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경신 대기근 - 中. 신해년의 지옥도

조선국 현종 11년(경술), 12년(신해)간 걸친 대기근인 경신대기근은 나라에 닥친 기근 중 가장 참혹한 재해로서, 천하의 기상에 이변이 일어나 홍수, 지진, 우박, 서리 등의 각종 천재지변이 팔도를 덮쳤으며 많은 질병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해치고 농사의 일은 흉작뿐이었으니 백성들의 고난은 극에 달하였다.

 

종친들과 대신들 또한 백성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하고 질병으로 연이어 쓰러져 죽으니 나라의 행정 또한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전무후무한 대기근으로 100만 명이 넘게 죽으니 실로 이는 임진년의 참변이나 병자년의 굴욕과 비교될 수도 없는 중대한 사직의 위기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경신 대기근 - 上. 경술년의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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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12년(신해년) 1월 1일

충청도에서 여역(癘疫)으로 죽은 자가 2백 20여 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일

경상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5천 1백여 인이었는데 여역이 또 뒷따라 번져 죽은 자가 2백여 인이었고 우역도 줄곧 치열하게 만연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5일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상차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해 말하고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오늘날의 나랏일은 참으로 위태하다. 백성이 몹시 곤궁하여 굶고 얼어서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다 하니, 내 놀라고 슬픈 마음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먹거나 쉴 적에도 편치 않아서 아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다. 경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반드시 며칠 안에 오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해가 이미 바뀌어도 줄곧 물러가 있으니, 이것이 어찌 경에게 바란 것이겠는가. 빨리 들어와 상하의 희망에 부응하라. 이러한 내용으로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 왕이 사직을 청한 우의정을 간곡히 만류한다. 많은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계속해서 사직을 청하나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8일

예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상차하기를,

 

"신이 접때 등대하였을 때에 양호(兩湖)의 전세는 혹 감면해 주거나 혹 남겨 두어 진휼하는 데 쓰게 하고 관서(關西)의 쌀을 가져와서 대신 채우자는 뜻으로 누누이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외방의 말을 들으면 민간에 굶어 죽는 무리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날마다 들리는 것이 모두 놀랍고 슬픈 일들입니다. 이런 때에 굶주린 백성에게서 전세를 독촉해 받아 수송해 온다는 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제 전량을 남겨 두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긴다면 양호의 연해안 고을만 상납하게 하되 쌀과 콩의 두수(斗數)를 적당히 줄여 주게 하고 산간 고을은 모두 받아서 본도에 두었다가,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하는 것은 결코 그만 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조복양이 민정중(閔鼎重)·김만기(金萬基) 등과 함께 입시하였을 때에 삼남(三南)의 전세를 감면해 주자고 청하였는데, 허적(許積)·김좌명(金佐明)·권대운(權大運)이 다들 ‘경비가 염려되므로 전세는 결코 줄일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의논이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자 조복양이 물러가서 또 상차하고 며칠이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상이 차자의 사연을 신하들에게 여러번 물어 보고는 마침내 전세를 받아서 남겨 두었다가 진휼하는 데 보태 쓰라는 명을 내렸다.

 

- 이젠 중앙으로 올라와야 하는 전세마저 굶주린 백성들이 너무 많아 구휼을 위해 지방에서 소비되기 시작한다. 이런 일은 계속되어 지방은 끊임없이 식량 부족을 호소하고, 조정은 있든 없든 무슨 방법이라도 짜내서 지방을 구휼하기 위해 노력한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1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 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도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을 파서 관을 뻐개고 고장(藁葬)을 파내어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

 

빌어먹는 무리들은 다 짚을 엮어 배와 등을 가리고 있으니 실오라기 같은 목숨은 남아 있지만 이미 귀신의 형상이 되어 버렸는데, 여기저기 다 그러하므로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감영(監營)에 가까운 고을에서 얼어 죽은 수가 무려 1백 90명이나 되고,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흉년이라 하여 용서해 주지 않는데 한 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어서 그 수를 셀 수 없고, 돌림병이 또 치열하여 죽은 자가 이미 6백 70여 인이나 되었습니다."

 

- 전라도는 인외마경의 상태에 도달했다. 계속되는 극심한 재해와 기근에 인과 의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남은 백성들은 살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마저도 주저 없이 행했다. 백성들은 기근과 굶주림에, 추위에, 살인과 도적질에, 전염병에 죽어나가니 조선팔도는 이제 사람 살 곳이 아니게 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4일

개성 유수 이정영(李正英)이 진휼에 필요한 물자를 청하니, 조정이 강도의 쌀 1천 5백 석을 획급(劃給)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5일

전라도에서 12월 29일 이후로 굶주린 백성으로 얼어 죽은 자가 2백 50여 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5일

평안도 벽동군(碧潼郡)에서 사람을 물어 죽인 짐승이 있었는데, 그 몸이 매우 크고 그 색은 반은 잿빛이고 반은 검고 혹 붉기도 하고 혹 희기도 하여 곰과 비슷하나 곰이 아니었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6일

경기에서 12월 보름 이후로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1백 70여 인이고, 죽은 소가 30여 마리였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6일

이날 서울 안 선혜청(宣惠廳)·한성부(漢城府)·훈련원(訓鍊院)의 세 곳에다 비로소 죽을 장만하여 두고 굶주린 백성에게 먹였다. 첫날에는 죽을 먹으러 간 자가 6천여 인이었고 이튿날에는 이미 1만이 넘었다. 빌어먹는 무리에게는 죽을 쑤어 나누어 먹이고 죽을 먹으러 가기 어려운 사족(士族)의 부녀자와 죽을 먹는 사람 중에 시골로 돌아가 농사짓기를 바라는 자에게는 모두 마른 식량을 주었다.

 

- 그나마 물자가 비축되어 있는 서울에서 빈민들을 위한 구휼소가 운영된다. 그러나 먹을 것을 찾아온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구휼소는 조금이나마 있던 조정의 비축 식량을 대부분 소비하고 끝내 중지되는 결말을 맞게 된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7일

햇무리가 진데다 양이(兩珥)가 있고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무지개 같은 흰 기운이 양이에서 나와 구불구불 뻗어 북쪽을 가리켰는데 그 길이가 각각 너댓 길 정도였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7일

원양도(原襄道)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67인이고 소의 돌림병도 줄곧 치열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9일

경상도에서 전후로 굶주리는 백성이 1만 1천 5백 53명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19일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의 소에 따라, 통영(統營)의 벼 4천 석을 덜어 내어 좌·우도(左右道) 각 진포(鎭浦)의 군졸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 그 생활을 도우라고 명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21일

충청도 정산(定山) 등 고을에서 굶주리고 얼고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43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23일

상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나라에 저축된 것이 있다면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저축된 것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하자,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조금 풍년이 들어 쌀값이 자못 싸지자 공사간에 함부로 쓰고 아낄 줄을 몰랐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하고,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모든 일에서 적당히 줄여써야 하겠습니다만 군사에게 드는 것이 가장 많으니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예전에 송(宋)나라 때 도성에다 군사를 많이 양성하다가 나라의 저축이 헛되이 소비되고 말았습니다. 중국도 이러한데 더구나 우리 나라이겠습니까."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서울의 구휼에 있어서는 이미 설치하여 시행하였습니다만, 반드시 어사를 보내어 민간의 고통과 원망이나 구황 정책의 잘잘못을 탐문하여 아뢰게 한 다음 처리해야 하는데, 이것은 실로 외방의 백성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각도에 두루 보내지 아니해도 경계하는 효과가 저절로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나라가 이지경에 이르자, 왕과 대신들은 이전에 재정을 비축하지 않았음을 한탄한다. 적게 걷고 적게 소비하는 조세정책으로 인해, 중앙으로 거둬들여지는 물자가 빈약해 자연재해 등의 큰 일이 일어나도 조정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재정이 너무나 부족했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23일

상이 하교하였다.

"제주에서 식년(式年)에 으레 공납하는 말 5백 필이 이제 올라올 때인데, 굶주린 백성을 시켜서 뒤져 붙잡아 오게 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몰고 올 때에도 필시 일로(一路)에 폐단을 끼칠 것이니, 잠시 올해에만 바치지 말게 하라."

