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스압, 노잼)마법사들의 왕

예전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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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시여어어어! 저희가 왔나이다!”
“……누구세요?”
그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왕이시여!”

나는 처음 듣는 노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웬 후드를 입은 노인 셋이서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런 노인들이 무릎을 꿇을 정도에다가, 잠깐, 방금 뭐라고? 왕?

“느하찻!”

나는 들고 있던 나무 지게를 구석에 던져버리고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아니, 늦게 했으니까 이 정도로는 봐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 엎드리자. 배를 깔고 복종의 뜻을 확고히 하면 이 정도 무례쯤이야 허허 웃으면서 넘겨줄 거야. 우리 폐하는 성군이니까─물론 만나본 적은 없지만.

“왕이시여! 어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왕께서는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시는 분이십니다, 왕이시여!”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왕궁에서 여자 가슴이나 주물럭거리고 있을 왕이 굳이 이 산간벽지까지 나올 이유가 없다. 또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 무리도 보이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라며 미쳐 날뛰는 신하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봤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주위에는 나와 이상한 세 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었다.

“…….”

조용히 바지를 털고 일어난 다음, 나는 구석에 내팽개친 지게를 다시 주워들었다. 다리 부분이 약간 부서진 것도 같긴 한데, 어차피 근시일 내에 다시 만들 거였으니까.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내 발목을 붙잡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왕이시여! 어찌 지게를 지시나이까!”

“이제 우리가 돌아왔으니,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오, 왕이시여!”

노인들이 외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나였다.

미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노인들은, 저들이 마법사라도 된다는 듯이 후드 로브를 입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빼빼 마른 노인은 회색, 반짝이는 대머리를 커버하겠다는 듯 가슴 어림까지 하얀 수염을 기른, 왼쪽에 있는 통통한 노인은 군청색, 마지막으로 풍성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오른쪽의 강직해 보이는 노인은 검정색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다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왕은커녕 개미 코딱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해 봤지만, 노인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대상은 역시 나였다.

“저기, 어르신들.”

“어르신이라니요! 항상 부르시던 대로 편히 하명 하시옵소서, 왕이시여!”

“하명하시옵소서!”

아니 그러니까 난 댁들을 불러본 적이 없다니까.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20년 간 내가 살아온 바에 의하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떼어내지 않으면 집까지 따라 들어온다. 속칭 ‘미친놈’이라고는 하는데, 어르신들에게 미친놈들이라고 하긴 좀 뭐하다.

나는 어떻게든 이들을 떼어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즉, 미친놈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내키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그러면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 것을 깨닫고는 다른 희생자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침착해야 한다. 이들이 나를 왕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이들에게만은 왕이 되어야 한다. 내가 비록 마을에서도 쫓겨나 산 중턱에 살고 있는 나무꾼이라지만, 이들에게 나는 왕인 것이다.

“크흠, 그럼 편히 부르도록 하겠네.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만나 그런지 이름이 가물가물 하구만. 톰이었나, 제임스였나? 아니, 리처드였던가?”

일단 지르고 보자. 나는 하나만 얻어 걸리라는 심정으로 보편적인 이름들을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셋 중에 단 한 명도 이런 보편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왜냐면, 그들의 눈에 서운하다는 기색이 주렁주렁 맺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렇게 이름 같은 것들을 틀리면 의심부터 가져야 정상인데, 서운한 기색을 보이는 것을 보니 나를 철썩 같이 왕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가운데에 있던 회색 로브의 노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어찌 저희의 이름을 잊으실 수 있으십니까? 왕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 아닙니까?”

“내, 내가 그랬던가. 하하!”

나는 애써 하하, 웃으며 현실을 회피하려고 시도했지만, 노인은 나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희가 그런 이름은 싫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굳이! 이 이름이어야만 한다면서! 지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옆의 두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밝혀왔다. 물론 그들의 눈에도 서운한 기색과 이슬방울이 달라붙어 있었다.

회색 노인은 말했다.

“제 이름은 그레이입니다.”

