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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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끌레망 와그레즈, 파리스의 심판. 그의 사과 한 알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파리스의 선택은 이후 교양 있는 시민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된다 : 도장은 함부로 찍지 말자 !

 

10년 간의 학살과 승리, 비탄과 영광이 모두 파리스의 로맨스로부터 벌어졌다. 당시 지중해 사회는 양 진영으로 나뉘어 격돌했고, 수많은 왕조가 엎어지는 동안 신민들은 터전을 잃고 목숨이 위협받는 등 대혼란을 겪어야 했다. 한 사내의 짧은 불장난 치고는 너무도 혹독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파리스와 트로이의 사연은 불쌍하지만, 나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짚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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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프레데릭 데스머라이스, 목동 파리스. 탄탄한 육체미를 자랑하는 미소년이다>

 

신화의 내용으로는 트로이 왕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금과옥엽으로 컸어야 할 그가, 뜬금없이 양치기가 되어 있다. 이는 모후 헤카베가 파리스의 태몽이 매우 불길해서 내다버렸다가, 목동이 그를 우연히 주워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까, 파리스는 사실 트로이 왕가에 대한 소속감보다는 유년 시절을 양떼들과 함께한 촌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셈이다.

 

나는 양치기, 라고 하면 목가적인 상상 속의 한량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고 한다. 늑대나 다른 양치기, 비적떼를 상대로 일족의 자산인 가축들을 지키려면 담력도 세야 하고 싸움도 잘 해야 한다나? 즉, 풀피리 불면서 시간 떼우는 직업이라기보단, 거칠고 힘 깨나 쓰는 3D 업종이었다는 뜻이다. 재미있게도 파리스가 양 치던 시절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보호자" 라는 의미를 가졌단다. 파리스가 양을 노리던 도적 무리를 쫓아낸 이후 얻은 이름이라 하니, 그의 강건한 자질을 엿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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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니발레 카라치, 헤르메스와 파리스. 파리스의 표정이 뭔가 띠꺼운데>

 

파리스는 나중에 트로이 왕가로 재편입되는데, 아마 프리아모스나 헤카베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한 듯 하다. 지나가던 왕궁 사람들이 목동 중에 유별나게 잘 생긴 사람이 있길래 물어물어 알아보니, 트로이의 왕족 출신이랬다나. 파리스의 미모는 제우스도 인정한 바 있다 : 여신들이 황금 사과를 가질 권리를 놓고 다투다 결론이 나질 않자, 제우스에게 판결을 부탁했는데 그는 이를 파리스에게 떠넘기면서 "파리스는 인간 남자 중에 가장 아름다우므로, 여신 중에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단다.

 

여기까지 요약하자면, "버려진 아들이었던 내가 이세계에선 초절정 미남에 씹마초스런 힘을 지녔는데 이제 왕자님이라구?". 한 편의 라노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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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볼로냐, 헤라클레스와 네소스. 이 조각상에서는 네소스를 손수 박살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영웅들을 잘 관찰해 보면, 어느 시점부터인가 영웅들의 결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헤라클레스로 대표되는 시대의 영웅들과 아킬레우스로 대표되는 시대의 영웅들이 그렇다. 둘 간의 시간적 차이는 고작 한 세대 남짓인데, 신화에서의 묘사는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영웅 간의 세대 구분에 기준이 되는 분수령을 트로이아 전쟁으로 보고 있다. 

 

전기의 영웅들은 대체로 괴수들을 사냥하고, 혼자서 나라를 세우거나 없애는 등의 그야말로 초인적인 활약상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런 타입의 영웅들은 행적이 모호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전승이 대립한다. 이것은 영웅담이 구전에 의존하면서 왜곡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당대 그리스인들이 영웅이라는 존재를 "인간의 몸으로 불가능한 업적을 남기는 자"로 설정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머리 아홉 달린 이무기나 외눈박이 거인을 잡아죽였다는 소리는 말이 안 되잖아? 즉, 당대 그리스인들은 영웅을 "신의 힘을 지닌 인간", 또는 "인간을 위해 싸우는 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전의 영웅들이 반드시 실존인물일 필요는 없는 것이며, 그 기록이 부족한 것도 당연하다. 

