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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 권력, 아브젝트(모성적 육체), 인스타그램

출처 https://m.blog.naver.com/hotleve/222020110790

 

이 글은 방재현 작가의 전시 <쏘리 마미 로망스>의 도록에 실렸습니다.

 

 

 

 

 

 

 

 

 

흘러라 내 눈물, 모든 것이 잠길 때까지

 

 

 

 

 

 

리타(연숙)

 

 

 

1.

일반적으로 수동적 여성성은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수동적 여성성은 자주 마조히즘과 연관되어 왔는데, 남성 권력과 마조히즘이 가진 떨어지기 힘든 속성으로 인해 수동적 여성성은 더욱 그 가치를 이해받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마조히즘적으로 작동해온 남성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척)함으로써 ‘통합적 주체’를 구성해왔다. 닉 맨스필드Nick Mansfield는 <마조히즘Masochism: The Art of Power>에서 이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조히즘은 권력에 대한 특정한 실험이며 이 실험에서 주체는 쾌락과 고통, 능동성과 수동성, 권력과 권력의 부재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시나리오를 꿈꾼다." 요컨대 자허 마조흐Sacher-Masoch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 Venus in Furs>에서 마조히즘적 주체는 상대에게 복종하고 속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구성한 시나리오의 일부분이 되도록 강제한다. 이 마조히즘적 주체 내에서 권력과 권력의 부재라는 이항대립 사이의 차이는 부재하며, 타자는 자신의 일부로서 흡수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조히즘적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냉정함과 잔인함Masochism: Coldness and Cruelty>에서 분석한 것처럼) 권력의 '전복'이나 '위반'이 아니라, 권력이 확보하는 자기 자신의 동일성과 우선권이다.

 

물론 권력 그 자체는 접근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무조건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마조히즘을 통해서 기존의 권력 관계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때로 지나치게 순진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이러한 수사학적 유혹에 저항해야 하는데, 모든 일탈적인 것이 그 자체로 전복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복적인 것은 또한 순응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조히즘에 대해 말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근대 이후 노골적으로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남성들-사이에서 권력이 부인의 형태로, 즉 마조히즘적으로 재생산되어 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과업은,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기를 ‘기꺼이’ 포기한 수동성을 발견하고 재조직화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해야 하는 수동성이란 무엇인가? 수동성의 계보는 좌파-페미니즘-퀴어 이론가들의 가장 급진적이고 불온한 저서들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어져 왔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사회적 상징질서에 뺄셈의 자세를 취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원하기의 급진적 가능성’), 아비탈 로넬Avital Ronell(‘남근 경제 속 안다고 가정된 주체를 발명하기 위해 이미 여성화된 어리석음의 지도 그리기),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나의 정동적 삶의 토대로서 선험적 욕망의 기원인 타자를 견디기‘), 앤 트제코비치Ann Cvetkovich(’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장을 구성하는 기분들-우울, 슬픔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범주를 궁리하기’), 주디스 할버스탐Judith Halberstam(자본주의적 가치에 반하는 실패로서의 퀴어니스를 재정의하고 정치화하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수동성을 포함한 부정성 자체를 공산주의적/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시급한 혁명적 과제로 진지하게 다루려 노력했다. 왜 우리는 수동성에 대한 그 모든 오명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를 존재론적인 전환이자 주체의 재발명으로 간주하고자 하는가? 우리가 건 내기의 판돈은 얼마인가? 우리가 잃지 않고 모든 것을 얻으리라고 믿는 것은 진실로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상상인가?

 

 

 

 

 

 

2.

여성주의적 관점에서의 수동성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사람이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라는 사실은, 그녀의 주된 업적 중 하나가 ‘어머니’, 즉 모성적 육체인 비체abject 개념의 발명과 복권에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정신분석학-프로이트, 라캉-은 일차적인 2자 관계가 '어머니'와 '아이'로 이루어짐을 공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남근'의 존재를 강조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이가 언어-상징계 속으로 '던져질'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 단계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이다. 아버지는 아이를 매로 다스려 아이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어머니는 아이와의 전오이디푸스적인 동일시 이후에 사라진다. 이들은 일차적인 2자 관계에서 아이가 받았던 어머니와의 육체적 동일시에 대한 억압은 반드시 아버지(상징계)를 통해 대체되고 강화된다고 설명한다. 이 각본에서 어머니는 반드시 제 3자로 남게되며, 욕망의 객체로만 존재하게 된다. 크리스테바는 여기서 어머니의 권능을 복구한다. 그녀는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외디푸스적인 어머니의 몸을 비천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말하는' 주체는 '깨끗하고 정결한' 주체여야만 한다. 주체는 모성적 육체-비체abject를 억압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우리를 혐오스럽고 역겹게 만드는 것, (어머니와의) 분리와 (어머니의) 배설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비체다.

