이다)는 과제를 (추론하여)수행할 능력은 못 되지만 잠금 장치가 제공하는 과제에 대한 답을 죄 외우고 있다. A는 문을 열 때 문제를 일일이 풀어서 문을 열고, B는 ‘문제와 답’을 ‘인식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답의 선지 가운데에서 답을 무작위로 정해서 그것을 닥치는대로 입력하여 문을 연다. 문제의 난이도가 매우 쉬운 편에 속한다면 A의 경우가 더 높은 효율을 보일 수 있겠으나, 잠금장치가 제공하는 과제의 난도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 수록 B가 더 빠르게 과제를 수행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는 과제 수행자가 문제 풀이를 5 회 이상 틀릴 경우에 5 분동안 잠금 장치가 정지된다는 전제를 추가한다손 쳐도, 여기서 B가 문제를 잘 찍어 맞추기만 한다면(그러니까 5 회 이상 오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A의 경우보다 빠르게 과제를 수행할 여지가 존재하게된다. 더구나 B가 과제 수행의 반복 숙달을 통해 어떤 특정 문제에 대한 답을 15 개에서 8 개까지 추려낼 수 있다면(물론 문제와 답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거의 확정적이 된다. 이 처럼 만화가 B가 시각적 단면(정보)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또한 시각적 단면을 잘 잊지 않으면서 그것을 표상 공간내에 (비의식적으로)표상할 수 있다면 만화가 A의 경우보다 더 높은 수준의 능률을 보일 수 있다. 

 

위 사고 실험은 ‘이 만화가는 이 장면을 그려낼 수 있으므로 이 장면을 이해하고 있다거나, 이 장면은 그려낼 수 없으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따위의 통념을 깨고 있다. 더 나아가 대상의 ‘높은 이해’가 납기가 지정된 어떤 일에 한해서 ‘높은 효율성’을 보장하지 않음을 눈 여겨보라. 어떠한 일이 인지적인 여유(물론 어떤 이는 주간 연재를 매우 여유로운 연재 형태라 ‘여길 수도’ 있다)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때때로 이해라는 가치가 무용하게 될 여지가 존재한다는 점 또한 주목하라. 끝으로 이같은 ‘여유 없음’의 투기장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우리의 통념과 다르게) 낮은 이해자가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자. 물론 A가 높은 추론 능력을 갖춘 데 더불어 매우 낮은 인지력을 소모한다거나 B와 같은 방식으로 다면적 표상과 함께 단면적으로 표상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면 결과는 또 달라질 것이다. 

 

낮은 이해와 높은 이해

 

카메라가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완전하게’ 담아낼 수 있다고해서 우리는 “카메라가 피사체를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기계는 자신의 렌즈를 통해 똑같이 모사한 외부 세계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이는 그 피사체를 인쇄 용지에 출력하는 인쇄기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무슨 ‘이해’가 없음에도 그들은 제 맡은 바를 톡톡히 해낸다. 하지만 우리는 이따금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무언가를 능히 그려낼 수 있다면,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 때문’이라는 착각을 범하곤한다. 즉 (생물학적 기계의)기능이 이해로부터 비롯된다고 여기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상당한 실력가라고 여겨졌던 창작자가 그의 이해에 반하는 결과물을 낼때 상당히 의아해 한다. 이런 의구는 요컨대 “이건 이렇게 그릴 수 있으면서ㅡ 어째서 저건 저렇게 그릴 수 없느냐”는 식으로 표현된다. 이 같은 이해와 기능의 필연적인 양립에 대한 통념은 상당히 유구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가 위에서 살펴봤듯이 만화가 지망생B는 A의 경우보다 시각적 대상들에 낮은 이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만화를 그린다. 심지어 몇몇의 독자들로부터는 그가 그리는 그림의 밀도가 A보다 높은 덕택에 ‘B는 A보다 실력가이다’라는 평가를 받기까지 한다.

이같은 바는 우리의 통념을 역설한다.

 

*지적 허영에 대한 막간 설명

 

우리는 이해가 수준적 개념임을 직관적으로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보적 축약을 통해 대상을 이해했다’거나 ‘이해할 수 있다’ 등을 얘기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어떤 주장에 정보적 축약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그 주장자들은 지적 허영을 즐기는 자들이라고 간주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는 전적으로 참일까? 여기, 단락과 단락 사이에서 이해와 그 수준에 대한 심층적인 면모를 더욱 살펴보기 위해 다음의 예문을 살펴보자(이것은 사고 실험의 주제와 전혀 무관하므로 여기에 흥미가 없다면 바로 아래 단락으로 넘어가도 좋다).

 

예문1.영희는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훔쳤다.

 

우리는 위의 예문을 통해 영희가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정말?). 혹자는 이를 까닭으로 우리가 모든 정보의 상세를 일일이 명시하지 않아도, 그 내용을 대체로 잘 알 수 있으며(즉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단순성의 원리(오캄의 면도날)를 운운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보를 축약하는 편이 아무렴 옳다는 당위를 설정한다(이것은 인간의 섭리를 운운하는 방식과 흡사하게 작동한다).

