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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장자 제물 사건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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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부 나뉘어 지긴 하지만 이것만 봐도 상관은 전혀 없도록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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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화는 신을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산 제물로 바치려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아케다 사건이라 부르며 신과 인간의 사이가 어떤 것 인지 보여주는 종교계의 가장 거대한 논쟁점이자 고민거리였죠. 종교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함에 있어서 이 사건은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이유는 종교와 삶 그리고 윤리, 이 세 가지는 인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나 결코 각자를 떼어 놓을 수 없는 긴밀한 사이인데 아브라함의 장자제물 사건은 이 세 가지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일화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 하나하나 차근차근 짚으며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은 여호와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자식이 없던 아브람은 신을 향한 지금까지의 순종에 대하여 보상으로써 자식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자손이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라 약속받게 됩니다. 또한 그 자손들을 위해 이집트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의 토지를 자손의 땅으로 약속 받습니다.

 

아브람이 가장 먼저 받은 보상은 아내 사래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얻은 첫 아들인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자식이 없으므로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을 보낸 것인데 하갈은 자기가 임신했음을 알고 사래를 멸시합니다. 참지 못한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를 알리게 되어 하갈은 되려 사래에게 학대받게 됩니다.

 

하갈은 광야로 도망쳤고 여호와는 하갈에게 찾아가 도로 사래에게 돌아갈 것을 명령하는데 이스마엘의 자손 역시 셀 수 없이 많이 늘어나게 해준다고 약속합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려 하는데

이슬람교의 쿠란에서는 아브라함이 신께 바치려던 제물이 이삭이 아닌 이 이스마엘로 기록됩니다. 창세기에서도

여호와가 번성의 약속을 한 것은 이스마엘이었고 (16:11, 17:20)

이삭에 대해서는 언약의 약속과 신에 의한 정통성이 존재합니다. (17:19, 21:12)

 

, 이스마엘에게는 자손이 셀 수 없이 늘어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삭에게는 그와 언약을 세워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남게 한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슬람은 정통성을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라 하더라도 첫 아들로써의 계승권과 그 번성의 약속을 중시하는 것이며

 

유대교는 정실부인인 사라의 아들, 이삭이 신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세우는 것과 신의 의한 정통성을 중요시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사성을 따지자면 유대교의 모세 5경 중 일부인 창세기가 단연코 더 오래되었고 쿠란은 기원후 5~6세기에 만들어 진 것이기에 쿠란이 재해석을 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이슬람교에서 쿠란은 신이 자꾸 그릇된 신앙을 하는 인간들을 위해 내려준 완전한 성서로써 보기에 이는 신앙의 관점으로써도 존중해야 합니다.

 

이스마엘 출생 후 여호와는 또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 할례를 할 것을 명령하고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꿀 것으로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후 낯선 나그네 셋으로 나타난 여호와는 다시금 자손을 줄 것을 아브라함과 사라 둘에게 약속합니다.

 

이윽고 사라는 이삭을 임신하고서 낳게 됩니다. 그리고 이삭이 젖을 떼던 날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라에 의해 쫓겨납니다. 그들이 이삭을 놀렸다는 이유였는데 아브라함은 이로 인해 근심하지만 여호와는 이스마엘로 하여금 역시 한 민족을 세울 것이니 걱정 말고 떠나보내라고 말합니다. 이슬람교는 쫓겨난 그들이 세운 나라와 민족이 이슬람이라 믿습니다.

 

이스마엘을 떠나보내고 난 후 얼마 뒤 여호와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반대로 쿠란에서는 이스마엘의 추방 이전에 아케다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건 이삭이건 간에 실제로 제물로써 바치려 했고 사실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하려던 목적이던 여호와는 이를 막고서 순종한 아브라함과 아들을 칭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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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화에서 우리는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간에 극심한 부조리함을 느낍니다. 실제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이 신에게 그런 부당한 명령을 받았을 때 진심으로 아들을 바치려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요하는 일화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창세기로 치자면 아브라함은 얼마 전 이스마엘을 떠나보냈기에 이삭이 유일한 상속자이며 미래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미래나 희망 같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숭고한 가치마저도 신이 바치라고 했을 때 바쳐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의문은 종교를 믿거나 믿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거대한 의무감에 의한 신경증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의 순종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 인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가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보자면 여호와는 단순히 하란에서 떠나라고 말한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 일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장자제물 사건까지 보았을 때 신이 그에게 해준 것은 그저 살던 땅을 떠나면 부유하게 해준 다는 것을 약속하고 축복을 내려주었으며 이집트에서 아내를 뺏길 뻔 했을 때 막아준 것, 아들을 준 것 뿐입니다.

 

여호와란 아브라함의 삶에 있어서 이익을 약속하는 대신 신앙과 순종을 요구하는 알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일 뿐 그 어떤 신학도 사상도 철학도 없는 사실상 민담 속 정령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여호와가 좀 더 긴밀한 사이이며 더 많은 대화를 나눴을 수 도 있지만 창세기만의 내용이라면 이때까지의 여호와는 신이라고 보기에는 그저 기적을 일으킬 뿐인 매우 빈약한 존재입니다.

 

물론 이 사건 이전에 여호와는 타락했다고 말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실현시켰습니다. 무엇이 악한 것인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은 아직 창세기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그저 타락했다고 멸망시켜버리는 여호와의 사상은 여지없이 모세의 정복기에 등장하는 전쟁신적인 면모를 지닙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정말로 악한 것은 맞는지에 대한 성 윤리 문제와 모세와 아브라함의 신인 여호와의 전쟁신적 면모 등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하기로 하고 그들이 악하다는 이유로 유황과 불로 전멸시켜버리는 신의 모습에 아브라함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악을 절멸시키는 여호와는 정말로 선하고 정의롭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분명 그에 앞서 여호와란 존재에 대하여 공포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의 학살예고 앞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든 그 학살을 막아보고자 소돔과 고모라에도 의인이 있을 것이며 그들조차 멸하겠냐며 신과 협상을 시도합니다. 의인 오십 명에서 시작된 협상은 열 명까지 떨어지지만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이 열명도 되지 않는다고 신은 판단합니다.

 

여호와의 선악에 대한 판단이 어떤 것인지는 출애굽기 이후 십계명과 민수기에서 자세히 드러납니다만 회개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저 학살을 하는 것을 출애굽기 이후나 창세기에나 변함은 없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과 유황 세례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많은 인간을 몰살하는 신의 능력 앞에 좋던 싫던 공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을 통해 아케다 사건을 논합니다. 다만 이 책은 보편에서 초월해 고립된 독립자가 된다는 그의 사상이 드러나며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인 윤리에서 벗어나 초월해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종교적 실존으로 들어선다며 그의 행위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윤리를 초월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간 것인지 더 그른 방향으로 간 것인지에 대해서 키르케고르는 종교 실존적 삶을 경외할만한 무조건 더 나은 방향으로 설명해버리기에 사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누가 보아도 그저 신의 힘 앞에 굴복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죽이는 것이 옳기 때문에 행한 것이 아닌 신의 명령이기에 행한 것이며 신의 명령이기에 무조건 올발라야만 하며 복종해야만하기에 행한 것입니다. 악한 것을 싫어한 다는 신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 시켰는데 정작 악한 것은 싫으면서 인간을 학살한다는 최악의 선택을 하는 그의 모순 앞에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복종만 할 뿐입니다. 이것은 오늘 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유일신교 신자들은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후 영원한 고통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신앙생활을 하는 마음이 적든 많든 간에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그들은 신이 옳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한다고 그 공포심을 부정하려 들지 모르겠으나 그 공포심이 일절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뻔한 거짓말입니다.

