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나의 폐급 이야기 -12-

-12-

 

자대 전입 후 한 달이 좀 넘은 뒤 진급을 했다. 일병이 될 즈음의 나는 아주 약간, 정말 미세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최소한 사람 이름은 다 외웠고 주특기도 어느 정도 외웠다. 완전하진 않지만 할 일은 할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폐급 딱지는 떼지 못했다. 하급자가 알아서 잘해야 하는 군대문화는 아직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알아서 잘 하는 것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포함돼있었다. 특정 상황에서의 언행 같은 아주 세세한 것부터 훈련을 위해 과자나 음료수를 챙기는 일까지 뒤죽박죽이었다. 차라리 매뉴얼처럼 정리가 돼있으면 외우기라고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항상 혼나는 날이 많았다. 진지공사를 하고 들어왔던 그 날도 그랬다.

 

, 일과 끝나고 들어갈 때 크게 인사하라고 몇 번을 말하냐?”

죄송합니다.”

적당히 상황 잘 봐서 그냥 크게 말하라고! 그게 어려워? 하기 싫어?”

아닙니다.”

근데 왜 안 해? 이유나 좀 들어보자!”

 

그 말을 할 타이밍을 잴 수가 없었다. 그게 이유였다. 그동안 계속 혼나기만 했기에 괜히 혼자 끙끙앓고 있던 거다. 모두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타이밍이 아니면 또 왜 인사를 그렇게 하냐고 혼날까봐, 다른 이유로 꼬투리를 잡힐까봐 걱정됐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더 혼나기만 할 것 같았다. 답답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날 혼내던 송 상병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그냥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군대가 늘 그렇듯, 소대에서 혼나고 생활관에 들어가면 생활관 선임에게 혼나게 돼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이영현 일병이 나를 불렀다.

 

, 니 일로 와봐라.”

.”

니 일과 끝날 때 인사하는 법을 모르나? 진지하게 묻는거다.”

잘못 들었습니다?”

인사를 왜 안 하냐고 묻는거다. 하는 법을 모르는 건지 뭔지 말해보라고.”

 

순간 고민했다. 그동안 쌓인 경험상, 그냥 혼낼거면 혼만 내지 이렇게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문제는 소대 선임한테도 제대로 말하지 않은 걸 이 사람에게 말하면 그게 내게 어떻게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거였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나 그렇지만 특히 군대는 정말 소문이 빠르게 돈다.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단 한 번 소문이 나면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그 소문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하급자들이다. 특히 나처럼 폐급으로 찍혀있는 사람이라면 그 소문이 거짓이라도 해명할 기회조차 갖기 어렵다. 그게 무서웠다. 그렇다고 하기 싫어서 안 한다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아니, 대답을 하라고. 지금은 혼내는 게 아니라 물어보는 거다.”

 

말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대답을 생각하는 시간이 어색한 침묵으로 느껴질 즈음이었다.

 

[ 행정반에서 전파합니다. 00 일병은 지금 즉시 행정반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

 

가봐라. 다음부턴 일과 끝나고 들어올 때 꼭 인사해라.”

. 알겠습니다.”

 

행정반에선 그동안 혼나느라 잊고 살던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행보관은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며, 밖에 있는 공중전화를 쓰라고 말했다. 별로 좋은 얘기가 아닐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통화는 그 확신 그대로였다.

 

여보세요?”

, 그래. 아들 밥은 잘 나오니?”

 

최근 1년 간 단 한 번도 이렇게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혐오스러웠다. 전화 통화였는데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오는 살의가 느껴졌다. 그 말은 곧 내게서 얻어낼 것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건 당연히 어머니의 위치였다. 평범한 가족처럼 물어볼 말은 통화를 시작한지 1분도 되지 않아 다 떨어졌다. 다른 가족이었다면 일상이야기를 하며 하소연하고 서로 아쉬운 담소를 나누면서 1020분 시간을 보냈겠지만, 우리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위치를 묻는 질문은 더 부자연스러웠다.

 

혹시 엄마 어딨는지 알려줄 수 있니?”

안돼.”

아빠가 엄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안돼. 그런 얘기할 거면 그냥 끊을게요.”

아니, 부모를 못 만나게 하는 자식이 어딨냐?”

