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지 않는 까닭

105486_35211_1458.jpg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속세를 초월한 그들의 유유자적함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청담(淸談)은 맑은 담론이란 뜻으로 위진남북조 시절의 중국을 견인한 사상을 이르는 말이다. 무엇이 맑으냐 : 바로 청담이 다루는 주제가 맑다는 이야기다.

 

청담 사상이 등장하기 이전의 중국은 어땠을까? 한실을 지배한 이념은 단연 유학이었으나, 그 세월이 오래되어 유교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지배 체계가 한계를 맞이하고 만다. 유가가 말하는 충의니, 효도니 하는 것들이 연일 벌어지는 전쟁 앞에 무슨 소용이 있었던가. 군벌이 난립하고 신민들은 터전을 잃고 유랑하는 대혼란의 시기, 수습이 필요할 때 유학은 지나치게 명분주의와 교조주의에 치우쳐 형식 따지기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250px-Yuan_Shao_Portrait.jpg

<자칭 기주목 원소(袁紹), 본초(本初). "천하에 힘 있는 자가 어찌 동 공(董 公) 혼자 뿐이겠소!" 즉 패도의 시대를 여는 한 마디였다>

 

당시는 아비 셋을 가지는 후레 놈이 있는가 하면, 천자를 등쳐먹는 고자 밑에 양자로 들어가는 놈, 황제를 참칭하고 거리낌 없이 천하의 주인 행세를 하는 놈 등등 잡놈 투성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잡놈은 바로 사세삼공 명문가의 원소다. 이 자는 6년상이라는 기행으로 널리 이름을 떨치는데, 기행이라 불릴만큼 내막이 해괴했다 : 원소는 얼자(= 천민 첩에서 난 자식)에 불과한 몸으로 아비를 일찍 여의어 원술의 집안에 입양 되어 살았다. 어느 정도 자라 얼자 치고는 벼슬도 제법 하던 원소였으나, 때마침 원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원소가 나서서 3년상을 지내기로 한다. 그러나 탈상하자마자, 얼굴도 본 적 없는 친부께서 돌아가시고도 곡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년상을 추가로 더 지냈다고. 그리하여 6년에 걸친 장례를 치르니, 이 같은 짓에 전국의 선비들이 열광하여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원소는 이 때 뜻 있는 인재들을 많이 알게 됐고, 훗날의 기반으로 삼는다. 상을 다 지낸 후의 원소가 보인 행보는 더욱 가관인데, 환관들이 도사리는 낙양으로 가서 청류파 선비들을 대변하며 십상시들에 대항했단다.

 

생각을 해 보자. 청류파란 황제의 눈과 귀를 막고 전횡을 일삼는 환관들에 반해 간언과 위민애국하는 선비들을 칭하는 당대의 개념으로, 당연히 환관들의 눈 밖에 난 존재들이다. 환관 세력은 이들이 정론과 시의적절한 비판을 가하자 금고형에 처하는 등으로 숙청하고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런데 원소가 어디 출신이라고? 맞아, 사세삼공의 영광에 길이 빛나는 여남 원씨 집안이다. 탁류가 지배하는 정치판에서 최고위 관료인 재상이 되려면 독야청청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원씨야말로 환관들에게 4대가 지나도록 붙어먹은 구적들이란건데, 이제 원소가 청류파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이게 말이나 될 소린가? 선비들의 눈을 멀게 한 6년상 사건도 문제다. 원소 본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원술의 친모를 위해 장사를 지내는 것, 그리고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장례를 치르는 것이 과연 순수히 부모를 공양하려는 마음에서 비롯했을까? 그리고 이 일이 전국의 사대부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는 결과를 낳는데, 과연 우연인가? 나처럼 불민한 사람도 다 아는 사실을 당대 선비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결국 당시의 시대관에서 유교적 가치란 경전에서 말하듯 진정코 인간 교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게 아니요, 허울과 형식만 따지는 도구였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례라 하겠다.

