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강력의 탄생> - 추천합니다

오늘 사서 순식간에 읽고 무척 맘에 들어서 얼른 추천하고자 글을 씁니다. 근래 한국인 저자가 쓴 과학 교양서 중에서는 이보다 뛰어난 책이 과연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것이긴 합니다마는...) 대개 이 정도 퀄리티의 책은 외국 서적의 번역본인데 말이지요. 책 말미에 보니 2편을 암시하던데 정말로 기대됩니다. 유사한 <스핀: 파울리, 배타원리, 그리고 진짜 양자역학>도 고를 때 같이 훑어보았는데 그 책보다는 교양서로서 더 우수합니다. 아래에 설명한 교양서로서의 본분에 좀 더 충실하기 때문에. 

저는 과학 교양서를 내러티브를 위주로 고릅니다.

어려운 지식을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는 책들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을 가볍고 쉽게 풀어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제대로 쓴 책은 만 15세한테부터는 권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유치하거나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적당히 전문용어에 물타기를 한 책이라, 차라리 관련 전공서를 보는 게 속이 편하니까요. (가끔 가다 정말 제대로 자세히 설명해주는 책도 있지만, 역시나 그런 걸 읽을 바에야 차라리 교과서를...) 게다가 집중을 조금 덜, 짧게 해도 시청각을 동원해 압축적으로 주입해주는 유튜브 동영상 클립이나 강의 자료가 근래 늘어나면서 그런 도서를 돈까지 주며 사서 볼 이유를 더욱 못 느낍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지식을 맥락 없이 그저 분야 따라 먹여주는 것보다는 특정한 지식을 일정한 테마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묶어놓은 책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내러티브를 만드는 책 중에 유독 자기 이야기를 많이 섞어놓는 책들, 아니 그냥 본인의 개인 인생사와 인생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써놓은 것 같은 책들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대단한 프로젝트 뒤의 비화라던가 하여 특정인의 고유한 주관이나 체험 자체가 관심 대상이거나, 개인의 일화긴 하지만 그 주체가 누구였든 간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간간히 삽입하는 것은 좋지만, 그 밖에는 굳이 알고 싶지 않고, 오히려 저자의 편협한 시선에 갇힐까 염려되기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박물학적 또는 공학적 대상에 관해 심층적, 다면적으로 기술하거나 과학기술의 발전사를 지식과 관련 인물, 에피소드 위주로 다룬 책이 제 취향에는 잘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책은 거의 언제나 구미 작가가 쓰고, 한국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그런 책의 비중이 낮습니다. 또, 나온다 하더라도 너무 저자 개인 또는 한국 특유의 사정을 많이 삽입하거나 내용의 양과 질이 빈약하여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읽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18000원이라는 값이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일반적인 과학 관련 도서에 나오는 몇몇 이름이나 연도를 넘어서서, 이론적 사고와 실험적 발견이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발전하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나 철학자, 저널리스트는 이와 같은 지적 활동으로서의 과학의 본질을 무시하고 인문학적 사변(이라지만 사실 말꼬리잡기, 언어도단을 이용한 궤변)이나 정치사회적 역학의 단순한 부산물이자 반영으로 격하하고, 그런 부류가 쓴 책을 읽으면 본인들의 철학적, 정치적, 도덕적 사조에 맞춰 근엄하게 치하하고 비난하고 훈수를 두며 별 폼을 다 잡는 볼썽사나운 꼴을 봐야 합니다. 

 

