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의 출신의 천민, 용맹으로 이름을 남기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12월 3일 기사中
상이 이르기를,
“변장과 수령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
하니, 아뢰기를,
한명련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10월 7일 기사中
한명련ㆍ김덕령은 모두 한 시대의 용장으로 남방에 헛되이 머물러 있으니,
(중략)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두 명성이 있으니 관서의 인심이 진정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596년 10월 21일 기사中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으로는 기용할 만하다. 그리고 한명련은 어떤 사람인가?”
【전공으로 항오(쫄병) 가운데에서 발탁되어 당상으로 승진하였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으며 단지 40~50인이 있을 뿐인데도 날마다 교전(交戰)할 때처럼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때때로 불러다가 재주를 시험해 보았는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습니다.
..(중략)..
“다른 일은 알 수 없으나, 적중에 종횡무진 돌격한 것은 분명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7일 기사中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별장 한명련이 충청도 방어사와 합세해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공주ㆍ회덕 지경에 이르러 유숙하다가, 왜적이 진산으로부터 산길을 경유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2일에 잠자리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서 변을 기다렸는데 왜적의 선봉이 갑자기 이르러 서로 교전하였습니다.
얼마후에는 수많은 왜적들이 크게 쳐들어와 종일토록 힘껏 싸워 쏘아 죽인 것이 거의 2백여 명에 이르렀지만, 중과부적인 데다가 날도 어두워져 다만 6급만 베어가지고 왔기에 그 귀를 베어 올려 보냅니다.
이날 싸움에서 앞을 다투어 돌진하고 좌우로 분격하여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창황한 나머지 전장에 버려두고 다 가져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힘껏 싸운 사람에 대해서는 권장하지 아니할 수 없기에...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13일 기사中
경기 감사 홍이상이 치계하였다.
(중략)
별장 한명련이 소초평에서 싸워 참살한 바가 매우 많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0월 3일 기사 中
정원에 전교하였다.
“한명련은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용렬한 의사로 치료하게 할 수 없다. 급히 내의를 보내 병을 간호하되 마음을 써서 구제하도록 하라.”
【명련은 힘껏 싸운 장사다. 앞장 서서 돌격하여 참획이 매우 많았으므로 상이 장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려 오른쪽 볼기에 탄알을 맞아 서울로 올라왔기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용맹으로 명나라 제독 마귀에게 눈도장을 찍다. 이순신 권율과 함께 조선의 양장으로 인정받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5월 11일 기사中
명나라 제독 마귀가 말하기를
귀국인 가운데 정기룡ㆍ김응서ㆍ한명련은 모두 의협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왜적을 잘 사살하니 함께 적을 토멸할 만합니다.
..(중략)..
지난번 아군의 대구와 삼가 전투에서는 한명련이 선전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 15일 기사中
제독이 말하기를,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 · 정기룡 · 한명련 · 권율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종2품의 오위장이 됩니다.
참고로 종2품이 어느 정도의 위치냐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가 종2품입니다.
아마 한명련에 대해선 임진왜란의 활약보다는 이괄의 난에서 이괄 부하였던 한명련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한명련은 실제로 굉장히 굴곡진,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면접관
나무위키 내용이랑 똑같은데.. https://namu.wiki/w/%ED%95%9C%EB%AA%85%EB%A0%A8#s-2.1
팽배수
왜냐면 그 나무위키 항목을 제가 작성했거든요.
나요즘형아가남자로보여
같은 소재로 최근에 글이 올라왔었어
한명련 아들인 한윤이 청으로 귀화해서
호란때 내려왔다는거까지
나요즘형아가남자로보여
그래도개추야
팽배수
최근에 글을 좀 보강해서 편을 좀 나눴습니다. 그래서 다시 올려봄요.
은빛달빛
천민 출신으로 충무공 된 사람이라고 해서 정충신 생각했었는데 한명련이었네
흰밤과검은달
노비가 저렇게해서 높은 품계올라가면 양반됨? 왠만한 양반보다 서열높은데 낮으면 이상하잖아
팽배수
아마 임란 초기에 면천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별장으로 삼았으니까요
혼세마왕
임진왜란 중, 후로 조정에 재산을 기부하면 그 액수에 따라 면천권을 부여했음.
돈많은 외노비가 한순간에 지역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음.
세기노비
참고로 저기 있는 김덕령은 선조가 때려잡았지... 역적으로ㅋㅋㅋ 시발
팽배수
김덕령은 당대에 명성에 비해서 한게 없다고 비판받았지만 그래도 역적으로 몰려 죽은건 딱하죠
호정보요원
선조가 실드라도 안쳐줬으면 그 전에 죽었을걸..
세기노비
그 내용이 수정실록에 있는건데 수정실록이 선조, 서인 중심적이라는 견해가 꽤 있어서 살짝 갸우뚱하긴 함...
또임
선조때가 딱 동인/서인 갈라져서 싸우는 초창기이고
임진왜란까지 껴있어서 조선역사상 가장 다이나믹하고
스펙타클한 시대였을것인데
굉장히 아쉬움.
소실되기전 실록 기록 다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진혜윤
근데 그건 김덕령이 좀 의심살 짓을 했음..
반란하는 애들이 김덕령뿐만 아니라 곽재우 이덕형등 다른 장수나 신료들을 같이 걸고 넘어졌는데
나머지는 다 불문에 부친 선조가 유독 김덕령만큼은 죽인 이유가
전공도 없는데 명성 드높히려고 이리저리 언플하는게 딱 의심사기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
전근대 장수들은 공을 세워도 자기를 낮추고 임금을 빨아서 의심을 피하려고 하는게 정상인데
유독 김덕령은..
호정보요원
정충신도 면천에 비슷한 케이스인데 서로 정반대의 길로...
PECVD
삼다수통제조사
cuqhstoRlqudtls
원익은 ips지
발째연속오르가즘
김덕령은 임진록 할때 봤는데 이분은 처음들음
재밌어서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