 

00501425_20190220.JPG

<무황제 조조(曹魏), 맹덕(孟德). 시대의 풍운아였던 그를 수식하는 절묘한 말은 "난세의 간웅"이었다>

 

비단 관념적인 타락만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 또한 유교를 기반 삼는 통치 체계에 경종을 울렸다. 이 제도는 한나라 시절 운용되었던 인재 채용 제도인데, 골 때리게도 사람을 뽑아 쓰는 기준이 바로 "윤리" 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현장의 여론 등을 조사해 "아무개가 효행이 깊다더라", "아무개가 의협심이 있다더라" 하면 추천하는 식. 이 따위로 일이 진행되니, 중앙 정계에 오르는 사람은 전부 지방 호족 등 유력 가문의 자제들 뿐이고, 제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 한 들 연줄 없고 돈 없으면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조조는 그 자신이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향거리선의 폐단을 잘 알아서인지 훗날 구현령을 내리면서 "불인불효해도 좋으니 능력 있는 자는 모두 쓰자" 고 발언해 당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조조 사후 조비가 뒤를 잇자, 진군이라는 자가 향거리선제의 폐단을 없애고자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제창해 올린다. 중앙에서 임명한 심사관인 중정이 지방의 유명인사들을 9등급으로 평가해 상주하면, 정부에서 등급보다 낮은 단계의 직책을 내려 맛보기로 일을 시켜본 다음 본격적으로 임용하는 제도다. 그런데 인재를 천거하는 기준이 또 "윤리"다. 이러하니 향거리선의 폐단은 그대로 답습해서, 중정과 토호들이 유착해 빽 있는 집안 사람들만 높은 품평을 받는 등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즈음해서 나라 전체에 귀족정의 기풍, 귀족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출세하고 싶어? 그럼 금수저 물고 태어나.

 

훗날 하후현이 이와 같은 구품관인법의 해악을 지적하고 나섰지만, 개혁까지 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실권자였던 사마의가 중정을 자기 사람들로 앉혀놓고 인적 네트워크를 장악함으로써 대세를 좌우했기 때문. 사태가 이러하니 정치철학에 집중하는 학문인 유학이 난세를 끝내지도 못하고, 가르치는 바가 모두 허황되어 유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47760ff529434bf68e9f4b22f392140a.jpeg

<하안(何晏), 평숙(平淑). 기행을 자주 벌여 사람들로부터 신선이라 불리웠던 사내다. 마땅한 화상이 없어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의 등장인물로 대체>

 

이런 상황에서 사대부들이 관심을 쏟은 것은 현학(玄學)이다. 노장 사상에 그 뿌리를 두는 현학의 큰 특징은 바로 무형(無形)을 지향한다는 점. 때문에 위 말엽으로 가면 아예 유교의 형태적 특징인 인성 수양과 정치중심적 성격의 학문은 버려지고, 세상을 구성하는 역(易)의 이치, 만물에 내재한 도(道)의 탐구에 몰두하는 학문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는 하진, 동탁, 왕윤, 이각 · 곽사, 조조에 이르기까지, 역대 내각들이 난세를 일으키고 종결시키는 등 유학적 정치모델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자, 당대 식자층들이 일련의 사태를 관장하는 초월적 원리가 있을 것이라 상상하고 연구한 데서 비롯한다. 특히 하안이 대성했는데, 그는 오래도록 도가에 심취해 깊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하안은 기존의 현학자들과 달리 「주역」을 중시해 이전까지 사람들에게 점술서 이상의 기대를 받은 적 없던 역경(易經)에 궁극적인 이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이 곧 노장 사상에서 말하는 무(無)와 같은 것이고, 그 안에서 모든 게 생겨난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그러므로 대저 정치를 함에 있어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지향해야 함을 설파한다. 나아가 그는 현학을 그 자체로 향유하는 것을 넘어, 현학을 기초로 유교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달아댔다. 괴력난신을 배격하는 유학자 입장에서 세상의 원리나 변화무쌍한 인간사의 원인을 설명하는 등, 형이상학적인 사고는 꽤나 낯설었기 때문에 하안의 해석은 경전을 바라보는 관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로써 그는 훗날 청담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을 얻게 된다.

 

대장군 조상이 정권을 잡으면서 조상의 당여였던 하안도 벼락출세했다. 그가 앉은 자리인 이부상서는 구품관인법의 영락으로 중정들에게 입김이 가장 세게 들어간다는 바로 그 이부상서로, 인사권을 꽉 쥔 노른자 중의 노른자 자리였다. 하안은 사마씨가 잡고 흔들던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인사 조치에서 벗어나, 자신이 새롭게 세운 "무위적 원리"를 기준으로 인재를 뽑아 올렸다. 이로 인해 위 말기의 정치판은 사마씨 일파와 조씨 일파로 나뉘어 대립 구도를 보였는데, 대체로 구신 · 능신은 사마의와 함께했고, 신출내기들이 조상의 편에 섰다. 당연히 하안을 필두로 그가 추린 인재들 사이에 도가적 논리의 유학을 중시하는 풍조가 감돌았을 것이다.

