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부자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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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 상경(上卿) 관이오(管夷吾). 당대에 이미 천하를 다스릴 인재로 평가 받았고, 삶을 통해 증명해냈다>

 

제나라의 임금 환공(桓公)이 관이오에게 부국강병의 요체에 대해서 묻자, 관이오는 ""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물론 그의 철학과 치적을 임의로 함축한 말이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후세 사상가들이 인의 · 도덕 · 사랑과 같이 형이상학적 가치를 중시했던 것과 비교할 때 확실히 특별한 구석이 있다 : 관이오는 제후들을 복속시켜 중원 천하를 다스리고자 했던 환공의 야망을 적당히 제지시키면서, "어차피 사방으로 2만 리가 넘는 천하를 혼자서 다스릴 방도는 없습니다. 차라리 제후들에게 각지의 영토를 알아서 다스리도록 하시고, 공께서는 그들의 신의와 물산을 얻으십시오." 라는 말로 새로운 전략을 제안했다. 관이오의 뉴 메타는 국제 시장의 물가를 장악해서 제후들이 저절로 복종하도록 만들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어 제 환공의 의중대로 미곡값이 결정되자, 군량미 살 돈이 부족해진 이웃나라들은 저절로 제나라에 복속 됐다. 멀리 떨어져 상대적으로 의존도가 낮은 나라들도 그 곳 특산물을 사들이는 거래로 길들였는데, 역시 관이오의 계책 덕분이었다.

 

또한 관이오는 나라의 흥망성쇠가 모두 경제에 달려 있어서, 전설적인 폭군 걸(桀)이 몰락한 것도 제 때에 농사를 돌보긴 커녕 재물을 마구 써서 민심이 이반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임금이 경제를 우선해야 나라가 살고, 사회 질서가 회복된다고 보았다. 관이오의 이러한 생각은 "목민(牧民)", 즉 "백성들 기르기" 라는 대담한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 목민심서(牧民心書)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목민을 처음 생각한 게 관이오였는데, 통치 규범을 자연의 섭리에 입각하여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백성들이 좋아하는 정책과 싫어하는 정책을 꼽으면서, 결국 백성들은 안락과 이익을 좇고 고난과 손해를 피하려는 습성이 있음을 전제했다. 따라서 백성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면 저절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깨우치고, 왕명에 복종하여 나라의 기강이 바로서기 마련이라는 게 관이오의 주장. 이는 화초에 물을 주면 꽃이 피고, 외양간에 여물을 주면 가축이 살 찌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관이오가 제나라의 재상이던 시절, 조세와 부역을 줄이는 한 편 농상업을 권장하는 경기부양책이 적극 시행되었다. 경제 전문가들을 모셔와 관리로 임명하고, 염전을 일궈서 재정에 보태는 사업도 이 때 이루어졌다. 부잣집의 길쌈을 막아 백성들 일자리를 창출한다거나, 쌓아놓은 양곡을 풀게 해서 물가를 조절하는 등의 (Piñata)식 경제 모형을 선진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제나라는 춘추오패의 당당한 으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렇듯 경제부터 살펴야 한다는 관이오의 믿음과 성공은, 그 어느 때보다 경제 개발 위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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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대량조(大良造) 공손앙(公孫鞅). 상앙(商鞅)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단호한 눈빛처럼 엄격한 통치의 기풍을 정착시켰다>

 

공손앙은 목공(穆公) 이후 15대에 걸쳐 쇠락을 거듭하던 진나라를 일약 중원의 패자로 빚어낸 장본인이다. 사람들은 진시황(秦始皇) 정도나 인물로 여기지만, 공손앙이 마련한 기틀을 잘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진시황 시절의 업적도 있을 수 없었다. 즉, 천하 통일의 위업은 공손앙의 노력에서부터 비롯했다는 말씀이다.

 

본래 위(魏)나라 사람이었으나, 당시 군주였던 혜왕(惠王)은 그를 중용하기는 커녕, "쓰지 않겠다면 차라리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는 조언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공손앙은 조용히 은둔하거나 소임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주인을 골라갔으니, 진 효공(孝公)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다. 효공은 즉위하자마자 "목공께서 얻으신 패주(覇主)의 칭호"를 운운할 정도로 패업에 대한 열망이 컸다. 효공에게 접근한 공손앙은 이를 뻔히 알면서, 일부러 군주로서의 도리나 성현의 말씀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효공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천하를 병탄할 부국강병책을 아뢰는 재간을 부렸다. 눈이 번쩍 뜨인 효공이 공손앙을 업어 간 것도 당연지사. 이렇듯 죽여야 한다는 당대의 평판과 주인될 사람을 시험하는 태도, 훗날의 행적으로 미뤄보건대 공손앙은 대단히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나 보다.

