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수학, 소개글) 게임 속에서 배우는 역설 feat.GLaDoS


주의) 게임 포탈2 스토리에 대한 스포 다수 포함

포탈2 플레이 해 본 게이들만 본다고 가정하고 쓰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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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휘틀리를 잡기 위해 오월동주하는 첼과 감자


02.jpg


그러던 중 감자는 휘틀리를 죽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포스터를 보여달라고 한다


paradox.jpg


역설을 설명하는 포스터


03.jpg


감자의 설명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문제를 풀려는 본능을 거부할 수 없고,

그런 인공지능에게 풀 수 없는 역설을 문제로 주면 인공지능은 문제를 풀다가 과부하로 터져버린다고 한다


04.jpg


물론 감자도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본능에 말려 과부하가 걸릴 수도 있다

사실상 목숨을 건 감자의 작전

어쨌든, 역설로 휘틀리를 잡으러 가는 첼과 감자


06.jpg


포스터에 나온 역설이 무엇이길래 전능한 인공지능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까?




paradox.jpg


다시 포스터로 돌아와서, 저 포스터에 담긴 내용이 뭔지 알아보자


1) "THIS STATEMENT IS FALSE!"

이 명제는 거짓이다.


이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만약 저 명제가 참이라면, 명제는 거짓이어야 돼

반대로 저 명제가 거짓이라면 명제는 참이야.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는 없으니까, 이 명제는 역설이 돼.


2) "NEW MISSION: REFUSE THIS MISSION!"

새로운 미션: 이 미션을 거부해라!


미션을 거부하면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니 거부하는 것이 아니야

반대로 미션을 수행하려면 미션을 거부해야 돼

이 역시 모순이야


3) "DOES A SET OF ALL SETS CONTAIN ITSELF?"


게임에선 좀 생략 됐는데, 사실 3번의 원본은 이래


"Does a set of all sets that do not contain themselves, Contain itself?"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의 집합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가?"


이것이 바로 유명한 러셀의 역설이야

이 역설이 중요한 이유는, 20세기 수학사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야


이런 말장난 같은 역설이 어떻게 수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20세기 수학 전반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


일단 아주 간단한 질문부터 하고 시작하자

과연 수학이란 무엇인가?



Cantor.jpg

집합론의 창시자, 칸토어



아리스토텔레스와 유클리드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 이후로 

수학사에서 수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면, 그 대답으로 논리주의가 대세였어


수학을 논리학의 일종으로 보는 관점이고, 

공리를 완벽하게 잡으면 논리에 의해 완벽한 수학을 구축할 수 있다는 주의였지


그러나 19세기 말 칸토어라는 수학자는 집합론에서 하나의 역설을 발견해

그 역설의 내용은 모든 집합의 집합은 집합이 아니다 라는 것이야


공집합을 제외한 모든 집합은 부분집합을 가지고, 그 부분집합을 모두 모은 멱집합을 생각할 수 있어

칸토어에 따르면 어떤 집합의 멱집합은 원래 집합보다 항상 기수가 커야 해

-여기서 기수란 집합의 크기를 나타내지만, 사실 무한집합에서는 농도라는 표현이 어울려

그냥 크기라고 이해하고 가자.-


모든 집합의 집합을 생각해 보자.

당연히 이 집합은 집합 중에서 기수가 가장 크겠지?

그런데 이 집합의 멱집합은 이 집합보다 기수가 커야 돼

결국 모순이 발생하고 이런 집합을 집합으로 볼 수 없다는 거지


집합을 집합으로 볼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이는 분명 인간 직관에도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아

기존의 논리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설이 생긴거지

기존 수학에 위기가 생긴 거야



20c.jpg

(만화 로지코믹스 중에서)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20세기 최고의 수학자라 불리는 두 명이 출현해

프랑스의 푸앵카레와 독일의 힐베르트가 그들이야

이 둘은 마치 아인슈타인과 보어 처럼 20세기 수학을 대표하면서도, 서로는 첨예하게 대립한 수학자야


다시 수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둘에게 물어보자


푸앵카레의 대답은 직관주의

즉, 수학이 수학자들의 직관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 직관에 반하는 수학은 수학이 아니라고 주장해

수학이 발견이냐? 발명이냐? 라고 물으면 발명이라고 대답하는 주의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칸토어의 집합론, 나아가 논리학도 인정하지 않아.


힐베르트의 대답은 형식주의

그는 수학을 발견이라 보고, 인간의 직관과 별개인 완전한 진리 체계로서 수학을 대했어

수학을 발견으로 보는 입장이지

그는 칸토어의 집합론을 옹호하면서 모순을 해결할 더 완전한 수학을 구축하려고 노력해


이렇게 두 세력이 대립할 때쯤에 러셀이 등장해



russell.jpg

영국의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


위에도 언급했듯이, 러셀은 또 하나의 역설을 만들어

그 내용이 바로,


"Does a set of all sets that do not contain themselves, Contain itself?"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의 집합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가?"




book.jpg


러셀의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보자


세상의 모든 책은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어

1) 책 속에서 자신을 언급하는 책

2) 책 속에서 자신을 언급하지 않는 책


예를 들어 해리포터는 책 속에서 해리포터라는 말이 나오니까 1번의 경우지


2번의 경우에 해당하는 모든 책의 목록을 적은 책을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 책은 1번 2번 어떤 경우에 속할까?