 

현종 12년(신해년) 1월 25일

새로 수령으로 제수되어 부임하는 자는 흉년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게 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29일

함경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사뭇 많았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30일

충청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5백 54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1월 30일

제주 목사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

 

"본도(本島) 세 고을 민생의 일은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산에 올라가 나무 열매를 줍는데 나무 열매가 이미 다하였고 내려가 들나물을 캐는데 풀뿌리가 이미 떨어졌으므로 마소를 죽여서 배를 채우고 있으며, 무뢰한 자들은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공사간의 마소를 훔쳐서 잡아먹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람들끼리 잡아먹을 걱정이 조석에 닥쳤으니 비참한 모양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8월부터 죽을 장만하여 구제하고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이미 다하여 4만여 명의 굶주린 백성을 다시금 구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해안 고을의 소금을 넉넉히 들여 보내소서. 전일 옮겨 온 5천 석의 곡식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1, 2월 두 달의 진휼할 거리도 모자라므로 3, 4월에는 한 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서 진구할 방책을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조정에서 전라도에 있는 호조 소금 5백 석과 상평청(常平廳)·통영(統營) 및 양남(兩南)의 사복시 목장 등의 곡식 7천 석을 획급(劃給)하여 전라 수영의 병선(兵船)으로 실어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해로가 멀고 풍파에 오래 막혀서 지난해 초겨울에 부친 장계가 이제야 도착했고 전후로 곡식을 나르는 배도 제때에 미처 도달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섬 백성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 제주는 곡식은 커녕 이제 풀뿌리도, 나무 열매도 찾아볼 수 없다. 제주 목장에서 기르는 말과 소들은 모두 도축되어 식량이 되었다. 4만명의 제주도민이 굶주리게 되었으나 조정의 지원은 미약하고, 그나마도 너무나 오래 걸려 제주의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여 사람고기를 먹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일

강화부에서 해일이 있었는데 조수가 들이치는 것이 석 자쯤이나 되기도 하였고 각처의 둑도 많이 무너졌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3일

경상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2만 3천 5백 53인이고 함경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4천 8백 69인이었다.

 

전라도에서 정월 8일 이후로 굶주린 백성 중에서 얼고 굶어 죽은 자가 2백 39인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52인이었다.

 

제주에서 지난 11월 2일에 큰 바람과 큰 눈이 한꺼번에 사납게 일어 쌓인 눈이 한 길이나 되었다. 산에 올라가 열매를 줍던 자가 미처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길이 막혀 얼어 죽은 자가 91인이었으며, 기근 중에 여역이 치열하게 발생하여 죽은 자도 많았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4일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좌도(左道)의 해방(海防)에 종사하는 군졸에게 이미 번포(番布)를 줄였으므로 의지해 살아갈 길이 없어서 구덩이에 굴러 죽을 걱정이 조석에 닥쳤다 하여 월과미(月課米)를 덜어내 나누어 주어 진구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여 월과미 5백 석을 덜어내어 영하(營下)와 소속의 열 군데 진(鎭)에 고루 나누어 주어 죽을 쑤어 구제하게 하였다.

 

-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이르니 국방의 일도 무너지게 되었다. 싸움에만 전념해야만 할 군인들이 너무나 굶주려 국방의 일을 도저히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조정은 짜내고 짜낸 구제책을 써 군인들도 구휼하게 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5일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이 2만 1천 6백 48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6일

경기에서 정월 보름 이후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1백여 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6일

경상 감사 민시중이 치계하기를,

"진휼한 곡식을 장만할 계책이 없으니, 태복·훈국·호조·상평청 등 각 아문의 소관 곡물을 전량 빌려 쓰게 하고 가을이 되거든 도로 받아서 갚게 하소서."

하였는데, 진청(賑廳)의 회계에 따라 태복 이외 각 아문의 잡곡을 모두 윤허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6일

개성 유수 이정영(李正英)이 치계하여 소금을 얻어서 죽을 쑤어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돕기를 바랐는데, 진청이 관향염(管餉鹽) 50석을 옮겨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6일

이때 중외의 기근이 매우 심하여 공사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났으므로 무릇 곡식을 얻을 방도에 대해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다. 이에 노직(老職)으로 가선(嘉善)·통정(通政)과, 증직(贈職)으로 지사(知事)·우윤(右尹)·판결사(判決事)·통례(通禮)·좌랑(佐郞)과, 영직(影職)으로 판관(判官)·주부(主簿)와 허통 교생(許通校生)·면강(免講)·보충대(補充隊) 등까지의 첩문(帖文)을 각도에 만들어 보내어 곡식을 모으게 하였다.

 

- 국가의 재정은 바닥나고 곳간은 비어가기 시작했다. 조정은 하는 수 없이 공명첩을 발급하여 곡식을 가져오는 자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면천을 행하는 등 사회질서의 혼란이 나라의 일로 인해 더 커지게 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7일

대사헌 이정기(李廷夔), 지평 윤계(尹堦)가 상차하여 진구할 방책을 아뢰었다. 전세를 탕감하여 민정을 위로하고 어사를 보내어 진휼의 정사를 살피고 마른 양식을 헤아려 지급하여 농사를 폐지하지 않게 하기를 청한 것이었는데, 상이 답하였다.

"아, 지난해와 같은 흉년은 실로 예전에도 없었다. 불쌍한 우리 백성을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말하다 보면 절로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프다. 이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절실하므로 매우 감탄하였다. 묘당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 국왕의 한탄에도 나라는 쓰러져 간다. 조정의 대신들이 지금의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갖가지 계책들을 마련해오지만 그러한 것들은 '소빙하기' 라는 미증유의 국난에는 소용이 없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0일

이때 국가의 재정이 바닥이 났다. 호조의 삼창(三倉)에 저축된 것이 4만 석도 채 못되어 두어 달도 버틸 수가 없었으므로 강도(江都)의 군향미(軍餉米) 3만 석과 관서(關西)의 쌀 3만 9천 5백 석을 가져다 경비를 채우고, 또 강도의 쌀 2만 4천 석과 관서의 쌀 1만 5백 석을 가져오고 또 어영청의 보미(保米) 5천 석을 대여하여 진휼의 밑거리를 채웠다.

 

- 경술년부터 시작된 재앙으로 결국 나라의 곳간은 완전히 텅 비었다. 비축해둔 물자들도 모조리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제1의 요충지, 강화도의 군량미와, 보인들이 내는 보미 등 나라에 꼭 필요한 국방비마저 전용(轉用)하기 시작한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1일

충청도 옥천(沃川) 등 고을에서 굶주리는 백성으로서 죽은 자가 69인이었고 여역(癘疫)도 점점 치열해졌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3일

평안도는 여역으로 죽은 자가 3백여 인이었고, 경상도는 전후의 굶주린 백성이 3만 8천 9백 67인이었는데, 굶주려서 죽거나 병이 들어서 죽은 자가 3백여 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5일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

"지금 섬이 온통 굶주리고 있는 백성이며, 얼거나 굶주리거나 여역으로 죽은 자가 이미 4백 37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공사간의 곡식이 다 비어서 구제하여 살릴 방책이 없으니 이전하는 미곡이 때에 미쳐 빨리 들어오지 않으면 수만의 죽어가는 목숨이 장차 눈앞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매우 근심되고 몹시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제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인데다가 기근이 특히 심하여 민간의 형세가 날로 더욱 위급해지고 있었다. 노정이 조천관(朝天館)에 나와 곡물을 날라 오는 배를 기다렸고 굶주린 백성도 뒤를 따랐다. 배 하나가 멀리서 가까이 오면 급히 가서 보고 곡물을 실은 배가 아니라 노정이 통곡하면서 돌아오자 굶주린 백성도 한꺼번에 울부짖었다. 듣는 자가 모두 슬퍼하였다.

 

- 제주는 최고 행정관인 목사마저 육지에서 오는 식량 수송선을 밖에 나가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제주의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지만, 본토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 지원을 보낼 수 조차 없다. 제주의 백성들은 극심한 고난에 빠져든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6일

경상도에 2월 초부터 비가 내려 열흘 동안 개지 않자, 강물이 불어 넘쳐서 강가 일대의 밀보리가 모두 침수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7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도내 각 고을에서 정월 스무날 이후 혹은 2월 초부터 모두 죽을 쑤어 구휼하고 있습니다만 얼굴이 누렇게 뜬 무리는 죽을 먹여도 구제되지 않아 진휼하는 곳에서 잇따라 죽고 있습니다. 2월 초에 날마다 크게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자 굶주린 백성이 모여서 추위와 굶주림에 울부짖고 있는데 그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리고 있으니, 비참한 꼴을 말하자니 목이 메입니다.

 

죽을 먹는 수는 큰 고을이면 1만여 명이고 작은 고을도 수천 명에 밑돌지 않으니, 한 도에서 받아들인 것을 다 쓰더라도 결코 보리가 나기 전까지 이어서 진구할 수 없습니다. 민간의 형세를 상세히 살펴보면 종자를 비축하여 둔 집이 열 가운데에서 한둘도 안 되고 모두 관가의 대출을 바라고 있는데, 약간 받아 들여 논 것도 종자로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조정에 보고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면 통곡도 부족합니다."

 

- 심각한 영양부족으로 죽을 먹어도 거부반응으로 픽픽 쓰러져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라도 전역에서 백성들의 극심한 고통은 계속되고, 이제는 빠르게 자라나는 보리를 수확하기 전에 구휼하는 곡식이 바닥나 구휼로서 그나마 연명하는 전라 백성들은 모조리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7일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치계하여 종자로 쓸 벼와 진구에 쓸 곡물을 얻어 각 고을에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강도(江都)의 벼 7천 6백 석과 쌀 8천 석 및 남한(南漢)의 쌀 6천 석을 획급(劃給)하였다. 또 그 계청(啓請)에 따라 남한의 쌀 8천 석과 강도의 쌀 6천 석을 더 주어 백성을 진구하게 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8일

전라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이 열흘 동안에 80여 인이었는데,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8일

원양도에 죽을 받아 먹으러 나온 기민이 9천 4백 90명이었으며 여역으로 인해 죽은 자가 1백 19명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19일

경상도 안동(安東)·경주(慶州) 두 부(府)의 판관을 임시로 폐지하였는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0일

경기에서 정월 16일 이후로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백성이 10만 67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0일

동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부사 정익(鄭榏) 등이 돌아오다가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치계하였다.