 

249년 고평릉 사변이 발발, 정국의 파워 밸런스는 뒤집히고 노망난 사마의는 끝장이라며 득의양양하던 조상 일파는 모두 역적으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하안, 하후현 등 기존 유학 체계에 반발하던 이들도 삼족을 토멸 당하고 몰락했다. 그러나 하안의 공부법만큼은 살아남아 이후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news1232514655_143025_3_m.jpg

<죽림칠현도. 다들 독특한 개성을 가진 현인들로 이름 날렸으나 구태여 소개할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

 

어린 황제 조모는 진작에 수술 당해 사마소의 손아귀에서 놀아났고, 정국은 그의 의중대로만 흘러갔다. 누가봐도 충신일 수가 없는 사마씨에게 굽혀야만 출세하는 상황에서, 재야의 유학하는 선비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결국 그들은 살 길을 찾아 현학에 더욱 몰두하니, 정사에 뜻을 두지 않고 철학적 논쟁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죽림칠현은 당대의 선비들이 취한 스탠스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대의 아이돌이다. 이들이 대숲에 앉아 나눈 이야기가 바로 청담으로, 정치적 현안 같이 탁한 주제는 배격하고 철학적이면서 오묘하고 고상한 주제만 다루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은 "도는 자연을 따라서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군주가 도를 지키면 이로써 만물이 스스로 조화를 이룰 것이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는데, 확실히 유자였던 공융이 "조조, 네가 양표를 죄 없이 죽이려 드니 천하 재사들이 너를 향해 입조할 것 같으냐?" 는 식으로 맹렬히 비판했던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공융이 결국 조조에 의해 목이 달아난 것에서부터 보여지듯, 죽림칠현의 처세는 신변의 위협에 대처하는 선비들 나름의 방책이었다.

 

죽림칠현의 행실은 하안이 가져온 파급효과만큼이나 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상중에 고기를 뜯고 음주가무를 하질 않나, 옷가지를 벗어재끼고 백주대낮에 활보하질 않나, 흡사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에 비할 만큼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던 유교적 질서를 뒤흔드는 짓을 행한 까닭은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함이었단다. 죽림칠현으로 꼽히는 인물들이 하나 같이 기인으로 보여도, 고도의 논변술로 무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장하는 바를 들어보면 얼토당토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고. 그렇게 함으로써 죽림칠현은 허례허식을 관습적으로 종용하는 유학 사상에 파란을 일으키고, 교조주의적 · 획일적 사고관에서 벗어나 사상적 다양성을 배양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긴, 그 정도 구실도 없이 막무가내로 굴었다간 추앙받기는 커녕 미친놈 소리나 들었겠지.

 

이들이 술 마시고 금 타면서 숲속 친구들 놀이를 했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까짓 거, 모여 놀거면 저들끼리 즐기면 그 뿐이지, 거창하게 떠들어서 어그로를 끌어야 할 이유가 뭘까? 바로, 사마씨 정권에 결코 가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 그것이다. 청담을 논하던 죽림칠현은 비록 늘 술에 취해 있는 꼴을 하고 선문답이나 외며 유학을 도외시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실제로는 유교를 국시로 삼는 사마씨 정권에 대한 저항을 목적으로 행한 처세였을 뿐, 누구보다 유학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죽림의 우두머리 격인 혜강은 "탕무와 주공을 깎아내린다"는 그를 향한 종회의 탄원에서 보이듯 오히려 유학적 지식이 대단했다 : 상 탕왕, 주 무왕은 역성혁명의 주역들이고, 주공은 어린 임금의 섭정을 했던 자이며, 공자는 선양의 아름다움을 칭찬한 바 있어 탕/무/주/공을 비판함은 곧 사마씨의 제위 찬탈에 대한 고사적 정당성을 빼앗는 조처에 다름 아니다. 그가 죽던 날 태학의 유생들 300인이 몰려와 이런 선비는 죽일 게 아니라 오히려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며 구명을 청했을 만큼, 혜강은 뼛속깊이 유자였다.