 

막상 공손앙이 효공의 신임을 받아 관직에 기용되기는 했지만, 진나라가 당면한 문제는 해묵고 복잡했다. 그제껏 진은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서융(西戎)족이라 사람들의 습속이 유목민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지세까지 험해서 대다수 사람들은 상업과 목축업에 종사했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는 사납고 문란해 절도(節度)가 지켜지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국력이 쌓이지 못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부족민들과 지방 귀족들이 토속적 권력을 누렸다. 이에 대한 공손앙의 처방은 "권농(勸農)"에 있었다.

 

공손앙이 농사를 장려한 방식은 상당히 독특하다. 관개 시설을 정비해서 부족한 농지를 확충하는 등의 노력도 물론 기울였으나, 보통은 땅 파먹는 일 이외의 생활 상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시도했거든 : 공손앙은 ① 상인들이 식량을 못 팔게 하는 법, ② 여관에서 나그네를 투숙시키지 못 하게 하는 법, ③ 한 집에 장정이 둘 이상 지내지 못 하게 하는 법 등등 얼핏 보면 이상한 법안을 제정하고, 위반자는 지위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했다. 그럼 매물 없는 상인, 거처 없는 나그네, 쫓겨난 장정들은 뭐 해요? 그야 당연히 농사지. 이외에도 술값을 올리거나, 백성들이 함부로 거주지를 이탈하지 못하게 하거나, 집안에 장사하는 사람 수만큼 세금을 걷게 했는데, 모두 술처먹고 싸돌아 댕기지 말고 농사나 지으라는 뜻에서였다.

 

그나마 정전제(井田制)의 폐지는 제법 세련된 방법이다 : 정전제는 땅을 9등분 하여 여덟 쪽은 지주들이 노나먹고, 나머지 한 쪽을 경작해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게 만드는 토지 제도이다. 문제는 그 한 쪽을 누가 경작하느냔 건데, 바로 8명의 지주가 공동으로 돌봐야 했다. 3천 년 뒤의 대학생들이라면 나라 단위로 일어나는 이 조별과제의 말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아무도 자기 몫으로 떨어지지 않을 땅에 정성을 들이지 않았고, 그렇게 국가의 세입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 때는 진나라도 명목 상 정전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공손앙은 차라리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도록 하는 원전제(轅田制)를 도입했다. 이로써 토지를 더욱 많이 소유할 수 있게 된 농민들은 농사에 사활을 걸었고, 진 조정에서는 전에 없이 많은 조세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집안에 농사 못 지어서 한 맺힌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손앙은 대체 왜 이리 과격하게 농사를 강조했을까? 이는 공손앙이 지향하는 "약민(弱民)"의 이념 때문이다. 약민이란 "백성들을 약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언뜻 듣기론 위정자가 할 소리는 아닌 듯 싶다. 그러나 약민의 핵심은 부의 창출 수단을 국가가 장악하는데 있다 : 공손앙은 사람들이 풍요를 누리면 저절로 질서와 법도를 깨달아 사회가 안정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진나라 사람들은 대다수 상인이거나 목수(牧豎)였다지 않았나? 즉, 재산도 상품과 가축에 치중되어 있었다는 뜻인데, 이것들은 사사로이 처분이 가능한데다 동산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옮겨다닐 수 있다. 그리되면 국부(國富)가 신민들의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가게 된다. 결국 나라의 부강함이 백성들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니, 자연히 백성들에게 향토 지배력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공손앙은 이를 두고 "백성들이 강하다" 라고 표현했다.

 

농사는 이러한 사태를 막는 방편으로, 부의 원천이 토지에 집약되도록 한다. 경제 구조가 농업 위주로 재편되면 백성들은 나라가 시키는대로 따를 수 밖에 없게 되는데, 더럽고 치사해도 땅뙤기를 떼어들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백성들이 약해진 뒤에야 부국강병을 향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게 공손앙의 설명. 그래서 공손앙은 백성들이 학문을 못 하게 막고, 죄를 범하면 가족까지 연좌하는 등의 조치를 병행함으로써 농사 이외의 경제 수단을 봉쇄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농사는 약민 정책의 연장선이자 그 자체로 약민을 이루는 수단이었다.