 

문제는 그 공포심 때문에 종교 신자들이 신을 적대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신의 악한 행동에 대해 악하다고 비난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루어진 그 엄청난 악행들에 대해 일신교 신자들은 모른 척 하거나 정당화시키려고 하며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에 대해 인간은 어리석으나 신은 현명하므로 모두 옳은 일일 것이다.’ 라고 쉽게 넘어가 버립니다.

 

신은 선 그 자체라는 발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고 모든 윤리관을 신에게 맡겨버리는 행동인데 이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근본적 이유가 정말로 신이 현명함을 인간에게 증명해보였기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의 초월적인 능력에 공포심을 가지고 그의 말에 복종한 결과인지는 매우 중요한 논쟁점입니다.

 

우리가 보통 선악을 따질 때에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선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물론 악도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복종행위가 종교 신자들에게 있어 그렇게 칭송의 대상이 될 정도로 숭고한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그저 의구심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그 행동을 올바르다고 말할 만한 이들은 권력과 힘 앞에서 순종하는 것을 인간의 가장 올바른 행위로 주장하는, 독재를 정당화하려는 지배층과 그들의 어용학자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공포에 의한 순종이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인가? 라는 결론에 다다르면 신에 대하여 끝없는 실망감만이 남게 됩니다.

 

여호와가 구약 성경에 보여준 모습에서는 그러한 의도 외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내가 대량 학살을 하겠다는 의도는 십계명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는 구절이 무색해집니다.

 

신 스스로는 구속하지 않으나 인간만을 구속하는 윤리관이 과연 옳은 것인지, 신의 초법성을 떠나 악한 민족이라면 아무 죄도 짓지 않았을 어린아이라도 무차별 학살하라고 명령하는 신이 정말 복종할 가치가 있는 대상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점이 됩니다.

 

즉 우리는 지옥을 두고 인간을 협박하는 신에게 공포감을 느껴 신앙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해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날 타인을 위하여 헌식적인 봉사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윤리적 종교를 따르는 이들인데 다만 예수는 권력을 무한대로 휘두르는 신의 정체를 사회의 약자 그 자체로 바꾸어 놓는 개혁을 시도했으며 구약의 여호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신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예수의 윤리형 종교를 따르며 구약의 여호와를 무작정 올바른 정의의 화신으로 보는 모순을 가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가 구약의 여호와를 인정하는 부분이 신약에 존재하므로 무작정 떼어놓고 보는 것도 논리적으로 문제는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각 학문적 시선에서 오는 차이로 신학적으로 신의 아들 예수로써 분석하는 것 외에 철학자 예수로써의 모습으로 보는 시도에선 권력의 대변자인 신을 윤리의 대변자로써 개혁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윤리형 종교를 따른다고 해서 구약의 여호와의 악함을 선하다고 정당화할 이유는 없으며 지옥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저 욥기에서 욥에게 신이 가르쳤던 것처럼 신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은 어리석을 뿐이니 그 의도와 목적을 알아채지 못해 사실 악으로 보이는 대학살이 지극히 선할 수도 있음을 어리석어서 알아채지 못 할 뿐이라며 합당화합니다.

 

구약의 신이 악하지 않고 선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논지는 대개 이와 같습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신의 대학살이 모순을 일으키지만 인간이 그저 어리석어서 사실 모순이 아니나 알아챌 수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며 신 자기 자신은 스스로 만든 계명에 속박되지 않는 초법성의 존재이기에 인간을 학살해도 악이 되지 않는 것이라며 정당화해주기도 하고 거대한 계획 앞에서 일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그들이 당장은 죽었으나 마지막 때에는 다시 살아나니 신의 시선에서는 죽인 것이 아니기에 악이 아니라는 신학적 해석으로 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의 시선에서는 이것이 너무나도 권력자의 독재를 미화하는 방식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해 선한 의도와 목적만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비종교인들의 신이라는 존재의 기대감 앞에서 여호와는 너무나도 그 과거가 추악합니다.

 

결론을 내리고서 요약하자면 그 비윤리성을 뛰어넘어 여호와를 신앙해야 하는 이유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한 목적이라면 종교 신앙이 그 의도가 너무나 1차적인 수준의 욕망행위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좀 더 숭고하고 고차원적인 행위여야 하는 것은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인정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리의 많은 종교들이 지옥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신을 믿을 것을 권해옵니다. 그들의 종교는 선행이나 봉사, 사색과 철학에 기반을 두지 않은 공포의 종교입니다.

이런 방식의 공포감에서 오는 종교와 더 나은 윤리관을 위한 종교 사이에서 사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전자의 입장이면서 후자를 주장을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더더욱 끔찍한 지옥의 고통을 피하려 종교를 믿게 되지만 너무나 1차적인 욕망 행위같은 종교생활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선행과 지적활동의 연장으로 종교를 한다고 포장을 시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수많은 종교가 어느 정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종교들에서는 문제점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종교가 명령하는 비윤리적인 악한 행동이 종교라는 이름하에 숭고한 윤리행위로 포장될 수 있게 됩니다. 종교의 공포 앞에서 자신이 지옥에 가지 않으려 하거나 천국에 가려고 하는 1차적 욕망 순종행위가 지극히 선한 윤리적 행동으로 탈바꿈 되어서 타인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윤리를 구성하는 것은 크게 6가지로 구성되어 질 수 있습니다.

 

-법적인 윤리

-사회문화권에서의 윤리

-종교적인 윤리

-세계 보편적인 윤리

-개인적인 윤리

-이데아적 윤리

 

이중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인 윤리들은 법적, 사회문화권, 세계 보편적 윤리들인데 종교적 국가가 아닌 이상에야 이 세 가지 윤리들이 가장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윤리입니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라는 윤리는 법적으로도 금지되며 전통적인 사회문화권 가르침에서도 금지되며 세계 보편적 윤리 역시 금지하고 종교적 윤리에서도 대개는 금지합니다. 다만 종교적 윤리에서는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 예외가 발생한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보편적 윤리에 있어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군인으로써 죽이는 것, 악행에 직면 했을 때 정당방위로써 죽이는 것 정도 외에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윤리는 전근대적인 면모가 남아있어 간통을 한 여인을 죽이는 것, 신을 모욕한 자를 죽이는 것, 종교를 믿지 않는 자를 죽이는 것 등이 정당화 됩니다.

 

신이 그러라고 했기에 이를 지키는 것이 타인을 죽이는 행위라 하더라도 악행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악행들이 종교적 윤리관에 있어서는 정당화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여인을 강간하더라도 구약 성경에서는 그 부모에게 합당한 은화를 주고 아내로 삼으면 악행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반대로 악행이 아닌 행동들이 종교적 윤리관에 있어서는 악행이 되기도 하는데 동성애가 오늘 날 악행으로 비난 받지 않으나 몇몇 종교적 윤리에 있어서는 그들을 죽여야 할 만큼의 악행입니다.

 

즉 보편적 윤리와 상충되는 점이 존재하기에 오늘 날 수많은 국가의 보편적 윤리가 종교적 윤리와 부딪히게 됩니다. 현재 큰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난민 문제와 연결 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권과 윤리관을 기초로 국가를 세우며 그 근본에 헌법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 헌법은 종교 국가가 아닌 이상 어떤 종교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전제주의가 아닌 이상 어떤 일정한 단체나 개인을 차별하지 않는 선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이를 전부 충족하는 것은 사실상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 한정되는 것이지만 현대의 국가체제 중 가장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는, 문명의 발전도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최선의 체제이기에 이를 기준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은 신분의 차이, 성별의 차이, 재산의 차이, 인종의 차이가 어떤 구성원에게 더 많은 이익을 제공하거나 반대로 손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되는 평등 사상이 기초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기초로 하는 일신교의 율법들은 고대에 쓰여 졌다는 특성상 그렇지 못합니다.