1번 경우에 속한다고 가정하면 이 책은 자신을 언급하는 책이야

근데 자신을 언급하지 않는 책만 책 속에 들어있으니까 자신을 언급할 수 없지


2번 경우에 속한다고 가정하면 이 책은 자신을 언급하지 않는 책이야

그러면 이 책 속엔 자신의 책 이름도 들어있어야 하지

결국엔 자신을 언급하게 돼


즉, 집합을 임의로 정의하는 것만으로 역설이 발생해

다시 한 번 집합론이 형식적으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해




godel.jpg

쿠르트 괴델



러셀의 역설이 발표되고 수학계 양 진영은 난리가 났어

푸앵카레는 역설을 반기면서 집합론과 논리학 두 가지가 모두 무너졌다고 평가해

반대로 힐베르트가 역설을 보고 격노한 건 당연하지


아이러니한건 러셀이 철저한 논리주의자라는 것이야

철학만 놓고 보면 힐베르트와 같은 편이라 할 수 있는 수학자인데 뒤통수를 친 꼴이지

러셀은 자신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

더 나아가 논리적으로 완벽한 수학을 구축하기 위해 화이트헤드라는 수학자와 함께 <<수학 원리>> 라는 책을 만들어.


하지만 이 책은 워낙 두껍고 난해해서, 책을 읽은 사람이 공동 저자를 포함해 세 명 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어

저자를 제외한 한 명이 바로 독일의 수학자 쿠르트 괴델이야


괴델은 러셀의 역설을 교묘하게 이용해, 어떤 수학체계에서도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항상 존재한다는 정리를 발표해

그게 바로 유명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즉, 그 명제가 참이든 거짓이든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거지

이 사실은 힐베르트를 비롯한 형식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줘

형식주의자들은 완전한 논리 체계를 갖추면, 수학의 모든 정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렇다고 결과적으로 직관주의가 이겼다는 것은 아니야

직관주의든 형식주의든 단지 철학일 뿐이고, 그 대립 과정에서 20세기 수학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겠지





wheatly.jpg


이렇듯 역설은 형식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명제를 뜻해

글라도스는 인공지능도 대답할 수 없는 명제를 이용해서 휘틀리를 죽이려고 한 거지.


하지만 휘틀리는 워낙 멍청해서 역설을 이해하지 못 했고, 되려 글라도스만 죽을 뻔 했지

게임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떡밥이, 20세기 수학사 전반을 흔든 떡밥이었다는 걸 알면, 게임이 더-


재밌어질리는 없지 ㅋ

그나저나 수식 입력기 안 쓰니까 개꿀


 

14개의 댓글

2017.12.16
이게 그 거짓말쟁이 문장 그런건가? 참과 거짓이 공존하는 상태??
0
2017.12.16
수학귀신님 닉값하시네
0
2017.12.16
잘 읽었다.
"그렇다고 결과적으로 직관주의가 이겼다는 것은 아니야
직관주의든 형식주의든 단지 철학일 뿐이고, 그 대립 과정에서 20세기 수학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겠지"
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한 대립과 철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철학적 차이가 있었고 그 사이에 어떤 식으로 대립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대립을 통해서 그 이후 수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크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게 왜 '세세한' 발전이 아니라 '큰' 발전인지 글 써줄 수 있어?
보통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문에 소개된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자기참조에 관련된 역설을 그저 재미있지만 진지하게 파고 들 필요가 없는 말장난 정도로 생각하거든. 이 역설을 비전공자에게 설명할 때에는 단순히 흥미 본위로 다루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도 그것이 수학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설명한다면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0
2017.12.16
@기그미
철학 지식이랑 필력이 부족해서 깊게는 못 파고 든다 ㅜㅜ
본문에 나온 「로지코믹스」가 러셀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인데, 당시의 철학적 대립이 잘 나와 있어서 추천함
구립 도서관 정도 규모면 이 책이 있을 확률이 높음
0
2017.12.21
@기그미
너가 저책 읽고 좀 써주라
0
2017.12.17
잘 읽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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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7
수학원리가 1+1=2 증명도 들어가있는 그 책 맞나?

여튼 잘읽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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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와씨 어렵다

근데 재밌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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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처음 러셀의 역설을 봤을 때
한 1분동안 그게 왜 역설인지 고민했다
근데 그럴법한 문장이었어
처음엔 상상할 수 있는 집합인줄 알고 상상해봤는데
애초에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란 게 있을 수가 없잖아 그게 역설 원인 요소이고 거기서 연장된거인듯
나는 그런 모순들은 그저 '위로 내려간다'와 같은 거라고 생각해
아래로 올라간다, 같은거 말이야. 종속관계인 것들을 독립관계로 강제해서 생기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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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트리오브세이비어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은 많음
예를 들어 모든 새의 집합은 새가 아니니까 자신을 포함하지 않지

다만 그런 집합을 모두 모았을 때, 러셀의 역설이 발생하는 거지
0
@테플로탁슬
아... 포함이란 게 원소로 포함하는거구나...
순간 부분집합같은 더 포괄적인 포함관계라고 생각함
그래서 모든 집합은 자신도 포함한다고 생각했었음
약간 내가 용어를 착각한듯
러셀이 상당히 기발한 집합을 발견했네
0
2017.12.18
집합의집합이란말이 자기자신을 포함 시킨다는 명제구나 집합을설정하는것 자체가 새를 새라고부르는거랑 같은 맥락이였다는 센세이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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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정육점 아저씨
모든 집합은 자신을 포함하는 집합과,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으로 나눌 수 있음
예를 들어 '모든 새의 집합'은 '새'가 아니라서 자신을 포함하지 않고,
'모든 관념의 집합' 은 '관념' 이니까 자신을 포함함

근데 러셀이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합'을 따져 보니까,
얘는 자신을 포함하지도 않고,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걸 발견한 거지
0
2017.12.19
또크또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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