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독일 근현대 산책] 3. 「나폴레옹 시대」의 종언

 

 

 

 

프로이센 지배층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은 나폴레옹에게 겪은 패배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부 유럽에서 프로이센의 입지를 이전보다 단단히 굳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프로이센은 군사력만 강한 별 볼일 없는 이류 국가에서 정치·행정·문화 모두 고르게 발전한 근대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거기에 더불어 국민들의 의식 측면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 의해 접하게 된 민족주의 정신에, 애국심 고취를 위한 호엔쫄레른 가문의 노력이 합쳐지면서 독일인들은 비로소 민족의식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라는 조국이 있는 것처럼 독일인에게도 독일이라는 조국이 있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특히 신성 로마제국이라는, 독일인들을 묶어왔던 최후의 울타리마저 멸망하고 나자 통일 독일의 건설은 더없이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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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원정 중 보로디노에서의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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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과 불타는 스몰렌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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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퇴각하는 프랑스군.>

 

 

절치부심하던 프로이센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12년 겨울, 무적으로 여겨졌던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가 러시아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돌아오자 독일인들의 애국심은 불꽃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죠. 18132월 프로이센의 주도 하에 혁명 프랑스를 꺾기 위해 다시금 전 유럽이 연합하여 6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고, 1813317일에 프로이센은 혁명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같은 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1797~1840)나의 국민들에게(An Mein Volk)라는 친서를 발표해, 프로이센 국민들은 물론 모든 독일인에게 나폴레옹과 혁명 프랑스에 맞선 투쟁에 함께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이제 프로이센의 역사가 과거와는 달리 프로이센 국민들의 손에 의하여 직접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했고, 나아가 프랑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모든 독일인을 결집시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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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3(1797~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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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국민들에게(An Mein Volk)>

 

 

이 시기에는 귀족·지식인·수공업자 등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나폴레옹에 맞서는 해방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중적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위나 계급에 상관없이 무언가를 함께 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각지에서 해방전쟁을 위한 자원입대자가 줄을 이었고, 여인들은 반지 하나·옷감 한 장까지도 군비 조달을 위하여 기꺼이 헌납했습니다. 프랑스와 싸우면서 독일인들은 처음으로 독일이란 무엇이고, 독일인이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신성 로마제국은 멸망했지만 독일인들은 다시금 통일된 독일인들의 나라를 원했으며 해방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18131016, 라이프치히에서 혁명 프랑스군과 대프랑스 동맹군 간의 운명을 건 일전이 벌어졌습니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22만 명, 프로이센의 블뤼허 공작이 이끄는 동맹군이 38만 명으로 양군 합쳐 60만 명이 넘게 투입된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최대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전투의 양상은 수적 열세에 놓인 데다 본국으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하기 힘든 나폴레옹에게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죠. 동맹군은 나폴레옹을 꺾을 수 있다는 기대 속에 맹공을 거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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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전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주특기인 천재적인 포병 운용술을 십분 발휘,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기병돌격이 프랑스군 보병 전열을 직접 타격하자 전투의 균형추는 급속히 동맹군 측으로 기울었습니다. 지난 러시아 원정에서 기병 전력을 잃어 반격할 수 없었던 프랑스군이 동맹군의 기병돌격으로 큰 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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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나폴레옹의 곁을 끝까지 지킨 바르샤바 공국(폴란드)군 기병대. 이들 바르샤바 공국군은 나폴레옹에게 협력하면 폴란드 민족의 나라가 재건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최후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하였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폴란드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1일이 되어서야 재건됐다.>

 

 

라이프치히 전투의 승패는 1018일에 완전히 결정됐습니다. 이미 거세게 불타오른 독일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자기들이 어느 나라의 국민이어야 하는지를 자각한데다, 굳이 몰락하는 나폴레옹의 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던 라인 연방군이 프랑스군 전열에서 도망쳐 동맹군에 합류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동맹군은 오히려 전투가 시작됐을 때보다 인원이 늘어나 43만 명을 헤아린 반면 나폴레옹에게는 이제 고작 15만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1019일 프랑스군이 전투를 포기하고 라이프치히에서 퇴각함으로써 한 시대의 운명을 건 전투가 동맹군의 승리로 종결됐습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거둔 대승의 여세를 몰아 대프랑스 동맹군은 1814년 봄, 드디어 혁명 프랑스의 심장 파리에 진격함으로써 변화와 격동으로 가득 찼던 나폴레옹 시대가 막을 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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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최후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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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입성하는 러시아군.>

 

 

이제 독일인들은 해방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남은 일은 통일 독일의 건국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의 여신이 독일에게 미소 짓는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의 일이었죠. 나폴레옹 시대의 종언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비인 체제 하의 비더마이어 시대라는 반세기 동안의 반동적 고착상태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무엇으로도 결코 막을 수 없는 법입니다.

12개의 댓글

2019.12.10

꼭 역사다큐보는 기분이네요

0
2019.12.11

항상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0
2019.12.11

진짜 재밌어요. 시간잘가고 지식채워주고 흥미롭고 최고인듯.

질문하나 드리고 갑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의 독일은 통일을 염원하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각 독일의 제후국? 국가들? 은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 지 또 왜 빈체제 하나로 독일 통일의 걸림돌이 된건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독일 통일의 출발 신호탄을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의 만남으로 봐도 무방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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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키시구루

그건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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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Volksgemeinschaft

현기증나요!! 미친다 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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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역시 민족의 성립은 언어나 문화가 아니라 전장에서의 투쟁이었던 것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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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서로마 멸망이후 이탈리아를 다뤄볼 생각 없음? 서로마가 몰락하고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지기까지 그 역사가 텅 빈거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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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소소한 오타 발견입니다. 「그랑 다르메」 => 「그랑드 아르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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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이스F91

제가 프랑스어는 잘 몰라서..저는 그랑 다르메라고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그랑드 아르메라고 쓰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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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Volksgemeinschaft

좋은 글 써주시는데 살짝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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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이스F91

고마워요 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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