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북학의>: 기술 학문 예찬

실학을 종래 주자학에 대한 대항적 학문 경향으로 파악하다가 근래에는 주자학의 연장선상에서 주자학의 수기론, 치인론 등의 개념의 확장 또는 변형으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북학파라고도 하는 이용후생학파 역시 그러한 인문학적 차원에서만 분석되곤 하는데, 박지원·박제가, 특히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이룬 학문의 공간은 그런 인문학적 평면과는 직교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학의>란 책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기술 학문 예찬'입니다.

당대 조선의 물질적 빈곤을 직시한 박제가는 원론적이고 도덕론적인 애민주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물질적 낭비와 저생산이 나타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생산 및 유통 기술 혁신을 통한 해법을 추구합니다. 자연물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산·채취·투입·가공하여 재화를 생산해야 하고, 생산된 물품은 유통·교역을 거쳐 수요자에게 닿을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해서 물질적 소비와 후생이 증대된 후에만 도덕과 정치, 미의식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물질적 빈곤의 타파이고, 그 해결책으로는 자연물의 적절한 조작에 의한 기술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비용을 줄이면서도 소비와 효용을 늘릴 수 있는가가 그의 판단 기준입니다.

생산량과 속도를 최대한 늘리고, 또 한 번 생산한 제품은 손상이나 오염 없이 오래 지속되어야 하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결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타박하며, 이를 종합한다면 박제가가 생각하기에 기술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 가치는 제품의 전 주기에 걸쳐 합산한 소비·효용의 최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가치가 달성되기 위해서는 일정하고 체계적인 법식(法式)이 필수적으로, 당장의 편의를 위해 타협하고 임시방편으로 때우고 넘어가려는 게으르고 회피적인 태도, 표준과 법칙 없이 불균일하고 조악한 제품에 안주하는 투박함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지금 조선에서 그러한 생산과 유통이 이뤄지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생산·유통 기술의 부재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박제가는 기술 낙관주의 및 결정론자로서, 자연은 인간에게 충분한 부를 허락하나 단지 인간이 기술이 부족하여 힘을 다해 채취하고 보존하지 못할 따름이므로 지금껏 결핍된 기술을 도입하고 개발하기만 한다면 물질적 부는 자연히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힘써 구한다면 마땅히 얻어질 재화에 대해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포기하는 태도를 지양합니다. 기술에 있어 요령이나 제조법과 같은 지적인 요소와 그런 지식이 구현된 물리적 도구, 그리고 그러한 도구의 실제적 활용을 일체로 보아 둘을 구분하지 않아, 기술적 지식이 있다면 곧 그에 상응하는 도구가 만들어지며, 또 도구가 있다면 틀림없이 쓰인다고 간주합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주장은 여기에서 맹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이, 박제가는 기술이 한 사회 내에서 개발·전파되는 제도적·문화적 여건에 대해서는 전혀 고찰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가 보기에 이상(理想), 최소한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기술의 집합체가 현재 또는 고대의 중국에 이미 현존한 상황에서 사회의 자체적·내생적인 기술 개발·활용에 관해서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나아가, 박제가는 장인들이나 하는 일이라며 천대와 무시만 받던 기술적 지식이 사대부들이 그렇게 떠받들어 마지않는 도덕, 정치에 비해 절대 단순하거나 천박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도덕과 정치를 펼치는 데 매우 효과적·기본적·필수적인 도구이므로 기술 학문은 지식인이 진지하게 탐구하고 전파·전승해야 하는 유익하고 중요한 학문 분야라는 점을 목놓아 외치고 있습니다. 북학의가 그 기술적 지식의 상세함와 범위에 있어 오주연문장전산고 같은 백과사전적 저작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박제가는 기술적 지식도 심오하고 정당한 학문 분야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예시를 세우고자 수레의 종류라던가 벽돌 굽는 방법에 관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은 것입니다.

(인문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현대 실학 연구자는 그런 서술을 대체로 지루하게만 여겨 무관심한 모양입니다만, 설사 그 세부적인 내용을 고증하고 검증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런 서술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 자기 자신과 비교하며 전율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18세기 중국 가옥이나 수레보다 비교할 수 없이 고도로 발달된 주택과 차량을 누리며, 18세기 조선인에 비해 스스로의 존엄을 물질과 기술 문명에 월등히 더 많이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기술에 대해서는 박제가만큼의 관심과 존중도 없다면 참으로 반성해야 합니다.)