“……내 작명 센스가 그렇게 처참한 수준이었나?”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의 두 노인에게도 물었다.

“그럼 혹시 이름이 네이비하고 다크…….”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나는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 서운한 기색 대신에 열렬한 기쁨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저의 이름만…….”

서운해 하는 그레이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찔렀다. 큰일 났다. 노인이 삐지면 막을 자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대로 내버려두면 이 세상 끝까지 나를 좇아서 올지도 모른다. 달래야 했다.

“하하, 모두 자네 덕분이네. 자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번쩍 하면서 기억이 떠오르지 뭔가? 암, 자네의 이름 덕분이지. 그렇고말고.”

“예……예!”

서서히 밝아져가는 그레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50세가 되던 해에, 자네들에게 명령을 했단 말인가? 20세의 나를 찾아오라고?”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그것 참……잘도 찾아왔군. 내가 바로 20세의 나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지금까지 약 두 시간 정도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해가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첫째, 프라우력 255년에 마신을 섬기는 필라교라는 단체가 나타나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금은 프라우력으로 245년이라는 것이다. 거기서 끝났다면, 이들은 단지 날짜를 잘 모르는 미친놈들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지금이 프라우력으로 몇 년인지 아시오’라고 묻자, 이들은 ‘당연히 245년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말인즉슨, 이 노인들은 미쳐도 단단히, 그것도 일반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미쳤다는 소리였다. 

혹시나 예지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해서 내일 날씨를 물어봤더니 도리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저희가 점쟁이입니까?’라고 대답했다. 자신들을 점쟁이쯤으로 생각한다는 게 기분 나쁘다는 양이었다. 

뭐, 그래도 여기까진 준수한 미친놈이다. 그것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정작 문제는 두 번째 이야기였다.

자기들은 마법사고, 나 또한 마법사라는 것. 아니, 나는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사의 왕’이란다. 나보고 왕이라고 한 것이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개소리중의 개소리이자, 그들이 논란의 여지가 없이 단단히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된 말이었다.

나는 마법의 ‘마’자도 배운 적이 없다.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마법에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아주 어릴 때부터 계발을 해야 했다. 나처럼 20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12살, 그 전에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

하지만 난 20살이고, 교육을 받은 적도 물론 없다. 만에 하나, 정말로 내게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었더라도 지금쯤 다 사라졌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그레이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레이.”

“예, 왕이시여.”

“마법을 한 번 써 보게.”

그레이는 내 말에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한동안은 안 됩니다.”

그럴 줄 알았다, 될 리가 없지. 마법이 되란다고 되는 것이었다면 마법사가 그렇게 귀했을 리가 없다. 노력과 재능, 그리고 운을 타고 나야만 하는 것이 마법사였다. 이렇게 미친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능력인 셈이다. 뭐 개중에는 마법을 익히다가 반쯤 돌아버린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마법을 익히다가 미친 것과 미친 사람이 마법을 익히는 것은 완벽하게 다른 일이다.


“이 곳으로 오는 데에 정말 많은 마나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저희 셋의 마나로도 모자라서 마나석 다섯 개까지 더 잡아먹는 괴물 같은 마법진 이었거든요. 그 마나석 하나면 사과를 죽을 때까지 사먹을 수 있는데.”

“사, 사과?”

마나석이라는 건 이름 그대로 마나를 저장하고 있는 돌을 말한다. 들어 있는 마나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지만, 정작 그것이 귀중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마법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는 도구를 구하는 데에 사람들은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 물건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자신의 힘이나 직위를 남에게 내비쳐 보일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일반적인 마나석 한 개당 마법 도구를 다섯 개 정도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 마법 도구 하나의 가격이 일반 영지 총소득의 반 정도 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마나석 한 개는 사과로는 계산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 나 같은 촌무지렁이도 이 정도로 알 정도면 그 가치가 얼마나 높겠는가?

그런데 그런 마나석을 다섯 개나 사용했다고 말하는 데다가, 굳이 빗댄다는 대상이 땅도 아니고 보석도 아닌, 사과라니?