 

아버지의 인내심은 정말 얕고 앝았다. 너무나 얕았다. 제대로 숨기지도 못한 본심은 겨우 두 번의 대답으로 바닥을 보였다.

 

솔직한 얘기로다, 니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냐? 세상에 부모를 못 만나게 하는 자식이 어딨냐! 그냥 한 번 얘기만 하고 싶다니까?”

 

예전에는, 정말 예전에는 딱 한 번 얘기만 하고 싶다던 말을 믿었었다. 9달 전 쯤 이었다. 그 당시 나는 100여일 앞으로 다가온 고시 1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못 이겨 집을 나갔지만 자식들과의 연락은 끊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도 당신이 안전하면 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면서 학교 주변 자취방을 계약해놓고 공부를 할 만큼의 생활비까지 주고 떠나셨다. 연락은 하되, 당분간은 어디있는지 찾지 말라는 말이 매우 불안했지만 연락이 됐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상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큰 안정을 줬다. 그렇게 공부를 한지 두 달 째, 혼자 저녁을 먹는 도중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 아들. 오늘 친구랑 볼일이 강원도를 갔는데 일이 잘 됐어. 그래서 기분 좋아서 아들한테 말하고 싶어서 전화했다.”

무슨 볼일요?”

친구한테 돈을 빌리러 갔는데 일이 잘 됐어. 시간되면 주말에 한 번 집에 와라.”

... 상황봐서 갈게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이상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돈을 빌린 게 아니라 어머니를 잡았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내가 멍청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돈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 사업을 처분한데다 아버지 택시까지 처분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더 늦게 팔면 면허값이 떨어진다며 망할 년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이를 바득바득갈면서 굳이 팔지 않아도 되는 택시 면허마저 처분하기로 한게 몇 달 전이었다. 내게 당장 생활비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서 돈이 모자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유모를 불안감에 빠져있을 때,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병원에 잠깐 들렀을 때 흥신소 직원을 끼고 있던 아버지에게 붙잡혔다는 거였다. 미쳐버리는줄 알았다. 내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그냥 기다리기로, 나중에 내가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만 그렇게 하고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거였다. 그러니까 흥신소 직원까지 써가며 그 난리를 친거겠지.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각인한 날이었다. 전화를 하며 그 기억이 스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내 앞에서 약속을 다 지킬 것처럼 상냥하게 말해도 그 속엔 이유모를 복수심만 가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줬다. 이런 일을 해놓고도 어머니가 어딨는지 물어보는 게 맞냐고 따졌다.

 

애새끼 대학물 먹여놔야 아무 소용없구만. 니가 사람이냐? 등록금에 생활비 뼈빠지게 내준 대가가 겨우 이거냐?”

 

과거와 다른 점은 내게 선택권이 있다는 거였다. 그 모든 헛소리가 지겨워질 때 나는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나와의 통화가 단서를 얻어낼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욕에 욕을 하면서도 본인이 먼저 전화를 끊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입대하던 날처럼, 나 역시 소리를 지르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미 관심병사였던 내가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자 타 소대 선임이 나를 비꼬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사람은 내 사정을 모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그 사람의 사정을 모르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때부터 2~3일 간격으로 부대에 전화를 걸어댔다. 이쯤이면 간부들이 신경을 쓸 법도 한데, 정작 소대장, 부소대장을 제외하면 뭐가 문젠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냥 문제가 있네라는 인식이 전부였다. 반복되는 전화에 순간 이성을 잃고 화를 내면 언젠가부터 송 상병은 그걸로 또 나를 혼냈다. 다른 건 내가 잘못해서 그런거였지만, 이 부분은 정말 힘들었다. 군생활엔 점점 적응해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점점 더 피폐해져갔다. 그렇게 첫 휴가가 다가왔다.

 
-----------------------
 
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3개의 댓글

어휴 이번 글은 읽으면서 맘이 아프네...

 

 

0
2020.01.12

알아서 잘하는게 잘 안된다는 사람들한테

자주 해주는 말이 관심차이다 라는 말임.

누가 그 상황에 주변사람에 더 관심이 많은가에

센스의 정도가 갈리는 것임

0
2020.01.13

더써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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