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필자의 논문 글 일부를 변형해서 올리는 겁니다. 등재지도 아닌 곳에 올릴 글이라 별로 안 읽혀질 가능성이 커서
여기에서라도 이야기해보려고 올려봅니다. 오류도 있기 때문에 재미로만 봐주세요.
우선 먼저 중국 갑옷은 어떻게 생겨먹었나를 알아보자. 구글에 중국 갑옷이라고 치면 이렇게 나온다
아주 전형적인 중국갑옷 느낌이지. 금색 번쩍 번쩍, 산문(山文)이라 불리는 희한하게 생긴 철편,
배때기랑 어깨에 붙은 짐승 머리, 귀 옆에 붙은 날개 장식 등등. 아주 전형적인 중국 갑옷 느낌이지. 최근에 나온 오공이라는 게임에서도 손오공이 입은 갑옷이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이런 느낌이지. 하지만 이는 중국 갑옷 중에 일부분에 불과해. 당연하지. 그렇게 역사가 긴데
중국에서 갑옷이라는 물건이 언제부터 처음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엉. 일단 상나라 시기의 목제갑옷 편도
남아있고 변방에서 청동제 갑옷이라고 보고된 것도 있어. 이게 사실 갑옷인지 제사용 옷인지 명확하지 않거든. 다만 투구는 확실하게 남아있엉.
어쨌든 확실하게 이게 갑옷이다라고 볼 수 있는 유물은 춘추시대부터야.
출처 : 나무위키, 원출처 중국고대군융복식
이게 그 유명한 증후을묘 출토품이야. 증후을묘같은 경우 학계에서는 갑옷보다는 안에 들어간 청동제 종이나
청동제 솥, 그리고 엄청나게 화려하게 장식된 칠된 목관이 유명하지
어쨋든 중국에서 갑옷 유물 실물이 가장 많이 발굴되는 시기는 상나라~남북조 시기까지야. 당나라 시대에도 찰갑을 구성하는
가죽제 소찰이나 철제 소찰들은 하기는 하는데 이전만큼 풍부한 양은 발굴되지 않아. 대신에 당나라 때는 도용이나
벽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추론가능하지
그렇다면 중국 전 역사 중 실물 갑옷+도용과 같은 간접자료를 가장 보기 드문 때는는 언제냐?
개인적으로는 오대십국~송나라 때라고 생각함. 송나라 시기에는 갑옷 제조방식, 갑옷 제조공방에서 얼마나 되는 철을
몇몇의 장인이 만드는가 어디에 비치하는 가 등의 기록은 풍부하게 남아있지만 정작,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정말 알기 어려워.
그 이유 첫번째. 실물이 없엉
진짜 실물이 없엉. 위에서 언급한 중국고대군융복식사란 책을 포함 내가 가지고 있는 보고서
다른 책들 다 뒤져봐도 세숫대야 같이 생긴 투구 하나 외에는 없어
문제의 그 세숫대야.
개인적으로 사실 난 이 세숫대야가 투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야. 정확히 말하면 이 청동제
투구는 산동성 남송묘에서 출토된 남송시기 유물은 맞으며 심지어 투구일 수도 있지만 실전용은 아니고 부장품(죽은 이를 위한 껴묻거리)
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신라 묘들에서 출토되는 금관이 실생활에서 쓰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고 거추장스럽지만
무덤 주인을 위해서 제작, 묻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는 거지. 그런고로 사실상 실물 유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해
두번째 : 그림은 있는데 이게 좀.....
송나라 시기 갑옷을 표현한 그림은 있어. 바로 무경총요에 수록된 그림들이지 무경총요는 1044년에 완성된
종합 군사저작이야. 안에는 진법, 행군법, 무기 등등 다양한 주제들이 수록되어 있어. 그 중에는 당연히 갑옷도 있지
<<무경총요>>에 묘사된 갑주.
그런데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이게 굉장히 좀 구체적이지가 않아. 갑옷인거는 알겠지만 뭘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 일단 어깨갑옷, 몸통갑옷, 투구, 흉갑이 따로 되어있는거는 확실한데 각각이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기 어려워. 그리고 심지어 지금 무경총요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명나라 시기 판본이야. 500년 뒤에 다시
쓰여진 거야. 그렇기에 1000년기에 쓰인 원래 책이랑 후대의 판본이 얼마나 달라졌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즉 저게
실제로 송나라 시기 갑옷을 묘사한 그림일 가능성은 높지만 진짜 저렇게 생겼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거야.