 

그래선지 공손앙은 농사를 비단 목적이 아닌,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면모도 보였다. 나라 전체에 농사를 권장하려면 우선 농사 지을 사람들이 많아야겠지? 공손앙은 이러한 논리로 귀족들이 데리고 쓰는 노비와 식객들을 강제로 면천 · 해산 시켜버린다. 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부역 및 세납 면제 조건을 까다롭게 바꾸고, 해당되지 못한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중하게 처벌했다. 농민의 숫자와 농지의 개간 정도를 면밀히 파악하겠다는 명목으로, 지방 영주들이 다스리던 봉토를 빼앗고 중앙 관리들을 파견해 직접 다스리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게 진나라에서 처음으로 군현제(郡縣制)가 실시되었다. 공손앙이 중앙집권화에 걸리적거리는 귀족들 숙청하는데 농사를 전가의 보도 마냥 휘두른 셈이다.

 

공손앙을 얻고 20년만에, 진나라는 뿌리째 일신되었다. 군비를 확충한 진은 적극적으로 위를 공격해 안읍(安邑), 마릉(馬陵), 안문(鴈門)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여러 차례 군사력을 과시했고, 주 왕실로부터 패자로서의 입지를 공인 받는 등 만방에 위세를 떨친다. 천하 제후들은 오랑캐 나라 우두머리라 업신여기던 진 효공이 회맹을 열자 앞다투어 참가하는 지경이 되었다. 백성들도 열심히 농사 지으며 본분에 전념했고, 떠돌아 다니거나 죄 짓는 사람이 없어지는 등 풍속이 유순해졌다. 이제 진나라는 서쪽 변방에 치우친, 척박한 나라가 아니라 중원 판도를 좌우하는 강대국으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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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드 샹파뉴, 콜베르의 초상. 콜베르는 주군과 더불어서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루이(Louis) 14세가 태양왕(Le Roi Soleil)으로 군림하며 프랑스 왕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누리던 17세기에 장 밥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도 궁궐을 드나들었다. 당시 프랑스는 놀랍게도 매관매직이 전통이자 합법이었는데,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콜베르 역시 재무총감부터 시작해서 각종 직함들을 사들이더니 최종적으로는 정무를 총괄하는 재상처럼 행세했다. 훗날 콜베르가 모든 관직을 내려놓게 되었을 때, 프랑스는 유럽의 맹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콜베르는 본인의 상관인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를 고발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 제일 가는 거부였던 푸케는 여러 관직을 겸하면서 국정을 장악했는데, 내친 김에 마자랭(Mazarin) 사후 공석이 된 수석국무장관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반 세기 가까이 수석국무장관직은 프랑스 왕국의 전권을 휘둘렀던 만큼, 누구나 탐내던 직책이고 특히 푸케가 유력한 후임으로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이를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으니, 5살에 왕위를 물려받은 이후 수석국무장관들이 오래도록 섭정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막 마자랭이 죽어서 친정을 펼 기회가 왔는데, 푸케처럼 명망과 경륜을 모두 갖춘 대신이랑 권력을 나누고 싶었을 리가 없지. 바로 그 타이밍에 콜베르가 푸케를 횡령 혐의로 체포하면서, 결국 푸케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초라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 사태는 명목 상 푸케의 비리 혐의가 밝혀진 것이지만, 사실 상 푸케와 루이 14세의 정치 싸움이었는데, 판결에서 국외추방령이 내려졌음에도 루이 14세가 개입하여 무기징역을 때려버렸기 때문이다. 이후로 콜베르가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아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일단 푸케의 횡령 자체는 중상모략이 아니었다. 푸케가 재무 담당자였을 시절에 나라 돈을 사비처럼 쓰긴 했거든. 문제는 당시 프랑스 왕국의 재정 상태가 몹시 처참해서, 푸케마저도 빚을 져가며 국고를 채워야 했다는 점이다 : 프랑스 왕국은 농경 국가여서 많은 농산물을 재배했지만, 그 중 가장 많이 난다는 포도조차 산지에서 80% 이상 소비되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16세기 말부터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 서불 전쟁 등등 끊임 없이 전쟁을 겪었고, 1660년부터 3년 간 기근이 들어 국토는 황폐해졌다. 당연히 세출이 세입을 능가했고, 전황에 따라 언제나 막대한 양의 급전이 필요해졌다. 부르봉 왕가에서는 국채 발행과 화폐 조작, 심지어는 매관매직 같은 임시방편으로 엄청난 수요를 충당해왔지만, 보통은 징세 청부업자, 소위 세리(稅吏)들에게 징세권을 팔고 선납금을 받는 식으로 떼웠다. 왕국에 자금을 융통해 준 청부업자들은 그보다 많은 액수의 돈을 지역 주민들에게 징구했으므로, 이는 빚을 갚겠답시고 더 큰 빚을 지는 격이다. 콜베르가 직책을 넘겨받고 보니 그 폐단이 극에 달해서, 프랑스는 해마다 내년도 세금을 당겨 쓰는 지경이었다.
 