 

"정월 초하룻날 청나라 황제가 성황사(城隍祠)에 가서 분향하려 할 때에 동서반이 오문(午門) 밖에 늘어 섰는데 신들도 하반(賀班)에 참여하였습니다. 예(禮)가 끝나자 도로 들어가고 뭇 관원들은 다 파하여 나갔습니다. 신들도 나오려고 하는데 예부랑(禮部郞) 한 사람이 황제의 명으로 신들을 부르기에 서둘러 건청궁(乾淸宮)으로 들어갔습니다.

 

청나라 황제가 문의 한 중앙 평상에 앉아서 신들을 계단으로 올라오라고 명하였습니다. 평상 앞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청나라 황제가 먼저 신 남의 나이를 묻고 다음에 국왕과 몇 촌의 친척인지를 묻고 다음에 길을 떠날 날짜를 묻고 다음에 글을 읽었는지를 묻고 다음에 이름 자를 묻고 또 신 정익의 성명을 물었는데 묻는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청나라 황제가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 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 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황제가 곧 빙그레 웃고 시랑 중 한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고 또 말을 전하기를

 

정사(正使)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물러가게 하므로 신들이 이일선(李一善)을 따라 나오는데 그 시랑도 나오면서 서로 이야기하고 갔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더니, 이일선이 말하기를 ‘황제의 물음에 사신이 대답한 말이 매우 좋았다고 시랑이 말하더라.’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 사신을 불러보면서 본국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는가.’ 하였습니다. 대개 그가 신들을 불러보고 위로한 것이 있으니 우대하는 뜻인 듯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말을 백성이 빈궁하다는 말에다 붙였다가 신들이 변명한 말을 듣고는 또 웃고 돌아가 고하라고만 하였으니, 깊은 뜻이 없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이 관외(關外)에 이르러 한 한인(漢人)을 만나 청나라 임금이 너그러운지 사나운지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한인 관원들은 매우 두려워한다.’ 하였고, 또 ‘관외의 부역이 무겁고 좋은 전지는 다 고산(高山)에게 점유당하였다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머리만 끄덕이고 말았습니다. 역관이 얻은 통보(通報)에 ‘지난해의 수재는 백수십 년 동안 없던 재난이었다.’ 하였고, 또 상으로 쓸 비단과 어의(御衣)의 밑천도 부족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해의 군량을 빌리려 하였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다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처럼 국가의 재정이 모자라고 기강이 무너졌는데도 문화의 정치를 해보려고 하여, 운남(雲南) 사람이 70세 된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돌아가 봉양하겠다고 청하자 허가하였고, 또 상중(喪中)에 있는 자에 대해 윤달을 계산에 넣지 않고 스물넉 달이 되어서 복관(復官) 의논이 있었고 또 만주위(滿洲衛)의 삼년상(三年喪) 논의가 있어 ‘사람들이 다 삼년의 제도를 행하고 있는데 그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단이 산해관을 지나 돌아오는 길에 서신을 올린다. 조선 사신단과 만난 청나라의 강희제는 군주의 힘이 약하고 신하의 힘이 강해 조선의 백성들이 굶어죽는 처지가 되었다며 비웃자 복선군 이남 등의 사신단은 그때문이 아니라 미증유의 난리가 나라를 강타하여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며 열심히 옹호한다. 이러한 강희제의 표현은 조선에서 큰 논란이 된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1일

팔도의 관찰사와 개성(開城)·강화(江華) 두 부(府)의 유수에게 하유하였다.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이 하늘처럼 우러르는 것은 먹는 것인데, 근년 이래로 참혹한 기근을 여러 번 만나 공사 간에 텅텅 비어서 굶어 죽는 자가 줄짓고 있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이 장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밤중에 생각하면 아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다. 아아, 가뭄과 홍수가 재해를 가져오는 것은 농사의 운세가 불행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도랑이 수리되지 않은 것은 또한 사람이 힘을 다 들이지 않아서이니, 식량을 넉넉히 할 방법에 힘을 다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날씨가 점점 풀려서 봄의 경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이때가 바로 온갖 곡식을 파종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사방을 순행하면서 들판을 살펴보되 종자와 식량이 있는가 묻고 경운(耕耘)과 파종이 늦지 않은가를 살피라. 그리하여 무릇 백성의 힘이 모자라는 것이 있거나 묵정밭이 일구어지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들의 궁핍을 도와 주고 그들의 경운을 권해야 할 것이다. 그 책임이 경에게 있으니, 경은 내 지극한 뜻을 몸받아 도내에 알리라. 그리고 수령도 반드시 하인을 간단히 거느리고 친히 다니며 살펴 종자와 식량을 도와 주고 경작과 개간을 권하여 파종이 시기를 잃어 농토가 황폐해지지 않게 하고 인사가 미진한 것이 없도록 힘써서 농삿일에 부족한 것이 없기를 기필하게 하라."

 

- 경술년의 재앙으로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자, 올해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면서 왕은 조선팔도의 관찰사와 개성부, 강화부 유수에게 올해 농사일을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찰사들이 책임지고 농사일을 관리하라는 하유를 내린다. 그러나 이 하유는 심각해지는 전국의 상황으로 인해 이룰 수 없게 된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2일

경상도에서 여역이 점점 치열해져 죽은 자가 2백여 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5일

황해 감사 맹주서(孟胄瑞)가 치계하여, 굶주리는 백성은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 보릿가을은 아직도 멀었으니 곡물을 얻어 진구를 계속하였으면 한다고 하였다. 본도는 고을 수가 가장 적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처음에 4천 석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진구하고 남은 첩가(帖價)와 월과 군기(月課軍器)를 쌀로 바꾼 것 등의 곡물 수천 석을 계속하여 쓰도록 또 허가하였다.

 

황해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1만 5천 5백여 인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40여 인이었고 굶거나 얼어 죽은 자도 많았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7일

평안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이 33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9일

경상도에서 전후 굶주린 백성이 7만 4천 8백 50여 인이었고 죽은 자가 90여 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9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기근이 이미 극에 달하여 살해하고 약탈하는 변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만 무덤 도둑에 있어서는 전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보성군(寶城郡)의 교노(校奴) 일명(日命)과 사노(寺奴) 최일(崔日)과 남원부(南原府)의 어영군(御營軍) 김원민(金元民)과 사노(私奴) 철석(哲石) 등이 남의 고장(藁葬)을 파 옷을 벗겨서 버젓이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었는데 추위에 다급하였기 때문이라 하며 군말없이 자복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계본(啓本)을 형조에 내렸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다들 ‘추위에 다급하여 그랬다 하더라도 그 정상을 따져 보면 강도보다 더 심하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고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이제는 남의 무덤을 파 옷을 벗겨 팔다가 무덤 주인의 친척에게 발각된 사례까지 등장한다. 소빙하기의 극심한 추위는 이렇게 사람으로서 행하였다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들까지 일어나게 할 정도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9일

진휼청에서 2월 달에 돌본 굶주린 백성이 2만 인이었고 죽은 자가 60인이었다. 이때 굶주린 백성 2만 인에게 먹이는 죽을 서른 또는 마흔 가마를 쑤어서 썼는데 닭이 울 때 시작하여 한낮에 이르러 끝나고 한낮부터 다시 쑤어서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너무나도 붐벼서 혹 먹지 못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거듭 먹는 자도 있었다.

 

- 진휼청의 구휼이 계속된다. 얼마 남지 않은 창고의 구휼미에도 불구하고, 진휼청은 매일 매일 죽을 쑤어 수많은 사람들을 먹인다. 시스템상 한계로 인파에 밀려나 먹지 못하는 사람도 생겨났고, 반대로 허점을 이용해 극심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몇번씩 죽을 퍼먹는 사람도 있었다.

 

 

 

 

 

현종 12년(신해년) 2월 29일

팔도에 기아와 여역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보고한 것은 죽을 쑤어 먹이는 곳에서 죽은 자만 거론하였을 뿐이고 촌락에서 굶어 죽고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심한 자는 진구를 잘하였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서로가 경쟁하여 덮어 두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계문한 숫자는 겨우 열에 한둘이었다.

 

- 노인들도 임진년의 왜란보다 극심한 참화라고 말할 정도로 신해년의 조선은 지옥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지옥도는 중앙에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 지방의 관료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피해를 줄이고 줄여 중앙으로 보고했고, 서울의 조정은 이를 토대로 국가정책을 결정하여야만 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일

경기에서 2월 보름 이전에 여역으로 죽은 자가 1백 47인이었고 굶어 죽은 백성이 13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3일

왕세자의 가례(嘉禮) 때에 서울과 지방에서 진전(進箋)·진하(進賀)하고 방물(方物)·물선(物膳)을 봉진하는 규례가 있으므로 예조가 규례에 따라 계품하니, 상이 진전만 하고 방물·물선은 봉진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3일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전 주부 정언형(丁彦珩)이 지난 겨울에 굶어 죽었고 그 아들의 딸이 이제 또 굶어 죽었습니다. 이러한 근심이 사대부의 집에도 많이 있으니 그지없이 놀랍고 참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사람들에게 각별히 양식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 대기근의 참변은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창고가 넉넉하지 못했던 사대부들도 극심한 기아를 버티지 못하고 아사하기 시작한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4일

경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9만 8천 3백 60여 인이었고 죽은 자가 1백 40여 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0일

함경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3백 70여 인이었고, 2월 27일 이후로 비와 눈이 잇따라 내리고 날씨가 추워서 밭이 얼어붙어 갈 수가 없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0일

전라도에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30여 인이었고 굶주리는 백성이 13만 3천 5백 90여 인이었으며, 죽을 먹이는 곳에서나 도로에서 죽은 자가 1백 40여 인이었고 지난해 10월 이후로 각 고을의 죄수 중에 얼고 굶어 죽은 자가 1백 30인이었다.