얼핏보았을 때 이는 매우 참인듯 싶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정보적 축약’의 한계는 단지 활자의 수를 줄이라는 요구에 그친다(그게 읽기 편하니까). 단순성의 원리는 설명하고자 하는 바의 규모적 측면을 줄이라는 데 있는 것이지 활자 그 자체를 줄이라는 데 있지 않으며 어떤 정보는 그 정보에 대한 상세를 기재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들도 있음을 염두에 두자. 위의 예문의 변형된 형태를 몇 항을 더 살펴보자.

 

예문2.(기초생활수급자인)영희는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훔쳤다.

 

예문3.(소년 가장이자 기초생활수급자인)영희는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훔쳤다.

 

예문4.(소년 가장이자 기초생활수급자인)영희는 대형 마트에서 물건(분유)를 훔쳤다.

 

위의 예문에서 내용이 상향식으로 더해질 수록, 우리는 그 내용에 추론 갑절하여, 이채로운 추론을 할 수 있다. 이 같은 정보적 추론에는, 예문의 행동 주체인 영희에게는 자신이 건사해야할 매우 어린 젖먹이 동생이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가 있을 터이며, 우리가 이러한 추론을 거듭할 수록 우리의 낮은 이해(예문1)는 높은 이해(예문4)로 거듭난다. 이 처럼 활자의 수를 줄이는 것은 정보 전달 측면에서 결코 능사가 못 되는데다 어떤 요구에 의해 마냥 활자의 수를 줄이는 것은 단순성의 원리를 따르는 바도 아니하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떤 지적 허영자의 허영심을 간파하고 싶다면(또는 당신을 두고 지적 허영자라고 힐난하는 주장에 반박하고 싶다면) 그가 주장하는 바에 대한 내용의 이해를 요구하라. 이를테면 그 주장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고,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추궁할 수 있다. 또는 활자적 장치들의 의도를 물어보거나, 주장하는 내용을 보다 쉬운 말로 풀어 써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겠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개념화(도식화 등)해달라고 주문해보라(물론 이를 요구하는 이의 지적 수준도 어느정도 높아야만 한다).

허영에서의 허가 ‘빌 허’자 이므로 그가 정말로 지적 허영을 즐기는 게 맞다면 그는 그것을 능히 설명치 못할 것이다. 그가 다만 텅 비어있는 때문에 현학적인 낱말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하여 자신이 정히 말하고자하는 바(내용)를 숨긴 때문이다(즉, 암기된 지식의 피상성에 의존한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지시하고, 설명하고, 조작하고(만화가 지망생A의 경우처럼), 개념화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주장을 높은 수준으로 이해한 셈’이라 이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그를 허영자라고 간주하기 어렵다(그림의 그림체만큼 표현 방식도 다양하다).

 

어떠한 인지 체계가 우월한가

 

만화가 B는 큰 무리없이 만화를 그려낸다. 특히 밀도 부문에 한해서는 A를 압도하곤 한다. B는 표상된 시각 형상을 A와 같이 조작할 수 없는 때문에 그에게 (비의식의)시각적 반복 숙달이 강요되지만, 그가 어떤 시각의 선천적인(생물학적인)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적은 반복 숙달 만으로 많은 시각적 단면(정보)을 표상할 수 있을 터이다. B는 많은 단면 정보로 하여금 시각적 실수(맞지 않는 인체 비례 등)를 보완할 수 있으며 이 같은 인지적 내용은 독자들로부터 결코 관찰되지 않는다. 즉 독자들은(독심술이 없으므로) 만화가 B가 그리는 결과물만을 관찰 할 수 있으므로, 그가 그리는 모든 대상들을 ‘B가 이해했다고 간주’한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틀렸지마는 B는 기능적으로 어떤 문제를 겪지 않고 일을 수행한다. 이에 반해 만화가 A는 시각적인 추론을 통해 표상 공간에서 시각 형상을 조작하고 표상한다. 만화가 A가 만약 애니메이터를 겸하려 한다면 그 과정은 B의 경우보다 수월할 수도 있다. B가 A를 따라 애니메이터를 겸하려 한다면, 각 객체의 모든 운동 정보들을 (반복 숙달하여)따로 배워야만 한다.

그렇다면 두 인지 체계 가운데 무엇이 더 우월한 인지 체계일까? 당초에 두 체계가 어떤 우열에 근거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판단 주체에게 맡기기로 한다. 요컨대 아주 적은 빈도로 출현하는 어떤 신체의 우수함은 이따금 우리를 놀라게하고 그것이 가히 대단하다고 여기게 하지만 이보다 더 극히 드문 수준으로 자연에 출현하는, 어떤 인지(창발)의 관한 것은 인간 역사와 문화를 뿌리 채로 흔들곤 한다. 두 체계 가운데 당신이 무엇을 손들어 줄 것인지는(그도 아니면 두 체계의 양립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인지) 숫제 당신 스스로의 몫이다.