나라가 결딴나게 생기자 콜베르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는데, 쉽게 말하면 배를 째는 것이다 : 먼저 국채의 발행과 기발행된 채무의 이행을 정지해버리고, 징세권자들에게 갚아야 할 돈 역시 일부 떼먹었다. 또한 전란기가 거듭되면서 급증한 가짜 귀족 · 성직자 · 관료 등을 색출하여 면세 특권을 박탈했고, 기존의 세제 혜택 대상 역시 축소했다. 부동산세를 줄이는 대신 간접세를 올려서, 귀천에 상관 없이 세금을 내도록 조세 정책을 개혁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토지와 인구를 조사해 세수를 확보하는가 하면, 비대해진 관료 조직을 재정비해서 낭비되는 돈을 줄여나갔고, 부패한 관리들을 붙잡아 벌금형에 처했다. 징세 묘기라고까지 불리운 일련의 과정들은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국왕의 비호를 받던 콜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히 추진했다.

 

그러나 전임 재상들이 무턱대고 쥐어짜는 바람에 프랑스 백성들은 진작 마른 오징어가 되어 있었다. 기껏 비싼 값을 지불해가며 요직이란 요직은 죄다 꿰어찼는데, 나라가 기울어서 인건비도 못 건지게 생기다니. 콜베르는 억울해하는 대신, 본인이 직접 경제를 중흥시키기로 한다. 특히 네덜란드와 스페인처럼 일찌감치 상업으로 성공한 케이스를 의식하여, 프랑스의 산업 구조를 상업 중심으로 개편하고자 했다. 이는 물론 신민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져야 세금도 많이 낼 수 있다는 통찰에 입각한 판단으로, 나라 안의 주요 권력을 모두 차지한 콜베르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우선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사업 환경 조성에 나섰다 : 동 · 서인도 회사, 지중해 회사, 북방 회사 등등의 지역 거점 상회를 창설하고, 이들에게 해당 방면의 독점적 무역권을 하사했다. 왕립 수공업조합을 만든 다음 군수품 · 모직물 · 사치재 등 일부 품목을 나라에서 전매하도록 했으며, 소요되는 인력과 자본 역시 왕실에서 지원해주었다. 조선소를 세우고, 상선(商船)과 그것을 호위할 군함까지 대대적으로 건조하여 그제껏 소홀했던 원양 무역에 박차를 가했다. 운하를 파고 교량과 도로를 정비했는가 하면, 광산을 개발하고 산림도 가꾸어서 사회간접자본과 원자재의 수급에도 신경썼다. 외국에서 기업가 · 장인과 같은 기술자들을 모셔와서 정착할 수 있도록 장려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동시에 프랑스의 대외무역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각종 규제를 도입했다 : 공산품의 품질을 개선하고자 산업 전 분야의 제조 과정을 엄격히 통제했는데, 직물을 예로 들면 실가닥의 굵기와 색깔마저도 일일이 참견했다고 한다. 인적 자원도 관리 대상이었으므로 국내의 상공업자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걸 막고, 외국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경우 사형에 처했다. 각종 가공품의 원자재는 오직 국내산만 쓰도록 하고, 수입산 물품들은 관세를 크게 매겼다. 자연적 · 전통적으로 결성된 여러 길드(Guild)들을 임의로 통폐합했는가 하면, 길드 중심으로 운영되어 온 사업 영역을 효율적이란 이유로 왕립 회사에 몰아주기도 했다.
 

