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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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필드 패리쉬, 이빨을 심는 카드모스. 구도 때문일까, 마치 거인 같아 보인다. 그는 위대한 테베를 건국한 창업군주로 기억된다>

 

카드모스는 그리스 신화 최초로 여신과 결혼한 사람이다. 놀랍게도 상대는 아레스의 딸 하르모니아. 그리스 신화에서 마이너하기 짝이 없는 바로 그 아레스의 사위 되신다. 그래도 명색이 신과 혈연관계이니 영광스러울 것도 같지만, 그리스 신화가 전하는 카드모스의 인생을 돌아보면 비참하고 통탄스럽기만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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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니콜라스 코아펠, 유괴되는 에우로페. 뭔 경사가 났다고 소라 나팔을 불어재끼는지 모르겠다>

 

그는 본래 포이니케 지방 티로스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와는 남매지간인 에우로페 역시나 티로스의 공주였겠지. 하지만 에우로페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했고, 왕궁이 발칵 뒤집어졌다. 아게노르 왕은 자식들을 소집해 엄명을 내리는데, 공주를 찾을 때까진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고명딸 댁에서 오빠들은 늘 이런 신세이기 마련이지만, 아게노르 왕가는 좀 더 했던 모양이다. 아들들이 진짜로 돌아오지 않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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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리크 골트지우스, 용을 잡는 카드모스. 부하들의 복수를 위해 나무 창을 갈아 왔다>

 

대신 카드모스는 보이오티아에 정착해 테베를 건국한다 : 이 과정이 기구한데, 당초 모후 텔레파사와 함께 하던 카드모스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다가 어머니를 여의고 만다. 더 이상 여동생을 찾을 동력을 잃은 카드모스는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으니, 아폴론이 그에게 여동생은 찾을 방도가 없으므로 포기하라고 일러주었다. 한편, 쟁기를 한 번도 맨 적 없는 순결한 소를 만날테니, 그 소를 따라가다가 징표를 보이거든 그 자리에 나라를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과연 카드모스는 소를 만났고, 소를 졸졸 따라가다가 그것이 앉은 자리에서 테베의 개국을 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 길어 오라고 보낸 부하들이 샘을 지키는 아레스의 용에게 죄다 잡아 먹혔던 것이다. 카드모스는 손수 아레스의 용을 처단하는데 성공했지만, 아레스의 후환이 두려웠다. 그도 그럴 게 카드모스가 처치한 용은 그냥 용이 아니라 아레스와 데메테르의 아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즉 용신이었기 때문(표현은 龍이라고 했지만 거대한 구렁이에 대한 동서양의 상징적 경의일 뿐, 뱀이나 마찬가지다).

 

카드모스는 아레스에게 속죄하는 심경으로 그의 노예가 되길 자처해, 10년 간 시종 생활을 했다. 이에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하르모니아를 내려 왕후로 맞이하도록 해 최초의 인간 - 신 커플이 탄생하고, 비로소 카데미아 왕조가 개창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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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하디만, 하르모니아와 카드모스. 노부부는 엘리시움에서 영원한 사랑을 나누었다>

 

한데, 아레스가 카드모스를 완전히 용서하진 않은 모양이다. 본격적으로 카데미아 왕가에 망조가 들어 무려 7대에 달하도록 후손들이 비명횡사하는데, 신화에서는 이것을 아레스의 저주로 표현하고 있다. 심적인 고통이 극에 달한 카드모스는 하늘을 우러러 "당신이 고작 뱀 하나를 그렇게 귀하게 여길 줄은 몰랐나이다 ! 나도 차라리 뱀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 하고 호소했고, 정말로 그 자신도 뱀으로 변해버리면서 운명을 맞이한다.