 

그러나 비천시된 어머니의 몸은 주체와 분리된 후에도 주체의 무의식 속에 흔적으로 남아 상징계 질서가 수립한 분리의 논리의 경계선을 침입하고 이탈하고 전복한다. “아브젝트는 바깥에 있다. 그 바깥은 작동의 규칙들을 인정할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전체의 바깥이다. 그러나 아브젝트는 축출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그 주인(즉 자아)에게 도발을 가한다. 아브젝트는 주인(즉 자아)에게 기호를 허용하지 않고, 방전, 발작, 비명을 요구한다. 각각의 자아에게는 대상이, 각각의 초자아에게는 아브젝트가 상응한다.”(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힘들Powers of Horror>) 그녀에게 어머니의 몸-'비체'는 전외디푸스적 영역에 한정된 몸이 아닌, 상징계의 경게를 가로지르며 상징질서를 위협하는 '공포의 힘'을 상징한다. 크리스테바는 이 무의식적인 힘은 오직 시적 언어를 통해서만,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경계 위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한다. 크리스테바가 가리키는 ‘모성적 육체’가 실제하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인지(유물론적), 혹은 우리가 비천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인지는(문화적) 정확하지 않다. 다만 오늘날 퀴어/페미니즘 이론의 관점에서,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개념의 무분별한 확장 또는 식민화라기보다, 차라리 비체 개념으로 설명될 수 밖에 없는, 처음부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내재하고 있던 무수한 증상과 징환이 폭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우리의 다치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Precariousness은 이제 자신의 존재 양식 자체를 기존의 세계에서 분리하고 그것의 ‘바깥에서’ 새로운 윤리를 구축하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서 ‘슬픔sad'와 ’아픔sick'을 중심으로 주체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몇 명의 여성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오드리 월런Audrey Wollen의 ‘슬픈 여자애 이론Sick Girl Theory'와 요한나 헤드바Johanna Hedva의 ’아픈 여자 이론Sick Woman Theory‘은, ’이론‘이라는 이름보다는 차라리 (여성주의자들의) 선언Manifesto의 계보에 속한다. 그럼에도 이 ’이론‘이 ’이론‘으로 불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들의 현전/목소리가 ’이론‘을 ’이론‘이라 부를 수 있게 만드는 자격, 즉 남근중심적 로고스와 자본주의의 논리에 분명하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비이성, 비논리, 비자발성의 박탈된 역사와 주체성을 남성적인 것으로부터 탈환하는 대신, 그것을 ’향해서‘ 새로운 윤리와 세계를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왜 이것이 이론인가?‘라는 질문은 반드시 ’무엇이 이론이 되어야 하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슬픈 여자애‘와 ’아픈 여자‘는 자신을 ’이론화‘함으로써, 부정성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프고‘ ’아픈‘ 존재의 양식과 태도를 조직화하려는 시도하는 것에 가깝다.

 

오드리 월런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전시장으로 사용한다. 그녀는 미술사적으로는 권위있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널리 비판받아온 여성의 이미저리들을 차용해,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 ‘셀피Selfie’를 찍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생존의 방법론'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특히 '보기looking'과 '되기being'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방법론이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이용한 작업 방식에 대해서 그녀는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월런은 온라인 존재의 활동이 가진 수행적 측면과 동시에 한 개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월런에 따르면, "진짜Real" 혹은 진정성authentic과 수행performance 사이에는 뚜렷한 이항이 없다. 대신, 예술가는 온라인 활동의 불가피한 측면("매일의 생활daily life"뿐만 아니라)과 기술 및 언어를 통해 주체가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가시화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는 월런의 방법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 SNS를 통한 넘쳐나는 자기 홍보와 자기 과시, 혹은 SNS 없이 어떠한 자아의 구성도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SNS을 통해 ‘생존’한다는 것은 (작가의 ‘찍힐 만한’ 외모, 스타일에 대한 지적은 차치하고서라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조차 비판적으로 재고해야만 하는 서술 아닌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이다. 셀카는 공허를 생산한다.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나 허영심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가 셀카중독을 낳는다...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다.” 이에 대해 월런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 것이다 : 부정적인 나르시시즘, 그것이야 말로 영원히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것이라고. 자기 파괴의 한 형태로서 공허, 허무, 슬픔, 우울은 모두 ‘슬픈 소녀들’에게 부과된 (성차별적인) 지상의 숙명이었다고. 그러므로 월런은 ‘슬픈 소녀 이론’을 통해, 소녀들의 슬픔을 목격하고 이를 저항의 행동, 정치적 저항의 역사로 재탄생시키자고 제안한다. "소녀들의 슬픔은 조용하거나, 약하거나, 수치스럽거나, 멍청하지 않다. 그것은 활동적이고, 자율적이며, 명확하다. 그것은 반격의 한 방법이다."