 

- 너무나 많은 백성들이 굶주린다. 삼남지방에서 각 도마다 몇만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일용할 식량조차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고, 나머지 지방도 그러했다. 1500만 조선 백성들은 경술년부터 시작된 재앙으로 절대 다수가 기아에 시달리고, 또 많은 수가 죽어나가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0일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치계하기를,

"지난해에 흉년은 온 도내가 똑같습니다. 조금 곡식이 여물었다는 고을도 여느 해에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고을에 비하여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므로 올 봄의 주리는 것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전세로 낼 쌀·콩과 각사(各司)의 공물 값으로 낼 베와 여러 가지 노비공(奴婢貢)으로 낼 쌀·베 등 부역을 일체 감면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해조의 물력으로는 옮겨 채울 길이 없습니다."

하니, 전세로 낼 쌀·콩만 반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1일

경기 양주(楊州) 등 네 고을에 비가 조금 내렸는데 산꼭대기에는 눈이 내려 눈 깊이가 두세 치였다. 수원(水原) 등 스무 고을에 된서리가 잇따라 내리고 찬 바람이 날마다 불어서 우거져 가는 밀보리가 다 상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4일

충청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6만 6천 4백 20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6일

함경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3백 70여 인이었는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상도에서 전후에 굶주리는 백성이 11만 5천 6백 70여 인이었으며, 여역이 매우 치열하여 전염 안 된 곳이 하나도 없고 밀보리가 시들어서 결코 풍성하게 익을 희망이 없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7일

평안도에 봄보리의 파종이 비 때문에 시기를 넘겼고 씨뿌린 뒤에 또 많이 썩었으며 밤마다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매우 찼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경기에서 2월 보름날 이후로 굶주리는 백성이 4만 5천 6백 인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80여 인이었고 불타 죽은 자가 6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8일

이때 굶주린 백성이 도성에 모였다가 죄다 죽을 먹이는 곳으로 나아가 밤에는 거리에서 자므로 나쁜 기운이 찌는 듯하여 서로 전염되어 며칠 동안 신음을 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문밖으로 실어내는 수레가 날마다 잇따랐는데, 그 중에는 혹 귀신처럼 됐으나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사람도 많이 섞여서 쌓인 시체 가운데에 들어갔다. 귀한 집이건 천한 집이건 독한 여역이 두루 차서 마치 불이 치솟듯 하였으므로 일단 여역이 걸린 자는 열에 하나도 낫는 자가 없고 심지어는 온 가족이 다 죽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놀라고 황급하여 분주하는 것이 마치 병화(兵火)를 피하는 것 같았는데 그 경황의 비참함이 이러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당초 도성 안에 진휼청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어지러이 모여서 이런 우환을 빚어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 진휼청을 그나마 물자가 남아있는 서울에만 설치하였더니 굶주린 전국의 백성들이 서울의 구휼청으로 모여든다. 피폐해진 사람들의 몸에는 질병이 만연하고, 이로 인한 집단 감염 사태로 양반이건 천민이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죽으니 서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다름 없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18일

사람들로 하여금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때 굶주린 백성이 쪼들린 나머지 그들의 골육을 보전하지 못하고 길에 버리거나 도랑에 던진 일이 빈번하였다. 어느 날 임금 앞에서 이 일을 말한 자가 있었는데, 상이 듣고 한참 동안 슬퍼하다가 드디어 이 영을 내렸는데 한성부에 정장(呈狀)하여 공문을 받아서 거두어 기르되 아들을 삼든지 종을 삼든지 그들이 하는 대로 하게 하였다.

 

- 극심한 고통이 부모와 자식간의 연을 끊어버렸다. 부모는 극심한 기아에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기에 이르니 고아들이 전국에 넘치게 되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죽여 없애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국왕은 고육지책으로 고아들을 종으로 만들어 돌보게 해 그들의 목숨이나마 살리고자 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21일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하기를,

"연산(連山)에 사는 사가의 여비 순례(順禮)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살면서 그의 다섯 살된 딸과 세 살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고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과연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른바 순례는 보기에 흉칙하고 참혹하여 얼굴이나 살갗·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마치 미친 귀신 같은 꼴이였다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었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잠시 엄히 가두어 놓았습니다. 해조를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연산 사람이 아들과 딸을 삶아 먹은 변은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 자애로운 성품은 천부적으로 같이 타고 나는 것인데 그가 흉칙하고 완고하더라도 어찌 지각이 없겠습니까. 심한 굶주림에 부대껴서 이토록 악한 짓을 하였으니, 이것은 교화가 크게 무너진 데 말미암은 것이지만 실로 진휼의 정사가 허술해서 그런 것입니다.

 

도신(道臣)은 먼저 수령의 죄를 거론해야 할 것인데 면의 책임자들만 다스리고 말았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감사와 수령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이어서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구황 정책에 대한 강구를 여러모로 극진히 하고 있으나 부고(府庫)는 다 비고 관리는 지쳐서 굶주려 낯빛이 누런 백성이 마치 물고기가 위로 향하여 입을 벌리듯이 갈망하다가 장차 다 죽게 되었는데, 더구나 이제 봄가뭄의 조짐이 이미 있어 밀보리가 점점 말라가고 있으므로 흙처럼 무너지고 기와처럼 깨지는 화(禍)가 훤히 드러나있는 때이겠습니까. 서울 안 진휼청을 설치한 곳에 다시 더 주의시키고 각도의 감사에게 글을 만들어 하유하여 진휼의 정사가 미진한 걱정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사건마저 발생했다. 충청도 논산의 한 여종이 극심한 기아에 미쳐 그의 다섯살 짜리 딸과 세살 짜리 아들을 먹어치웠다. 조정은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구휼책이 미흡함에 있다고 진단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모자람이 없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결론내린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23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전후 굶주린 백성을 합하여 셈하면 17만 2천 2백여 인입니다. 3월부터 죽을 먹는 가운데에서 농민을 뽑아 양식을 나누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떠돌며 빌어먹는 자는 고을 관아 근처의 죽을 먹여주는 곳에 모여서 먹게 하였습니다만 너무나 얼고 굶주려서 얼굴 가득히 누렇게 뜬 무리는 날씨가 따뜻해진 뒤에 죽은 자가 더욱 많습니다.

 

토착민은 아침저녁으로 죽을 먹는 틈에 채소도 아울러 맛보므로 다들 소생하는 기운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굽거나 고기잡이 하는 가구가 생업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다들 죽을 주는 곳으로 갔으니 어염세(魚鹽稅)를 크게 감면하는 조치가 없으면 앞날의 근심이 매우 절박할 것입니다. 포구나 섬에 사는 백성들은 대체로 관아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집을 못 잊어서 죽을 먹으러 가지 않기 때문에 온 가족이 죽게 되는 경우가 육지 백성보다 휠씬 많습니다.

 

주(州)로 통하는 큰 도회지에는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으므로 쓰러져 죽은 시체가 매우 많습니다. 흉년의 여역(癘疫)은 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모든 마을에 전염이 안 된 곳이 하나도 없어 불처럼 더욱 치열해지고 있으므로 편히 쉬게 될 날이 언제 있을지 막막합니다. 죽을 장만하는 것을 감독하는 자 중에 전염되어 앓는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고 각 고을의 수령과 아속(衙屬)으로서 전염되어 앓는 자도 많습니다. 혹 관아 사람 전수가 전염되어 앓으면 그 관아의 노비가 관속(官屬)의 일을 대행하기도 합니다. 병을 앓는 백성을 위해 장막을 따로 설치하여 전염될 걱정을 방지하고 있습니다마는, 대엿새 분의 식량을 나누어 주면 한꺼번에 죄다 먹고는 지팡이를 짚고 무릎으로 기어 들어와 입을 벌리고 먹여 주기를 바라는데 쫓아도 안 되고 타일러도 안 됩니다. 비참한 꼴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전라도 전역의 굶주리는 백성이 17만명을 넘어섰다. 죽은 사람은 너무나 많아 길바닥에 채일 정도에 이르렀다. 거기에 전염병도 크게 번져 향리와 수령을 가릴것 없이 고을의 나랏일 하는 사람들도 전염병에 걸려 쓰러져 죽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전라도 전역에서 이러한 비참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24일