 

즉, 죽림칠현은 청담의 기조를 일으키며 그 제일 과제를 "개인주의의 자각 및 사유의 개인화"와 "사마씨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삼고 몸소 청담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식자층이 열광하는 것도 당연지사. 유교의 정신(= 忠)을 배격하지 않으면서, 유교가 배려하지 않는 정신적 규격화를 탈피하고, 유교로 인해 생긴 구습을 무너뜨려주니 그야말로 유학자들에게 등불 같은 테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사마소는 향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작은 혁명을 묵과하지 않았다. 그는 종회의 고변을 즉각 받아들여서 혜강을 불효죄로 처형해버리는 것으로 죽림칠현의 조직적인 움직임을 분쇄해버렸다. 사실 죽림칠현은 꼭 7명이서 같이 논 것도 아니고, 동시기에 논 것도 아니며, 동일한 지역에서 논 것도 아니어서 이들은 금방 와해되었다. 결국 청담 사상의 중요한 테마인 "저항 정신"은 이 때를 기해 소멸한다. 제 아무리 자유로운 생각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었다.

 

sunhak021.jpg

<김홍도, 신선도. 자유의 표상인 신선도 신선 그 자체의 이미지로부터는 벗어나지 못 했던 것인가>

 

저항이 빠진 청담에 무엇이 남았을까? 근본적으로 현학이 그 시초인 청담은 실질 세계와 거리가 먼 공리공론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결국 유용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경우가 없었다. 이는 청담을 처음 시도한 하안, 죽림칠현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에서 비롯한다. 그들 모두 허세충이었던 게 문제다 !
 

하안은 어머니가 조조에게 재가하면서 조조네 집에 얹혀 살며 양자처럼 컸다고 한다. 그는 총명하여 조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후일 조조의 딸과 혼인해 부마에 오른다. 그러나 하안의 방탕한 면모를 싫어한 조비와 조예가 관직을 임명하지 않아, 기나긴 백수 생활을 보내야 했다. 나처럼 없는 집 자식이야 백수면 그런가보다 하며 살겠지만, 하안은 귀족 중의 귀족 아니던가. 귀족사회에서의 위신이 갖는 가치를 생각한다면 하안이 얼마나 초조했을지 이해가 된다. 이에 하안은 학문을 닦는 것으로 출세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가린 것 같다. 마치 자신에게 출세욕은 없고 그저 노장학에 대한 관심만 있다는 식으로 언플을 펼쳐서 체면치레를 하는 거지. 이윽고 조상의 집권으로 기회가 오자 사마의를 태부로 올려 봉인해버리고 본인은 이부상서가 되어 전권을 휘두르는등, 하안이 말년에 보여준 모습을 보면 그의 학문하는 태도는 별로 진실되어 보이지 않는다.

 

죽림칠현 또한 문제가 많은 놈들이었다. 사마씨의 횡포에 은둔으로 저항하겠다는 식의 명성을 쌓았으나, 결론적으로는 사마씨 내각에 출사해 한 자리 해 먹기 때문이다. 산도와 왕융은 사도(= 재상), 상수는 산기상시(= 경호실장), 유령과 완적은 참군(= 참모), 완함은 태수(= 도지사)직을 역임했다. 혜강은 비록 사마씨 조정에 출두한 적은 없지만, 조조의 손녀사위인 몸으로 출세길이 막혀있었을 뿐더러, 일찌기 중산대부(= 제후)였다. 혜강이 사형에 처해지면서 결국 시류에 편승해 고위직에 종사했으니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혜강의 아들 혜소가 훗날 천자 사마충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으로 볼 때, 혜강 또한 진심으로 청담을 실천하고 가르쳤는지 의문).

 

