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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나는 예수님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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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나의 첫 만남은 좋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처음 간 그곳은 사람이 너무 많았고, 시끄러웠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간절히 외치는 모습이 너무나 무서워서 그 다음 주부터는 가겠다는 말을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지 않다가 초 3 때 집 근처에 있던 가톨릭 성당은 2년 전 갔던 교회보다 조용하고 경건했고 아늑했다. 딱히 좋아서 간 것은 아니었기에 미사가 시작되면 졸기 바빴지만, 미사가 끝나고 문 밖을 나서면 성모 마리아 상과 시선을 마주칠 때 마다 묘한 편안함이 느껴져서 나쁘지 않았다. 성당을 더 이상 다니기 힘들어질 때엔 어머니가 밤마다 주기도문을 외우시며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따라 나 또한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기도의 내용은 처음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기도만 하다가, 나이를 먹고 머리가 어느정도 커지면서 하나님이 굉장히 소극적이신 분이란걸 깨닫고 내가 스스로 내 죄를 반성하고 곁에서 지혜를 갖도록 도와주십사하고 기도했다. 기도가 얼마나 먹혔는지 모르는겠지만 힘든 수험생활을 버티게 해준 몇 안되는 것이었다.

 

  어른의 세계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신의 권능은 무력해졌다. 성경 속 구절은 지혜를 가져다주는 좋은 조언자도 되어주지 못했고, 처음 겪는 고통의 연속들 속에서 예수는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 대신에 조금 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고, 돈이 대부분의 것들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건조한 신념으로 갈아끼웠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선 나도 모르게 젊은 꼰대가 되고 있었다. 한심하고 창피한 모습을 친구들과 가족들 앞에 보이고 말았지만 남들도 다 그런 줄 알고 의식적으로 무시를 하며 지냈다. 그런 삶이 좀 오래되고 나니 어떤 순수함을 본능적으로 찾고 싶었던 것일까,  페이스북에서 잠깐 봤던 한 독립영화의 티저 영상은 내 호기심을 붙잡았다. 결국 일주일 후에 소극장을 찾아가 관람을 했다.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감독이 어렸을 적 예수를 처음 알게된 시절을 조금 판타지를 가미해서 새롭게 창작한 작품인 듯 하다. 그래서 주인공 호시노 유라는 어린시절 감독의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유라가 도쿄에서 시골로 이사하고 처음 접한 예수란 존재는 요술램프의 지니와 크게 다르지 않은것으로 묘사된다. 간절하게 빌었던 첫 소원으로 절친인 카즈마를 만날 수 있었고, 혹시나 이것도 될까 싶어서 빌었던 소원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비상금도 우연히 찾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카즈마의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항상 웃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행복을 가져다주는 마법같은 존재라고 여긴것 같기도 하다.

 

  이랬던 유라의 예수님에 대힌 인식을 180도 바꾸게 된 계기는 카즈마의 갑작스런 교통사고 이후였다.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카즈마를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카즈마의 어머니와 카즈마의 친구들, 선생님, 유라는 간절하게 예수님에게 그의 무사귀환을 기도한다. 허나 신은 나타나지 않았고 카즈마는 허무하게 죽었다. 죽은 카즈마를 위한 조문과 기도를 유라에게 맡기는 선생님의 앞에서 '기도했지만 이뤄주지 않았어'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유라의 원망섞인 속삭임은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과 배신감이 함유되어있다. 충격적인 스토리의 반전을 알게되고나자, 이 영화의 제목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그렇게 귀엽고 앙증맞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깜찍한 폰트로 영화 포스터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에게 배신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감독이 자신의 어린시절 먼 곳으로 떠나버린 친구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문구는 이 영화를 좀 더 오랫동안 곱씹게 할 필요를 만들었다. 감독에게 주인공을 투사하고 나니 영화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창호지를 뚫는 장면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더욱 중요해진 것 같아서였다. 첫 장면에선 유라의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구멍이 숭숭 뚫린 창호지에 새로운 구멍을 하나 더 만드는 장면이었고, 마지막 장면은 새로 바른 창호지에 유라가 구멍을 뚫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가슴아픈 이별을 맞이했던 노인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표식을 남기는 모습, 처음 겪어보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 남긴 허무함을 느끼는 소년의 모습을 창호지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빈 구멍을 넘어 무언가를 응시하는 노인과 소년을 통해 감독은 죽은 자를 그리워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안타까움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래전에 이별한 친구에게 헌정하는 영상임과 동시에, 한 소년이 겪는 가슴아픈 성장통 이야기이다.

 

  70분이 조금 넘는 짧은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느린 사건 전개로 인해 많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신을 다시 생각나게 해줬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틀이 지난 오늘 새벽에 잠이 안와서 예수에게 기도를 해봤다. 기도의 내용은 별로 다를게 없었다. 어제 내가 저지른 죄를 스스로 깨닫게 해주시고, 오늘은 좀 더 지혜로운 내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는 기도였다. 비록 소중한 사람을 구해주지 않았던 무신경한 신이었을지 모르나, 도시에서 시골로 막 전학온 한 소년에게 평생 잊지못할 소중한 친구를 선물해 준 신이기도 했다. 이 모순적인 존재를 오늘 밤에 한 번 찾아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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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댓글

나도 이거 보러가려고 했는데 보려고 했을땐

이미 상영관이 압구정에 하루 한타임만 남아있더라...

평 꽤 괜찮던데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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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돌이와갑순이는섹스

좋은 작품이었음. 나도 CGV나 메가박스 이런데가 아니라 개인이 하는 소극장에서 본거였는데 한번 그런곳 찾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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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3

작은 예수가 소년 앞에 나타나다는 설정, 나는 예수님이 싫다 제목이 처음엔 조금 황당했는데, 카즈마 교통사 이후에 가장 바라던 소원이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이해되더라. 어린 시절 감성 그대로를 담백하게 담아냈고 조금 지루하긴 한데, 그래도 괜찮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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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1

ㅇㅇ 간만에 보는 좋은 영화였어. 주연 아역배우들 첫 연기였던거 같은데도 잘 하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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