 

그녀의 프로젝트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종종 병원 가운을 입은 채 통증 관리 센터나 병원에서 패션지 스타일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찍어 올림으로써 자신의 의료 경험을 기록하는 셀피 시리즈이다. 병실에서 셀피를 찍는 것은, 모든 것이 정량화/제도화/수치화된 의료제도의 시스템에서 작은 자율성의 빈틈을 열어준다. 월런은 ‘자신의 삶의 비율을 계산하고 잘라내고 봉합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율성이 없는 인형, 마네킹처럼 취급되지 않는다고 느끼기란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셀피를 통해 자신의 몸을 몇 번이고 기록함으로써, 이를 수행하고 상연함으로써 그녀는 자기 자신이 여전히 예술적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한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비건강’속에 ‘부정적’으로 도취되는 이미지를 전시함으로써, ‘건강’ 개념이 가진 은폐된 남성/백인/중산층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이를 타격하고자 한다. "우리의 증상은 우리의 무기로 변형될 수 있다. 우리의 증상은 힘strength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픈 여자 이론’의 조안나 헤드바 역시 자신의 병을 단순히 낭만화하는 대신 그것-신체라는 ‘고통의 감옥’의 ‘정치적 장소성’을 적극적으로 제안하려 한다. 앤 크베코비치의 우울증에 대한 저술에 영향을 받은 ‘아픈 여자 이론’은, 병을 오로지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현상이자 집단적인 역사적 트라우마의 증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긍정한다. ‘아픈 여자 이론’은 특히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작업들(‘지금 당장 광장으로 나갈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은행 창문으로 벽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조안나 헤드바가 보기에, 한나 아렌트는 몇 가지 ‘사소한’ 것들을 간과했다. 하나는 ‘공공public'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작업에서 간주되는 ’눈에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 사이의 이분법이다. 이러한 이분법에서 ’모든 개인적인 것들(비가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공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침대에 갇혀서 광장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적인 활동에 전혀 참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로, 한나 아렌트는 누가 광장에 들어올 수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주디스 버틀러가 시위에 대해 ’그곳에는 언제나 경찰이 오고 있거나 혹은 이미 있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누군가의 신체는 그러한 상황에서 심하게 보호받지 못하게 될 것이 명백하다. 만일 누구도 광장에 나가 돌을 던질 수 없다면, 그들 신체가 가진 장애, 질병에서 오는 취약함은 어떤 방식으로 정치화될 수 있을 것인가?

 

조안나 헤드바는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질병/장애가 심화되는 일련의 끔찍한 경험들을 통해,  ‘척추에 달라붙어 검은 연기를 내뿜는 작은 악마’가 거주하는 공간으로써의 ‘참을 수 없는’ 몸, 그리고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자신에서 살아남기 위해 ‘병든 여자 이론’을 쓰기 시작했다. “병든 여자 이론은 대부분의 정치적 저항의 방식들이 내면적인 것internalized, 살아진 것lived, 체현된 것embodied, 고통스러운 것suffering,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비가시적인 것invisible이라고 주장한다. 병든 여자 이론은 주디스 버틀러의 취약성과 저항성에 대한 연구를 참조해, 신체에 존재하는 존재를 주로, 그리고 항상 취약한 것으로 재정의한다. 어떤 몸body가 일시적인 영향이 아니라 오직 그것의 취약성에 의해 정의된다는 전제는, 그 몸이 견디기 위해 지속적으로 다른 자원의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을 중심으로 세계를 다시 형성할 필요가 있다. 병든 여자 이론은 몸과 마음이, 특히 우리가 처한 신자유주의, 백인 우월주의, 제국적-자본주의, 시스-헤테로-가부장제의 체제에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모든 몸과 마음이 이것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는 것은 즉, 우리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견뎌낼 수 밖에 없는,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는 몸들(‘동료my fellow spoonies')에게 조안나 헤드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픈 여성 이론의 목적들 중 하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고칠 수 있도록 기관에 의해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저항하는 것이다. 고칠 필요 없어, 여왕님들. 고쳐야 할 것은 바로 이 세상이야.” 우리가 ’슬픔‘과 ’아픔‘을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트라우마로 수용하고 이를 정치화할 것을 요구하게 될 때, ’슬픔‘과 ’아픔‘이야 말로 우리 삶의 토대인 지울 수 없는 타자로서의 취약성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눈물을 충분히 흘려도 좋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흘려도 좋을 것이다. 누구도 일을 하러 갈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절실히 기다리고 오랫동안 지체되어 온 그 ’빌어먹을 명예로운 정지motherfucking glorious halt‘가 시작될 때까지. 세상을 잠기게 하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익사시킬 때까지. 눈물은 흘러야만 할 것이다.  

2개의 댓글

2020.07.03
[삭제 되었습니다]
2020.07.03
@쥬니

ㄹㅇ 들뢰즈 나오면 바로 졸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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