 

카드모스 신화 전반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비극적 구조는 의아함을 자아낸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귀향길은 막혔는데, 신탁 때문에 낯선 땅에 정착하려 애썼고, 그 과정에서 신의 분노를 사 씨가 마르는 극형을 당해야 했다. 이런데도 테베 왕가의 태조로 모셔지고, 영웅으로 이름 날 수 있었을까? 소위, 그리스 영웅 신화에서 볼 수 있는 모험 활극이 보이지 않는단 말씀이다. 이런 슬픈 이야기는 영웅 신화로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만한 요소가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 : 그런데도 카드모스 영웅담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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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고동 껍데기. 티레 해안에서만 나는 뿔고동으로 만드는 심홍색 염료는 매우 귀해 로마 시대가 되어서도 귀족들만 구해다 쓸 수 있었다>

 

우선 카드모스의 고향인 포이니케는 그리스어로 "고동색"이란 뜻으로, 바로 페니키아를 의미한다. 당시 페니키아인이 즐겨 입었던 옷감과 페니키아인의 주요 교역품인 염료가 모두 뿔고동에서 추출해 만든 자주색이어서 그렇게 불렀단다. 티레는 페니키아인들의 도시 가운데 가장 융성했던 항구 도시로, 카드모스의 출신지 티로스가 곧 티레였다. 그러니까, 카드모스는 본래 재벌 2세였단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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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모스의 이동 경로. 오늘날의 레반트 지역 일대에 강성한 항구 도시 티레가 있었다>

 

그의 항로를 지도 위에 나타내 본다면 갈고리 모양이다. 흡사 소 아시아 지역의 해안을 훑고 지나간 모양새인데, 이는 아마도 당시 페니키아인들의 교역로를 신화로 옮긴 흔적인 듯 하다. 페니키아인들은 항해술이 뛰어나 지중해를 오랫동안 장악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먼 곳까지 무역 항로를 개척했다. 최대한 신화에 맞춰서 상상해본다면, 모후와 동행하던 카드모스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가던 도중 어머니가 위독해지시자 의술의 신전 델포이로 모시기 위해 회항한 것이라고 해도 괜찮겠다.

 

한편, 페니키아는 해상 무역에 집중했지만 당대 기술력으로는 장기간의 원양 항해가 어려워서 무역로 곳곳에 중간 기점으로 활용할 식민지를 세우는 방식으로 난관을 타파했다. 이런 식민지들은 초창기에 천 여 명 정도의 소규모로 출발해 페니키아 상인들의 보급품을 지원했지만, 점차 개척되면서 완숙한 도시로 성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페니키아 식민지가 훗날 로마와 맞붙는 카르타고. 카드모스 왕자가 그리스 본토로 진출해 테베를 세운 일화도 어쩌면 페니키아의 확장 정책에 따른 결정이거나 페니키아 특유의 보급 기지 정도로 시작해 왕국으로 거듭났음을 은유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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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모스가 그려진 암포라(Amphora). 에우보이아에서 출토되었다. 암포라는 길쭉한 용기인데, 보통은 포도주를 담았다고 한다>

 

페니키아인들의 주요 교역품으로 상술한 심홍색 염료 이외에 세공된 금속, 도기, 올리브, 백향목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페니키아인들에게 그리스인들이 많이 의존했던 것이 포도주인데, 지중해 지역에 처음으로 포도주를 소개한 게 페니키아인들이다. 그들은 운송 과정에서 포도주가 상하지 않도록 송진 묻힌 올리브유를 포도주 위에 부어 보존하는 방법을 채택해 뛰어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로 숙성시키는 양조법까지 전파했다고 하니, 가히 유럽의 두강(杜康)이라 할 만 하다.

 