황해도에서 3월 안에 잇따라 된서리가 내리고 11일에는 눈이 내려 산들이 다 희어졌는데 종일 녹지 않아 기장과 조가 얼어 상하였다. 2월에는 비가 잇따라 내려 봄갈이의 때를 잃었는데, 이 달에 이르러서는 가뭄이 날로 심하고 사나운 바람이 땅을 쓸어 밀보리가 점점 말라갔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25일

집의 이단석(李端錫)이 나아가 아뢰기를,

 

"진휼하는 곳에 있던 굶주린 백성의 주검을 수레로 실어내는 일이 잇따라 보기에 참혹한데, 그 가운데에는 혹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싸잡아 실어내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도 화기(和氣)를 상할 만하니, 진휼청과 각부의 관리를 엄히 경계하여 이런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 이런 폐단이 다시 있으면 진휼청의 당상·낭청과 각부의 관리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각별히 엄하게 경계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죽은 사람을 묻을 때에 주검을 염하여 깊이 묻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드러나고야 말 것이니, 더욱 불쌍하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이미 진휼청에서 면포를 주어 몸을 가리고 단단히 묻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곧 파내어 염한 것을 벗겨 간다 하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만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접때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사람의 발에 줄을 묶어 논 것을 거리에서 보았습니다. 이것은 동네 사람이 끌어내기 위해 미리 만든 도구인데 매우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슬퍼하였다. 승지 성후설(成後卨)이, 한성부의 죽을 먹이는 곳이 시어소(時御所)와 자못 가까운데 여역의 기세가 더욱 성하다고 하여 옮겨 설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운반할 즈음에 반드시 끼니를 잃을 걱정이 있을 것인데, 굶주린 백성이 혹 이 때문에 죽게 된다면 또한 매우 불쌍하다."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세자의 가례(嘉禮) 사흘 전에 잠시 부근의 죽먹이는 곳에다 합하여 설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진휼소 앞에 쓰러져 죽은 사람이 넘쳐나 그 시체들을 옮겨 묻는 과정에서 아직 죽지 않은 자도 싸그리 잡혀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거기에 죽은 사람을 묻는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곧 파내어 시체의 옷을 훔쳐 도망가니 이제는 도리가 무너지고 사람이 이제는 사람이 아닐 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26일

교리 신정(申晸)·민종도(閔宗道), 부수찬 이합(李柙) 등이 상차하여 진구하는 정사에 대해 극구 말하고 이어서 책례(冊禮) 때에 낭비를 줄이고 감옥에 지체되어 있는 죄수를 빨리 처결할 것 등을 아뢰니, 상이 답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황급하기가 마치 중류(中流)에서 노(櫓)를 잃어 어떻게 건너야 할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 아, 허물이 실로 내게 있다.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음식을 대하여도 입맛이 없고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않다. 더구나 연산(連山)의 일은 말하기도 참혹하다. 교화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 매우 부끄러워서 내 절박한 마음이 병중에 더욱 간절하다. 예를 행할 일이 있더라도 어찌 호화롭게 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제 상차한 내용을 보건대, 경계한 것이 매우 절실하니, 가까이 두고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나라가 멸망의 기로에 빠지고 백성들은 현실에 대한 절망속에 더이상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차마 행하고 다니게 되니 왕은 매우 슬퍼하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임을 자책한다. 경술년부터 국왕은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참담해하며 자책하였지만 그런 국왕을 비웃듯, 백성의 고통은 갈수록 더욱 커지게 된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27일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전시(殿試) 때의 당해 승지를 파직할 것과 직강(直講) 이태서(李台瑞)를 사판에서 삭제할 것과 가례(嘉禮) 때의 차지 내관(次知內官)을 파직할 것 등등의 일로 잇따라 아뢰었으나, 상이 다 따르지 않자 차례로 정계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일 도성 안에서 혹독한 여역이 치열하게 일어나 서로 전염되어 죽은 자가 날마다 잇따르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외방에서 모여든 굶주린 백성은 오로지 진휼의 죽을 먹기 위해 온 것인데 겨울부터 봄까지 뼈에 사무치도록 얼고 굶주린데다가 밤낮으로 한데에 거처하다 보니 바람과 서리에 시달려서 조금만 흔들려 넘어져도 곧 죽고 말므로 시체가 줄을 잇고 도랑이 다 찼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절로 마음이 놀라고 눈물이 글썽입니다. 해부(該府)와 진휼청은 이러한 상황을 빨리 아뢰어야 할 것인데도 여전히 까닥도 아니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성부와 진휼청의 당상·낭청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또 진휼청에서 죽을 장만하는 곳을 문밖의 적당한 곳으로 옮기고 그 가운데에서 병이 전염된 무리 또한 구별하여 거처하게 한 다음 각별히 구완하고 치료할 것에 대해 유사를 시켜 여쭈어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한끼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서 서울의 진휼청 앞으로 몰려든 빈민들의 고난이 극심했다. 이들은 진휼청이 내주는 죽을 먹고 근근히 버티다 전염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계속해 죽어나가니 이것은 목불인견의 광경이었다. 조정은 진휼청을 닦달하고 책임을 추궁하지만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28일

평안도 이산(理山) 등 네 고을과 황해도 수안(遂安)과 경상도 창원(昌原)과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와충청도 영춘(永春)과 전라도 운봉(雲峰) 등 두 고을에 다 눈이 내렸는데 서너 치 또는 한두 치씩 땅에 쌓여 녹지 않았다. 여섯 도의 감사가 잇따라 아뢰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30일

이달에 서울에서 굶주리고 앓다가 죽은 수가 1백 50여 인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3월 30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도내에 여역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어서 그칠 가망이 없다 하여 향축(香祝)을 얻어 도내의 중앙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겠다고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4월 1일

사간 심유(沈攸), 헌납 박지(朴贄), 정언 강석창(姜碩昌) 등이 아뢰기를,

"올해 기근의 참혹은 팔도가 다 같습니다만 함경도 육진(六鎭)이 더욱 심하여, 심지어는 옥수수대를 가루로 만들어 푸성귀 음식에다 섞어 먹으면서 조석에 달린 목숨을 잠시나마 이어 가고 있으니, 열흘을 넘지 못하고 장차 구덩이로 굴러 죽을 것입니다. 육진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각별히 어루만져 돌보아 국가의 은혜로운 뜻을 보이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어사를 보내어 변방 백성을 위로하여 타이르게 하고 이어서 편리할 대로 일을 보게 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진구해 몹시 급한 것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육진이 당한 기근의 정상은 전해 듣기에 매우 참혹합니다. 그러니 창고에 저축된 것이 있다면 도신(道臣)이 또한 죽는 것을 보고도 곡식을 대여하는 것을 막을 리가 없습니다. 이제 어사를 특별히 보내더라도 이미 본도에 곡식이 없고 또 곡식을 옮겨 갈 형세가 못되니 헛되이 갔다가 헛되이 온다면 도리어 국가의 은혜로운 뜻을 펴는 일에 어긋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도신에게 창고의 곡식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옮겨서 구제할 형세가 되는지를 조사한 뒤에 다시 품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곡식을 옮길 수 있는 형세가 되면 계문하기 전에 곧 편리할 대로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 최전방 지역인 함경도 육진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본래 식량이 부족하던 지역에 이번 대기근이 겹쳐 육진의 사람들이 옥수수대를 가루로 만들어 푸성귀에 섞어 먹으며 하루 하루를 근근히 버틸 정도가 되었다. 조정도 함경도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기에 육진에 지원을 해준다 뭐다 결정하기 전, 일단 함경도의 식량창고에 식량이 남아 있기는 한지 여부를 먼저 살피기로 한다.

 

 

 

 

 

현종 12년(신해년) 4월 3일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였다.

"본도(本島)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천 2백 60여 인이나 되고 남은 자도 이미 귀신꼴이 되었습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 먹었기에 경내에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어서 마소를 잡아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끼리 잡아 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습니다."

 