그 외에도 석물이나 조각상등이 있어. 군융복식사에서 복원한 갑옷도 석물과 조각을 바탕으로 했지. 하지만 이런
석물이나 조각등은 종교적인 색체+전통적인 표현양식의 답습이 섞여있는 경우가 대다수야. 그래서 당대의 실제
갑옷을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의도적인 왜곡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 실제로 예시를 하나 들어보면 조선시대 왕릉 석물을 들 수 있어
조선시대 왕릉 석물 중 하나야. 자세히 보면 우리가 드라마나 그림에서 보던 조선시대 갑옷과는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꺼야. 조선시대 무인상의 갑옷은 오히려 송나라 시기 석물과 유사해.
그러므로 석물을 그대로 가져와서 '야 이게 송나라 시대 갑옷이야'라고 하는 것은 어려워. 한편 명심할 것은 이런 자료들이 송나라 시기 갑옷을 완전히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야. 다만 제작자나 소비자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에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큰 사례들이라는 거지.
예를 불교회화에 묘사된 갑옷들은 실제 방어력보다는 상징성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더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지.
지금까지 송나라 이야기만 했지만 오대십국은 이보다 더 심각해. 그래서 앞으로는 굳이 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어.
자 이렇게 실물도 없어, 기껏해야 있는 자료도 500년 뒤에 새로 찍어낸 거라서 원본이랑 얼마나 다른 건지
알수도 몰라, 석물이나 조각은 제작자와 주문자의 의도가 너무나도 반영될 수 밖에 없기에 원본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어 등등. 그러면 우린 뭘보고 송나라 시기 갑옷을 유추할 수 있는 거지?? 그냥 포기해야 하나??
구글에 宋 甲胄치면 나오는 이것들은 도대체 뭘 보고 그린거지? 나무위키에 실려있는 송나라 갑옷 복원품은 도대체 뭘 보고 만든거지??
그나마 다행히도 회화, 석물, 조각 등에서 당대의 자료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이 소수나마 남아있어. 또한 비슷한 시기
주변나라들(요나라, 금나라, 몽골)의 자료들도 중요한 참고거리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무경총요도 그 중 하나야. 아까전에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기 어렵다고 했잖아? 하지만 이전 시대, 이후 시대 갑옷과 연결시켜보면
대략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있지. 네모 혹은 동그랗게 묘사된 것들은 작게 재단된 철판을 의미할 꺼야. 그리고 그것이 일정한
방향으로 겹쳐져 있는 것은 소찰로 만든 찰갑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또한 당나라 시대 도용(사실 이것도 종교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지만)과 기록(唐六典)들을 참고했을 때 비단이나 가죽과 같은 소재로 갑옷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 전통이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하지. 즉 무경총요에 수록된 갑옷들의 세부적인 요소들은 알 수 없을지 몰라도 전체적인 형태, 구조 등은 당대의 것을 반영했을 것이라 가정하고 논지를 전개해나간다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문제가 조금은 풀리기 시작해.
일단 무경총요의 갑옷을 다시 살펴보자
그리고 다음의 송나라 회화와 석물들을 번갈아 살펴보자.
사천성 남송묘 벽화
Bobrov. L.A, 2003년 논문에서 발췌. 6번, 8번, 9번, 17번, 18번 그림을 유사히 보면 됨
8번은 북송시기 회화에서 나온 기병의 모습이야. 무경총요에서 나온 것과 유사한 갑옷을 입고 있지.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에 송대 갑옷일 가능성이 높아. 의전용일 가능성도 있지. 다만 해당 회화도 어떤 성격의 회화인지를
살펴보고 특정한 목적이나 종교적인 색채가 있으면 창작자의 의도적인 왜곡이 있을 수 있어. 그러나 여기서는 그거까지는 하지 않을께
6, 9번은 몸통갑옷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투구가 어떤 구조인지 잘 보여주고 있어. 투구 아래 주위로 원형의 고리같은게 있는걸 알 수 있어
이걸 보고 무경총요의 투구를 보면 소찰과 같은 묘사가 투구 아래로 돌아가고 있느 것을 알수있지.