어라, 그러고보니 카드모스의 친딸 세멜레가 제우스와 관계해서 낳은 아들이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였네? 술과 생육을 관장하는 디오니소스를 하필 페니키아 출신인 카드모스 가계에 편입해 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카드모스와 그 세력은 테베에 정착하면서 인근에 포도주 만드는 법이나 와인 주도(酒道)를 보급한 공로가 혁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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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에서 발견된 페니키아 비문. 날카롭게 새겨진 글자들에서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페니키아인들의 진정한 수출품은 바로 문자다. 페니키아인들은 무역을 워낙 광범위하고 대규모로 했기 때문에 장부 기록에 쓰일 간결하고도 쉬운 문자가 필요했는데,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배워와서 자신들만의 페니키아 알파벳으로 가공했다. 이를 다시 그리스인들이 배워 필요한 걸 더하고 빼니, 그리스 알파벳이 되었다. 페니키아의 왕자 출신인 카드모스가 테베에서 가신들,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문자 교육도 했음을 그리스 전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카드모스와 그의 일파가 바다 건너 페니키아로부터 그리스 세계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술과 문장이라니, 정말이지 환상적인 조합이잖은가 ! 테베가 낳은 그리스의 대영웅 헤라클레스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도, 디오니소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카드모스 신화가 널리 퍼진 것도 모두 고대의 테베가 그리스 본토에서 갖는 문화적 위상이 대단히 강력했기 때문이란 게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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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 인류 문명 탐험 4부 현대 서구 문명의 뿌리, 그리스 문명 편 도리아인의 침공 경로. 도리아인의 별명은 바로 "헤라클레스의 후예" 이다>

 

문제는 두 가지인데, 첫째로 도리아인의 침입을 꼽을 수 있겠다. 도리아인은 BC 1200년 경에 남하해 미케네 문명을 종식 시키고 마주치는 모든 그리스 왕국을 파괴했다. 사실 도리아인의 남하라는 이벤트는 학자들이 연구의 편의성을 위해 고안한 개념으로, 실재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모른다. 만일 도리아인의 침공이 있었다고 가정할 때, 300년 간의 암흑 시기를 간단하게 "도리아인이 박살내놔서 문명이랄 게 없음" 이라고 설명하면 끝이다. 

 

이러한 문명 파괴에서 테베도 자유롭지 못 했다면 카드모스와 같은 창업군주의 신화를 후대에 온전히 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스 문명권에서 대중적으로 쓰이던 선문자 B가 3세기 간의 암흑기 동안 소멸했으므로, 페니키아 문자 체계를 쓰던 테베 인근 보이오티아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카드모스의 신화는 구전에만 의존해 내용을 전달하는 신세가 되었다. 가뜩이나 고대의 신화인데다, 원전이 파괴되어 전할 길이 없으니 내용이 모호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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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요르단스, 카드모스와 아테나. 한 몸에서 났으나 서로 신의가 없는 자들의 상잔을 구경하고 있다>

 

둘째로 아테네를 꼽을 수 있겠다. 도리아인의 남침에서 유일하게 문명 단절을 겪지 않은 곳이 있으니, 바로 고대의 아테네였다. 이는 아테네인들의 자부심이기도 했는데, 아예 지배 계층이 도리아인 계열로 바뀌어버린 스파르타나 아르고스 등 굴지의 왕국들에 비해 여전히 이오니아인 중심의 정치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 문자로부터 벤치마킹하여 만들어진 그리스 문자도 실은 아테네와 이오니아식이다. 아테네와 연맹 속주들이 에게 해의 문명적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그들이 사용한 이오니아식 그리스 문자가 그리스 전역으로 퍼진 것. 그래서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그리스 문학 작품들이 아테네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나는 카드모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만드는 것에 아테나가 일조했다고 본다. 카드모스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잡은 날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불현듯 아테나가 뒷수습을 돕겠다고 나선다. 아테나는 우선 카드모스로 하여금 드라콘의 강냉이를 털어 바닥에 뿌리게 하고, 몸을 숨기게 했다. 카드모스가 시키는대로 하자, 맨 땅에서 무장한 용아병(Spartoi)들이 솟아나왔다. 아테나는 카드모스에게 돌멩이를 집어던지게 했는데, 이 돌에 맞은 용아병들끼리 시비를 가리다가 혈투가 벌어져 실력이 백중지세인 5명을 빼고 모조리 죽었다고 한다. 카드모스는 이들을 중재해 부하로 삼고, 테베를 굴리게 했다. 