아무리 잘 들어주려고 해도 미친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이건 절대로 내 잘못이 아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들은 대로 말하는 미친 사람들 잘못이지.

“크, 크흠, 그랬나. 마나석 다섯 개라니……음.”

“…….”

그리고 찾아오는 정적. 할 말이 없다.

그레이는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고, 나는 그에게 해줄 말이 없다. 내가 진짜 이들의 왕이어야 무슨 말을 할 것 아닌가. 이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심코 이상한 걸 말했다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할 말, 할 말, 그래, 그렇지.

“그럼 마법은 언제쯤 다시 쓸 수 있는가?”

“뭐 급하게 필요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전 워프를 사용한 장본인이라 한동안 마나 냉각 상태일 테지만, 그냥 마나만 공급한 네이비와 다크는 자잘한 마법 몇 개는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배신인가.

이제 네이비와 다크가 돌아오면 그레이는 ‘왕께서 마법이 필요하시다!’ 운운하면서 마법을 사용하라고 우기기 시작하겠지. 마법이라곤 당연히 쓸 수 없는 두 명은 당황하면서도 허공에다 대고 손짓을 하던가, 아니면 주문을 외울 테고. 결국은 이상하게 마법이 안 나온다면서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겠지.

“그런데, 우리야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쳐도, 그냥 왕께서 사용하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응?”

“왕께서는 모든 마법사의 왕이신데요.”

그건 그쪽이 그렇게 우긴 건데요. 난 내가 마법사라고 말한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레이의 눈이 심상치 않다. 두 눈이 가늘어지고, 그 사이의 눈동자는 뭐랄까, 의심이라기엔 너무 순진한, 그래, 의아함이다. 그의 눈은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말인즉슨, 그레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나를 완벽한 자신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직접 지어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망나니짓을 해도, 심지어 그들의 눈앞에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마법사가 나타나도 그의 믿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세상에 미친 놈 이길 자는 없다더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의아함으로 가득 찬 그레이의 눈. 달리 말하자면, 믿음으로 가득 찬 그레이의 눈. 그리고 당연히 네이비와 다크 또한 그레이와 같을 것이었다. 똑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 그렇지.

나는 진정으로, 이들의 왕이 되어 주기로 결심했다─일단 지금의 상황에서 도피하고 나서 말이다. 내가 정말로 그레이의 앞에서 마법을 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크흠, 그런데 네이비와 다크는 어디에 갔는가? 아까부터 보이질 않는데?”

생각해보니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셋이 같이 있었는데, 그레이와 대화할 때부턴 둘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히 문이 열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는데. 게다가 이 집은 내가 대충 지은 오두막집이라 엄청나게 좁다. 누군가 나가면 티가 확 나는 집이라는 소리였다.

내 물음에 그레이는 씨익 웃었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치아는 엄청나게 하얗고 깨끗했다. 관리를 잘 했나.

“곧 있으면 올 겁니다. 왕께 진상품을 바쳐야 한다고 난리를 치면서 나갔거든요. 아마 지금쯤이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쿵 하는 소리가 집 밖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문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웬 집채만 한 멧돼지와 사슴이 꿈틀거리며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나무 장작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게 뭔가?”

“진상품입니다, 왕이시여.”

다크가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이게 진상품이라는 건 그레이의 말을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내가 물은 것은 ‘어떻게 이런 걸 가져왔느냐’라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내 말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다. 진상품을 구하러 나갔다고요.”

“아니, 그건 아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친놈은 힘이 세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인 둘이서 어떻게 멧돼지와 사슴, 거기에 나무까지 해올 수 있는 거지?

순간 그들이 한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마법사.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레이, 네이비, 다크. 그레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네이비와 다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손가락을 까딱해 허공에불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아, 일단 잠깐 기절 좀 해야겠다.

“왕이시여!”