청담류 대선배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바로, 이들이 모두 마약사범이었다는 점이다. 하안이 유행시켰다는 오석산은 다섯가지 광물을 섞어 만든 가루약인데, 배합법은 저마다 다르지만 명백히 "기분 좋아지는 약"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석산에는 땀을 내고 기운을 북돋워주며 피로감을 싹 몰아내는 약효가 있다고 하나, 그 때문에 오석산을 먹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바깥을 쏘다니며 옷을 벗어재끼거나 약기운에 취해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등 해괴한 짓을 일삼았다. 하안은 약 때문에 피부도 연약하고 창백하게 됐을만큼 오석산을 장복했고 주변 상류층에도 마구 권했다. 그 결과 오석산은 마치 고위 관료들만 향유할 수 있는 고급 아이템처럼 인식되었다. 오죽했으면 돈이 없는 사람은 오석산을 먹은 흉내를 내기 위해 일부러 대낮에 웃통 까고 약에 취한 척 했을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이런 자들이 청담을 시대의 해법처럼 떠받쳐 왔으니, 후학들이 금자탑 속에 갇혀 허세 놀이에 빠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귀족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가세해 청담을 기괴하게 비틀었다. 청담의 신비주의적이고 염세주의적인 색채가 귀족들에게 전해지자, 이 분위기에 심취한 나머지 자기들끼리 확대 · 재생산하면서 별 시덥잖은 모양새를 자꾸만 더한 것이다. 사유의 자립을 추구하는 청담에 룰을 추가하는 행위가 그러한데, 그야말로 청담의 본래 취지를 완전히 박살내버린 처사다. 이로인해 청담도 규격화가 진행되었으니, 황당무계한 노릇이다.

 

진나라 당시의 청담은 1. 청담하는 자가 자격 제한에 통과해야 했다 : 귀족 자제가 아니면 끼지도 못하게 했다. 2. 청담하는 장소에 신경써야 했다 : 경치 좋은 곳의 정자나 연회장이 필요했다. 왕희지는 연못을 파고 손님들을 초청해 청담을 논했을 정도. 3. 청담 회장에 소도구들도 지참해야 했다 : 향로나 작은 풍경(風磬), 지팡이, 부채, 거문고, 먼지떨이 등등 들고 흔들거나 사용하면 마치 신선 분위기를 낼 만 한 예장용품을 갖고 와 장단을 맞춰야 했다. 4. 반드시 파격적인 주장을 다뤄야 했다 : 얼핏 듣기에 고상하고 놀랍기만 하면 장땡이었다. 굳이 논리적일 필요도 없었고, 대충 수습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001.jpg

<팔선도(八仙圖). 신선이라는 탈속적이고 신비스러운 존재가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까닭은, 그만큼 속세가 어지러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렇듯 허례허식에만 집착할 뿐 심원한 의미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청담이 엘리트 계층에 널리 퍼지자, 사회적으로는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놀이를 멋으로 아는 자들이 관직에 오르는 문제 말이다. 청담이 왜 청담인가, 속세를 멀리해서 청담 아니던가? 그런데 청담하겠답시고 개폼 잡는 작자들이 벼슬을 하니 희한한 일들이 생긴다.

 

연못을 파고 놀았다는 왕희지의 아들 왕지는 말 기르는 일을 맡은 주제에 자기 임무도 몰랐다. 상관이 "네 일이 뭐니?" 라고 묻자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끌었다 놨다 하는 걸 보니 말 타는 건 아니고, 말 돌보는 일 같네요." 라고 답 했단다. 다시 상관이 "지금 군영에 말이 몇 마리지?" 라고 물었지만 "그건 말 기르는 사람한테 물으십시오. 저는 마굿간에 가 본 적도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 상관이 "야 요즘 병이 돌아서 말이 자꾸 죽는댄다. 몇 마리나 죽었냐." 라고 묻자,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왕연은 노자를 강연하는 자리를 즐겨 열었지만, 매번 경전을 해석함에 있어 말을 바꿔댔다. 그 부분을 사람들이 지적했지만 경구를 제멋대로 수정하는 등 논리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구중자황(口中雌黃)이라 칭했다. 자황은 오탈자를 지울 때 쓰던 노란 물질로, 즉 네 입 속의 지우개라고 부른 것이다. 이렇게 줏대도 없고 말도 이리저리 바뀌는 왕연은 상서령(= 재상)까지 오른다.

 

심지어 양무제 소연은 청담에 심취해 정사를 방치했다가 나라 안의 경제는 파탄나고, 반란까지 초래했다. 양무제는 너무 사치를 부려 집안에 재화가 썩어나는 동생을 보고도 "와, 돈 많네." 하는 게 전부였고, 불교에 귀의하겠다며 자꾸만 절에다가 자기 자신을 노비로 파는 바람에 부하들이 돈 주고 사와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후경의 난이 발발하자 "놈은 내가 채찍만 들어도 찍 쌀 것이야." 라며 한껏 허세를 부려봤지만 나라가 결딴이 나고 말았다.