 

그런데 이 행적이 아레스로 하여금 노여움을 거두게 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오히려 관점에 따라서는 아테나의 주도로 아들의 시체가 능욕 당하고, 살인자는 여신의 비호 아래 왕국을 건설하기까지 하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카드모스의 속죄는 이 다음 시기, 그러니까 테베를 건설한 다음이므로 결국 아테나가 아레스의 저주를 극복하는데 일절 관여한 바가 없다는 뜻이 된다. 이는 아테나 여신의 개입이 매우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연출이다. 다시 말해, 용을 잡는 그 순간부터 카드모스가 뱀으로 화(化)하는 그 날까지의 일들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는 뜻이다.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둬가면서 비극적인 연출을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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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지도. 과거에는 보이오티아와 아티카를 아우르는 단일 국가가 존재했고, 테베와 아테네는 거기서 분화돼 나온 왕국이다>

 

왜냐면 아테네랑 테베가 지척이었거든. 테베로 말하자면 스파르타나 아테네처럼 그리스 판도를 좌우하는 종주국은 아니었지만 내내 보이오티아를 결집시켰던 세력으로, 삼국지로 치면 촉한에 해당하는 국가였다. 로마 시대까지 꾸준히 살아남아, 보이오티아 동맹을 결성해 전성기를 구가하는 등 나름대로 아테네의 숙적이라 할 만 했다. 

 

비극이란 무엇인가. 그리스어로 비극은 트라고디아(τραγῳδία), 즉 "염소의 노래"란 뜻이다. 과거 디오니소스의 왕림을 기리는 디오니시스 제전에서 창을 불러 우승한 자에게 숫염소를 상으로 내린 바 있는데, 이 때문에 염소 타령이란 의미로 비극 장르가 생겨났다. 그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좋은 비극의 소재는 다름 아닌 적국 원수의 일가붙이. 오늘날에도 적대하는 사람을 담가버리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대중들에게 먹히는데, 하물며 고대 그리스에서야. 때문에 아테네의 코앞에 위치한 테베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좋은 안주 거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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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 실바니,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결투. 발검한 채 노려보는 눈빛은 이미 형제지간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다>

 

선대의 죄악으로 후대가 고통받는 현상은 카데미아 왕조 내내 지속된다. 카드모스의 아들 폴리도로스는 요절했고, 장녀 아가베는 마이나스들과 함께 광기에 빠져 자기 자식인 펜테우스를 찢어죽였고(흠씬 두들겨 패고 내쫓았다고도 한다), 차녀 아우토노에는 아들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엿봤다가 사슴으로 변해버렸으며, 삼녀 이노는 남편이 미쳐서 아들 레아르코스를 죽이자 절벽에 몸을 던졌고, 막내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본 모습을 보여달라고 졸랐다가 타 죽고 말았다. 카드모스의 손자이자 폴리도로스의 아들 랍다코스는 아테네 왕 판디온과 싸우다 패사했고(또는 사촌 펜테우스와 함께 마이나스들에게 죽었다고도 한다), 랍다코스의 아들 라이오스는 친아들 오이디푸스에게 죽는다. 오이디푸스는 패륜을 저지른 죄책감에 스스로 눈을 찌르고 왕위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아들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형제는 서로 싸우다 공멸한다. 말 그대로 7대가 죄인 집안인 셈이다. 이는 사실이 그랬다기 보다는, 테베 왕가의 조상들을 욕보임으로써 아테네 민중들에게 쾌감을 선사하려는 의도로 곡해되었다고 봐야 한다.

 

플라톤이 비극이라는 장르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비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실이나 진리에 입각한 게 아니라, 그저 음유시인들의 취향이나 선입견에(혹은 그보다 더욱 어두운 의도에) 따라 이리저리 내용이 뒤틀렸을 뿐인 아테네 비극이 대중들에게 주는 착각을 해악이라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두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므로 좋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나는 카드모스 신화를 소개하는 입장에서 플라톤의 주장에 더 공감한다.

 

유재원 교수의 저서 「그리스 신화 II : 신에 맞선 영웅들」에서는 카드모스가 겸손하고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인간이라고 묘사한다 : 아레스의 용을 본의 아니게 죽였고, 이를 속죄하고자 10년 간의 참회를 바쳤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신들로부터 용서 받아 그 자신도 초월적 존재로 끌어올려졌다고 한다. 카드모스의 최후를 근거로, 그가 테베의 수호령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뱀은 신화적 상징으로 대지신을 뜻하고, 대부분의 그리스 영웅들이 죽어서 저승으로 내려가는 것과 달리 카드모스는 뱀으로 변해 엘리시움에 들어가는 운명을 맞았다고 하므로 정황상 맞는 이야기이다.