그들이 온 지 벌써 한 달 째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던 세 명의 노인. 자신들이 마법사라고 주장할 때는 코웃음을 쳤었지만, 정작 내 눈앞에서 마법이 구현되는 모습을 보니 그 말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다.

자신이 워프를 시전한 것 때문에 마나 냉각 상태라고 징징대던 그레이는 요즘 들어 마나를 다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동안 바치지 못한 진상품을 바친다며 네이비나 다크보다 월등하게 많은 수의 사냥감을 잡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잡아오는 사냥감도 처음에는 멧돼지나 노루, 사슴 같은 것들이었지만, 그들끼리 경쟁이 붙었는지 이젠 호랑이 같은 맹수나 트롤 같은 흉포한 몬스터를 씨가 마를 정도로 잡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인들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셋 다 엄청난 수준의 마법사라는 것과, 그레이는 정말로 사과를 좋아한다는 것. 네이비는 보기와는 다르게 채식주의자─그런데 매일 멧돼지를 잡아온다─라는 것. 다크는 눈치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 전부였다.

나머진 기껏해야 ‘늙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들의 기행은 ‘진상품’을 바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법이라고는 쥐뿔만큼도 모르는 나에게 자신들의 지식을 하루에 18시간씩 강제로 주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수식이고 마나고 나발이고 처음 듣는 나였기에 그 2주간의 시간은 지옥과도 다름없었지만, 익숙해지자 어느새 지식을 폭포수처럼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마법을 할 수는 없어도 지식만큼에서는 누구에게도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드루이드 계통의 마법 전문인 그레이의 지식, 자연 계통 마법 전문인 네이비의 지식, 정령 계통 마법 전문인 다크의 지식을 모두 전해 받았으니까.

하지만 제일 이상한 것은 지식 강제 주입이나 몬스터 진상 따위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열 살 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매일 하던 호흡법─아버지가 알려주신 호흡법을 나에게 강제로 시키는 것이었다. 호흡을 하면 언제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하지 않게 된 것이었지만, 노인들은 하기 싫다는 나에게 계속해서 호흡을 강요했다. 다른 때에는 내 앞에서 벌벌 떨던 노인들도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듯 했다.


“자, 눈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다음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냄새로 세상을 보십시오. 그 다음 숨을 내쉬면서 소리로 세상을 보고, 호흡을 마무리하며 느낌으로 세상을 보시면 호흡 한 번이 완성됩니다.”

“아, 안다니까. 근데 몇 번이나?”

내 물음에 그레이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양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말했다.

“저녁을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지금 저 말은 이 호흡을 저녁때까지 하라, 이 뜻일 것이다.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밝군.”

밝은 정도가 아니라 해가 중천에 떴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시간이 대략 1시 쯤, 그리고 우리가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언제나 여섯 시였으니, 그레이의 말은 이 호흡을 다섯 시간동안 하고 있으라는 소리였다.

길어봐야 한 시간을 예상하고 있던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네이비를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봤지만, 그는 매정하게 시선을 외면해버렸다. 다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 다 애써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고는 있지만, 나를 감시하려는 듯 그 자리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알았어, 하면, 하면 되잖아.”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나무와 새들. 특별한 것이라고 해 봐야 산 아래에 있는 예전에 내가 살던 마을 정도. 언제나 보던 풍경들이라 특별할 것은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수풀 내음과 방금 먹은 멧돼지 구이 냄새. 잠깐, 멧돼지 구이가 좀 탔었던가? 어디선가 약간 타는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숨을 내쉬면서 귀에 정신을 집중했다. 새의 지저귐 사이로 익숙하지 않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쇠 비슷한 것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

중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호흡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눈을 번쩍 떴다. 세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기 전만 해도 나에게만 향해 있던 시선이었는데, 어느새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캐스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홀더의 눈.”

원하는 곳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을 사용한 노인들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그들의 미간은 점점 좁아지더니, 이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찌푸려졌다. 곤란의 표시였다.

“이런, 이들이 어떻게 벌써!”