 

한편, 후기의 영웅들은 모두 전쟁 영웅들이다. 트로이아 전쟁을 묘사한 대서사시 일리아스는 아카이아 연합의 영웅들과 트로이아 영웅들의 일대기를 소상히 적어두었다. 일리아스는 누가 누구의 아들이며, 어디의 왕이고, 그 땅의 특산물은 무엇이며, 그의 자식은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일로 죽었다는 묘사로 가득하다. 이것은 일리아스를 저술한 호메로스가 논리적인 서술을 좋아해서 그런 걸수도 있지만, 트로이아 전쟁기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트로이아 전쟁기의 영웅들은 보다 사실적이고, 개연성 있는 행적을 드러낸다. 이는 그들이 실존인물이었거나, 최소한 모티프가 되는 인물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파리스도 전쟁 이후의 영웅이니까 일리아스에 기록이 실려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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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대결. 아프로디테가 보우하는 파리스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일리아스에 따르면 파리스는 트로이아 전쟁 내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파리스의 형제인 헥토르, 데이포보스, 헬레노스 등 트로이의 왕자들은 모두 함대를 지휘하거나 성을 수비하는 군단장이었는데, 그 혼자서만 별다른 지휘 이력이 없다. 화살을 잘 쏴서 아카이아 연합의 맹장인 디오메데스를 부상 입히거나, 객기를 부려 메넬라오스와 1:1 대결을 벌인다는 묘사는 있지만 그 뿐. 무구를 번쩐번쩍 광이 나도록 닦아 놓고 혼자 젠체하면서, 쌩고생하는 트로이아 장군들이 피를 뒤집어쓸 동안 후방에서 놀고 있는 정도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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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돌하는 아킬레우스와 멤논이 그려진 도자기. 좌측은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 우측은 멤논의 어머니 에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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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돌하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그려진 도자기. 위에 나온 도자기의 뒷면이다. 좌측은 아킬레우스를 응원하는 아테나, 우측은 헥토르를 응원하는 아폴론>

 

아카이아와 트로이아를 아우르는 대전쟁에서, 파리스의 역할이 거의 없다니? 이 전쟁을 촉발하고,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장본인이 전쟁의 향방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을 뿐더러, 터전이 불바다가 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질문 : 주신에게 인정받을 만큼 미남이자 용맹하다고 소문난 파리스는 왜 트로이 전쟁에서 소외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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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지아 회랑, 파트로클로스를 후송하는 메넬라오스. 용사의 죽음에 처연해 하는 메넬라오스가 보인다>

 

나는 그 답을 메넬라오스에게서 찾고 싶다. 헬레네의 남편이자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는 미케네의 왕자로 태어났다. "미케네" 하면 당대 아카이아를 주도하는 패권국이었고, 소위 제우스의 황금핏줄이라 불리우는 성골 중의 성골이라 할 수 있다. 신화에서 헬레네의 숱한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틴다레오스가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메넬라오스의 형은 헬레네의 누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결혼했다. 무슨 뜻인지 감이 오겠지?).

 

스파르타도 미케네 못지 않은 강국이었으며, 황소가 수 백 마리에 금이 넘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부강했다. 이제 메넬라오스가 그와 같은 스파르타 왕국의 부마가 되었으니 그의 앞길은 탄탄했다(디오스쿠로이 형제는 요절하여 틴다레오스에게 아들이 없었다).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이 사이좋게 두 나라를 나눠 먹었으니, 누구도 아트레우스 왕조를 위협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헬레네가 납치 당하고, 메넬라오스가 아가멤논을 부추겨 트로이아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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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상상도>

 

여러분은 적벽대전이 강동이교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라면 믿겠는가? 물론 사나이라면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는 법이다. 절세가인이라면 더욱 ! 하지만 군주는 그래선 안 된다. 여자 한 둘과 자신의 기반을 건 도박은 아무리 생각해도 타산이 맞질 않고, 부하들의 충성심에도 금이 갈 수 있으니까. 차라리 강동이교는 구실이거나 허구이고, 그보단 조조에게 촉, 오 동맹을 격파해야 할 별개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메넬라오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스파르타의 중신들은 틴다레오스 왕가의 봉신들이므로 그 적통한 여식인 헬레네에게 충성을 바쳤을 수 있다. 그리하여, 헬레네가 납치되자 격분 + 국가의 위신을 염려하여 전쟁 분위기까지 무르익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왕가의 계보를 위해 전쟁이 벌어져야 한다면, 군주로서 메넬라오스는 어떤 선택을 해야 옳았겠는가?