 

신분, 성별, 인종에 대한 차별 대우를 그들의 성서에서 합리화 시키며 나아가 이러한 차별대우를 하지 않을 시에 신의 처벌이나 그들의 공동체에 의한 처벌이 약속됩니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은 구성원들이 각자의 요구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딜레마에 빠질 수 있지만 그에 앞서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은 그 각각 구성원들 간의 분쟁이 가능한 일어나지 않도록 중립의 입장을 띄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완전히 중립의 입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 국가를 만들고 그 헌법을 제정한 다수의 민족, 인종의 윤리관, 사상이 사실상 국가를 움직입니다. 어떤 단체나 개인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소양이지만 국가라는 것 자체가 어떤 사회 문화권, 지리권역 단체가 자신들의 보호와 이익을 위해 만드는 것이기에 현대’, ‘민주주의라는 속성이 붙는다 해도 그 근본 속성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대개의 현대 선진 국가들의 구성원들이 평등사상을 가지고 신분, 성별, 재산, 인종 차별을 막고 범죄시해도 그 다수의 구성원이 원하는 일이기에 자연스럽고 정당한 민주주의 국가적 행동입니다.

 

국가의 다수가 평등을 원하는 상황에서 평등하지 않은 종교를 들고 왔을 때 이는 헌법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헌법이 평등을 말하면서도 종교의 자유를 말할 때 어떤 종교가 불평등을 요구한다면 그 종교 역시 자유를 얻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 에 대한 모순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고민해보면 사실 쉽게 답이 나옵니다.

대개 우리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려 하는 것을 악으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행위가 처벌받지 않고 확산 될 때 그 집단은 쉽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종교를 믿는 자들이 그 종교를 바탕으로 불평등을 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종교 내부에서 이익을 얻고 처벌을 피하려는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이들의 행동은 어떤 집단이건 간에 거부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종교적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손해를 감수시키고 체재를 부정하는 집단을 국가와 헌법이 부정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의 종교적 자유라 함은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로 보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타인들이 인간끼리 정해놓은 법보다는 신이 정한 율법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행위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법을 어기는 것에 대가는 잠시간의 고통일 뿐이지만 신의 율법을 어기는 것은 영원한 지옥의 고통이 대가로써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율법 즉, 종교적 윤리는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고 그 처벌의 대가를 종교 집단에 의한 처벌, 혹은 신이 인간을 죽이거나 지옥으로 보내는 법규입니다. 인간이 인간끼리 서로의 이익을 지키고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법은 왜 지켜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으나 율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신이 하라고 했기에 해야 하며 하지 말라고 했기에 하지 말아야 할 뿐, 신이 그것을 왜 요구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종교집단은 그저 그것이 선한 행위이기에 선해야 하며 악한 행위이기에 악해야 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신은 예수 이전에는 그 무엇도 인간에게 설명해주지 않는 매우 불친절한 신입니다. 악한 민족이 왜 어떻게 얼마나 악하고 왜 죽여야만 하는지 애초에 악한 행동이 왜 악한지 자신을 신앙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이루어져야하는지 각종 제사는 무슨 의미이며 왜 해야하는지에 대해 일절 침묵하고 그저 죽여야 하는 이들을 지목하고 때로는 직접 죽이며 벌을 줄 뿐인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민족에게 약속한 수많은 할례, 성관계, 음식, 행동에 대한 수 많은 제약들에 대해 상세하게 왜 그래야하는지 설명해주지 않고 그저 지킬 것만을 강제하고 지키지 않으면 직접 벌을 주던가 민족을 통해 벌을 내립니다.

 

오늘 날 이 문제로 가장 크게 불거지는 것이 성윤리 문제입니다.

구약 성경은 아이를 낳기 위한 성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행위를 금지시킵니다. 자위와 동성애는 물론이고 부부간에도 아이를 낳으려는 목적 외의 쾌락을 위한 성관계는 금지됩니다.

성욕에 따른 성행위가 왜 그른 것인지에 대해 신이 일절 설명을 하지 않고 그저 금지만 시킵니다.

 

1차적인 욕구를 지향하는 미적추구 상태는 예수는 물론 부처 또한 경계해야하는 행위로 구분하지만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미적추구 상태가 인간의 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부처와 예수는 1차적 욕망을 제 1원리로 생각하는 인생의 허망함을 경고한 것 뿐입니다. 윤리적 추구 상태와 종교적 추구 상태는 인간의 올바른 삶을 지향하며 미적 추구를 더욱 나은 방향으로 옮기고 지속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결코 미적 추구 그 자체를 그르다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정보의 전달을 위해 언어를 만들고 목판과 석판을 만들어 문자를 남기기 시작했으며 종이를 만들어 보존과 유통을 용이하게 발전시켰습니다. 이후 인쇄술이 발달하고 전화를 통해 장거리 정보 전달을 쉽게 만들었고 tv로 화상정보 전달을 시도하고 인터넷을 통해 광역 대량정보 전달이 성취됩니다. 이 모든 것은 윤리적 추구나 종교적 추구가 이루어낸 것이 아닌 더 나은 현실을 추구하는 미적 추구가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현실의 추구를 마냥 수준 낮은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지혜의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은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조심해야합니다.

 

따라서 성욕이 1차적인 욕망 추구 행위이기는 하나 이를 무작정 수준 낮은 것으로 배제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일 뿐입니다. 인간의 성욕 또한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인류가 올바르게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지 없애버릴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호와는 구약에서 성욕을 무조건 그른 것으로 평가하며 생산을 하지 않는 모든 성적 행위를 금지합니다.

 

물론 여호와가 금지한대로 모두 따르는 종교 신자들도 존재합니다만 이들은 내부에 심각한 모순점을 지니고 있으며 반대로 신의 명령에 타협을 하는 종교들도 많이 존재합니다. 다만 타협을 하고 있는 종교 신자들은 악한 성행위를 취사선택하며 일부를 그르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둘 다 율법을 모두 따르건 취사선택 하건 간에 자기들이 그르다고 평가한 성 행위를 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동성애 문제일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대부분이 이성애자이기에 이루어지는 차별 행동인데 신이 금하고 있는 생산을 하지 않는 일반적인 성행위는 누리면서도 자신이 하지 않는 동성간 성행위에 대해서는 금지하는 지극히 적반하장 스러운 행동입니다.

 

자위, 비가임시기의 성행위 혹은 콘돔을 쓰는 불가임 성행위 등에 대해서 대개의 종교들은 현재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일반적인 신도들이 지킬 수도 없을뿐더러 지키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런 율법을 강요하는 종교는 일반 신도의 대거 이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대개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여호와 일신교들은 금지하고 있는 율법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현재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으로 신학적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동성애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은 넘어간다고 쳐도 신약인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악으로 규정된다며 우상숭배, 살인, 절도와 같이 취급합니다. 또한 신약인 로마서에서 동성애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불순종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동성애를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는다고 보며 후천적인 선택의 결과인 악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것은 생산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성욕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사상에서 오는 것이며 이성애자들의 자위나 임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모든 성행위 역시 그르다고 평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그르다고 평가하는 것은 예수의 사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그를 수 밖에 없으며 온전히 선할 수가 없으니 스스로를 선하다고 여기지 말자는 것이 예수의 근본 사상입니다. 율법을 모두 지키는 바리새파들이 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타인을 미워하는 것으로 이미 살인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타인의 물건을 원하는 것만으로 절도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평가하는 것이 예수의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 살인, 절도를 당연히 하지 말아야하는 것처럼 동성애도 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2천년 전 유대교의 사상에 불과합니다.

 

살인, 절도와 같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할 악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처럼 인간의 당연한 법도를 따르는 것이며 예수의 사상은 인간들의 법적 악행을 당연히 금지하면서 어려운자를 돕는 선행을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사상으로 보아야합니다.