조선에 위와 같은 주장을 은연 중에 암시하거나 어느 정도 친연성이 있는 기록 또는 행적을 남긴 사람이 없진 않습니다만, 이렇게나 급진적인 사상을 종합적, 직설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박제가 외에는 전무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실학을 전통 주자학의 변용 또는 확장으로 치부해 버린다 해도, 박제가, 그리고 그와 사상을 같이한 박지원과 같은 인물은 그렇게 간단하게 깔아뭉갤 수 없습니다. 기술을 통해 물질적 부를 창출하는 과정의 중요성과 학문적 가치를 인식하고, 망실된 고대의 전범을 학습하여 기술적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태도를 보아 박제가는 18세기 조선보다는 차라리 15, 16세기 유럽에 어울리는 인물 같다는 느낌마저 드네요.

 

박제가가 훌륭하다, <북학의>가 뛰어나다는 평은 많지만 과연 어떤 점에서 진정으로 두드러지는지 제대로 짚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 글을 씁니다. 아마 조선에서 테크네를 넘어선 테크놀로지의 개념에 가장 가깝고 명백하게 접근한 사람이 바로 박제가일 것입니다. 그에게 기술은 단지 잡다한 손재주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특정한 시각과 자연관, 사회관, 학문관까지 의미했으니까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태도, 특히 그냥 막연히 실질을 추구한다는 원론이나 유토피아주의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인간상을 근거로 도입된다면 반드시 해결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방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당시 조선에서는 너무나 급진적이고 논쟁적이어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을 펼쳤다는 점에서 유수원과 비슷합니다. <북학의>와 <우서>를 읽을 때 뭔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우연만은 아니겠지요.)

4개의 댓글

[삭제 되었습니다]
@승희좋아는개드립인사말

조선에 위와 같은 주장을 은연 중에 암시하거나 어느 정도 친연성이 있는 기록 또는 행적을 남긴 사람이 없진 않습니다만, 이렇게나 급진적인 사상을 종합적, 직설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박제가 외에는 전무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박제가가 훌륭하다, 북학의가 뛰어나다는 평은 많지만 과연 어떤 점에서 진정으로 두드러지는지 제대로 짚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 글을 씁니다. 아마 조선에서 테크네를 넘어선 테크놀로지의 개념에 가장 가깝고 명백하게 접근한 사람이 바로 박제가일 것입니다. 그에게 기술은 단지 잡다한 손재주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특정한 시각과 자연관, 사회관, 학문관까지 의미했으니까요.

 

다들 경제발전을 위해 기술발전과 상공업 발전을 옹호했다 정도의 상투적인 어구만 남발할 뿐이라 딱히 누구 참조할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이헌창의 '북학의 완역 정본'이나 '초정 박제가 연구'도 그렇고... 연구자들 자신의 기술관 자체가 박제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게 아니라서 그런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박제가의 대청관은 그의 고유한 기술관에서 유도된 이차적이고 부가적인 요소일 뿐, 그의 사상을 중국 또는 청 흠모로 환원하는 것은 북학의의 논리적 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본말전도적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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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도 자본주의의 발달이

개인의 윤택한 삶을 보장해주었을 뿐더러

개인의 자율성을 신장시키고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해주게 하긴했죠

 

한국에도 저런 변화가 있었더라면

다르게 전개되었을텐데 아쉽네요

 

모든 성리학자들이 실천을 중요시하고

그중 실천을 더욱 중요시하는 조식과 같은

성리학자들이 대두하긴했지만

도덕철학적인 입장에서의

실천의 영역에서만 거론되었고

현실의 인간상을 근거한 실천으로는

논의되지않았다는 것에 크게 동의합니다

 

성리학이 경학의 학문이고

국가가 그것의 발달에만 너무나도 치우쳐져

그런 토양이 마련되지 못했던 현실도

너무나도 아쉽네요

글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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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1

와 중고등학생때 국사시간에 박제가 북학의 외웠었는데 여기서 다시보네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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