 

나는 전쟁을 유발한 파리스, 그리고 전쟁을 종용한 메넬라오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존재하지 않았나, 의심한다. 두 사람은 이 전쟁의 세팅에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는데, 헬레네라는 여인을 두고 연적 관계를 형성해 전쟁의 명분을 만든 것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다. 둘의 밀월을 어떻게 추론할 수 있냐면, 두 사람의 정치적 위상에서 공통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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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유적지 위치. 스파르타와 거의 800km 가까운 거리 차이가 난다>

 

파리스는 트로이 왕가에서 버려진 왕자다. 메넬라오스는 미케네 왕가의 콩 라인이다. 당연히 두 사람 다 아쉽게 놓쳐버린 대권을 향한 갈망이 타오를 것이다. 때문에 틈만 보이면 계승자를 집어 삼키고, 자기 것이었어야 할 왕위를 찬탈하려 할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이 합의점을 찾고, 이러한 일을 벌인 것이라면 어쩐지 일리아스의 묘사에 수긍이 간다. 파리스는 전쟁이라는 혼란기를 틈타 트로이 왕가를 장악하고, 메넬라오스는 아가멤논을 자극하여 미케네가 출병한 사이 아가멤논을 암살하거나, 최소한 아가멤논이 부재한 틈을 타 미케네와 스파르타를 병탄하면 윈윈인 셈.

 

메넬라오스의 야심을 암시하는 대목은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 신화에서 엿볼 수 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부군이 원정 떠난 사이 아이기스토스와 사통하고 있었는데, 아가멤논이 돌아오자 그를 무참히 살해하고 아이기스토스를 왕위에 앉힌다. 분노한 오레스테스는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여버렸는데, 이 때문에 왕자의 패륜을 놓고 재판이 열리게 된다. 당연히 강상 패륜죄는 사형. 하지만 오레스테스가 방청객인 이모 헬레네를 붙잡고 협박하자, 메넬라오스가 1년짜리 추방형으로 특별 사면해주었다고 한다. 한편 오레스테스의 아내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딸, 헤르미오네 ! 오레스테스를 사주하여 형을 제거하고 왕좌에 앉힌다는, 그럴싸한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가?

 

파리스는 이렇듯 호시탐탐 미케네 왕위를 넘보는 메넬라오스와 협력 관계를 맺거나, 적어도 그를 자극해 어떠한 위기를 형성한다면 자신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트로이아 전쟁이 발발하자, 쾌재를 불렀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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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 파리스를 꾸짖는 헥토르. 헥토르가 쓴 투구와 파리스의 무릎에서 빛나는 투구의 결 차이를 보라>

 

문제는 헥토르가 그의 생각보다 유능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10년에 걸친 방어전 동안 헥토르 혼자서 아카이아 연합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여 영토를 수호해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 물론 문자 그대로 10년 간 전쟁을 하진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쟁쟁한 그리스의 영웅들과 군대가 모두 모인 대결에서 초전박살 나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군재라 할 수 있다. 

 

큰 그림을 망친 상황에서 파리스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별로 없다. 반란? 헥토르는 트로이의 수호신 수준으로 숭배 받고 있었으므로, 열광적인 인기와 왕세자라는 정통성을 한 몸에 지닌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암살? 파리스는 트로이 왕가에 굴러들어온 돌 신세라, 그를 위해 목숨 바칠 무사나 그런 사람을 구할 영향력도 없었다.

 

결국 파리스가 할 수 있는 것은 태업 뿐이다. 트로이가 조금이라도 불안정해져야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으니까. 그 와중에 헥토르가 전사하면 고맙고, 그렇지 않더라도 소모전 끝에 약해진 트로이를 정리하는 편이 파리스 본인에겐 훨씬 쉬운 과제일테니, 전쟁에 시달리게 내버려두는 게 나은 판단이다. 일이 잘 풀려서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면, 아카이아와 화해하고 깔끔하게 끝내면 된다. 