17번은 북송 시기 회화에서 따온거야. 일종의 행군도인데 가슴에 철판같은 것이 달려있어. 이 도면에서는 잘 묘사하지 않았지만
몸통 부분도 찰갑인 것을 알 수 있지.
이러저러한 자료들을 종합해봤을 때 송나라 시기의 갑옷은 소찰로 만든 찰갑이 주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어.
그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지만 동 시기 주변 사례들이나 앞시기 뒷시기를 같이 살펴봤을 때 일반적인 찰갑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큼. 또한 어깨와 팔은 별도의 갑옷을 입는 방식(피박)이었을 것으로 보여.
한편 의장용 갑옷은 실전용 갑옷과 다른 형식이었을 가능성이 커. 17,18번 그림과 같이 명광개(明光鎧)와 유사한 방식이었거나
8번과 같이 당나라 시기부터 이어져오던 비단, 가죽으로 만든 갑옷에 여러가지 장식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
'야 근데 송나라가 한 300년 간 나라인데다가 북송, 남송으로도 나눠지는데 너무 두루뭉실한 거 아님?'
'피터 코널리(Peter Connolly)의 로마 투구 분기별 변화양상 보셈.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북송, 남송은 나눠야 하는 거 아님?'
여기에 대한 대답은 어쩔 수 없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음. 계속 이야기하듯이 유물실물이 없는 이상 모든 추론이
회화, 조각, 기록과 같은 간접적인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 게다가 그 자료조차도 시대나 지역이 굉장히 편중되어 있어.
대표적으로 무경총요의 경우 11세기에 한정되는 자료이며 위에서 언급한 회화들도 대부분 북송시기인 10~12세기 자료임. 남송 시기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제한적이지.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럼. 자료가 없는걸.
그렇다면 이제 송나라와 투닥거렸던 다른 민족들 즉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의 갑옷들은 어떤게 있는지 간략하게 알아보자.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서로 투닥거렸던 이 이민족들의 갑옷이 점차 서로 닮아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야. 이런 현상은 세계 어디서든 흔히 보이는 현상이야. 후금과 투닥거린 명나라, 사산조와 투닥거린 로마제국 등등. 그렇기에 연해주 쪽 여진, 거란의 자료를 이용할 때 송나라의 무경총요, 회화자료를 이용하곤 함.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요나라의 갑옷도 중국책인 군융복식사에서 복원시도 했어. 이후에 나온 다른 책에서도 해당 책에서 나온 복원안을 따르고 있지
보면 알겠지만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알수 있을 거다. 그것도 그런것이 갑옷은 불교 천왕상에서 따온 거다. 즉 계속해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왜곡되기 쉬운 케이스란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라의 실전 갑옷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와 관련된
연구는 의외로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진행된 바 있음. M.V. Gorelik이라고 이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분이야.
위의 그림은 화질이 좋지 않은데, 원래 논문 보러 가는 러시아 사이트가 지금 먹통이라서 pinterest에서 퍼와서 그럼 나중에 러시아 사이트
다시 갈 수 있으면 바꾸겠음. 어쨌뜬 보면 찰갑을 입은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송나라와 마찬가지로 어깨갑옷은 별도로 제작되며
그 밑으로 거의 발목까지 늘어진 긴 찰갑이 위치하지. 이렇듯 요나라의 갑옷도 송나라와 다르지 않게 찰갑인 것을 알 수 있어. 다만 차이가
있다면 무경총요 어깨갑옷에서 확인되는 가슴 부분 가리개가 확인되지 않는 정도??
다만 이 도면의 원도인 그림은 현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따르면 8세기에 그린 것을 14세기에 복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므로 어느정도 왜곡이 들어가있을 수 있어
그러나 현재로서는 가장 요나라 찰갑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지 원래 그림을 보고 싶으면 링크 남겨주고 싶은데 제제대상이라네
구글에 18 songs of a nomad flute 치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나오니까 들어가면 바로 나와
영감님의 다른 책인 <몽골-타타르 군대>, 2002에 수록된 거란 의 갑옷출토품과 투구 출토품이야. 전형적인 찰갑의 모습을 하고 있지
이 말고도 최근 다른 러시아 연구자가 거란의 투구들에 대해 보고한게 있어.