콜베르의 이러한 정책 기조를 콜베르티즘(Colbertism), 또는 중상주의(重商主義)라고 부른다. 중상주의는 경상수지를 흑자로 전환 및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 차원의 개입과 극단적인 보호무역을 추구한다. 그러나 중상주의의 최종 목표는 흑자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하는데 있다. 때문에 상공업 기반이 미약하여 중상주의의 실현을 위한 선행 과정도 복잡했고, 경제 주체들의 얼키고 설킨 이권 관계를 국가가 멋대로 해체하느라 많은 원성을 샀지만, 무엇도 강성대국으로의 약진을 멈출 수 없었다.

 

한편, 중상주의 체계를 이어간 덕에 프랑스는 대단한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1656년에 약 9천만 리브르(= 약 9조 3천억 원 !)에 달하던 빚을 10 여 년 만에 700만 리브르(= 약 7천억 원)대로 줄이는 등 재정 상황이 매우 호전되고, 부르조아 계층이 급증하면서 곳곳에 도시가 들어섰다. 상업 패권을 거머쥐면서 온 유럽이 프랑스제 물건을 명품으로 알아주는데 이르렀다. 국왕은 휘하에 20만이나 되는 상비군을 소집하며 국력을 과시했다. 경제적 여유를 되찾은 왕실에서 예술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면서, 화려하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바로크 양식의 예술 사조가 이 시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군주이자 절대왕정의 대표로 손꼽히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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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투르니에, 미다스 왕. 자세히 보면 잔에서 황금이 쏟아지고 있다. 미다스는 욕망의 해방을 관장하는 신조차도 못 말린, 탐욕의 대명사이다>

 

관이오의 정치 철학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들은 곳간만 채워주면 알아서 예의염치를 깨우친다"던 그의 주장은 마치 자본주의의 출현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실용적이고 물질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의염치란 사유(四維), 즉 나라의 네 뼈대로서 국가의 기틀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강령에 해당한다. 그리고 관이오는 경제만 잘 살리면 백성들이 알아서 해당 강령들을 준수한다고 생각했다. 뭐, 가난하면 범죄율이 높아질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서로 돕고 살기를 기대하긴 어려우니 어느 정도 타당한 의견인 듯도 하다. 

 

그러나 관 선생의 삶을 놓고 본다면, 그 견해가 도통 설득력이 없다 : 관이오는 물욕이 심하여 사치스럽기가 제 환공과도 견줄 정도였다고 한다. 스스로 제정한 법에 따라 시장세 3할을 거두어서 자기 주머니에 채워넣었고, 그 돈으로 저택을 세 채나 지으며 세 집 살림을 차리는 등 임기 내내 축재를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곡식을 매점매석 하는 바람에 미곡 값을 300배나 뛰게 만들었고, 예법상 군왕에게나 허용되던 치장을 주제넘게 부리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관적관이 따로 없다. 관이오가 죽자, 그보다 더욱 탐욕스러운 역아(易牙), 수초(竪貂), 개방(開方) 같은 간신들이 환공의 총애를 누리며 득세했다. 이들은 관이오 못지 않은 부자였으면서 나라를 취하고자 궐을 농단하고, 은인이자 주인인 환공이 비명횡사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럴진대, 과연 예의염치가 지켜졌다고 할 수 있을까.

 

공손앙은 효공의 사망과 함께 극진한 후원자를 잃으면서 명운이 다 하고 말았다. 귀족들의 특권과 기득권을 박탈하면서 매우 독선적이게 행하여 많은 원한을 샀기 때문이다. 효공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전방위적인 정치 공세에 휘말린 공손앙은 달아나려 했으나, 얼마 못 가 금방 붙잡혔고 번개 같이 숙청당했다. 공손앙의 최후는 대단히 공교로운데, "여관에서 나그네를 투숙시키지 못 하는 법" 때문에 어디 숨지도 못 했고, "죄인의 가족까지 연좌해야 한다"는 방침 때문에 삼족이 주륙을 면치 못 했다. 자신이 농사로써 나라를 일으키려고 만든 법에 자신의 목이 달아났으니, 이를 두고 "작법자폐(作法自斃)"라는 말이 생겼다.

