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듀랑고 생존메모 "학위 없는 법학자" 편

 

 

학위 없는 법학자 #1

저는 법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니 법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제가 있던 부족은 단일한 국적의 사람, 그것도 고등학생들이 세웠는데 그 때문에 처음엔 자국의 법률과 상식을 따랐죠. 하지만 자국의 법률을 잘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고, 자국이 더 이상 없다는 더 큰 문제가 있었어요.

 

 

#2

한 친구가 제비뽑기로 부족장이 됐습니다. 부족장의 권한은 말로 정했습니다. 친구는 부족장이 된 다음에 권위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몇 번이나 지적했지만 고치질 않았고 새로운 조난자들이 부족원으로 합류하자 더 심해졌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부족의 일을 법으로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친구는 인력 낭비일 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엔 동의했습니다.

 

 

#3

밤에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면 모닥불에 둘러 앉아 법의 기초가 될 기본법을 정했습니다. 기본법의 목적을 우선 잡았죠. 자유롭고 평등한 삶, 부족의 공적인 자리를 어떻게 둘 것인가, 정의 추구, 구성원의 복지 증진, 안전을 위한 무장 등등 여러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 외에 들어갈 것을 논의했지만 서로 생각의 차이가 커서 앞서 언급한 것들 정도로 합의를 봤죠.

 

 

#4

전문을 썼습니다. 글을 잘 쓰는 친구가 문장을 골랐어요. "우리 인민은 부족을 구성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리고, 정의를 실현하고, 복지를 증진하며, 서로의 안전을 위해 이 기본법을 만든다." 문장이 멋져서 계속 다시 읽었죠. 부족장은 "부족장의 뜻을 받들어", "부족장의 뜻을 존중하여", "부족장을 중심으로" 같은 말을 넣길 원했지만 못 넣었습니다. 사실 전문은 제가 썼습니다.

 

 

#5

제1조를 두고 다들 어떻게든 자기 문장을 넣으려고 안달을 냈죠. 제가 전문을 쓴 걸 자랑한 게 다들 거슬렸나 봅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쓴 제1조가 선택됐습니다. "입법권은 부족의회에 속한다." 부족장은 "부족장은 부족 통합의 상징이며, 모든 권력은 부족원의 민주적인 동의로 부족장이 위임 받는다." 같은 거지같은 문장을 밀었습니다. 하지만 뭐 결국 이렇게 됐죠.

 

 

#6

사실 제1조로 몇몇 문장을 더 고민했습니다. 의회 얘기부터 꺼내기보단 인간의 기본권 얘기를 먼저 할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부족장이 나대는 게 고까워서 일단 어떻게 권력을 나눌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권력이 서로 견제하게 하는 게 기본권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 같았거든요.

 

 

#7

의원의 숫자를 두고 의견 충돌이 잦았습니다. 구성원이 다 합해서 23명 밖에 안 됐지만 훗날 늘어날지도 모르니까요. 결국 제2조 2항에서 "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15인 이상으로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다들 토론하다 지쳐서 망할 놈의 인원은 적당히 제끼자고 했거든요.

 

 

#8

기본법을 정하는 동안에 2명이 죽었습니다. 랩터들이 겨울이 되자 제가 살던 지역에 빈번하게 나타났거든요. 활을 만들고 숲 속을 뛰어 다녔습니다. 우리는 기본법 없이 많은 의사결정을 했고 부족장은 위기 상황이라며 자신의 의견을 밀어 붙였죠. 기본법을 빨리 완성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기본법의 통과 규칙을 정했습니다. 전원 참석에 과반수의 동의.

 

 

#9

행정부와 사법부를 두고 진통이 이어졌습니다. 부족장은 부족장의 임기로 7년을 주장했습니다. 구두로는 1년만 하기로 했죠. 새로운 조난자들이 조금씩 나타나면서 부족의 인원이 51명이 됐습니다. 그들에게 생존방법을 교육하느라 시간을 거의 다 썼죠. 기본법회의에 못 가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 즈음에 부족장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각자 초안을 쓴 다음에 표결에 부쳐 다수의 동의를 얻는 기본법을 택하자고 의견을 냈습니다.

 

 

#10

친한 친구가 같이 사냥을 나가는 길에 저를 따로 불러 말했습니다. 부족장이 자신에게 유리한 기본법 초안을 쓰고 있다, 기본법에서 제대로 견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독재가 될 거다, 부족장을 좀 때린 다음에 우리 말을 들으라고 하자, 저는 입 다물라고 답했습니다. 부족장은 새로운 조난자들에게 잘 대했습니다. 기본법 초안을 표결에 부칠 때 신입들의 표를 얻어 자신의 초안을 통과시킬 생각이었나 봅니다.