 

카드모스는 어쩌면 페니키아 상단을 보호하고, 내륙에 새로운 터전을 잡기 위해 파견된 아게노르 왕가의 분조가 아니었을까. 우월한 페니키아인의 문명을 바탕으로 일대 원주민들을 교화했으며 7개의 문으로 유명한 테베 성벽을 세우는 등, 일찌감치 폴리스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원시적인 폴리스를 구축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찬란했던 옛일이 역사와 문화의 승자인 아테네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글에도 문제가 많지만, 대략 여섯 가지 문제가 있다 :

 

1. 어디까지나 신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 신화를 취사 선택한 것과 취사 해석한 문제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2. 카드모스의 입지는 알 수 없다 - 지중해에서 페니키아인이 갖는 위상은 설명했지만, 그것이 카드모스의 입지와 연결된다고 할 수는 없다. 아게노르가 딸만 예뻐한 사람일 수도 있고, 카드모스가 본처 소생이라는 보장도 없다.

3.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다 - 카데미아 왕조의 후예들이 파멸하는 과정을 야만성의 탈피 과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동족상잔이나 근친상간, 신성모독 등 비문명인이 문명인으로 거듭나면서 극복해야 하는 모습들을 은유하는 장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이런 콩가루 집안이 있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카드모스 왕가가 정말 재수 없어서 묘사 그대로의 파멸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

4. 페니키아인의 구성은 모호하다 - 페니키아는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가 아니었다. 단일 왕조는 더더욱 아니었는데, 페니키아도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페니키아인의 여러 특색은 일부 페니키아 도시 국가들(예를 들면 시돈, 티레)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당대에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거든.

5. 도리아인의 침공은 허구이다 -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실체 없는 대규모 민족 이동 현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도리아인의 남침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미케네 문명은 가뭄이 광범위하게 드는 등의 재해로 인한 쇠퇴 현상이 발견되고 있고, 침공 이전부터 도리아인이 미케네인과 섞여 살았다는 연구도 있어 진실을 알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도리아인의 침입이 완전히 허구였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차라리 바다 민족의 침공을 계기로 미케네 문명권이 박살났다고 보는 게 더 알맞을 정도라 문제지만.

6. 증거가 부족하다 - 신화에 기반한 뇌피셜이다보니 이렇다 할 증빙 자료는 없다. 위의 다섯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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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낭비하게 해서 미안

 

9개의 댓글

카드모스의 장모 아프로디테는 페니키아인들이 모시던 음욕과 생장의 여신 아스타르테 숭배 사상이 키테라 섬에 정착하면서 그리스에 사랑의 여신으로 받아들여진 거래. 카드모스의 손자이자 아프로디테의 외증손 디오니소스가 하필 포도(주)와 생육의 신이라는 걸로 볼 때, 그 뿌리가 나름 깊다고 할 수 있지. 한편, 아레스는 고대에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이름 날리던 대신으로 모셔지고 있었어. 그렇다는 말은, 아레스 신앙으로 대표되는 보이오티아 원주민 세력과 아프로디테 신앙으로 대표되는 페니키아계 이주민 세력으로 등장인물들을 양분해 볼 수 있겠네. 아레스의 용(= 원주민 우두머리)을 잡고, 그 강냉이로 부하들을 만들고(= 내분 유발), 마침내 테베를 건국했다(= 양 진영 갈등의 봉합)는 카드모스의 신화를 통해 두 세력 간의 대결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짐작할 수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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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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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수염

쪼끔 늦었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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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6

문단 나누는 거라든지 내용이라든지 뭔가 ㅈㅈㄱ교수 책 읽는 것 같아. 재밌게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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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지

그 분 책을 나도 읽어봐야겠네, 고마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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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6

하워드 하디만 그림 좋네요 오밀조밀.. 글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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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롱이

매번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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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계속 썰 풀어라 재밌게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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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아닌데그만들싸워

소재가 고갈되기 전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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