 

즉 무언가가 악하니 그것은 하지 말고 그자들을 처벌하고 없애라고 말하는 사상은 구약의 사상이며 신약의 사상은 타인의 죄악을 꾸짖기 앞서 자기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깨닫고 온전한 선행을 추가적으로 하라는 사상인 것입니다.

 

신의 율법을 그저 그대로 지키는 종교야 그렇다치고 신약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들이 동성애를 비난하고 있는 모습은 예수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증명이 타인을 처벌하고 피해 주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되고

신앙의 증명이 타인을 도우며 헌신하는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예수의 사상입니다.

 

 

신의 명령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고민하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신의 명령을 쓰는 자에게 영성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읽는 자에게 영성이 깃드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는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며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율법을 인간을 중심에 맞춰 재해석합니다. 율법은 곧이 곧대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신의 뜻을 궁리하고 신의 목적이 인간의 선함과 윤리에 두고서 그에 맞지 않는 율법의 시행은 오히려 신의 뜻을 저버리는 행동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재해석권은 그가 신의 아들이기에 그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 모두를 신의 자녀로 보았기에 누구나 이와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하던 신은 신앙의 증명을 위해 자기 희생 혹은 타인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타인희생 신앙증명을 요구한 것으로 보는 측면에서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오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아들을 희생시킨 것으로 이스라엘 인을 위하여 가나안 인을 학살하라고 시키던 정복신으로써의 악함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일화 이후 인신공양을 금지했지만 그들의 정복전쟁기 자체가 신의 명령 하에 악독한 민족을 말살한 것이니 타 민족을 신에게 바치는 제사의 제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종교행위로써의 전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자기희생 신앙증명을 요구한 것으로 보는 측면에선 아브라함은 비록 자기 자신이 아닌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지만 더 이상 후손을 보기 어려운 그의 처지에 아들이라는 자신의 생명보다도 우선 될 소중한 것을 요구받는 자기희생적 신앙증명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은 아브라함의 헌신을 보기 위하여 제물을 요구한 것으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나 타인을 잔혹하게 살해할 수 있는지를 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즉 타인 희생 신앙증명이 아닌 자기 희생 신앙증명으로 그의 헌신을 보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악했던 점에 대해 비난 할 것은 비난 하더라도 이와 같은 해석에서 편협하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의 헌신을 보고자 인신공양을 요구했다는 점을 쉽게 간과해서도 안 됩니다.

보통 신학에서는 아케다 사건에 대해 예수의 죽음과 결부시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도 신의 아들도 제물로써 바쳐져야 할 운명이었고 그 운명을 초월해 아브라함의 아들은 살아나고 예수는 부활하게 되었다고 비유합니다.

 

제물이 되어야 할 아들에 시점을 맞추는 것 외에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하는 아브라함과 여호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신학적 해석도 존재하며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에도 관심을 돌려 샤갈의 그림에서는 사라와 마리아가 등장해 그들의 심정을 고민해보기도 합니다.

 

신의 자기 희생적 행동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 바라보았을 때 삼위일체론으로 아버지 신이 아들 신을 제물로써 인간에게 내주었다는 신학적 해석이 주류입니다만 삼위일체론은 2~3세기 카톨릭의 사상이며 성경의 해석에서 나온 신학자들의 시선일 뿐입니다. 신은 하나이나 인격은 셋이다라는 그들의 독자적 해석인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시각에서 해석하면 아들 신인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닌 여호와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었다는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읽는 자에게 영성이 깃든다는 개신교의 기초 사상으로 다양한 해석을 지식정보정도로만 보는 선에서 분석하도록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삼위일체를 공식으로 받아들이나 카톨릭의 해석이 반드시 옳은 해석이라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들이 잘못된 해석과 행동을 했던 사건이 한 둘이 아닙니다. 카톨릭은 성경의 해석을 신부에게만 허락하며 성경을 읽거나 소지하는 자를 약 400년간 사형시켰던 전적이 존재하며 면죄부를 판매하던 과거도 존재합니다. 그들의 신학적 해석에만 무조건적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은 세상 모든 이가 신의 자녀임을 말하던 예수의 사상에 되려 어긋납니다. 즉 카톨릭의 해석이 그를 수도 있으며 그들도 끊임없이 잘못과 개선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 집단입니다.

 

예수가 죽을 때에 신이 죽었다는 분석은 예수의 사상이 종교적 행위보다 윤리적 행위에 우선순위를 두는 예수의 사상에서는 기도 외에는 특별히 시행해야할 종교적 행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례식, 침례식, 안식일, 성찬식 등등의 예식은 추후 예수의 신자들이 제멋대로 만든 제사행위들이며 이러한 종교 활동은 사실 예수의 사상에서는 극적 딜레마에 두었을 때 아무런 효용도 없습니다. 사실 이런 예식을 하는 이들도 이러한 예식 행위는 그저 다짐을 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카톨릭에서는 신을 믿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은 바도 존재합니다. 예수의 사상중점을 윤리행위인가 종교행위인가로 양분했을 때 윤리행위만으로도 신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종교적 예식이 예수의 사상에선 사실은 아무런 효용도 없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 벼랑에 묶였던 프로메테우스와 같이 예수는 인간을 위해 구시대을 지배하던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신을 제물로 바치고 함께 죽었습니다.

 

즉 예수의 출현은 인류의 구식 종교 애니미즘, 토테미즘 식의 종교들의 종말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이전의 여호와는 각종 종교 행위로 그 존재를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증명해야 했으나 예수 이후 종교적 행위가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윤리적 존재로 세상에 계속해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많은 이들이 신을 믿지 않으며 학자들은 머지않아 종교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써 한번 학습된 선악의 개념이 사라질 수 는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 한 바와 같이 돌판 위에 새겨진 율법에 따르는 것이 아닌 마음 판에 새겨졌고 이웃과 형제들에게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칠 이유가 없어 졌습니다.

 

신은 예수를 통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윤리의 개념으로 생존하게 된 것입니다.

현실에서 어떤 효력도 지니지 않는 각종 종교행위들은 이제 종교행위가 아니게 되었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돕는 행동이 종교행위가 됨으로써 신은 인간의 윤리개념에 기대여 영원불멸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에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기독교가 사라지기란 어렵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가 사라지더라도 인류의 보편적 윤리는 뿌리깊게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것으로 예수의 사상 없이도 예수의 의도대로 인류가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 예수를 신앙하건 신앙하지 않건 간에 올바른  사회상을 목적으로 할 때 포함되는 수 많은 철학과 윤리 개념들이 예수의 사상 아래서 성장되어 온 것들입니다현대의 철학과 사상들은 좋던 싫던 서구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서구권은 기독교의 영향에서 벗어 날수 없으니 말입니다.

 

종교 없이도 선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예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인간이 선하게 사는 것 그 자체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는 윤리적 행동이야말로 인간의 올바른 종교행위라고 보았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쳤던 아케다 사건은 오늘 날 우리에게 타인을 위하여 얼마나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물론 예수는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하며 그만한 헌신을 요구해옵니다. 어느 정도로 우리는 윤리적으로 살 것인가? 이에 대해서 현실과 윤리 사이에서 고민했던 칸트의 철학은 생존이 윤리보다 앞설 때에 그것은 순수 악이 되기에 윤리가 생존에 앞서 제 1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의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 그리고 심적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현실에서 인간은 선하게 살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공산주의의 몰락에서 충분히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류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법제도를 개선하고 윤리에 대하여 얼마나 어떠한 기초 교육을 시킬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인류는 부처와 예수, 칸트의 사상대로 완전한 윤리를 기반으로 한 현실의 이익을 도외시하는 순수한 선의 인생을 살 수는 없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며 조금씩 전진합니다.