그레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치고는, 집 안에 들어가 셋의 로브와 지팡이를 들고 나왔다. 네이비와 다크도 사정을 잘 안다는 듯 말없이 로브와 지팡이를 받아들었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바로 그 차림이었다.

“왕이시여.”

“응?”

나는 ‘왕’이라는 단어에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내가 아는 왕이라는 단어는 모두 위에 군림하고, 명령을 내리는 존재였기에 처음에는 어색했고 말투도 괴상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왕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왕이라는 존재와는 판이하다는, 굳이 따지자면 정 반대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이들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저희가 수업을 할 때, 아카데미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아카데미. 마법에 재능이 있지만, 누군가의 제자로 들어갈 형편이 되지 못하는 자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일종의 마법 학교였다. 만들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평민이나 노예 출신들도 아무런 제한 없이, 마나에 대한 기본적인 재능만 있다면 받아들이는 것으로 소문이 났기에 매일 엄청난 수의 마법사가 양성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교수진으로는 은거한 마법사들을 초빙해, 교육의 질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단체 교육인 만큼 각자에게 돌아가는 관심의 양은 적겠지만, 일단 마법사가 되는 것만 해도 어딘가. 허공에 재능을 날려 보내고 밭을 일구거나 채찍을 맞는 것 대신에야 월등히 좋은 선택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설마 해서 물었다.

“설마 나보고 아카데미로 가라는 건 아니지?”

“…….”

그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땅바닥에 지팡이를 꽂아 넣었다. 그것을 본 네이비와 다크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허공으로 지팡이를 치켜들고는 같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과 모든 물체, 이 땅 위와 땅 아래,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의 원천인 마나여!”

“지금 여기서 마나로 이루어진 그릇을 깨뜨리고, 새로운 마나를 부르리니!”

뭐?

저 주문은 들은 적이 있다. 당연했다. 그들의 모든 지식을 전수받은 나였기에. 그들이 외우고 있는 저 주문이, 이미 금지된 마법인 육체를 마나로 환원하는 주문이라는 것쯤은 순식간에 알아챌 수 있었다.

“자, 잠깐!”

나는 그들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그레이가 꽂아놓은 지팡이 밑에서부터 무언가 뿜어져 올라왔다. 초록빛의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보았던 나무 넝쿨이었다. 하지만 나무 넝쿨은 본연의 의미대로 가만히 있기보다는, 자신을 불러준 소환사의 의지를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묶어라, 넝쿨아!”

나무 넝쿨이 마치 뱀처럼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단단하게 굳어갔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 봐도 넝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

“왕이시여, 저희는 이만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네이비, 다크!”

안 돼.

절대 안 된다. 대체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이들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려 하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용납할 수 없다.

네이비와 다크의 몸이 아래쪽부터 산산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푸른 기체가 되더니, 그레이의 몸을 타고 나무 넝쿨을 거쳐 내 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그들과 만난 지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이런 곳에서, 고작 나 같은 놈에게 자신의 생명을 바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밝은 곳으로 가야만 하는 그들이었다. 그만큼 좋은 사람들이었고, 훌륭한 마법사였다.

그런 그들의 생명이 지금 내 눈앞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왕이시여.”

“그레이, 다크! 네이비! 당장 멈춰!”

“송구하오나 그럴 수 없습니다, 왕이시여.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저를 부디 벌해 주시옵소서.”

그레이의 입가에서 핏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핏물은 땅에 채 떨어지지 못하고 허공에서 증발하며 푸른 마나가 되었고, 그것조차도 넝쿨을 타고 내 몸으로 주입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진 것 같았다. 두근대는 심장은 세상 전체에 울려 퍼졌고, 그 심장 박동에 맞추어 내 몸 안에 들어온 그들의 마나가 약동하기 시작했다.

“왕이시여, 막으셔야 합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뜨겁고 끈끈한 무언가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기 전, 마지막으로 본 그들의 얼굴은 모두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그들 모두의 음성이 들려왔다.

곧, 만나게 되실 겁니다─



눈을 떴다.