 

더 복잡한 현실

 

나는 가상의 두 만화가를 가정하여 만화가의 표상 체계를 두 모형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줄여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이보다 더 복잡한 형태를 띤다. 기실 말하자면 위의 사고 실험과 같은 ‘특정한 인지 모형’이 우리 뇌에 ‘특정한 형태로 설치’되어 있지는 않으며 두 만화가의 두 인지 모형은 양자 비교를 통한 극적인 차이를 살펴보고자 창안된 가상의 모형임을 알아두자. 이 또한 충분한 설명이 못 될 터이지마는 우리는 아래와 같은 식으로 시각적 대상을 표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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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는 이는 테두리가 없는 영역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테두리가 있는 두상의 각도를 단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시를 위해 첨부한 그림이므로, 위의 설명은 원 출처와 무관함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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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의 두상에 대한 이해가 다면적인 데 반해, 그 안면에 그려넣는 이목구비에 대한 이해는 단면적일 수 있다>

 

즉 사람마다 만화가 A와 만화가 B가(그들의 표상 도구가) 각기 다른 비율로 내재돼 있는 셈이다(그리고 본문에서 설명하지 않은 만화가 C와 만화가 D, 만화가E, 만화가F······도 함께 내재돼 있다). 위의 도식처럼 어떤 사람은 두상의 특정 각도를 시각적 추론에 의존하지마는 다른 특정 각도는 단면 정보에 의존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전체 두상에 대한 다면적인 정보 조작이 가능하나 그 안면에 눈을 그려넣는 것은 단면 정보로 하여 그려낼 수 있다. 시각적 조작(A의 표상 도구)은 이만큼만 가능하고 단면 정보의 호출(B의 표상 도구)은 이만큼만 가능한 셈이다.

어떤 이가 시각적 대상을 얼마큼 이해하고 있고 또 단면 정보에 얼마큼 의존하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위의 막간에서 설명했듯이 그가 생시간 경험해보지 않은 특정한 시각 형상을 조작해보라고 주문해보자. 그 자가 어떤 이해에 기반하여 시각적인 조작을 수행하고 있다면 이를 해낼 수 있을 것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그것이 힘들 수 있다.



 

생각해보기 

 

1.혹자는 현재의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며‘ 이를 까닭으로 그림 분야(만화 등의)가 머지않아 정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얼마큼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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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척 클로스는 그 누구보다 사실적인 초상화를 그려내지만 심각한 안면인식장애를 겪고 있는 장애인 예술가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하여 초상화를 그리는 것일까(이해 없는 능력)? 그리고 그의 방식의 배후에는 무엇이 존재하며 그것이 (그게 생물학적이든 인지적이든)시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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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댓글

실제로 두 체계는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합니다. 반복 숙달되는 표현이 B체계로 수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림은 본질적으로 평면이기 때문에 B체계가 더 큰 범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드로잉의 구성>이라는 책을 재밌게 보실 것 같네요. 내용이 흥미롭고 어렵지 않아 금방 훑어 보았으나, 글을 좀 더 간결하게 추려서 쓰시는게 필요해 보입니다. 생략하고 지우는 것 또한 하나의 표현입니다.

 

1. 인공지능은 본문에서 암시되듯 극단적인 B체계의 산물이며, A체계와 유사한 여러 도구를 보조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간과의 가장 큰 차이는 필요에 따른 능동적 기획 능력과 수요, 권한일 겁니다.

 

2. 안면인식장애는 얼굴을 각 개체의 고유한 심볼로서 자연스럽게 기억하고 연상하는 것이 어려운 질병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회화의 색과 형태는 물론 도형적 해석, 구성 능력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안면인식은 생물학적 B 체계이고, 척 클로스는 A체계로 B체계를 모방하는 관계를 취합니다. 다른 A체계도 마찬가지 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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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19 일 전
@바베큐치킨버거

좋은 덧글 정말 감사합니다. 드로잉의 구성은 너무 좋은 책이네요. 조금 읽어봤는데, 확실히 그림 작법서도 서구권에서 출간되는 것들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한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문장 구성에 대해 지적해주신 바도 가히 타당합니다만, 인지 체계가 본문의 화두인만큼 엄밀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었으며, 모든 활자적 장치들이 (제가 생각하기에는)저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배치되었다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더 골자만 골라내도록 하는 게 많은 분들이 읽기 좋으리라 여겨집니다.

 

더불어 생각해보기 2 항의 척 클로스가 겪는 안면인식장애는, 말씀하신 대로 시지각을 통해 얻어진 (상향식)안면 정보를 최종적으로 통합하지 못하는 장애입니다. 그러므로 척은 타자의 얼굴을 화소 단위로 분절하여 정보를 얻고(즉 이해 없는 얼굴의 단위), 그것을 통해 초상화를 그립니다. 척이 하는 일은 시지각을 담당하는 각각의 세포 수준과 같으며(신경 세포 또한 얼굴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하위 수준의 신경 세포가 도맡는 일을 자신이 직접 구사하는 셈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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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일 전

너 왜 요즘 만화 안 그려... 너꺼 안드로이드 엄마 콘티 재밌게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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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18 일 전
@꺼삐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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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일 전
@009

너 SF 만화 안 그리고 또 이상한 철학 글 싸면 혼난다. 가서 언능 SF 만화나 그려 ! 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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