 

더욱 참담한 일은 공손앙 사후에 벌어진다. 효공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혜문왕(惠文王)은 개인적으로 공손앙을 혐오했으면서, 그의 중농주의(重農主義)적 개혁안은 유용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공손앙을 처리하는데 가담한 귀족들의 통수를 때려버리고, 공손앙식 부국강병책을 계속해서 추진해 나갔다. 이로써 나날이 강성해진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중원에서 최초로 황제를 배출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천하를 경륜하는 위치에 오른 뒤에도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쥐어짜며 생산 수단으로 삼았을 뿐, 보다듬거나 구제해 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비대해진 황실의 권위와 집중된 금권력은 대규모 공사와 사치를 유발했고, 이로 인해 자꾸만 민심을 잃었다. 결국 시황제가 통일 제국을 수립한지 15년만에 왕조째로 망하는 사태가 터졌다.

 

프랑스도 중상주의를 고집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당시 근로자들은 매일 14시간 이상씩 혹사 당해가며 푼돈이나 만져야 했는데, 농산물에 상한가를 둔 뒤 이를 근거로 임금도 일괄 삭감했기 때문이다. 왕립 회사의 특권 보호를 명분으로 동종 업계에 둘 이상의 기업 · 길드를 허용하지 않았고, 그래서 길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났다. 범죄자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대신, 왕립 회사에서 강제로 노역 시키거나 무역하러 가는 갤리선 노꾼으로 던져주는 일이 많았다. 제조업 분야 전반에 걸쳐 온갖 품질 규정을 강요하는 통에, 오히려 기술 발전의 측면에서는 뒤처지게 되었다. 반면, 일부 기업가들은 왕실의 혜택을 충실히 받아먹으면서 몹시 부유해졌다. 지원 사업이 워낙 든든해서, 왕립 회사들은 일반적으로 방만하게 경영했고 훗날 재정 부담의 주범으로 남았다. 그들에게 후원 받은 루이 14세는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서, 본인 생전에 완공되지도 못 할 베르사유 궁전의 개축 공사를 지시했고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이러니 프랑스 사회에서 부의 양극화 문제가 점차 심해졌고, 국민들 입장에서는 혁명이 마려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중상주의의 작동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 중상주의는 흑자를 강조하여 보호무역을 밀어붙인다지 않았나. 바꿔 말하면, 프랑스와 교역하는 상대 국가들은 모두 적자를 본다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프랑스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군함을 건조하고 병사들을 육성하는 등 재무장에 열을 올렸다. 즉, 중상주의는 나라 안에서 걷는 세금이 부족하면, 나라 밖에서도 걷으면 된다는 식으로 굴러간다 ! 이걸 당하는 나라가 과연 뻔히 보고만 있었을까? 당연히 온 유럽에서 너도나도 중상주의 하겠다고 난리를 피웠고, 나라 간에 발생한 무역 갈등이 무력 갈등으로 비화하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프랑스도 재무적 독립을 지키기 위하여 루이 14세 치세 동안 네 차례씩이나 전쟁을 치렀으며, 그 중 두 번은 콜베르가 살아 있을 적에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가 아시다시피 17세기를 달군 중상주의는 지독한 자식을 하나 낳는데, 우리가 제국주의(帝國主義)라 부르는 놈이다. 중상주의를 견지해 덩치가 커진 나라들은 열강(列强)으로 개명하고서, 좁아 터진 유럽 땅 너머까지 끝없는 욕망의 마수를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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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모 피자 가게에서 한 가정에 선물한 피자와 메시지. SBS 뉴스 8.13. 일자 기사에서 발췌>

 