 

Triumph_of_Achilles_in_Corfu_Achilleion.jpg<프란츠 폰 마치, 아킬레우스의 승리. 트로이의 죽음이 영광을 차지했다>

 

아, 마침 헥토르가 죽었다. 트로이 전역이 실의에 빠지고, 위대한 장군이자 훌륭한 남자였던 그를 위해 애도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사태를 수습하고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였다. 일리아스 바깥의 이야기에서, 그의 행동을 끝까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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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헤르터, 죽어가는 아킬레우스. 복원된 석상이다. 옆으로 보면 화살이 보인다>

 

파리스는 小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를 화살로 쏴죽였다. 그의 장기인 궁술로. 진작에 발휘 되었으면 좋으련만, 파리스는 당초부터 헥토르가 죽어 없어지길 바랐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 쓰임새를 다 한 아킬레우스는, 장차 파리스 자신이 다스려야 할 왕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이므로 일찌감치 제거해 두는 편이 좋았을테지. 이 단계까지 성공한 파리스는 토붕와해 직전인 트로이의 신민들을 규합하고, 헥토르의 위광을 그리워하는 그들에게 자신이 대안임을 설파하고 지지세력이 되어줄 것을 촉구하는 한 편, 아카이아 연합에는 화의를 제시하여 전쟁을 종결 짓고 왕좌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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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로이, 목마가 입성하는 장면. 죽음과 공포를 열렬히 환영하는 군중들의 운명이 가혹하다>

 

이 부분에서 파리스는 전쟁의 국면을 상당히 오판한 것 같다. 아킬레우스는 분명 용장이지만, 그 한 명이 없다고 트로이아 전쟁이 주춤하리라고 본다면 너무도 낙관적인 시선이었다. 아가멤논은 집요했고, 트로이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일리오스 낙성 편의 묘사를 충실히 따라가자면, 오디세우스의 계략으로 거짓 후퇴한 아카이아 연합 함대는 적이 물러난 줄 알고 안도한 트로이아의 성벽 안으로 특공대를 잠입시켜 성문을 연다. 야음을 틈타 진격한 아카이아 용사들이 성 내를 피바다로 만들었고, 트로이는 하루 아침에 귀곡산장이 되었다.

 

그 난리통에 파리스 또한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이 초래한 지옥 속에서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말이다. 파리스가 제 분수를 알았더라면, 못해도 왕자로서 일생을 살며 영화를 누렸을테지만, 애석한 일이었다.

 

재미있게도 오디세이아를 읽어보면, 메넬라오스가 트로이의 목마 작전 당시 목마 안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메넬라오스는 파리스와 애초부터 별다른 계약 관계가 아니었거나, 전쟁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거나, 또는 이 참에 트로이에도 깃발을 꽂아두려는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오레스테스를 형 대신 왕위에 앉혔고, 헤르미오네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티사메노스가 미케네 왕 자리를 이었으니, 트로이까지 정벌해 전리품을 챙기면서 미케네도 꿀꺽하는 메넬라오스의 큰 그림만 잘 맞아 떨어진 꼴이다.

 

이 글에도 문제가 많지만, 대략 여섯 가지 문제가 있다 :

 

1. 어디까지나 신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 신화를 취사 선택한 것과 취사 해석한 문제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2. 일리아스는 서사시환의 한 작품이다 - 그러니까, 말하자면 문학에 가깝다는 뜻이다. 매우 사실적인 묘사와 치밀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명작임에는 분명하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역사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가령, 아카이아 연합군과 트로이아 군대가 10년 간 치고 받은 것은 일리아스의 내용 중에 있지만, 당대 그리스에 그만한 국력이 있다고 볼 순 없으며, 전쟁 자체도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일리아스 曰, 1175척의 함선에 각 120명씩 탑승)였다기보단 약탈전 정도가 아니었겠느냐는 시각이 강하다. 이에 기반한 해설은 당연히 소설 팬픽 수준에 다름 아니다.