이런거
이런거. 이중에서 4번은 저 위에 중국 책에서 복원한 전사가 쓰고 있는 거야. 기존에 보고되었던 거지
1번은 Gorelik 할배가 보고한거고, 2번이 위에 사진의 사례야 아래의 5,6번은 복원했을 때 추정한거고.
눈썰미가 좋고, 한국 갑옷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거보고 생각나는 게 있을 꺼야. 바로 발해의 투구로 추정되는 투구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복제품이야. 실물 도면은 조금 다르게 생겼는데 찾기 귀찮아서 패스.
자세히보면 구조나 장식이라던가 요나라 투구랑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러시아 연구자들도 이를 두고
이 발해 투구가 요나라 투구(9~11세기) 보다 앞의 형식이거나 후대의 형식이라고 지적하고 있어. 그리고 이 발해 투구의
출토지는 상경용천부로 알려져 있지. 즉 이 발해 투구는 어쩌면 발해의 투구가 아닐 수도 있어. 실제로 투구가 출토된 요나라 묘가 중국 동북지방에
위치하고 있기도 해
Gorelik 영감님이 그린 거란 기병. 9세기라 하는데 아마 이후로도 그렇게 큰 변화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돼
자 그렇다면 최근에 방영된 고려-거란전쟁의 요나라 갑옷도 한번 살펴보자.
소배압씨 위주로 가져와봄
옛날 사극에 비해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마 몇가지 아쉬운 점은 있지. 회화나 무경총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어깨 갑옷이 따로 있고 그것을 끈으로 묶는 방식이 보이지 않아. 찰갑의 엮는 방법은 훌륭해. 어차피 찰갑 제작법은 삼국시대나
조선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아. 그건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고.
다만 투구가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투구의 구조 자체는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어. 4개의 골조 위에 잠금쇠 역활을 하는 부분
그리고 아래쪽에 다시 골조와 판을 잡아주는 철대 사이로 철판을 채워놓는 방식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사용된 방식이긴 하지만
이 시기에는 유목민 투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그런데 저 눈썹 모양. 저 눈썹 모양의 철판은 요나라 자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
저건 뭘 보고 만든거지??
저 눈썹 모양 투구를 이야기하려면 이제 금나라로 넘어가야 됨. 이제 금나라 갑옷을 알아보자. 금나라 갑옷도 중국군융복식
책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다른 사례와 똑같은 방식으로 복원했으니 바로 러시아 연구자들의 성과로 넘어가도록 하자
여진족 관련 자료는 두 나라에 비해 풍부한 편이야. 그렇기에 연구도 상대적으로 잘 되어 있고 시기별로도 대략 어떻게
변해가는지 파악이 가능해.
11~13세기 여진, 금나라 투구의 도면이야 L.A. Bobrov의 2003년 논문에서 발췌했어.
이중 11~13번은 여진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토된 유물이야.
이건 유물의 출토당시 사진과 도면이야
이런 마스크도 있지.
위에 있는 유물 도면 중 투구에 눈썹 같은게 그려진게 보이지? 러시아 연구자들 사이에서 Jin식 즉 금나라 식 투구라고 알려진 투구야
시기상으로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13세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몇몇 사례는 이후 몽골에 의해 마개조 된 사례도 있어. 이런
금나라식 투구는 생각보다 여러곳에서 출토됨. 내몽고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도 있고 동유럽에서도 간간히 출토되지
이런 동유럽에서 발견되는 사례는 추정컨데 앞에서 이야기한 몽골에 의해 마개조된 사례라고 추정돼.
또한 투구와 관련해서 쪼금 더 이야기할 것이 있는데, 구글에 금나라 갑옷이라고 치면 흔히 나오는 이미지가 있어.
바로 이렇게 얼굴까지 가리는 형식의 투구지. 이런 투구의 구조와 관련해서도 최근의 연구가 하나 있어
이 투구의 근거가 되는 자료는 남송시기 회화인 서응도(瑞應圖)야.
보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 또한 중앙에 지휘관과 같은 사람이 있는데 머리 위로 소찰을
말아올린걸 알 수 있어. 이것을 봤을 때 아마 평상시에는 말아올려놨다가 전투시에는 내려서 얼굴을 보호하는 식이었을 것이었던 것으로 보여
그리고 무경총요에서도 이러한 형태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송나라도 유사한 방식을 채택했을 것으로 보이지.