 

 

#11

폭력은 직관적인 방법이긴 합니다. 저는 키가 198센티미터에 몸무게 110킬로그램의 근육질 남성이고, 부족장은 저보다 40센티미터는 작은 여성이니까요. 저도 폭력의 유혹을 느끼곤 합니다. "세상은 결국 힘이야. 힘으로 해결하자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안 살려고 법을 만드는 건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유혹은 늘 있지만, 유혹을 견뎌내는 게 인간이지요. 이런 당연한 걸 말하며 자신이 대단한 인간인 양 느끼는 제 자신이 좀 짜증납니다.

 

 

#12

저도 조난자들에게 기본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파했습니다. 그런 얘길 할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고 느끼고, 태도가 거만해지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의견을 주기도 하고 저의 지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자신이 나이가 많단 이유로 자기 의견을 강요하려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약간 회의적이 되긴 했습니다. 갈등을 없애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갈등을 줄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13

신입 가운데 변호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법학에 대해 많이 가르쳐 줬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덫과 활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죠. 사법부와 행정부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인구가 늘었을 때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부족과 부족이 합칠 일이 있을 경우 조항도 마련해두자, 등등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초안은 93개 조항으로 썼습니다. 식량 비축에 시간을 쏟아야 했기 때문에 기본법 통과가 절실했죠.

 

 

#14

투표소를 만들었습니다. 부족장이 만든 초안과 제가 만든 초안, 2개가 최종적으로 남았습니다. 제 초안이 통과되면 다시 선거를 해 정식 의회와 부족장을 뽑고, 부족장이 지명한 법원장을 의회가 과반수 참석에 과반수 동의로 승인해야 했습니다. 투표 결과 제 초안이 압승했습니다. 18세 생일이 지나지 않아 저와 부족장은 새로운 부족장 선거에 나갈 수가 없어서 부족장은 변호사가 됐습니다. 그는 기본법 책자에다 손을 얹고 법원장이 된 전직 영어교사에게 선서를 했죠.

 

 

#15

전임 부족장은 18세가 되자 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제6선거구에서 4표를 얻어 당선됐죠. 저는 부족장의 경제 보좌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이름은 그럴 듯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다른 부족에 가서 소금이나 아스피린 같은 물자를 사 오는 게 일이었습니다. 의원들은 급료가 없었고, 행정부에서 근무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전임 부족장은 주로 감자 농사를 짓고 밀을 재배했습니다.

 

 

#16

저는 법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한 부족의 기본법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저 혼자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주무자였죠.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전 존나 멋졌습니다. 부족에 새로 가입자가 생길 때마다 물어보죠. "누가 이 기본법을 만들었죠?" 그럼 저는 소금포대를 정리하다가 손을 흔들어 줍니다. 그럼 이런 말이 따라 붙죠. "훤칠하네요."

 

 

#17

전임 부족장은 저한테 인사도 안 합니다. 그럴 만도 하죠. 전임 부족장의 남편은 제 친구인데 한 번은 전임 부족장이 아파서 아스피린을 구하러 왔습니다. 나중에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고마워는 하지만 고마워 하지 않고 있어." 저도 이해합니다. 어떻게 제가 마음에 들겠습니까? 뛰어난 사람은 평생 질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18

부족장을 때리자고 했던 그 친구는 군사 보좌관으로 근무하다가 몇 차례 횡령을 저질러 첫 수감자가 되었습니다. 60일 징역형에 5년간 공직에서 쫓겨났죠. 감옥이 완성이 안 되서 재판이 늘어졌습니다. 형을 선고받았을 때 이미 58일째 부족 청사에 구속된 상태였죠. 그 친구는 딱 이틀 복역했습니다. 이틀을 못 참고 첫날 밤에 부족을 탈퇴할 것이라며 재판 결과가 무효라고 주장했죠. 법원은 가입자가 재판 중에 부족을 탈퇴해도 재판은 유효하다는 의견서를 보내왔습니다.

 

 

#19

20살이 되자 부족장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기본법에 35세로 정해 놨습니다. 제가 정한 거였죠. 변호사 출신 부족장은 임기를 3년 남기고 급여가 적다는 이유로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다른 부족으로 가겠다며 부족을 탈퇴했습니다. 저도 교수들이 세운 부족에서 법학 강좌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경제 보좌관에서 사임했죠. 탈퇴는 안 했어요. 학위 없는 법학자의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제 메모를 찾아주신 분께 감사합니다.

9개의 댓글

2019.02.08

듀랑고가 의외로 심오한 게임이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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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
@loststar

듀랑고가 심오하다기보단 글쓴이가 심오한척 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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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

망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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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

이런거 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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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

소설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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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
@숮토끼

소설 맞음 자원 하나 캘 때마다 하나씩 언락되는 소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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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보다 설정이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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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니깐 파리대왕 순한맛같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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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

듀랑고도 폴아웃 볼트처럼

 

워프 생존자들 마다 부족마다 스토리나 성향 세계관 짜놓았으면 재밌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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