 

내세에 대한 공포 때문에 종교를 믿는 수많은 이들이 그 공포를 벗어나 주위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지옥과 같이 느낄 때에 비로소 올바른 종교가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부디 아브라함과 같이 그릇된 신의 명령에 고개 숙이는 구 시대적 종교에서 벗어나 공포에 떨지 않으며 마음 판에 새겨진 진정한 윤리적, 종교적 삶을 살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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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글에서 예수에 대해서 좀 대충 넘어가는 감이 있는데 이전 글들에서 충분히 설명해서 


또 쓰기는 뭐해서 그런 거다. 흥미있으면 이전 글들 찾아보면 됨


자꾸 꼬리에 꼬리 물면서 글이 길어지더라고 가능한한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정리하려고는 했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다음 글은 아마 0000년의 종교와 철학과 사상 이라는 제목으로 쓸 것 같음


마지막으로 살펴보니까 조금 너무 스압인 감이 있네


어쨋든 또 당분간 ㅂㅇㅂㅇ

41개의 댓글

2018.07.31
너무 멋지고 유익한 글이었다. 작성자야 덕분에 좋은 글 볼수있어서 정말 고맙다 추천누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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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1
음...길게 적는다고 수고했고, 저번 글에서 내가 몰랐던 많은 사실들을 알려줘서 고마웠다. 그런데, 결국 이번 글에서 본인의 주장이 나오게 되니 실망스럽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네.

본인이 주장하고 싶어하는 내용은 알겠는데, 그 근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우선 방법론이 잘못되었다. 첫 번째로, 저번 글과 이번 글은 크게 보아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3단계 실존에 대한 설명 중 세번째 단계인 종교적 실존보다는 윤리적 실존이 더 옳다고 주장하는 내용인데,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왜 윤리적 실존보다 종교적 실존을 강조하였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느껴진다. 이는 뒤에도 설명하겠지만, 글쓴이게서는 종교나 인간 심층의 심리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 부족해보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죽음과 실존에의 불안,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누미노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윤리적 실존을 긍정한 것이 아니라 이것도 뚜렷한 한계가 있는 진정한 실존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걸 그대로 이용하여 윤리적 실존을 종교적 실존보다 우위에 둔다는 것은 마치 한의학을 까기 위한 현대의학의 논문을 인용해서 한의학의 유용성을 증명하고 있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마찬가지의 오류가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언행을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데서 드러나는데, 우선 복음서라는 곳에 적혀 있는 예수의 언행이 진짜 인간 예수에게서 발화된 말인지 현재로써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즉, 이 글의 저자는 복음서 기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복음서 기자들은 '호교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언행을 예수가 죽음으로 신이 죽었다던지, 유대교의 신이 아닌 우리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신이라던지 하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한다는 것은 복음서 기자의 의도와 배치될 뿐더러, 복음서가 기록된 배경이나 복음서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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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항상 글 읽어줘서 고맙다 ㅇㅇ 근데 나는 순전히 정보만을 제공하는 글을 쓰려는게 아니라서;; 내 주장이 들어가는거야 어쩔수 없지

키르케고르는 완벽한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고 봐서 교회에는 비판적이나 기독교 신자였기에 그 사상이 묻어있어 윤리적 절망이 나오게 된 배경이 예수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까. 모든 인간은 완벽하게 선할 수가 없어서 윤리적 절망을 겪게 된다고 봤지. 이전 글들에서 설명했던 부분이야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실존 이후 종교적 실존으로 접어들게 된다고 보는데 스스로도 완벽한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종교적 절망) 신과의 단독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종교적 실존으로 접어들게 된다고 말했어

문제가 있다면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설명할 때에 아브라함은 아직 아들을 죽인다는 악행을 실행할 수 없는 윤리적 추구 상태라고 보았고 보편적 윤리를 초월해 신과 단독해서 보편적인 윤리를 초월하고 종교적 실존에 접어든다는 주장을 했어.

그로인해 어째서 보편적 윤리가 신과의 단독 이후 초월한다면 배제해도 되는 수준낮은 것으로 치부하는가? 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그는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 대해 아브라함의 초월과 선택에 찬양을 하며 끝을 내버릴 뿐이야.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다는 말을 서두에 써놓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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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그는 보편을 초월해 고립된 단독자가 된다는 사상을 주장했던 사람이고 보편에 속하는 윤리역시 초월의 대상으로써만 바라봤어

그러나 나는 보편적 윤리가 보편적 종교와 초월된 종교보다 하위에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물론 보편적 윤리가 다수에 의한 악행이 될 수도 있고 감옥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오늘 날의 세계 보편적 윤리는 어중간한 종교의 율법보다는 더욱 숭고한 위치에 오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야

쿠란을 보았을 때 여성차별, 신분차별, 인종차별이 허락되어 있고 구약 성경 역시 말할 것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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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나는 오늘날의 인류가 쌓아온 보편적 윤리가 구 시대의 종교들의 율법보다 결코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보편적 윤리의 성장에는 예수의 사상이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나는 예수를 구시대 종교에서 벗어난 초월자라 보고 있어

즉 오늘 날 키르케고르의 사상으로 보자면 2차적 보편윤리에 불과한 것이 사실은 3차 초월의 개념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 것이고

여러글에서 키르케고르를 각각 다루다 보니 내 생각들이 충분히 전달이 안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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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그리고 복음서의 오류는 충분히 알고 있어

자유주의 애들이 그런거에 토씨하나하나 달아서 무슨 말이 사실 예수가 한것이고 아닌가를 분석하고 있으니까

다음번 글이 0000년의 종교와 철학과 사상이라고 써놨는데 거기서 예수 출생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던 종교들을 분석하며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역사적 인물이라 분석한다면 그 사상들은 어디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인가? 를 주제로 쓰려고 하거든

걱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제반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
여기서 논하지 않는 것은 그저 주제에 벗어나기 때문이야 그런걸 전부 다루면서 아브라함에 대해 쓸 수는 없잖아
각 글에 주제가 있어야 쓰기 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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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엘티샌드위치
글을 쓸 때 늘 고민 되는 것이 어디서 어디까지 다뤄야 하나의 글로써 조잡하게 되지 않는가 생각하게돼

예전에 글쓰기를 배우지 않았을 때 이것때문에 늘 글이 더럽게 써졌거든

지금은 쓰고 싶은게 많더라도 적당히 자르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단점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됬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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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1
최근에 종교계의 행태를 보면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불교나 어떤 종교던지 욕을 들어먹어도 싸다고 생각하지만, 각 종교는 저마다의 깊은 지평이 있고 그것은 단지 내세에 대한 불안이라던지 지옥에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 미안하지만, 글쓴이는 종교에 대한 지식은 많으나 종교란 것의 정수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글쓴이의 주장은 종교라는 것이 인간을 도덕이라는 굴레에 묶어놓을 뿐 진정한 자유를 주지 못한다는 니체나 마르크스의 주장과 비슷하기는 하나 솔직히 말하면 그들보다 매우 세련되지 못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끝으로 저번에도 댓글로 적었지만,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는 실패한 치기 어린 젊은 사상가/선동가일뿐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거꾸로 그의 언행이 재평가받게 된 것이지,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그의 사상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고 글쓴이가 그렇게까지 높은 평가를 할만한 사상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니, 아마도 우리는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믿음의 영역이지만, 그의 모든 사상과 기독교의 존립자체가 그가 부활에 걸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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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나는 종교를 엄청나게 좋아하면서도 싫어하고 있어
머릿 속에서 무신론 자아와 유신론 자아가 늘 토론하면서 싸우고 있지

모르면서 깔 수는 없기 때문에 배워야 했고 무신론적 자아는 언제나 극단적 딜레마를 시도하면서

어떤 것이 사실 쓸모없는 종교행위인가? 를 찔러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나는 가차없을 수 밖에 없어

특이하게도 불교를 배울 때는 무신론 자아가 늘 구석에 박혀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불교는 지옥이니 뭐니 하는 종교가 아닌 스스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종교였기에 극단적 딜레마가 전혀 통하질 않았어 해석권이 부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나 미생에게도 있다고 보는 불교의 특성상 아니면 아니고 맞으면 맞는 식이었으니까