3.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의 사이를 의심한다 - 아가멤논의 자리를 노린 메넬라오스가 일부러 그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식으로 적어놨지만, 따지고보면 아가멤논은 제수씨와 처가 + 아우를 위해 전쟁까지 불사한 의리왕 김보성급 사나이다. 그런 형님 뒤통수 칠 궁리나 하는 소인배로 메넬라오스를 폄하하는 것은 근거 없는 비방이다. 오레스테스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4. 영웅의 시대를 임의로 나눴다 - 트로이아 전쟁 전/후로 영웅상을 구분하는 건 나만의 관점이다. 학회에 정식 등록은 안 했다. 일반적으로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인용해, 황금기/백은기/청동기/영웅기/강철기로 나뉜다.

5. 파리스를 과대평가했다 - 물론 지지세력이 약한 사람은 비상한 수단으로 권력을 노려야 마땅하다. 하지만 파리스가 권력 지향형 인물인지, 그렇게 궤계가 뛰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양치기로 자란 그에게 왕궁 생활은 놀랍고 신났으면 신났지, 탐심을 낼 대상으로 보였을 것 같진 않다. 어디까지나 이렇게 해석해 보면 의미심장하다, 정도로 읽어 주면 좋겠다.

6. 증거가 부족하다 - 신화에 기반한 뇌피셜이다보니 이렇다 할 증빙 자료는 없다. 위의 다섯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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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낭비하게 해서 미안

 

27개의 댓글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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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bootz

감사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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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안이 가릴거면 다 가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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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콤보

덜 익은 건 괜찮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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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신화를 해석한다는건 정말 재밌는 일인것 같아. 그걸 어떻게 해석하든지 말이야.

흥미롭게 읽었어. 내 파리스에 대한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아. 파리스는 버려진 자식, 게다가 전쟁이라는

분란의 씨앗을 가져 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파리스를 받아주고 왕자로써 대우했어.

트로이 입장에선 갑툭튀한 파리스와 헬레나를 내쫓은 다음에 모른척하면 전쟁없이 끝날 수 있음에도 말이야.

그리고 파리스는 트로이 전쟁 중 메넬라오스와의 다이다이 빼곤 성을 지키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어.

이런 점에서 트로이는 파리스를 트로이에 왕자로 인정하며 그를 지키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즉 파리스는 트로이로부터 왕자로서의 정당성을 입증 받았다.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파리스에 대한 내 의견은 정치적인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어린애야.

파리스가 전쟁을 일으킨 과정과 진행 내용을 보면

목동생활 -> 알고보니 내가 왕자? -> 트로이 복귀 -> 복귀 도중 헬레나와 정분 -> 트로이로 도주 -> 계기로 트로이 전쟁 발발 -> 메넬라오스와

다이다이 -> 패배 -> 성에서 존버 -> 숨어서 활로 아킬레우스 족침 -> 트로이 목마 ->하루아침에 멸망 이렇게 진행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 행동으로 보았을 때 갑작스럽게 신분 상승 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생각없이 사랑에 눈멀어 충돌적으로 일으킨 사고로

보여지지 정치적인 야심으로 볼 순 없을 것 같아. 그리고 전쟁 중 포지션에 대해서도 전쟁과 용병에 대해 무능한 파리스를 지키고자 성에 짱박혀있던게 설득력이 있어보여. 왜냐하면 파리스가 아무리 강건하다 양치기라 몸쓰는 일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말 그대로 양치기였어.

그 당시 전쟁과 무예를 배우던 왕과 귀족과는 다르게 양치기 일을 하고 한 평생 살고 있었단 말이지? 그런 점에서

메넬라오스와의 결투에서 진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어. 마찬가지로 용병에 대한 경험도 없었을테니 나라의 장군으로

지휘하기도 무리가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헥토르로 종결되는 빈약한 트로이 인재풀인데 병사를 조금이라도 다룰 수 있다면 밖에 나가 지휘하는게 맞겠지. 즉 파리스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임과 동시에 전쟁에 있어 아무 쓸모도 없는 잉여 인간인거야. 그럼에도 왕자로써 정당성을 인정받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이 들어. 트로이로써는 재앙 그 자체였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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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신

매우 훌륭한 지적이야, 그리고 이 이야기가 좀 더 진실에 가깝겠다는 생각도 들고. 내 뇌피셜의 한계 + 음모론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글이 이렇게 나왔지만, 억지로 메넬라오스와 엮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해석이 더 알맞겠지.