송나라가 먼저인지 금나라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양국이 투닥거리는 사이 서로에게 물질문화가 퍼져나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요소야.
이건 최근(2016년) 금나라 투구와 위의 회화를 바탕으로 어떤 구조로 되어있었을지 추정하는 그림이야.
이건 Bobrov의 2006년 논문에서 11~13세기 금나라 갑옷 변화양상을 보여주는 도면이야. 특이한건 이른 시기의 11세기에는
한국의 종장판주(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서 만든 투구)나 소찰로 만든 투구와 유사한 투구를 사용한 게 눈에 띄어. 필자의 생각에는
중국 동북지방의 투구 제작 전통이 이때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 어쨌든 금나라도 전형적인 찰갑을 계속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여기서 결론을 내보도록 해볼게
1.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의 갑옷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이전 시기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그나마 금나라의 사정이 가장 좋다
2. 세 나라는 소찰을 엮어서 만드는 찰갑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는 투구도 마찬가지다.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의 갑옷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여기까지야. 몽골의 경우 워낙 시기도 넓고 지역도 넓어서 간략하게
언급하게 너무 어려워서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할게. 혹시나 궁금한 거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면 시간 되면 준비해도록 할게.
DLOSPCJK
연구자 개붕이야?
평양냉면
프린세스오브웨일즈
월급루팡3세
질문 좀..,
1. 주창 투구 같은건 언제쯤 쓰인거여?
2. 송나라랑 고려 초기 갑옷이 닮은거여?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dndudwp99&logNo=221311380649&proxyReferer=https%3A%2F%2Fnamu.wiki%2F&trackingCode=external
납달리
주창의 투구가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챙 넓은 형태의 투구는 원, 명대, 한반도에서는 조선시대 투구가 있음
원대는 내몽고 자치구 출토품이 있으며, 명대는 勇자형 투구라고 빨간색 투구가 있음. 다만 내몽고 자치구 출토품은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가 없어. 그거랑 비슷한게 러시아 서부에서 출토되었는데 거리가 너무 멀지. 그래서 그냥 넓게 원~명대라고 생각하면 될거임. 시기상으로도 조선에 15세기 이전에 유입되기 위해서는 원~명기로 보는게 가장 적절하지.
납달리
송나라랑 고려 초기 갑옷이 닮았는지는 알 수 없어. 고려도경의 기록에 따르며 궤이하다고 하니까 구조가 좀 달랐을 수는 있어. 다만 부박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통점도 상당히 있다고 추정할 수 있지. 또한 금, 요나라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 국가들(일본 제외)는 대부분 비슷 비슷한 갑옷 구조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라고 크게 다를 거는 없다고 추정됨. 다만 본문과 같은 이유로 불화나 석탑에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고려시대 갑옷을 복원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월급루팡3세
페퍼로니콜먼
어디 좁밥 국가도 아니고
커다란 대제국이었는데... 갑옷양식하나 완벽하게 알수가 없는게 참 아이러니하네...
닌자리방방
송나라 갑옷 ㅇㄷ
그라울러
요, 금 의 갑주는 고구려 갑주와도 꽤 연관이 있어보이는데.
고추건조기
걍 아시아권은 대충 다 찰갑이었다 생각하면 됨 만들기 비교적 쉽거든
나는붕우유신
에벰베
한반도 갑옷도 가능?
몽고습래회사 그려진게 고려군이다 아니다 말 많던데
고려군갑옷은 어떤지 궁금하넹
납달리
한반도 갑옷은 나중에 시간되면 삼국시대부터 글 써볼게.
charlote
몽골갑옷이란걸 보면 조선갑옷하고 굉장히 비슷하던데
납달리
몽골제국이라는 시대적, 지역적 범위가 워낙 넓기 때문에 조선갑옷의 대표인 두정갑이랑 비슷한 것도 있지만 저기 서쪽 끝 타타르라고 불리는 지역은 현지랑 뒤섞여서 동유럽 쪽과 유사할 정도지. 심지어 중앙아시아, 알타이, 특히 티벳쪽은 늦은 시기까지도 전통이 유지될 정도임. 그래서 몽골의 경우 이렇다하고 정의하기 너무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