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나의 폐급 이야기 - 13 -

-13- 예방주사

 

한 달 선임들이 단체로 휴가를 나가는 날 이른 새벽.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낮에나 들을 수 있었던 욕지거리에 잠에서 깼다.

 

어휴, 개폐급새끼 하나 때문에 진짜 이게 뭐고?”

송이환 일병의 사투리 섞인 고함이 들렸다. 잠에서 깨면 이미 밖에 나가고 자리에 없어야 할 사람들이 생활관을 뒤적거리며 욕을 하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 반쯤이었다. 휴가 출발 시간이었다. 이미 생활관 사람들이 다 깼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냥 계급낮은 생활관이라 무시했는지 모르겠지만 속으로 , 시발...’ 할 때쯤 누군가 불을 켰다.

 

얘들아, 미안해. 미안해. 우리가 휴가를 나가야되는데 뭘 좀 챙겨야 해서, 미안해!”

 

그날 함께 휴가를 나간다는, 대학물을 먹어서 역시 처음에 고생 좀 했다던 신재형 상병이었다. 조금만 키가 더 컸으면 군대에 오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신병이 들어오면 아무리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갈굼은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 많은 선임들은 한마디씩 얹으며 사람의 마음을 쿡쿡 찌른다. 어려서, 덜 성숙해서, 그냥 그게 재밌으니까, 다들 하니까... 다양한 이유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신재형 상병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대부분의 후임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시발 시발하면서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라는 생각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내 휴가도 아니고, 잠 한시간 일찍 깬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활관에 휴가자들을 남겨놓고 점호를 하러 나갔다.

 

이상했다. 아침점호가 끝나고 일과를 준비하는데도 휴가자들은 부대를 떠나기는커녕 온 생활관을 다 뒤집어엎고 있었다. 이영현 일병의 자리에서 온갖 욕을 하다 지쳐버린 선임들의 푸념 속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군번줄을 잃어버린 듯 했다. 굉장히 어이없고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병사들은 휴가를 나갈 때 반드시 군번 줄을 차고 나가야 한다. 모든 행정이 전산화돼있는 21세기, 군인이라는 신분을 확인하려면 군번줄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내 몸이 오징어가 돼도 신분 확인에 문제가 없는 시대지만 군대는 그들만의 비생산적인 규칙을 철저하게 강요했다. 이해는 됐다. 실제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런 복종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그날 새벽부터 시작된 모든 문제는 이영현 일병이 휴가 보고를 할 때 군번줄을 까먹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3시간 동안 중대 전체를 뒤지면서, 정작 이영현 일병의 사물함 구석에 박혀있던 군번줄을 찾지 못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나 역시 휴가를 2주 정도 앞둔 상황이라, 이 사건은 완벽한 타산지석이 됐다. 이영현 일병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에겐 예방주사와 같았다. 그의 실수는 나의 배울거리가 됐다.

 

이영현 일병은 34일이라는 짧은 휴가를 갔다 온 후에도 꾸준하게 교훈을 줬다. 군대라는 곳은, 특히 육군은 여성인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시대가 어떻고 여군이 얼마나 많은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육군엔 여성인권이 없다. 여군이 일을 못해서가 아니다. 남자가 극단적으로 많고 그들 중 대부분이 갇혀 사는 곳이기에 음담패설로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은데, 당장 그거라도 안 하면 답답해 죽을 것 같다고 여기기 때문에 여군이 있건 없건 그냥 뱉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성 경험의 허세가 만들어진다. 이 허세는 그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 간에는 상당히 중요하다. 진짜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말을 하면 거짓말이어도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도 있는 듯 하다. 물론 그런 발언과 인권의식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나같은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대화에서 주인공이 되려하진 않는다. 방관자의 위치를 유지할 뿐이다. 문제는 나같이 그런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샌님, 폐급이 마치 그런 경험을 실제 해본 것처럼 말할 때다. 이렇게 되면 주변의 반응은 이 새끼 진짠가?’지랄, 거짓말하네의 두 가지로 나뉜다. 사실이라면 괜찮지만, 지어낸 것이라면 어느 쪽이든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 어떤 반응이든 검증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영현 일병은 휴가 복귀 후 첫 작업을 나가는 육공트럭 위에서 최악의 검증 결과를 받았다.