글 중에 이야기하는 걸 깜빡하고 넘어간 부분을 잘 지적해줬네 : 전쟁을 촉발한 파리스를 트로이 왕가가 내쫓거나 처벌하지 않은 이유 말이야. 나는 파리스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거나, 프리아모스가 지난날 아들을 버린 일을 속죄하려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받아줬거나.. 뭐 그런 식으로 쓰려 했는데, 오히려 말해준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좀 더 낫겠다.

좋은 글 읽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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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한그르데아이사쯔

아냐 나도 덕분에 그리스 로마 신화 다시 생각해 봐서 좋았어 댓글엔 너무 파리스에 대해 부정적으로 적긴 했는데 활을 잘 쏘았다는 점과 당시 연합군 최대 영웅인 아킬레우스를 조진 점에 대해서는 고평가해야된다고 생각하기는 해 다만 나라말아 먹은 게 더 커서 부정적인 인식이 클 뿐.. 앞으로도 재밌는 글 계속 써주길 바라 나도 서양 미술사 공부하던 때 생각나서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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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신

잉ㅋㅋㅋ 난 오히려 양치기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더 맞는 것 같은데..ㅋㅋㅋㅋ 정치공학적 고려가 있었다, 없었다 같은 것보단 그 편이 더 자연스럽지ㅋㅋㅋㅋ 훌륭한 관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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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신

앗, 뭐야, 5번에 적어놨었네! 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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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쓰는데 얼마 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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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페이스

구상에는 나흘, 쓰는데는 하루 조금 덜 걸린 것 같습니다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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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은 왜 다 벗고있냐 천도있으면서

무슨 철학적 의미가 있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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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가핥은머리

더운 곳이라서..?ㅋㅋㅋㅋㅋ 어쩌면 화가들이 생각한 아름다운 육체를 드러내고 싶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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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그르데아이사쯔

잘 아는것처럼 얘기하더니

이런질문은 또모른다고 하냐 맥빠지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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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가핥은머리

미술 전공에게 물어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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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버팔로가핥은머리

고대 그리스에선 사람 본연의 아름다움을 중시해왔어, 특히 사람의 몸에 대한 아름다움을 중요시했어.

그래서 다른 신화에 비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의 성격이 유독 인간스럽지.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근데 그림의 주인공들은 왜 옷을 벗고 있을까? 인간의 몸의 아름다움을

중시해서 표현한 것도 있고 또 인물의 대한 차별를 주기 위해서야. 몸에 대한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생각

하기에 가장 아름다움 -> 신 신보다는 덜 아름다움 -> 영웅 -> 영웅보다 덜 아름다움 -> 일반인이라 보는거지

그래서 대체로 고대나 중세 그리스 관련 그림에선 나체는 신으로 묘사되고 옷을 입었지만 육체적인 부분이

부각되는 것이 영웅 옷을 다 입고 있는 것들은 엑스트라 이렇게 나눠서 볼 수 있게 하는 장치기도 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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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커피신

정리하면 나체인 이유 = 인간의 육체미 표현과 인물 구별을 위한 장치 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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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와, 뭐하는 양반이냐 ㅋㅋㅋ 전공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 파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취미로 이 정도로까지 열심히 읽는 건가. 그렇게 매력이 넘치는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덕력이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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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듬비빔밥

취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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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한그르데아이사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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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파면 팔 수록 끝이 없다 ㅋㅋㅋ

좋은 글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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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수염

매번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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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잘 읽었어요 도자기에 아킬레우스 거시기가 보이는 것 같은데요 하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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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롱이

덜 익은 건 괜찮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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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근데 왜들 다 벗고있지.. 작가가 변태기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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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씨함마

글쓴이가 일부러 그런 그림만 골라 왔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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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첫짤 비슷한 화풍에 비슷한구도로 예수 잔치하는그림 있지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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