제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꿈이길 바랐지만, 내 심장 박동에 맞춰 몸 안에서 춤추는 마나들은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나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내 몸 안을 유영하고 있었고, 나 또한 아무런 무리 없이 그 마나들뿐만 아니라 대기 속에 있는 마나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그들이 넘겨준 지식이 아닌, 그들만의 기억까지 맴돌고 있었다. 물론 내 정체성을 위협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생전에 마법사였다고 과시라도 하듯, 마치 책자처럼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알려준 호흡의 정체와, 필라교에 대한 것, 그리고 그들의 정체까지.

바닥에는 그레이가 바닥에 꽂아놓은 지팡이와, 네이비와 다크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긴 나무 지팡이들이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누구의 것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옷자락을 길게 찢어낸 뒤에, 지팡이들을 한데 모아 동여맸다. 그리고는 남은 천으로 그것을 어깨 부근에 단단하게 묶었다.

떠날 채비를 마친 나는 마을 쪽을 내려다보았다.

“비홀더의 눈.”

마을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마나 역류로 죽은 내 아버지를 역병 환자로 몰아, 그리고 나를 저주받을 악마의 아이로 몰아 내쫓은 그 마을이, 지금 내 눈앞에서 약탈당하고 있었다. 아니 약탈 수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나를 내쫓은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들에게 동정심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들 덕분에 나는 고된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 누구와도 말을 섞지 못하고, 밤이면 몬스터에게 위협받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마을에서 날뛰고 있는 필라교도들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이 마신을 섬기기 때문은 아니다. 마신을 섬기건, 마을을 약탈하건 나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들이 부탁했다.

“번개 구슬.”

허공에 나의 의지대로 수십 개의 거대한 번개 구슬들이 만들어졌다. 닿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뿐만 아니라, 반경 수십 미터에 번개를 줄기줄기 뿌리는 광역 마법이었다.

“가라.”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번개 구슬들을 마을로 떨어뜨렸다. 마을 전체에 떨어진 수십 개의 번개 구슬들은 순간 반짝이는 빛을 내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굉음을 쏟아내며 푸른불꽃을 마을 전체에 퍼트렸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고, 오로지 빠직거리는 전류 소리만 들려온다. 산 중턱에 있는 나조차도 머리칼이 곤두설 만큼 강력한 전류가 마을 전체를 타고 흘렀다.
등 뒤에서 지팡이를 하나 뽑아냈다. 그레이의 약간 그을린 지팡이였다. 

나는 허공에 마법진을 하나 그렸다.

“식물이 알려주는 길, 아카데미.”

나무와 풀들이 몸을 숙이며 길을 열었다. 이 길만 쭉 따라가면 그들이 말한 아카데미가 나올 것이다.

나는 내가 살던 집을 쳐다보았다. 아니, 비단 내가 살던 집만이 아니라 그들과의 추억이 어린 집이었다. 이 집 앞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고, 그들의 허무맹랑하게 들렸던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들과 함께 먹었고, 마셨고, 잤다. 

지옥 같은 지식 주입도 당했었고,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아버지의 호흡법도 여기서 다시 만났었다.

“불타오르는 소멸.”

나는 작은 불씨를 하나 불러냈다. 아주 자그마하고, 뜨겁지도 않고, 할 줄 아는 것이라는 딱 하나밖에 없는 그런 불씨를 말이다.

집을 향해 불씨를 날리자,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물건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키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르는 불씨가 집을 통째로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환하게 불타오르는 집을 뒤로 하고,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신께 영광을! 저놈의 피로 축제를……크악!”

“빛나는 광휘.”

다크의 빛 계열 정령 마법이 필라교도 무리들 사이에서 작렬했다. 20명이 조금 넘던 필라교 무리는 무언가를 할 틈도 없이,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지듯 사라졌다.

아카데미까지는 아직 멀기만 한 것 같은데, 필라교도는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분명 필라교가 준동하는 것은 10년 뒤일 텐데.