 

, 휴가 나가서 여자 좀 만났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주 우락부락한, 정말 말 그대로 바바리안 같은 체격의 선임이 그에게 말을 꺼냈다.

, 만났습니다.”

, 너 여자친구 없다며!?”

그래서 클럽 갔었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갔습니다.”

~~~~~ 그래? 헌팅했어?”

했습니다.”

, 나는 그런거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되는거야?”

여기서 피식 웃을 뻔했다.

대충 옷 빼입고, 머리 바른 다음에 클럽 가서 만나자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보여준 사진은 밀레니엄, 세기말을 말할 때 유행하던 어설픈 힙합패션이었다.

학교에서 신나게 떠들다 갑자기 모두가 조용해지면 귀신이 왔다갔다고 하는데, 그때 그 트럭에선 귀신도 떠나갔을 것이다.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을 거다.

몇 초간 빤히 이영현 일병을 바라보던 선임은 무거운 한 마디로 대화를 끝냈다.

 

... 그래.”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휴가, 그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가정이 박살나버린 내가 다른 병사들처럼 즐거운 휴가를 보내리란 생각은 안 했지만, 나 역시 만날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 무엇을 하건 대충 얼버무리든지 아예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였다. 그 모든 예방주사를 다 맞고 나서도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나는 휴가를 나갈 수 있었다. 첫 휴가는 내 군생활 반전의 첫 단추였다.

 
------------------------------------------
 
쓰면서 군생활 같이한 사람들과 얘기하며 소재 재발굴 하다보니 내용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5개의 댓글

2020.01.18

재밋다추

0
2020.01.18
@작은투자자

돈은 없지만 재테크 글도 잘 읽고 있어요

0
2020.01.18
@무슨일이여

엄머 감사함니다 🚗 귀여운 자동차콘 선물로 드릴게오 :)

0
2020.01.19

재밌네. 근데 아직도 이등병이면 앞으로 썰 최소 50화는 남았단건가

0
2020.01.19
@하라쇼

지난화인가 지지난화쯤 일병 달았습니다ㅋㅋㅋ

 

대충 33~34 정도 예상해요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408 [역사]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ver2 9 FishAndMaps 6 23 시간 전
12407 [기타 지식] 100년을 시간을 넘어서 유행한 칵테일, 사제락편 - 바텐더 개... 2 지나가는김개붕 0 1 일 전
12406 [기타 지식] 오이...좋아하세요? 오이 칵테일 아이리쉬 메이드편 - 바텐더... 3 지나가는김개붕 2 2 일 전
12405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지구 1부 29 Mtrap 8 2 일 전
12404 [기타 지식] 칵테일의 근본, 올드 패션드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야기 15 지나가는김개붕 13 3 일 전
12403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2부 20 Mtrap 13 2 일 전
12402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1부 13 Mtrap 19 3 일 전
12401 [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完) 1 綠象 0 1 일 전
12400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체포되기까지 28년이... 1 그그그그 6 3 일 전
12399 [역사] 아편 전쟁 실제 후기의 후기 3 carrera 11 4 일 전
12398 [과학] 경계선 지능이 700만 있다는 기사들에 대해 36 LinkedList 9 4 일 전
12397 [역사] 미지에의 동경을 그린 만화 8 식별불해 5 7 일 전
12396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두 아내 모두 욕조에서 술을 마시고 익사했... 그그그그 2 7 일 전
12395 [기타 지식] 서부 개척시대에 만들어진 칵테일, 카우보이 그리고 프레리 ... 3 지나가는김개붕 5 8 일 전
12394 [유머] 웃는 자에게 복이 오는 삶 10 한그르데아이사쯔 7 8 일 전
12393 [기타 지식] 모던 클래식의 현재를 제시한 칵테일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4 지나가는김개붕 2 9 일 전
12392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공소시효만료 11개월을 앞두고 체포된 범인 그그그그 3 9 일 전
12391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범인으로 지목받자 딸에게 누명을 씌우려다... 그그그그 4 10 일 전
12390 [기타 지식] 브라질에서 이 칵테일을 다른 술로 만들면 불법이다, 카이피... 5 지나가는김개붕 1 10 일 전
12389 [기타 지식] 럼, 라임, 설탕 그리고 다이키리 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 2 지나가는김개붕 6 11 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