 

이것은 결코 재미난 일화가 아니라, 그 시대 벼슬아치들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청담하는 자라면 본받아야 할 경지로 여겼다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관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청담 하겠다고 설쳐대니, 성실히 일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기는 풍조가 조정에 만연했다. 당연히 할 일이 별로 없는 직렬에만 사람들이 몰리고, 일은 하위직에 몰아주어 행정적 낭비가 심각해졌다. 왕휘지처럼 제 할 일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허다했고, 그런 놈들이 끼리끼리 뭉쳐 파벌을 형성해 더욱 문제가 되었다.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비천한 것들은 결코 청정한 자신들과 어울릴 수 없도록 가로막았거든. 그래서 능력 있고 열정적인 인재도 귀족들이 장악한 고위직으로 승진할 도리가 없었다.

 

1-1PQ5224219602.jpg

<왕개에게 산호를 보여주는 석숭. 황제가 왕개에게 하사한 산호를 부숴버린 다음, 자기 집에 더 좋은 게 있으니 가져가라고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나마 이들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청담에 임했다면 또 모르겠다. 겉으로는 "세속적인 일"을 마다하던 자들이, 청담질 하며 놀아 재낄 때는 흥청망청 사치를 부려댔으니 말이다. 왕제라는 이는 마굿간 바닥에 돈을 깔아주거나, 사람 젖을 물려 키운 돼지고기를 즐겼고 석숭은 화장실을 침실처럼 꾸며 손님들이 놀라게 하는 등 돈지랄을 있는대로 부리면서 청담가를 자청했다. 한편, 출세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대외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주제에, 정작 높은 관직에 제수되면 부리나케 입조하여 줏대 없이 굴었다. 하안이랑 똑같네 이거.

 

또한 거처는 신선이 사는 곳처럼 꾸미고 늘 신선 같이 보이기 위해 애썼다. 정작 관리 선발을 위해 시험을 볼 땐 미리 경학자에게 문장을 받아오거나 대리 시험을 치게 만드는 등, 본인들 머리에 든 건 쥐뿔도 없었다. 그래놓고 관직에 오르면 다시 신선을 들먹이며 놀았다. 청담이 여기까지 이르러서는 과연 타락해버린 유학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차라리 황제의 권위를 중시하고 예법이라는 기준이라도 지키고자 했던 형식주의 유학이 사회적 질서 유지 차원에서는 훨씬 나았겠다. 앞서 말 한 왕제는 천자 개인 공간인 정원에 마음대로 들이닥쳐서 과일은 다 따먹고 나무는 모조리 베어버렸다. 사마염의 권위가 약한 것도 있었으나, 애초에 청담 하는 놈들은 권력(특히 자기보다 윗 서열인 사람의 권력)을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런 막장짓도 서슴지 않았다.

 

청담의 광풍은 법가적 질서를 기반으로 다져진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겨우 끝이 난다.

 

99CDB4485B3D1C8A25.png

<조지 칼린 meme,  "정치적 올바름은 예절로 위장한 파시즘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에도 청담이 일고 있다. 모든 종류의 사회적 차별을 없애 소외된 계층이 없는 세상을 만든다던가, 동물들의 생명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겠다던가, 자연을 보호해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지구를 물려주겠다던가, 그 정신은 고매한 것을 좇고 있으나, 그 실천은 본뜻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 하는. 청담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는 사상이 우리 곁에 범람하고 있다.

 

소외된 사람들이 없게 하겠다면서, 왜 독거노인, 소년 · 소녀 가장과 고아들, 미혼모,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지 않는가? 동물들이 불쌍하니 먹지도 말라면서, 왜 상대적으로 덜 "귀여운" 동물에 대한 말은 없는가? 환경을 보전하자고 주장하면서, 왜 근대에 가장 환경을 많이 파괴한 선진국들에 대하여 비판과 책임을 논하지 않는가? 전부 돈 때문이잖아.

 

청담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오석산의 마기(魔氣)가 되어 자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사상이 본래 추구하던 정신을 되새기고, 현실 사회의 문제 해결에 주력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청담가는 시대의 등불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61개의 댓글

@시공의폭풍저그콩진호

개드립콘 갯수 제한이네 씁

0

필력도 좋고 사고의 깊이도 느껴지는데 관점이 좀 일방적이지 않나? 저런 청담 사상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학계 내에서도 인정받는 관점이냐? 전공자도 아니고 대중 차원에서 저 시대 다룰땐 전부 다 유교적 관점에서 '정통성 있는' 나라가 망한건 다 청담 사상 탓하는거 같아서 미심쩍던데.