현종 12년(신해년) 4월 3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떠돌며 빌어먹는 백성이 버리는 갓난아이를 이루 손꼽아 셀 수 없는가 하면 심지어는 옷자락을 당기며 따라가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기도 하며 부모 형제가 눈앞에서 죽어도 슬퍼할 줄 모르고 묻어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리가 끊어져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 전라도의 상황은 더 악화되기도 힘든 경지에 이르렀다. 제주는 계속되는 식량부족으로 2260명이 굶어 죽는 참사가 일어나고, 도내 동물들은 이제 씨가 마르기 직전이라 곧 있으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전라도 본토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현종 12년(신해년) 4월 5일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에서 큰바람이 서남방으로부터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려 몇 리 사이에 산이 보이지 않고 일찍 파종한 갖가지 곡식이 날리는 모래에 죄다 손상되어 남아있는 종자가 없었으며, 덕원(德源) 등 여남은 고을에서도 큰바람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4월 6일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 집에서 도둑질하였다 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의 굶주린 백성 한 사람이 죽을 먹이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하였습니다. 천성으로 사랑하는 관계인데도 죽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며 죽음에 대한 슬픔이 먹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으니, 윤리가 딱 끊겼습니다. 이는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 사랑도 윤리도 생존 앞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심한 재난과 고통속에 사랑과 윤리는 점차 마모되어 사라져갔고, 남은 것은 동물의 생존본능 뿐이었다. 자식을 버리고 도망가고, 죽이고, 배우자를 버리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니 인간인지 동물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들이 조선팔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현종 12년(신해년) 4월 12일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올해 진휼하는 곳에서 떠돌이들의 주검이 날로 늘어나 도성 문 안팎에 주검을 나르는 수레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청(該廳)에서는 으레 월말에 서계(書啓)하고 있으므로 날짜가 이미 오래 지나서 죽은 자의 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닷새에 한 번 아뢰도록 하여 허술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해골을 묻어 주는 정사는 성스런 왕들이 중히 여기었습니다. 지금 길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잇따라 누워 있으니 더욱 유념하여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신칙하였는데도 대부분 거두어 묻지 않아서 파리들이 빨아먹도록 버려두고 있으니, 보기에 처참합니다. 해부로 하여금 날마다 살펴보게 하여 혹 한데에 버려두고 일찍 묻지 않은 것이 있으면 당해 부관(部官)을 나문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요즈음 팔도의 장계를 보면 굶거나 여역을 앓거나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거의 없는 날이 없지만, 겁탈하고 살상하는 도둑의 사건에 대해서만은 원래부터 아뢰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개 도신(道臣)이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따르는 소치이지, 본디 홍수나 가뭄이나 도둑을 아울러 아뢰어야 하는 의의가 아닙니다. 더구나 이제 살상하고 약탈하는 걱정이 곳곳에 일어나고 있어서 앞날의 염려를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해도의 감사를 시켜 열읍(列邑)에 신칙하여 곧 알리게 하고 또 토포사(討捕使)를 엄히 주의시켜 각별히 계략을 써서 붙잡아서 널리 퍼지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진휼청 앞에 쌓이는 시체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계속해서 묻고 있지만, 아직도 길가에 버려진 시체가 차고넘친다. 전국에서 발생하는 각종 강력범죄와 범죄자들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처벌을 두려워하는 지방 관리들의 축소보고 때문에 중앙의 눈이 가려진 채 강력범죄 문제는 계속발생하고 있었다.

 

 

 

 

 

현종 12년(신해년) 4월 19일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이합(李柙), 정언 윤계(尹堦) 등이, 해조를 시켜 서울과 지방에 여역이 가시게 기도하는 제사를 빨리 지내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무신년010) 의 전례에 따라 날을 잡지 말고 서울과 지방의 여러 곳에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게 할 것을 청하니, 드디어 중신(重臣)을 보내어 북교(北郊)와 민충단(愍忠壇)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외방의 험천(險川)·쌍령(雙嶺)·금화(金化)·토산(兎山)·강화(江華)·진주(晋州)·남원(南原)·금산(錦山)·달천(㺚川)·상주(尙州)·원주(原州)·울산(蔚山) 같은 곳에는 향(香)과 축판(祝版)과 폐백만을 보내고 본도에서 제관(祭官)을 가려 차출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4월 29일

서울 안에 진휼하는 곳이 세 군데인데 한 곳에 죽을 먹으러 가는 굶주린 백성이 혹 1만여 인 또는 7, 8천 인 또는 5, 6천 인이었다. 이 달에 죽은 자가 무려 5백여 인이나 되었고 길에 쓰러져 죽은 무리도 매우 많았다. 한데에다 버려둔 채 거두지 않았다 하여 비국의 계사에 따라 하옥되어 논죄받은 부관(部官)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으나, 죽은 자가 잇따라서 각부(各部)가 즉시 매장하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각도에서 굶주려 죽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에 대해 보고한 것도 1만여 인이었다경상·전라 등 도의 각 고을에서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백성의 수는 한 도를 합할 때 많으면 20여 만이었고 적어도 18, 19만에 밑돌지 않았다.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쓰러져 나갔다. 서울에서 배를 곯는 자는 1만명 가까이 되었고, 각 도에서도 20만명 정도가 굶주렸다. 죽은 사람들은 도마다 각각 1만명을 넘어갔다. 나라의 근간인 백성의 다수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나라도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6일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듣건대, 진휼하는 곳에서 죽을 먹이는 일을 이달 15일에 중지한다고 하니, 세 곳에서 죽을 먹는 백성이 마침내 돌아갈 곳이 없어 죽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여 잠시 동안 홍제원(弘濟院)의 진휼하는 한 곳을 그대로 남겨 두고 가을까지 죽을 쑤어 주어 혜택을 끝까지 베푸소서. 그리고 삼남(三南)의 민사도 매우 염려스러우므로 보릿가을을 할 때가 되었다고 진휼의 정사를 중지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고을은 빨리 방백(方伯)을 시켜 요리하여 끝까지 구제하게 하는 것이 가까운 데를 미루어 먼 데에 미치고 차별없이 사랑하는 도리에 맞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여 말해 준 정성을 내 아름답게 여긴다.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 인견할 때에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진휼의 정사를 중지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구애되는 점이 많이 있는데, 정유악이 이른바 한 곳만을 남겨 둔다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정유악이 아뢴 바는 대체로 좋으나, 국가의 형세가 결코 지탱할 수 없을 뿐더러 한 곳만 남겨 두는 것도 과연 폐단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지금 밀보리가 전부 흉작이어서 결코 끝까지 구제할 희망이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살릴 수 없을 사람에게 헛되이 쓰는 것보다 조금 저축을 남겨 두어 토착민을 구제하는 것이 나을 것이므로 모두 폐지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의 의논이 다 폐지해야 한다 하니, 정유악이 드디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각종 마료(馬料)가 한 달에 1천 석에 가깝고 정초청(精抄廳)의 마병(馬兵)은 그리 긴요할 것이 없는데도 일체 폐지하여 진휼에 옮겨 썼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하고도 백성을 진구할 곡식이 없다고 한다면 믿을 백성이 있겠습니까. 설사 둔위(屯衛)가 성대하고 말이 살쪘다 하더라도 백성이 다 죽어가 나라의 근본이 거꾸러진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그것을 장차 어디에다 쓸 것입니까? 신이 어리석은 소견을 함부로 아뢰어 채용되지 못하였고, 더구나 거둥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추감을 받고 있으니, 갈아서 물리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추함(推緘)을 아직 감결(勘決)하지 않았다 하여 갈았다.

 

- 서울의 물자가 바닥났다. 더이상 구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빈민들에게 죽을 나누어 주는 일도 15일 끝나게 되었다. 정유악은 진휼소 한곳이라도 남겨두자고 상소했지만, 상황이 너무나 어렵고, 나라가 더 이상의 구휼을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불가피하게 진휼하는 일을 폐하게 되었다. 정유악은 그렇다면 국방력의 핵심인 기병에 필요한 식량을 가져와서라도 백성들을 구휼하자고 주장했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7일

경기 양지(陽智) 등 고을의 봄보리에 갑자기 황기(黃氣)가 생겨 거의 다 말라 죽었고 해서(海西) 각 고을의 밀보리도 다 그러하였다. 밭에 거두어들일 것이 없어서 굶주림이 날로 심해졌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9일

상이 침을 맞았는데 응어리가 곪았기 때문이다. 정치화(鄭致和)가 약방 도제조로서 입시하였다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이미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강도(江都)·남한(南漢)에 저축된 것이 하나도 없이 바닥이 났고 백관에게 주는 녹에 있어서는 오로지 관서(關西)에 의지하고 있는데 또한 잇대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또 듣건대, 영남의 역졸(驛卒)이 거의 다 굶어 죽어서 국가의 명령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합니다.

 

더구나 지금 밀보리에 황증(黃蒸)이 들어 시드는 재해는 예전에 없던 것인데 거기다 누리까지 또 뒤따라 치열하게 일었으니, 앞날의 그지없는 염려가 지난날보다 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바라는 것은 오직 전하의 한 몸에 달려 있을 뿐인데, 조정의 하는 일을 보면 매우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저 국가에서 대간을 두는 것은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인데, 대각의 신하가 논쟁한 것을 시행한 것이 아주 적으니 근일 내사(內司)·내관(內官)의 일에 대해 논한 것이 곧 그 한 가지 일입니다. 전하께서 따르지는 못하시더라도 때때로 또 기를 꺾으시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언로(言路)의 막힘이 근일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보면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 된 것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또, 삼남(三南)은 본디 국가의 근본이라 하는데 사망하는 우환이 다른 도보다 더욱 심한 데다가 밀보리가 또 여물지 않아서 실로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간신히 살아 남은 가엾은 백성도 모두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므로 필시 그 위급한 정상을 죄다 통촉하지 못하고 계실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흉년의 참혹함은 삼남이 더욱 심한데 앞날의 일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근년에 혜성(彗星)의 변이 있었을 때 다들 병화가 있을까 근심하였습니다. 그때 천문을 잘 아는 자가 ‘어느 해에 반드시 기근과 여역으로 주검이 쌓이는 참변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존망이 이미 판명되었으니, 전하께서 두렵게 여겨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 분발하여 일으키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천심(天心)을 돌려서 대명(大命)을 잇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정치화가 전하는 현재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국방상 최중요지역인 강화도와 경기도 광주(남한산성)의 비축물자는 모두 바닥났고, 모든 신하들에게 주는 월급은 오직 평안도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기에, 일본과 접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인 경상도의 역졸들이 모조리 굶어죽어 중앙의 명령이 더이상 경상도에 전해지지 못했다. 거기에 메뚜기떼까지 나타나 곡식들을 먹어치우니 대참사가 따로 없었다. 다만 정치화는 이러한 이유를 왕이 대간의 말을 잘 듣지 않아 벌어진 것이라고 잘못 진단한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13일