그들의 과거에서도, 시골 마을에선 필라교도들이 일어났을까? 아니면 그들이 이 시간대로 넘어옴으로서 뭔가 변화가 생긴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든 중요하진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필라교도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10년 뒤든, 지금이든 내가 필라교도를 없앤다는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숲속에까지 필라교도들이 있는 거지?”

필라교는 평민들 사이에서 교활하게 뿌리는 내리는 집단이지, 이렇게 숲속을 돌아다니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수십의 필라교도가 여기에 있을 이유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는 소리였다.

누군가를 잡으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무언가 찾을 것이 있다거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뒤에서 숲에 들어온 뒤로 처음 듣는 평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내 앞에 나타날 필요는 없는데.

“저, 정말 감사합니다. 웬 미친놈들이 뒤쫓아 오는 바람에…….”

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기어 나온 것은 웬 처음 보는 남자 셋이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는 것을 내세우기라도 하듯 온갖 먼지와 나뭇잎이 달라붙은 옷들.

그들도 그들 자신의 행색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을 붉혔지만, 벌써 다 봐버린 마당에 뭐 어쩌겠는가.

세 남자는 모두 30대 중반 쯤 되어 보였는데, 한 명은 노예였던 듯 비쩍 말라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기본적인 몸은 가지고 있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평민으로서는 가지기 힘든 약간 통통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은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마법사라는 것.

“아카데미로 가시는 길인가 보군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우리 셋 다 2단계 마법사들인데, 진전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카데미로 가면 뭐가 좀 달라질까 해서…….”

비쩍 남자가 반색했다. 혹시나 같은 길일까 기대하는 것일까. 나는 그들의 기대어린 눈길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지만, 일단 우리 마을에는 저렇게까지 마른 사람은 없었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

“테미, 쓸데없는 말은 참아.”

“하, 하지만…….”

통통한 사내가 신나하던 마른 사내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는 머뭇거리는 듯 했지만, 이내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듯 고개를 푹 떨궜다. 

길가에서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는 것은 상대에게도 민폐일뿐더러, 가끔은 자신에게 화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필라교도들에게…….”

“필라교도요? 저들이 종교단체였습니까? 저희는 그냥 미친놈들 인줄 알고…….”

“그런데 왜 종교단체들이 무장을 하고 있지?”

“종교단체 맞습니까?”

아직 일반인은 알지 못하는 듯 했다. 당연했다. 원래는 20년 쯤 뒤에야 알려져야 정상인 이름이었으니까. 준동이 빨라졌다 해도 이름이 퍼지는 것은 아직 조금 더 뒤의 일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순간, 그들의 뒤에서 뭔가 반짝하는 것이 보였다.

“얼음 꽃.”

네이비의 지팡이를 뽑아들고 그쪽으로 얼음 계통 마법을 쏘아 보내자, 비명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4단계 마법을 주문도 외우지 않고……!”

“그만. 감탄할 때가 아닙니다.”

순수하게 경탄으로 빛나던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거멓게 죽었다. 수풀 속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대략 30여명 정도. 하지만 이쪽의 전력은 4명이 전부에다가, 그중 셋은 전투에는 별 도움 되지 않는 2단계 마법사다. 절망하는 것도 당연했다.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되는 사람들은 언제 봐도 재미있단 말이야.

그들의 표정을 봐선 곧 도망가거나, 아니면 곧 기절하거나 둘 중 하나일 듯 했다. 

“밝게 빛나는 태양.”

여기서 기절하면 방해만 되니, 차라리 도망가는 것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고 상대의 시야를 가리는 섬광 계열 마법을 사용한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셋 모두 등에 매고 있던 짐을 풀고 있었다. 짐 안에는 육포쪼가리 조금과 물병, 그리고 지팡이와 로브가 있었다. 

설마 지금 그걸 여기서 사용할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엄숙한 표정으로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2단계 공격마법이라고 해 봐야 상대를 간지럽히는 정도일 텐데,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로브까지 챙겨 입는 걸까.

게다가 저 로브는……잠깐만.