1
@보헤미아식예절교육

맞는 말이야. 전부 청담 탓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이야기가 전부 내 사견이라서 그래 ㅎㅎ; 학계에서 인정받는 관점이냐면 글쎄... 그냥 무식쟁이가 입만 살아서 쓴 글이니 유머라고 생각해 줘 ㅋㅋㅋ;

0
@한그르데아이사쯔

ㅇㅇ 잘 썼음. 난 개인적으로 서양사 전공이라서 그런지 나이 좀 먹고 어릴때 배운 동양사 뒤돌아 보면 유교 문화권 특유의 경제 구조나 인구 자료보다 사상적 경향을 중심으로 특정 시대를 평가하는 경향 이런게 보일 때가 있어서 신기하다.

1
@보헤미아식예절교육

사상사가 어찌 경제사, 인구통계학적 특성과 떨어질 수 있겠어 ㅋㅋㅋㅋ 다들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걸 ㅋㅋㅋㅋㅋㅋ 그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부분에 집중하지 않아 새삼스럽게 보일 뿐이겠지 ㅎㅎ 내 뇌피셜을 즐겁게 읽어줬다면 고마워 :)

0
[삭제 되었습니다]
@세레브민주공원

확실한 역사적 진실이 아니어서 그래ㅋㅋㅋㅋㅋ 그냥 내 생각이라 유머

0
2019.10.08
1
2019.10.12

ㅋㅋㅋㅋㅋ 위진남북조시대가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지

1
2019.10.13

그래서 왜 맑은 물에 고기가 안삼? 갑자기 중국은 왜나옴?

0
2019.10.16

글쓴이 머하는 사람임? 죽림칠현 까지 정독했는데 책한권 분량이네ㅠㅠ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374 [기타 지식] 카우치 사건은 정말 인디 음악을 끝장냈는가? 44 프라이먼 19 23 시간 전
12373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1년마다 1명씩 잠을 자다 사망한 가족. 홀로... 2 그그그그 3 1 일 전
12372 [역사] 송파장과 가락시장 5 Alcaraz 6 1 일 전
12371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괴물을 쓰러뜨렸다." 어머니에... 2 그그그그 3 2 일 전
12370 [기타 지식] 알코올 중독에 빠질 수 있는 칵테일, 브랜디 알렉산더편 - 바... 1 지나가는김개붕 4 2 일 전
12369 [기타 지식] 세계에서 제일 잘 팔리는 칵테일 중 하나, 위스키 사워편 - ... 2 지나가는김개붕 3 2 일 전
12368 [기타 지식] 왜 나는 독일을 포기하고 캐나다로 왔는가 26 상온초전도체 10 2 일 전
12367 [역사] 미국인의 시적인 중지 2 K1A1 12 3 일 전
12366 [기타 지식] 독한 칵테일의 대표, 파우스트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야기 5 지나가는김개붕 2 3 일 전
12365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아무도 듣지 못한 죽음의 비명이 들린 357호실 1 그그그그 6 5 일 전
12364 [기타 지식] 칵테일에도 아메리카노가 있다. 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야기 6 지나가는김개붕 6 5 일 전
12363 [역사] 역사학자: 드래곤볼은 일본 제국주의사관 만화 16 세기노비추적꾼 13 6 일 전
12362 [과학] 번역)새들은 왜 알을 많이 낳는가? - 후투티의 형제살해 습성... 5 리보솜 3 6 일 전
12361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20년만에 해결된 미제사건 4 그그그그 9 10 일 전
12360 [호러 괴담] [미스테리] 고립된 남극 기지에서 사망한 남성. 근데 무언가 ... 14 그그그그 12 12 일 전
12359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문자를 차단했다고 살인까지? 3 그그그그 5 14 일 전
12358 [기타 지식] 미국은 왜 틱톡을 분쇄하려 하는가? 14 K1A1 29 14 일 전
12357 [기타 지식]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칵테일 마르가리타편 - 바... 7 지나가는김개붕 9 14 일 전
12356 [역사] 애니메이션 지도로 보는 고려거란전쟁 6 FishAndMaps 6 16 일 전
12355 [기묘한 이야기] 일본 멘헤라 아이템에 대해서 알아보자 25 Overwatch 17 16 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