삼남(三南)의 감사·수령은 모두 가을 곡식이 성숙할 때까지 바꾸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상 허적이, 각도의 수령은 이미 보릿가을을 지냈고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지만 나중에는 게을러지는 것이 본디 사람이면 똑같은 것인데 또 잉임(仍任)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하다 하여 차례로 차출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삼남은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으므로 교체함에 폐단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특별히 명을 내린 것이다.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입은 재난이 너무나 컸기에 원래 게으름을 막는다며 하였어야 할 인사교체마저 재난을 막고 삼남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룰 지경이 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15일

각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보릿가을 철이 되었고 또 안팎의 저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의 세 군데 진휼하는 곳의 굶주린 백성이 모두 3만 2천 40여 인이었다. 서울 백성 1만 9천 5백 70여 인을 제외하고 파하여 본토로 돌아가는 외방의 굶주린 백성에게 각자의 여정을 셈하여 돌아갈 때에 먹을 양식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자에게는 15일 분의 죽거리를 주었다. 병에 전염된 자에게는 각각 양식을 주고 활인서(活人署)를 시켜 치료하게 하고, 의지할 데 없는 어린 무리에게는 따로 양식거리를 지급하되 진휼하는 곳을 설치하였을 때의 감관(監官)에게 주어 그 친속 또는 수양할 사람을 찾아서 구분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외방에는 혹 보리가 익지 않아서 기한이 지나도록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곳이 있고 서울에는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것이 세 군데나 되고 또 중신(重臣)을 가려서 감독하게 하였으니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바야흐로 진구할 때에만 죽는 자가 잇따랐을 뿐이 아니었고 더구나 밀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이라는 상황을 눈으로 보았을 텐데 또 죽을 쑤어 구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는 비록 국가의 재정이 다 비었기 때문이겠지만 각 아문에 저축한 것으로 말하면 남은 것이 있으니,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지극한 정성으로 처리하게 하였다면 또한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석 달 동안 어렵게 부지런히 구제한 끝이라 다시는 어쩔 수 없다고 핑계대어 먹여 주기를 바라는 저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모두 구덩이에 빠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운(國運)과 관계된 것인가. 비통하다.

 

- 진휼도 비축된 식량이 부족함으로 인해 종료되고, 서울의 진휼소는 문을 닫았다. 진휼소 앞에서 근근히 버티던 32040명의 빈민들은 본래 서울에 살던 19570명의 사람들을 제외해고 전국의 고향으로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사관도 이러한 상황을 보고 여기저기 탈탈 털어보면 빈민들을 구제할 식량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을텐데 조정은 3달동안 구휼해줬으니 이정도면 됬다고 빈민들을 죽을 지경에 밀어넣었다며 안타까워한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16일

함경도 각 고을에서 마소의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개 돼지까지도 전염되어 죽었다. 함흥(咸興)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쳐서 한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20일

한성부가 아뢰기를,

"쓰러져 있는 주검을 묻는 일에 대해 국가에서 신칙을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어제 낭청을 보내어 적간(摘奸)하게 하였더니, 남부(南部)에 속한 경내에 쓰러져 있는 주검이 더욱 많아서 성안과 성밖에 있는 것이 77구나 되었는데 혹 머리뼈만 남은 것도 있었습니다. 해부의 관원이 즉시 묻지 않았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것으로 보건대 진휼을 파한 뒤에 부관(部官)이 전혀 마음을 쓰지 않은 정상이 매우 밉다. 해부의 관원을 나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20일

이때 내간(內間)의 궁인(宮人) 중에서 의심스러운 병 때문에 질병가(疾病家)에 내보냈던 자가 잇따라 죽었고, 도성의 사대부로서 전후 죽은 자도 수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온 집안이 모두 전염되어 열 사람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낫지 않았다. 동서 활인서(東西活人署)와 각처의 사막(私幕)에서 병을 앓다가 죽은 자와 길에 쓰러진 주검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각부(各部)에서 죄다 묻지 못하고 구덩이에 가져다 두는데 동서교(東西郊) 10리 안에 쌓인 주검이 언덕을 이루고 빗물이 도랑에서 넘칠 때에는 주검이 떠서 잇따라 내려갔다. 도성에서 이처럼 사람이 죽는 참상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 질병이 서울 곳곳에 퍼져나간다. 폐출된 후궁들이 요양하던 집에서 연이어 죽었고 많은 사대부들이 질병에 쓰러져 죽으니 서울을 강타한 질병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매섭게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을 죽여갔다. 질병으로 쓰러진 사람이 너무나 많아 도성에는 시체들이 만연하니 이러한 참상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24일

진휼청이 아뢰기를,

"서울에서 진휼을 파한 뒤에 의지할 데 없어 빌어먹는 무리에게는 각소(各所)에서 혹 양식을 주기도 하고 죽을 먹이기도 하면서 그 족속과 수양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일 진휼을 파한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굶주린 백성이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항간에서 빌어먹다가 굶고 병을 앓아서 장차 죽게 된 자가 자못 많습니다. 듣건대, 홍제원(弘濟院)에는 아직도 병을 앓는 백성을 머물러 두고 먹이고 있으므로 또 다시 슬피 부르짖으며 살려 주기를 바라고 있는 수가 이미 2백을 넘었습니다. 이제 진휼을 파하였다 하여 일체 물리친다면 물러가도 돌아갈 곳이 없어서 반드시 다들 구덩이에 굴러 죽을 것이니, 구분하여 처리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본청에서 세 곳에 남아 있는 굶주린 백성을 거두어 모은 다음 따로 강창(江倉)을 설치하고 이어서 죽을 먹이다가 다시 사세를 보아 파하여 보내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진휼이 끝난 뒤에서 아직 돌아가지 않는 백성들이 많았다. 진휼청 앞에서 제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는 빈민들의 절규에 조정도 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 결국 이들을 얼마정도 구휼하다 다시 보내기로 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26일

단천감(丹川監) 이양헌(李良憲) 등 네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내렸다. 양헌 등은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녹(祿)을 잃고 죽을 먹으러 나아가 목숨을 이어가다가 진휼을 멈춘 뒤에는 빌어먹게 되었는데, 종친부(宗親府)의 계사로 인하여 상이 하교하기를,

"매우 불쌍한 일이다. 해조를 시켜 먹을 것을 지급하여 굶어 죽을 걱정이 없게 하라."

하였다.

 

- 관직을 그만두고 상을 치루러 간 사람들이 빈민이 되었다. 한때 사대부로서 관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조차 사직한 이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빈민이 되어 진휼청의 진휼에 의존하고, 진휼이 끝난 다음에는 거지처럼 여기 저기 빌어먹고 돌아다니게 되었다. 배고픔은 사대부들마저 처절하게 만들었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28일

경상도 대구(大丘) 등 고을에 크게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술잔만하기도 하고 큰 주먹만하기도 하여 농민이 맞아 중상을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한 노파가 이 때문에 죽었으며 까마귀·까치·꿩·비둘기 등이 다쳐서 무수하게 죽었고 나무가 꺾이였으며 우박이 지나간 밭은 죄다 헐벗은 땅이 되었다. 감사가 이를 계문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29일

상이 뜸을 떴다. 정치화(鄭致和)가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성상께서 만약 인조 대왕께서 남한 산성에서 포위당할 때의 심정처럼 마음가짐을 가져 종묘의 향사 이외에는 온갖 것들을 멈추신다면 어찌 간신히 살아 남은 이 백성을 구제할 수 없겠습니까."

 

하고,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임진란 뒤에는 국가의 사전(祀典)도 행하지 않은 지 오래였습니다. 사전이 중하기는 하나 또한 어찌 변통할 도리가 없겠습니까."

 

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흉년이 들어 곡식이 여물지 않으면 제사에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여기서 흉년이라 한 것은 반드시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묘악(廟樂)을 오히려 연주하지 않았으니, 오늘날 온갖 것들을 멈추는 일 또한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국가의 유지에 있어서 필수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이 중단된다. 선대 왕들에게 바치는 종묘의 향사를 제외한 국가행사, 제사들은 모조리 중단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5월 29일

이달에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수가 서울은 3천 1백 20여 인이었고 팔도에서 보고한 것은 모두 1만 3천 4백 20여 인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삼남(三南)이 가장 심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6월 4일

황해도 해주(海州) 등 열여섯 고을에서 누리가 크게 치성하여 온 들판에 가득 차 온갖 곡식의 줄기와 잎이 다 없어지고 삼이나 채소까지도 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현종 12년(신해년) 6월 4일
우윤 이민적(李敏迪)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진휼을 멈춘 뒤에 밀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주검이 잇따라 전일보다 심합니다. 해서(海西)는 재력이 본디 넉넉하므로 도신(道臣)을 시켜 나름대로 감영(監營)의 저축된 것을 풀어서 없는 데로 옮기게 하면 혹 스스로 지탱할 수 있겠으나, 경기는 수천 석의 쌀을 얻지 못하면 실로 삶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묘당을 시켜 빨리 헤아려 처치하게 하여 피폐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소 끝에서 말한 일은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등대하였을 때 허적은 남한 산성의 쌀 3천 석으로 소속된 각 고을을 구제하고 또 강도(江都)의 쌀 4천 석과 경청(京廳)의 쌀 3천 석을 내어다 그 나머지 여러 고을을 진구하기를 바랐고, 정치화는 두 곳의 군향(軍餉)을 결코 진구에다 쓸 수 없고 또 진휼청에도 저축한 것이 전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세 곳의 쌀을 합하여 7천 6백 석을 진휼의 용도로 대여해 주기를 바랐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금 형세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전일에 낭비를 한 탓이다. 많이 내어 구제하고 싶지만 저축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치화가 아뢴 의논을 따랐다.