이런 불교의 영향인지 나는 해석권이 개인이나 특정 인물에게만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됬어 대부분의 종교가 그런 형태를 띄고 있기에 그런 종교에 대해선 다소 공격적이게 됬고

암튼 나는 유신론적 자아 때문에 종교 역시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어서 종교의 정수라고 말한 것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니가 보기엔 아닐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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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그리고 예수의 부활같은 건 종교인이 아니라면 예수의 제자들이 지금 껏 모아온 지지자들과 영지주의와의 융합을 시켜 부활했다고 선동한 것은 아닌가? 라는 식의 공격이 가능해

내 무신론적 자아는 그런 방식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인정하게 만드려면 그 철학의 심오함을 탐구하는 수 밖에 없었지

니가 말하는 것 처럼 예수의 사상은 별로 특별한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어
신이 왕과 권력자의 대변자로써가 아니라 약자들의 대변자로써 끌어내린 시도는 예수가 처음이었고 이로 인해 신을 통한 정통성이 인간 모두에게 주어지면서 평등 사상이 대두되는 핵심 열쇠가 되었으니까. 물론 그리스의 민주주의라던가 프랑스 혁명이라던가 다른 중요한 부분들 역시 존재하기에 현재 우리가 평등을 누리고 있지만 말야

난 딱히 예수가 부활했건 안했건 상관 없어 그런 신비한 기적이란게 없다 해도 2천년전 예수라는 인물상을 나는 좋아하니까

부활이라는 기적이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면 그것은 증명이 불가능하기에 사상누각이 된다고 생각해
그냥 제자들에 의해서 조작이 되었건 안되었건 예수와 제자라는 집단이 만들어낸 '예수'라는 인간의 철학을 탐구하는게 내 삶의 목적 중 하나니까 계속 글을 써나갈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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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비엘티샌드위치
내가 워낙 공격적으로 써서 기분이 상했겠지만, 그래도 대응해줘서 고맙네.

너의 주장은 '그러나 나는 보편적 윤리가 보편적 종교와 초월된 종교보다 하위에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오늘 날의 세계 보편적 윤리는 어중간한 종교의 율법보다는 더욱 숭고한 위치에 오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야'가 주된 것 같다. 맞니?

그런데 네가 말한 보편적 윤리라는 것에 우리가 절대적인 가치를 두어야하는 이유가 뭔지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네가 말한 보편적 윤리라는 것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이 믿고 있던 신이나 꾸란의 신과는 달리 동성애자들을 죄악시하지 않고, 여성차별을 하지 않는 등 좀 더 세련된 형태의 현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일 뿐이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과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내가 볼 때 너는 '신 앞에선 단독자'라는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니체의 주장을 인용하면 보편적 윤리를 따라야 된다는 생각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결국 인간을 노예의 상태에 빠뜨리고 말 뿐이다.

너의 그러한 보편적 윤리의 근거를 예수로부터 찾았지만 나는 너의 방법론이 그래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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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Clesis
복음서의 오류를 지적하자는게 아니야. 여담이지만, 자유주의 신학자 이외에도 정통 신학자들도 역사비평이나 본문비평은 당연히 수용한다. 바트 어만 같은 사람은 내가 볼 때는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정통 신학자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4대 성인이라고 하면, 보통 소크라테스, 붓다, 공자, 예수를 이야기하는데 그 중 예수라는 사람은 복음서에 따르면 길게 잡아 3년, 짦으면 1년 반 정도의 공적인 활동을 했을 뿐이지. 나머지 성인들은 그 당시 평균수명의 이상의 삶을 살면서, 평생을 자신의 가르침을 베풀었고 집대성하였는데 반해 그의 활동 연한은 너무나 짧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비기독교적인 자료는 놀랄만큼 적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거야. 어떤 학자는 예수는 실제로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까지 이야기하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람이 4대 성인이 되었을까?

바로 부활에 달려있는거야. 그가 실제로 부활하였든, 영지주의자들과 융합했든, 제자들이 환상을 보았든 상관없이 예수의 부활신앙에 의해 기독교가 시작되었다는 거야. 네가 말한대로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존립은 그렇게 위태로운,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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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Clesis
그러니 부활신앙에 의해 복음서든 바울 서신서는 요한의 서신서 등이 쓰여진 거란 이야기지. 그래서 부활이라는 건 잘 모르겠는데 예수라는 인간의 철학을 탐구하고 싶다라는 방법론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거야. 예수의 사상이 평등사상이 대두되는 핵심열쇠가 되었을 수 있는데, 그 사상이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거라니까.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런 사상 자체가 우리에게 알려질 일도 없었다는 거지. 고작 1년반에서 3년간 활동한 사상가/선동가가 얼마나 많았겠니? 그런 수 많은 이름 모를 철학자 중의 하나였을 거라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는 복음서라는 지도가 가리키는 곳이 있는데, 다른 곳을 가서 내가 남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곳을 찾았고 이게 바로 진정한 독도법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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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공격적인건 전혀 상관이 없다 넌 내 글 매번 읽어주잖아 너도 글썻는데 누가 다 읽고 난뒤에 조목조목 반박하면 그사람이 싫다는 생각 전혀 안들거다 ㅇㅇ 되려 고맙지
그래도 암튼 생각이 갈리는건 어쩔 수 없다 책 한권 분량 될때까지는 이쪽 방향으로 갈거야
7년간 종교에 빠져서 국내 이단들 순회공연 하고 2년 전부터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의 내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거니까
그리고 내가 사색해왔던 최종결론을 사람들하고 나누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한거라 그냥 '아 쟤는 저런식으로 생각해왔구나'하고 생각해줘 물론 계속 비판 하는 것도 환영이야 내가 글쓰는 재미중 네 비판 보는 재미가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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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다시 내글을 천천히 객관적으로 고민해봤는데 나는 인간들이 어떤 원리를 제 1원리로 삼고 살아야 하는가?를 가장 중점에 둔 것같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불교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고통도 마음을 다스려 행복하게 살면서 1차 미적 욕구 역시 배제하지 않고 인류의 발전을 계속 추구해 나가면 된다고 결론 지었었거든 예수의 사상 역시 혼합해 타인을 돕는 윤리 또한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야

문제는 마음을 다스려서 팔이 없어도 행복하고 눈이 없어도 행복하고 육체가 몽땅 사라져서 의식만 남아도 행복하며 죽음에도 두렵지 않게되는 상태에 이르러도 내세의 지옥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남는 상태였지

따라서 나는 내세의 지옥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보편적 윤리에선 옳지않은 악한 존재고 '나만의 해석에 따른 예수의 사상'하에선 신은 이제 윤리의 심사를 받고 윤리적이지 않으면 신이 아니어야 하니까 지옥은 없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다다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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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is
무 지옥론은 신학계에서도 주류대우 받는 사상임은 너도 충분히 알거야

뭐랄까 네 덕에 깔끔하게 생각을 정리하게 된것 같다 글 수정 할때 이부분도 추가하면 괜찮을 것 같네

네 말마따나 나는 잘못된 독도법으로 이상한 곳에 와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한 결과로써 결말지어진 이 상태의 내가 바로 나니까 어쩔 수 없지
저놈이 어디까지 가나 봐주면 고맙겠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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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2
@비엘티샌드위치
ㅎㅎ 너의 넓은 마음만은 이미 부처님 급인거 같다. 앞으로도 좋은 글 잘 부탁한다.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는 예수의 말이 진리에 대한 거라는거 알지? 계속 구도자의 길을 걸으면 언젠가 진리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고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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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애당초 있지도 않은일로 이렇게 심도있게 소설에 소설을 덧쓰는게 참 대단한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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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세줄요약 실종 부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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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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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얘들아 이건 개독이 아니라 신천지부류 사이비 삘 난다. 조심들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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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둥둥
내가 제일 고민되는게 이점이다. 가능한한 다수에게 거부감 없이 신학정보를 제공하려고 하는데도 이단이라는 거부감이 생겨나는거 ㅠㅠ
주류 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가가면 어쩔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겠지 뭐