이 챋은 사건의 진행에 따라 필요한 때는 정치사회적 상황을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정한 과학 문화와 전통을 바탕으로 과학적 아이디어가 창조되고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과학적 개념이 정립되는 지적인 과정을 놓치지 않고 상세히 추적하고 있습니다. 진정 주목해야 하는 줄거리와 의문점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객관적인 어조로 조근조근 설명하는 것이 진짜 과학교양서를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줍니다. 역시 관련 연구자가 쓴 책이 맞구나 하게 되는 측면입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강력의 탄생을 말하는 단원이 책 뒷 1/3에 대부분 몰려 있어서 서론은 참 긴데 본론에 가서는 마치 긴장이 풀린 것마냥 이야기가 전반부처럼 치밀하게 진행되지를 못하고 점차 초점이 흐려집니다. 묘사하는 대상은 점점 복잡해지는데, 그에 대한 묘사 자체는 세밀함을 잃고 두루뭉술하게 변해가니 원고를 준비하다 피로해져서 적당히 해치우고 끝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책이야 강력의 탄생이지만 사실 양자장론과 핵물리, 입자물리의 전반적인 탄생 과정을 다루는데, 어째 저자 스스로의 표현대로라면 학문의 원년 이전에 해당하는 부분이 원년 이후보다 훨씬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강력을 처음으로 계산한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계산했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긴 장비로 어떤 값을 얻었으며 어떻게 두 결과가 서로 교되어 무엇을 암시했단 말인지는 결국 해명되지 않은 채 그저 뭐 하여튼 측정을 했고 계산을 했고 발표를 했더랩니다 하고는 적당히 덮고 넘어가버립니다. (아는 사람은 알아듣겠지만 과연 모르는 사람이 이런 묘사를 읽고서 정말 알 수 있을까? 싶게요.) 1932년~1940년대에 해당하는 부분을 오히려 책 2/3, 아니 3/4를 할애하면서 핵•입자물리, 양자장론의 구체적인 발전상과 역사적인 실험이 이론의 검증과 전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더 상세히 다뤘다면 책의 제목과 주제에 훨씬 부합하면서 다른 교양서가 도저히 채워주지 못하는 소중한 니치를 차지하는 매우 가치있는 책이 되었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아울러, 책이 강력을 위주로 설명한다고는 하지만 약력에 대한 연구도 입자물리학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데 정말 너무나 소략하게만 나와 있어 이 부분은 특히 보강해야 합니다. 이 책의 속편이 나온다면 추가로 설명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진행해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단순한 외국어 표기인데도 잘못된 곳이 가끔 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부분 발췌합니다. 

 

"디랙이 양전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걸 예측하기 1년 전인 1927년 어느 날, 스코벨친은 자기장에서 기존의 궤도와 반대 방향으로 휘는 입자를 보았다. 휘는 정도로 봐서는 질량이 전자와 비슷했는데, 휘는 방향이 반대였다. 신기하게도 거의 같은 지점에서 두 개의 선이 나와 하나는 오른쪽으로,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휘었다. 그는 두 궤적 중에서 전자의 궤적과 반대로 휘는 궤적은 입자가 아니라 잡음 같은 것일 거라고 여겼다. 스코벨친은 1927년에 쓴 논문에서도 감마선의 에너지 분포만 집중적으로 살폈지 자신이 관측한 이상한 궤적은 다루지 않았다. 

 

디랙이 자신의 이름을 단 방정식을 세상에 내놓은 1928년에 케임브리지에서 러더퍼드가 주관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디랙도 참가했지먼 스코벨친도 참가해 자신의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스코벨친은 전자와 반대로 휘는 입자를 봤다고 이야기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디랙조차도 스코벨친이 한 발표를 들으며 그 궤적이 양전자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진리가 자신을 드러낼 때는 먼저 그림자만 살짝 보여준다. 형태를 알 수 없는 희뿌연 진리를 보려면 그 그림자를 따라가야 한다. 눈앞을 더듬으며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진리의 그림자가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진리를 손아귀에 움켜쥐려면 딱 한 움큼 더 집요해야 한다. 아쉽게도 스코밸친은 길을 가다 마지막에 머뭇거리고 말았다. 이 새로운 입자가 무엇인지 제대로 찾아낸 사람은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였다."

 

"앤더슨은 디랙의 논문을 몰랐고, 디랙이 쓴 그 유명한 양자역학 교과서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애초에 양전자를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물리학에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발견이 터져 나오곤 한다. 앤더슨이 찾은 것은 디랙이 예언한 양전자가 틀림없었다.

 

앤더슨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정리해서 사이언스에 보냈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도 물리학 논문의 전범이라고 부를 만큼 정직하고 신중하게 쓰였다. 앤더슨은 이 논문에서 자신이 본 것을 양전하를 띤 전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세 개의 측정 결과를 들어 이 궤적이 전하가 양인 입자가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양성자는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양성자라고 하기에는 궤적의 반지름이 너무 컸고, 궤적의 길이도 길었다. 논문의 마지막에 앤더슨은 '이 궤적은 전하량과 질량이 전자와 비슷한 입자가 만든 것임을 나타낸다'라고 조심스레 결론을 내렸다. 

 

앤더슨의 논문이 발표되자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닐스 보어와 볼프강 파울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무시했고, 러더퍼드조차도 앤더슨의 결과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1933년 옥스퍼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연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수학적 아이디어를 구현한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내놓은 아인슈타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아포리즘이지만, 물리핟에서 어두워진 우리의 눈을 밝혀주는 것은 무엇보다 실험이다. 러더퍼드는 나중애 자신의 영국 동료들이 양전자가 존재한다는 걸 실험으로 확인한 후에야 양전자를 마지못해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애통해 했다. 