 

 

 

 

 

현종 12년(신해년) 6월 4일

...상이 답하였다.

"아,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망극한 재변을 당하여 백성이 장차 죄다 죽게 되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니,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차라리 내 몸이 그 재앙을 대신 받고 말지언정 백성이 그 화를 당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 ...

 

현종 12년(신해년) 6월 6일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장령 이섬(李暹)·박지(朴贄), 지평 조위봉(趙威鳳) 등이 아뢰기를,

"기근과 여역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백성이 많이 죽기는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경기와 호서에서 굶어 죽는 자가 잇따랐는데 도신이 아뢴 것은 열 가운데에서 한둘일 뿐입니다. 수령의 보고만을 믿고 더 유의하여 깊이 살피지 않았으니,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와 충청 감사 이홍제(李弘濟)를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무신인 곤수(閫帥)가 총애받는 환관과 체결하여 뇌물을 쓰고 아첨하는 것은 예전 일에서 보고 경계해야 합니다. 통제사 유여량(柳汝𣛀)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며 또 간사하고 교활하여 전후에 번진(藩鎭)을 맡았을 때 조금도 성적이 없고 오로지 잘 섬기려고만 힘썼으니, 한낱 채수(債帥)012) 일 뿐입니다. 본직에 제수되어서도 고치려고 생각지 않고 절선(節扇)이라고 하면서 벼슬이 높은 내관(內官)에게 보냈으니, 이것은 실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크게 금해야 되는 것이니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현종 12년(신해년) 6월 14일
서울의 기근이 심하여 은 8냥으로 겨우 한 섬의 쌀을 바꾸었다. 사대부의 집에서 앞다투어 비단 옷가지를 가지고 저자에 가서 팔려고 해도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았고 여느 해에는 서너 냥 정도의 값이 나가는 완구품으로 두어 되의 쌀을 바꾸려 하여도 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어쩔 줄을 모르고 얼마 안 가서 죽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파는 쌀은 많아야 여남은 말에 지나지 않았고 적으면 몇 말의 쌀뿐이었다. 사대부로서 벼슬이 낮아 봉록이 박한 자는 태반이나 굶주렸고 각사(各司)의 원역(員役)들도 거의 다 굶어서 낯빛이 누렇게 떠서 장차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 사대부들의 고난도 극에 달한다. 그들이 지닌 사치품들은 너무나 귀한 식량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시장에 풀린 쌀은 너무나 적어, 은 8냥이 곧 쌀 한섬이 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다. 하위 사대부들은 굶주리고 각부관청의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들도 모조리 굶어 업무를 수행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현종 12년(신해년) 6월 15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민간에 밥짓는 연기가 끊어진 참상이 봄보다 훨씬 더합니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낯빛이 누렇게 뜬 백성이 수없이 떼를 지어 문을 메우고 거리를 메워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으며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사족(士族)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득합니다. 곡물이 떨어지고 나면 이어서 소금과 간장을 주었고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고 나면 또 해초류를 주는 등 관아에 저축된 것으로서 입에 풀칠할 만한 것이면 모두 긁어 썼지만 마침내 속수무책인 채 죽는 것만 보고 말게 되었습니다.

 

역로(驛路)가 모두 비어서 장차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고 관속(官屬)이 흩어져서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죽은 자는 다 떠돌며 빌어먹는 자들이었는데, 근일 길에 쓰러진 주검은 모두 본토박이 양민입니다. 그러므로 각 아문에서 진휼에 쓰고 남은 곡물과 세 산성(山城)의 군향(軍餉) 관적(官糴)으로서 창고에 약간 남은 것을 털어서 나누어 주면 만분의 일이라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조정에서 급히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세로 받은 콩과 쌀 또한 1백여 석을 남겨 둔 고을도 있을 것이니, 굶주린 백성 가운데에서 가장 심하고 의지할 데 없어서 결코 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고 입을 벌리고 먹여 주기를 바라는 무리에게 이것으로 죽을 만들어 먹이게 하였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다 윤허하였다.

 

- 전라도의 지옥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굶주리는 전라도의 백성들이 모조리 관아로 몰려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아우성이었고, 이들에게 식량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탈탈 꺼내어 주었지만 결국 그 백성들이 아사하는 것을 막을수는 없었다. 전라도의 행정은 이제 마비 직전의 상태가 되어 경상도와 마찬가지로 역졸들이 오랜 굶주림 끝에 모조리 도망쳐 역참 시스템이 붕괴했고, 수령 휘하의 사람들도 제 살길 찾아 모조리 흩어졌다. 

 

 

 

 

 

현종 12년(신해년) 6월 18일

경기 감사 오정위가 치계하였다.

"도내 각 고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 이외에 굶어서 도로에 쓰러져 죽은 주검을 묻도록 신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굶어서 지친 백성이 실로 거두어 묻기 어려웠으므로 길에서 썩게 되었습니다. 또, 흙을 덮더라도 소나기가 한 번 지나가면 곧 드러나고 있으니 보기에 참혹한 정상을 이루 다 아뢸 수 없습니다."

 

현종 12년(신해년) 6월 18일

서울과 지방에서 소 잡는 것을 금하는 것을 늦추었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당초에 소 잡는 것을 금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데에 뜻이 있었는데, 지금 굶주린 백성에게 혹 송아지가 있어도 나라에서 매우 엄하게 금하고 있으므로 사는 자가 전혀 없어서 소를 가지고도 굶어 죽을 형세에 놓여 있습니다. 또, 금령을 범한 사람은 속(贖)을 거두고 형벌을 받는데, 죽지 않으면 몸을 상합니다. 흉년에는 금령을 늦춘다는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를 잡지 못하게 금령을 더욱 밝힌 것은 실로 농사를 위한 것인데, 사세가 전과 달라서 백성이 다 죽게 되었으니 어찌 이 금령을 부질없이 지켜서야 되겠는가. 이제부터 금령을 범한 자에게는 형벌을 주지 말고 속만 거두게 하라."

하였다.

 

- 농사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는 내년 농사를 위해서 아껴놓아야 할 귀중한 재산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를 당장 잡아먹지 않으면 내년 농사고 뭐고 백성들이 굶어죽게 생겼다. 국왕은 소의 도살을 허가하여 백성들이 식량이 없어 소를 잡아먹었다고 관아에 끌려가는 일이 없게끔 하였다.

 

 

 

 

 

현종 12년(신해년) 6월 23일

상이 하교하기를,

"이런 흉년을 당하여 백성이 다 구덩이에 굴러 죽고 있으니, 음식을 대하면 두렵고 자나깨나 놀라고 있다. 서울 안의 물건은 이미 줄였으나 각도에서 진상하는 것도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두 대비전(大妃殿) 이외의 각전(各殿)에 바치는 것은 모두 내년 가을까지 특별히 멈추게 하라."

 

현종 12년(신해년) 6월 30일

이달에 도성 안에서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자는 1천 4백 6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죽은 수는 1만 7천 4백 90여 인이었다. 그 밖에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범에게 물렸다는 보고가 잇따랐으며 도둑이 살해하고 약탈하는 우환이 없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하였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신해년 6월에 17,490명이 죽었다. 당대 조선 인구 1,500만명의 1/1000에 달하는 숫자가 고작 한 달만에 사라진 것이었다.

 

 

 

 

경술년의 재앙은 신해년의 지옥도를 열기 위한 시작에 불과했다. 신해년의 조선은 그저 인외마경이나 다름 없었다. 기존 사회를 지배했던 인륜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백성들에게는 짐승의 생존본능만이 남아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조선팔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 다투며 노모를 자식이 버리고 도망치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백성들은 인간으로서의 틀을 벗어던지고 지옥과도 같았던 조선 땅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투쟁했다. 

 

살아남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었으며 얼어죽고, 살인당해 죽어나갔다. 기존에 비축되어 있던 식량들은 이제 완전히 바닥났으며, 온갖 자연재해와 재난등이 농사일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강력한 질병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을 쓰러뜨렸고, 강도질과 강간, 살인을 일삼는 범죄단체는 전국 곳곳에 활개쳤다. 현종 12년(신해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조선 백성들의 고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2개의 댓글

2020.11.08

이게 당시 전세계적 이상기온저하 현상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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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8
@쉽지않은남자

ㅇㅇ 그리고 시기적으로 임진왜란보다 더 심각했다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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