신천지도 이단에 대해 연구할때 1년 반동안 침투해서 공부했는데 거기는 각종 종교예식으로 점철되어있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독교식 이슬람교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돼
하루에 5번씩 절을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거긴 2달간 교회 안나가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쳐 그런 뉘앙스의 종교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종교방식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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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2
이글 요약
https://www.youtube.com/watch?v=YPkXWtXQb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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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어린 글 꾸준히 재미있게 잘 읽고 있음요. 10년동안 교회를 다니면서도 개인적인 의미를 찾지 못해서 지금은 안나간다만, 이런 글 읽으면서 종교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되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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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3
고마워요 항상 잘읽고있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요즘 굉장히 힘든데 님글 읽고나면 버틸 힘이 생기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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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재밌게 잘 보고있음 근데 종교는 쓰레기 안믿는게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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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애초에 예수덕에 그나마 그럴싸하게 가공된거지,
원문 보면 참 신 답없다라는게 느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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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본질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꿰뚫고 있지 못하니까 이런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잘못된 관점으로 바라보고있는 거임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을 자식인 이삭을 통하여 자손을 번성케 한다고 하였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에 대해 믿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이삭을 죽이려 했던 것임(히11:17-19)
먼저는 약속을 하고 여러 능력과 성취를 보임으로써 여호와를 신뢰한 만한 근거를 먼저 주고 시험하는 것임. 일방적인 믿음이 아니라 약속과 근거에 대한 믿음을 바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약속에 대한 믿음을 신은 강하게 요하는가. 아담과 하와가 창2:17의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약속을 믿지 않았으므로 인간 세계에 죄와 악이 관영하게 되어 신이 떠나갔고, 절대적인 약속과 증거를 보여줌으로 사람에게 또한 절대적 믿음을 요구하는 것임
이라는게 본질적인 성경 상의 신의 관점에서의 흐름이고 여기에 대해 너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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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전제된 서론부터가 거를 타선이라 다는 안 읽어봤는데 대충보니까 꼼꼼하게 구신약 다 훑어가면서 연구한것도 아니고 다분히 추측에 따른 자기생각,관점 위주로만 서열해놨네
위에도 올렸다시피 히11장에서 본 바 신이라면 당연히 죽이더라도 부활시켜 줄 능력이 있으시겠지, 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한 것임을 알 수 있음. 너가 생각하는 거처럼 공포에 의해서 복종한게 아니라 그간의 예언과 성취와 기적,이적을 보이면서 충분히 신의 능력을 경험하게 한 후 이후 있을 사건 또한 믿게한 거임(히11:1이하)
그리고 이스마엘로 자손을 번성케 한단게 뭔 개뼉다구같은 소린지... 물론 이스마엘로 하여금 마호메트 코란의 기원이 되게하고 저 구절대로 번성케 하는 건 맞는데 근본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별처럼 많게 해주겠다, 너의 씨로 하여금 등등의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삭에게 해당됨 히11:16이하, 창21:12. 번성에 대한 상징성도, 언약에 대한 상징성도 전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 갖고있다는 말.
이건 진짜 기본적인 얘기인 건데.
보편적으로 기독교는 선민사가 중점이 되기 때문에 코란의 직계보에 해당되는 이스마엘은 성경 내의 약속의 중심에 해당할 수가 없다. 다윗 예수 등의 대표적 상징인물들의 직계 조상 계보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에만 해당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이걸 왜 설명하고있는지 손가락 아플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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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뭐이자식아?
뭐 나도 원글이의 관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너의 다소 근본주의적이면서 배타적인 신학관에도 동의하지 못하겠다. 아브라함 사건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을 현대 세계에 사는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가 있니? '인간제물을 바치게 하는 신이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은 당연히 근대 이후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질문 아니냐. 그런 질문에 대해 '그런 해석 방식은 본질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몰라서 하는 소리니 잘못된거야'라고 말한다면, 현대에서 기독교는 점점 자폐적이고 소종파적으로 밖에 변할 수 없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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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Clesis
뭐 무신앙인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깨너머로 들은 것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인신공양을 요구한 여호와는 사악하다, 라고 말하면 몰라서 저런거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성경에 대해 연구하고 개인적인 해석을 제시했단 사람이 제대로 알지도못하고 신이 이렇느니 저렇느니 하는 건 가소롭지. 내 말의 즉슨 아브라함의 인신공양은 부당하다고 하는 소리는 성경에 무지한 인간은 충분히 자주하는 소리지만 신학에 대해 접근하는 사람이 저딴 몽매한 지식과 자기 교리를 설파하는게 이단적이기 때문에 폐쇄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단 거지. 내가 언제 모든 사람이 본질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알아야 한다고 한게 아니잖아 단지 기독교에 대해 공부하고 견해를 제시하는 입장에서 저러면 안되는 거지 잘못된 인식만 조장할 뿐이야 이 본문은.
무조건 구신약을 대조하고 비교해 볼 때에야 비로소 올바른 검증이 가능한 거지 쟤처럼 구약만 파고들어서 추측하면 아브라함에 대해 저런 잘못된 소리가 나옴. 예수도 구약을 폐하는게 아니라 온전케 하기 위해 왔다고 한 것처럼 구약과 신약은 따로 보는게 아니라 같이 봐야 하는 거다.
그러니 위경이 아닌 정경인 이상에야 신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히브리서를 기자의 '해석'으로 받아들이면 안되고 딤후3:16이하로 받아들여야 함.
당연히 현대적 관점으론 이게 이해가 안 될 수 밖에 없겠지 신앙인을 위해 저술한 글이니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 봤을 때에야 이해가 가능하지. 최소 2천년 전의 글이기에 현대인의 관점과 상충되는 부분은 필시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아브라함 사건처럼 믿음과 약속의 상관성에 대한 영역은 기독교인만의 윤리관에 대한 영역이야
그걸 모르면 왜 아브라함은 망설임 없이 이삭을 바쳤는지, 신은 인신공양 (이라기보단 실제론 약속을 믿고있는지에 대한 시험)을 요구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 신과 사람과 언약의 상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성경속 신의 의도와 계획성을 알 수가 없음 그리고 쟤포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이상 그걸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왜 인신공양하니 마니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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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뭐이자식아?
자. 봐봐. 네 글을 읽어보면 너는 몇 가지 선입견(말 그대로 미리 네가 상정하고 있는 의견)을 가지고 있어.

1. 성경은 구신약을 대조하고 비교해 볼 때야만 비로소 올바른 검증이 가능하다.
2. 위경이 아닌 정경은 위경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며 이를 연구하는 사람은 이를 존중해야한다.
3. 성경은 현대인의 눈으로 비판하며 볼 것이 아니고 기독교적인 윤리관을 가지고 판단하여야 한다.

내 의견을 하나하나 간략하게 이야기해줄게.