우리 모두는 인간적이게 살길 원하고, 그러려면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마, 니 서마터폰 중독이다 !" 라고 일갈하시던 우리 어머니조차 요즘은 메신저로 한 마디 하시기까지 2초도 안 걸리는데, 이토록 간편하고 신비스러운 기술적 효익은 당연히 경제적 풍요 없이는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경제 수준은 비단 기술 뿐만 아니라, 의 · 식 · 주에 이르는 생활 방식, 문화 및 예술, 가치 판단과 신념 등등 일일이 손꼽기도 어려운 분야에서 다양한 영향력을 끼친다. 선대의 인물들도 이러한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몸소 이바지함으로써 많은 긍정적 변화들을 이끌어냈다. 다시 말해,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경제적 번영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 성장을 우선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전 · 후 과정에 대한 고려는 소홀했다. 살펴 본 바와 같이 경세가들은 백성들을 혹사시켜 부를 쌓고는, 그것으로 무기를 만들고 권력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즉, 인간다운 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거나 활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로 인해 다스리기 좋은 세상은 됐을지언정, 사람답게 살기 좋은 세상은 될 수 없었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경제적 가치를 우선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우리가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응당 당시의 실패들을 경계하고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인간답게 경제를 발전시키고 활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불민한 덕(德) 덕후로서, 경제 주체들이 덕성을 갖추는 것 이외의 대안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 도덕은 미덕과 악덕을 분간하는 기준이고, 덕성은 그러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하필이면 듣기에도 애매모호한 덕을 해답이랍시고 고른 이유는, 돈과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규범이기 때문이다 : 도둑질과 살인이 나쁜 짓임을 구태여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듯이, 덕이란 사회 질서와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가치 체계이다. 만약 경제 활동에서 우리 모두가 경제성이 아닌 덕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야말로 인간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지지 않을까? 예를 들면, 기업은 원가를 속이거나 부당 노동 행위를 강요하는 대신 윤리적 원칙에 따라 영업 하고, 근로자 역시 직장 윤리와 성실한 태도를 지켜 근무하는 식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몹시 기발한 방법으로 덕행과 경제를 융합하는 중인 듯 하다. 우리는 어째서 유제품을 사기 전에 한 번 더 살펴보고, 특정 옷가게의 물건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가? 또한 우리는 어째서 편백나무 방향제와 특정 브랜드의 치킨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흐뭇해 하는가? 이러한 불매운동과 "돈쭐" 내는 현상은 경제적 손실까지 동반하기 때문에, 명백히 소비 행위에 도덕적 판단이 작용한 결과이다. 나는 지금처럼 소비자들이 직접 기업에 도덕적 가치를 묻고, 소비로써 심판하는 방법이 옳다고 믿으며 오래도록 계속되길 바라고 있다 :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내가 대학 다닐 때나 배우던 낡고 수동적인 방법이다. 반면, 우리가 선행을 베푼 기업에 흔쾌히 지갑을 여는 것은 훨씬 적극적이고 사회 친화적인 방법에 해당한다. 이렇게 덕성에 따른 경제 행위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나쁜 기업"을 솎아 내고 "착한 기업"만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도덕을 준수하고, 그것이 공중의 영역에서도 잘 이행되고 있는지 감시할 필요가 있다. 선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은 끊임 없이 선행을 낳으니, 우리들의 도덕적 소비 활동이 이어진다면 시장에서 악덕을 몰아내고, 성장 중심 사회에서 잊혀지고 만 인간성이 고개를 들며, 새롭게 형성된 新 경제 질서가 우리를 인간적인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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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의 댓글

2021.09.09

이 양반 글 엄청 기다렸는데 반갑소.

1
@이보게날세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아 망설이다보니 오래 걸리고 말았습니다 :)

0

어느 나라가 흑자라는건 다른 나라는 적자란거지

그럼 부의 총량은 어떻게 늘어난걸까

1
@월급받으며개드립하기

식민지에서 뜯어왔다고 합니다 :(

0
2021.09.09

공자님말씀이 여기서 왔구나 ㅊㅊ

1
@뇌없는몽상가

그렇습니다. 공자는 관이오의 경제적 성과를 높이 평가했지만, 동시에 그가 예를 알지는 못했음을 지적하며 역시 인격 수양이 뒷받침 되어야 경제 발전도 의미 있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

1
2021.09.09
@한그르데아이사쯔

오씨 개떡같이 말햏는데 찰떡같이 알아먹고 설명도 해줘써. 너 최고👍

1
@뇌없는몽상가

부끄럽습니다. 다른 글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

0
2021.09.10

모아서 책으로 내도 되겠다

고전을 엮는 솜씨가 일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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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ukskdjdj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책도 써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개드립 식구들과 생각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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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쓰시네요. 형님글은 언제나 추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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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메모장

항상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잘 안 돼서 늦어지기만 했습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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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1

이 글을 읽고나니 왜 그리 덕을 강조했는지 쉽게 와닿네. 추가로 그 옛날 춘추전국시대가 오늘날은 글로벌로 확장된거같은 느낌

2
@국통수험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0
2021.09.15

이번 글도 재밌네요. ㅊㅊ야

2
@재롱이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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