비쩍 마른 사내는 누더기처럼 헤진 회색 로브를 착용했고, 통통한 사내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듯, 최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군청색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다. 또 그냥 평범했던 사내는 가장 무난한 검은 천으로 만든 로브를 착용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숲이여! 저들의 눈에 나뭇잎을!”

“세상 모든 곳에 있는 마나여,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들의 머리카락을 태워버려라!”

“바람의 정령이여! 저들의 허파에 바람을!”

드루이드 계통 혼란 마법, 자연 계통 화염계열 공격 마법, 정령 계통 바람계열 괴롭히기 마법.

그레이, 네이비, 다크의 마법이다.


“이게 뭐야? 마법인가?”

“모두 무시해라! 신께서 말씀하시길, 저 앞에 있는 네 명은 앞으로 우리의 대업을 두고두고 방해할 자들이라 하셨다!”

“마신께 영광 있으리라!”

당연히 적에겐 거의 아무런 타격도 가지 않았다. 기껏해야 눈에 계속 달라붙는 나뭇잎을 떼어내고, 타들어가는 머리카락을 털고,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는 정도.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금속의 배신.”

그들과 내가 만나게 된 것이 어찌 보면 이들 때문이라 죽이기엔 조금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뜻이다. 그들의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만 아니라면 이번 한 번 쯤은 관대하게 왕으로써 용서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들이 들고 있던 금속으로 된 모든 것이 조각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검과 창은 물론이고 갑옷, 투구, 목걸이, 심지어 신발에 달린 금속 징까지 모두.

“끄아아악!”

“히, 히익!”

“내 팔이! 내 파아알이이이!”

운 좋게 살아남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약간 잔인한 광경이었는지 내 옆에 있던 그들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입을 막고 있었다.

어차피 몇 년 뒤에는 자신들이 하게 될 행동인지도 모른 채로.

나는 살아남은 필라교도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어디 한 쪽이 날아가 버린 불완전한 몸으로도 애써 도망치려고 바닥을 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불타오르는 소멸.”



그들을 모두 태우고 땅의 정령 마법으로 대충 흔적을 묻어버린 나는 그들이 혹시 얼마나 더 가야 아카데미가 나오는지 알고 있을까 싶어 말했다.

“그런데, 아카데미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어?”

무심코 그들에게 하던 것처럼 반말을 해 버렸다. 이제 와서 ‘요’를 붙이자니 조금 그렇고, 그냥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했다.

“아, 네, 네, 압니다. 알아요. 한 다섯 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그렇단 말이지.”

그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마법만 익히던 사람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람이 무더기로 죽는 것을 보면 패닉에 빠지는 것이 정상이다.저렇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냉철한 이성을 중시하는 마법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고, 원래 정상적으로 숲에서 처음 만나 동료가 된 이들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떠올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통성명이나 하지.”

“예, 예? 통성명이요?”

“이름말이야, 이름.”

그들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내 생각을 짐작한 듯 애써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려고 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제 이름은 테…….”

“만나서 반갑네, 그레이.”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로브를 내려다보고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로브의 색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는 것을 보니, 역시 그가 맞는 듯 했다.

“제 이름은 윌…….”

“만나서 반갑군, 네이비.”

네이비는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에 갈 때까지, 그러니까 나와 헤어질 때까지 이런 요상한 이름을 써야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가 나와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일단 비밀로 해두는 것이 나을 듯 했다.

“제 이름은 밀러입니다!”

그 순간 나머지 한 명이 선수를 쳤다. 검은색 로브. 다크다. 눈치 빠른 것은 여전하군.

하지만 예외는 없다.

“나 또한 만나서 반갑네, 다크.”

나는 그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눈에서 내 이름을 ‘쓰리 로드’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나를 부를 호칭은 이미 한참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왕이라고 불러주면 참으로 고맙겠네.”

차례차례 일그러져가는 그레이와 네이비, 다크의 얼굴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그들과 같이 만들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예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과 다시 만났다.

1개의 댓글

2018.06.25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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