구약은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적어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 경전이다. 이를 신약을 통해서만 구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종교인들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폐쇄적인 태도다. 또한 네가 말한 딤후3:16절은 구약 중에서 토라나 선지서들에게 한정되는 이야기이다. 이걸 다시 신약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써먹는 건 순환논리의 오류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적인 윤리관이라는게 어느 한순간에 정해져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때로는 외부의 논리를 도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형성되게 되는거지.
어떤 면에서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적인 윤리관이 나오게 된건데, 다시 이걸 기독교적인 윤리관으로 성경을 해석해야한다는 건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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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Clesis
뭔가 잘못 알고있네? 유대교 이슬람교와의 공통 경전이라고 하기엔 엄연히 다르다 예를들어 유대교는 토라와 전승인 탈무드가 기본 경전급이지만 기독교 구약은 모세5경은 유대교와 상통하나 그 외에 선지서와 역사서 시가서 등까지 모두 다 포함해서 구약이라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너의 말은 맞다고 볼 수가 없음.
그리고 그 차이점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점에서 정말로 중요한 부분을 내포하는데 말이야. 구약은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다. 그러나 모세5경은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와의 공통분모다 ㅇㅋ?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같이 봐서 성경인 거지 따로 구약은 유대교꺼고 신약은 기독교적 측면이 강하고 그런 말이 개헛소리란 말.
그리고 위경이 정경보다 뒤떨어진다란 말은 뭐 어느정도 내 생각과 들어맞긴 해 왜냐면 정경과 위경의 구분은 정경은 신약에서 구약의 성구를 인용한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구약을 정경이냐 위경이냐 구분짓는 척도인게 큰데 앞서 모두 다 얘기했듯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따로 취급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에, 그리고 신약에서의 언급이 없기 때문에 과연 선지자가 쓴 성경이 맞는가 사료하기에는 정확성이 정경보다 뒤떨어지기에 위경의 신성적인 권위가 낮을 수 밖에 없단 거임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이걸 선입견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내 말을 자꾸 억지로 곡해하는데 성경 자체가 아닌 아브라함 사건에 해당하는 부분이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해석하기 어렵고 이런 신앙적 숨은 의도가 담긴 내용을 무신앙인의 관점에서 보기 어렵단 말인 거지.
그리고 딤후3:16이하가 토라나 선지서들에 한정한다는 건 어디서 배운 해석인가? '모든'이란 수식어는 어디다 두고?
니 말로 따지자면 토라와 선지서 외에는 성경이 아니다, 라는 주장으로 판단하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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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뭐이자식아?
타나크(히브리어: תנ"ך Tanakh)는 유대교의 경전으로, 기독교의 구약에 해당한다. 이 이름은 이를 구성하는 세 분류명을 늘여서 쓴 형태이며 ( תורה 토라, נביאים 네비임, כתובים 케투빔), 각 분류명의 맨 앞글자를 따서 약칭으로 '타나크(תנ"ך)'가 된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B%82%98%ED%81%AC

디모데후서가 언제 써졌지? 그리고 신약의 정경 목록은 언제 정해졌고? 디모데후서 저자가 히브리서의 존재 자체를 알았을 거 같냐?

그리고 위경과 외경의 개념도 틀렸다. 네가 말한건 외경의 개념인데, 그것도 좀 잘못이 있고....후. 지면이 짧아서 말하기 힘드네. 알아서 공부를 좀 해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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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Clesis
그리고 난 본문이 심히 마음에 안드는 또다른 이유 중에 하나가 대충 훑어보니까 아브라함 사건에 대한 분석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신뢰성은 둘째 치고 서론부에만 거기에 대해 얘기해놓고 그담부턴 쭉 뭐 윤리관이 어쩌고 현대인은 어쩌고 궁시렁 해놔서 글의 핀트를 어디에 맞춘 거지 라는 생각 때문에 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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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뭐이자식아?
고고학이나 문헌 비평이 발전하면서 성경이라는게 그 절대적인 권위가 사라진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야. 창세기의 천지창조같은 것도 수메르나 바빌론 신화에서 따온 것도 많고. 구약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성경이나 기독교의 교리 같은 것도 역사의 산물이다. 이걸 다 인정하는 상태에서 현대의 신학은 새로운 논의를 펼치고 있는 중이다.

성경을 신부가 독차지하는 시대에서 벗어났는데, 인문학적 해석이나 현대 윤리적 해석에 의해 가차없이 비판받지 못할 이유가 뭐냐? 기독교는 초기 형성에서부터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성장해왔지, 결코 비판이나 반론을 허용치 않으면서 발전한게 아니다. 중세의 가톨릭이 그런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종교개혁이 일어난거고. 폐쇄적, 소종파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없는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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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Clesis
뭐 수메르 바벨론 신화니 불교에서 조로아스터교에서 여러 종교에서 짜집기했느니 그런 말들 나오는 건 충분히 알고 그런 관점에서 현대적인 관점에서 비판을 할 수 있단 건 나도 알지. 근데 신학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고해서 신학적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을 신학적인 관점으로 반론하는게 허용되지 않는가? 경서라는게 단순히 인문서로만 인정된다면 경서의 존재의의가 무슨 소용이지? 그렇게 된다면 결국 종교인에 대한 존중은 묵살시킨다고 볼 수 있지. 그러한 관점으로 봤을 때 본문에서는 다분히 현대적 윤리관에 의해서 해석하면서도 신학적으로 접근을 했지만 근거되는 성구가 충분히 빈약하고 왜곡되었기 때문에 신학적인 측면에서의 타당성과 근거를 보충해서 반론해준 것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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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뭐이자식아?
네가 말하는 신학이 현대의 신학을 대표하는게 아니라니까. 네가 말하고 있는 신학은 그저 근본주의 신학인데, 그게 메인스트림 신학이 아닌지는 벌써 수백년이 지났다니까. 우리나라 교회에서 주류라고 해서 마치 정통 신학인 것처럼 신학은 그런 것만 있는 것처럼 말하면 곤란하다. 경서라는게 인문서조차의 가치가 없다면 그야말로 경서의 존재의미가 뭐냐? 종교인이랑 인문학자가 그렇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경계가 있니? 원글이의 글에 대한 반론은 나도 충분히 했지만, 너의 반론은 좀 핀트가 어긋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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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Clesis
그리고 말야 모든 글은 내용을 주제에 맞게 서술을 해야지 주제에서 내용이 벗어나면, 아무리 그 내용이 좋은 내용이더라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냥 글이라는 것의 진짜진짜 기본적인 규칙이다. 이건 그냥 국어시간에 배우는 거임.
제목을 애초에 아브라함 사건에 대한 현대윤리적 관점에서의 비판, 뭐 이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하거나 하다못해 서론부에서 현대윤리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이런 언급이라도 있어야 하는게 당연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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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뭐이자식아?
마지막으로 이 아재가 한마디만 더 할께. 네가 말하고자하는거 이해하고 왜 화가 나고 짜증나는지 아는데, 현대 인문학자들의 모든 비판을 수용한다고 기독교의 교리가 무너진다거나 앞으로 기독교의 발판이 점점 사라진다거나 그렇지는 않아. 오히려 현재 과학자나 인문학자들과 토론하면서 더 풍성한 신학이 될 수 있는거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 종교는 열려있다. 열려있을 때만 발전하고 그 지평이 넓어지는 거지, 오히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해석하려고 하면서 다른 종교, 다른 학문과 대화를 단절하는 것은 점점 사이비처럼되는 지름길이고, 고립되고, 결국은 소멸하게 된다.

걱정마라. 기독교는 그렇게 기초가 없는 종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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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이자식아?
나도 종교생활을 했기에 구약과 신약의 상관성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이삭 희생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연계 되어 인간의 죄는 죗값을 치름으로써 없어지는 것인데 예수를 제물로써 바치는 신의 계획을 증거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일화로 미리 예언하며 증거하기 위함임을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알아

이를 모르지는 않지. 다만 내가 중점으로 둔것은 우리가 만약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명령을 받았을 때, 지옥에 대한 인간의 공포심 같은 거야

예언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야 신학적으로 신앙인의 관점이 될 뿐이라서 이런 걸 혐오하고 신비적인걸 부정하는 사람들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는 신학적 개념 없이도 무신론자들에게 예수의 사상을 어필하고 싶은거야 만류귀종이라고 결국 예수의 사상은 타인을 돕고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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