 

'디랙이 예측하기 전에 실험물리학자인 우리가 먼저 양전자를 찾아냈어야 했어.'

 

재미있게도 자연은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았다. 자연은 그저 진리를 찾아 애면글면 헤매는 자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한 번씩 보여줄 뿐이었다."

 

"블래킷은 훗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실험물리학자는 만물박사'라고 말했다. 그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있으면서 익힌 것은 실험물리학자는 다재다능해야 하고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블래킷은 안개 상자로 실험하면서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는 실험물리학자였지만 수학도 뛰어나게 잘했다. 실험 장치를 꾸밀 때 물리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다. 당시에 안개 상자로 알파입자를 측정하려면 안개 상자 속의 기압을 급격하게 낮춰야 했으므로 피스톤을 빨리 당겨야 했고, 또 안개 상자 속에 생겨난 입자의 궤적이 사라지기 전에 사진을 재빠르게 찍어야 했다. 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블래킷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피스톤과 사진기를 연결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알파입자의 궤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알파입자가 들어오는 순간에 안개 상자 내의 공기가 초응결 상태가 되게끔 장치를 보완했다. 블래킷은 이 장치를 이용해 하루에 수천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블래킷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는 연구를 마치 군사 작전을 하듯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데이터를 많이 모았는지 확인하세요!'

 

그가 한 말은 실험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었다."

 

"1932년 6월부터 이 새로운 장치를 이용해 두 사람은 그해 가을까지 1000장 가까이 되는 사진을 얻었다. 이 두 사람도 앤더슨퍼럼 자신들이 찍은 사진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휘는' 전자를 발견했다. 이들에게는 결과를 보여 주며 같이 토론할 수 있는 디랙이 있다는 게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디랙이 그들 곁에 없는 쪽이 더 나았다. 디랙은 그런 실험 결과를 보고 흥분해서 '우와! 이게 바로 제가 예언했던 반전자입니다!'라고 외칠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디랙은 논리적이었고, 신중했고, 말수가 없었다. 

 

블래킷은 무척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얻은 결과라도 늘 의심하며 확인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확신이 생길 때까지 실험을 계속했다. 데이터가 모이고 모든 의심이 해소되고 나서야 결론을 내렸다. 이건 실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장점이지만, 이런 점 때문에 앤더슨과의 경쟁에서는 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자신을 찾아온 호기를 움켜쥐지 못한 채, 기회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헤실바실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 두 사람은 양전자를 가장 처음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이 발견한 입자가 디랙이 예언한 입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양전자의 발견을 처음으로 공표하는 영광은 놓쳤지만, 두 사람의 연구는 앤더슨보다 확실히 한발 더 나아간 연구였다."

 

"니시나는 조심스럽게 디랙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생님이 이번에 쓰신 논문에 부호가 하나 틀렸습니다.'

 

디랙은 싸늘하게 답했다. 

 

'하지만 결과는 맞아요.'

 

당황한 니시나는,

 

'아, 맞아요. 아마 부호 실수가 두 번 있었나 봅니다.'

 

그 말에 디랙은,

 

'두 번이 아니라 짝수 번 실수했다고 해야 합니다.'

 

디랙의 말이 더 일반적이긴 했다."

7개의 댓글

2021.10.17

유튭채널 석군의 서랍장? 추천

현대물리의 발전을 시간순으로 풀어줘서

물알못도 재밌게 볼 수 있음

0
2021.10.18

책에서 말하는 강력이라는게 대략 어떤거야?

0
2021.10.18
@개드립ㅅㅂ

세상의 4개 상호작용(힘) - 전자기력 / 중력 / 강력 / 약력 중 강력

원자핵에서 작용하는 힘 중 강한 힘이다..라고 생각하면 편함

1
2021.10.18
@할렘약쟁이

내겐 익숙하지 않은 용어인데 설명 고마워"

0
2021.10.18
@개드립ㅅㅂ

세계의 본질은 뭘까? 뭐로 구성되어있을까? 하면서 쪼개고 쪼개고 작게 들어가보니 결국 남아있는건 입자 몇개랑 저 상호작용이더라~그중에 하나가 강력이더라~라고 쉽게 생각하면 됨 ㅋㅋㅋㅋ

 

 

0
2021.10.19
@할렘약쟁이

결국 에너지더라~

0
2021.10.23

90년대에 나온 일본 과학서적에 힘은 네가지가있고 2개로 통일될 수 있다. 근데 이건 아름답지 않으니까 하나의 규칙을 찾는중이다 라고 봤는데 이후이야기 아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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