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간도영유권, 대한민국판 제국주의

기존에 한 인강강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설파하는 간도영유권 이야기를 짧게나마 비판했음.

http://www.dogdrip.net/105335602 

(일제가 만주침략을 위해 간도의 범위를 어떻게 만들고 확장시키고 왜곡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일제의 논리를 어떻게 고대로 받아먹고 있는지는 해당글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넷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보통 공격적인 반응을 많이 받음. 그런데 그런 모습은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건 우리의 교과서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임. 나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내 학창시절 선생님은 중국의 실효지배 100년이면 간도에 대한 권리를 상실하게 되니까 정부가 빨리 나서야 된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오 시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오늘날 보니 그건 애초에 다 헛소리였지. 

그런데 한국에서 현실적으로 역사에 대한 교육과 관심이 고등학교 이후 거의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수십, 수백만의 학생들이 이런 교육을 받아왔고 받고 있고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한국의 간도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인지 알아보려고 함.

지루하더라도 한번 읽고 우리나라 역시 역사왜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간략하게 줄이긴 했지만 출처로 단 원전들도 상당히 내용이 길기 땜시 그것도 전부 읽고 싶은 사람은 시간 있을 때 찬찬히 읽어보길 추천함.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2006).jpg

 

이 글을 작성하면서 서가에서 꺼내 찍은 따끈따끈한 2006년 개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114p. (아재 아님. 오해 ㄴㄴ)

읽어보면 마치 우리 땅이었던 간도를 일제가 마음대로 내준 것처럼 서술해놨다. 이걸 저렇게 별표 매겨가며 열심히 외웠다니...

한국사로 바뀐 요즘은 어떨까. 나는 검정제인 요즘 교과서들은 보지 못했지만 비슷하거나 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거야 뻔한게,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jpg

 

보다시피 정부지침으로 이렇게 쓰라고 하고 있다. 출처는 문화체육관광부 정책브리핑, http://www.korea.kr/archive/expDocView.do?docId=30471 

2011년 12월 30일 확정 발표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중 한국사의 독도와 간도 부분이다.  

이런 식으로 정해놓고 가르치니까 사람들이 간도를 빼앗긴 땅으로 인식하고 간도를 되찾자 운운하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가 바로잡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고 국정교과서에 사학계가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것이다.

 

그럼 우리 정부의 이런 입장을 떠나서 실제 역사는 어떠했는지 한번 들어가 보자.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 38년(1712년, 청나라 강희제 때) 일이다.

한국의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백두산정계비의 '西爲鴨綠(서위압록) 東爲土門(동위토문)' 에서 이 토문강이 중국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토문강  동쪽인 오늘날 소위 '간도'는 조선땅이었고 곧 우리땅이라는 것이다.

토문강.png

 

이들의 말대로라면 두만강과 토문강은 '당연히' 다른 강이어야하며 조선의 국경은 서쪽의 압록강과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 되어야한다.

과연 그럴까?

 

지금 이응거도에 진을 설치한 일로 말하더라도 이해와 시비가 명약 관화하여 반드시 그 죄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대간이 바야흐로 사직하고 있는 중이어서 논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변경의 화는 경각간이 염려되는 것인데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당초 진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 시비가 각각 달라서 옳다고 하는 자는

‘경흥 땅은 수몰이 되어 경작할 만한 전답이 없는데 이 섬의 전답에서는 풍부한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비록 저들 땅이라 하지만 진을 설치하여 그들의 침입을 막고 군대를 주둔시켜 요새를 지키면 끝내 다른 걱정이 없다.

경작할 만한 땅을 버려둔 채 한 고을의 백성을 굶주리게 하는 것은 땅을 개척하여 나라를 부하게 하는 방책이 아니다.’ 하였고, 그르다고 하는 자는

 ‘우리 국경은 두만강이 한계이고 조종조부터 경흥을 경계로 하였으니 이러한 천험은 인력으로 옮기기 어렵다.

조종조에서 버린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며, 더군다나 방해의 골간은 해염을 업으로 삼고 있고 심처 야인은 이를 파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골간을 내몰아 쫓아서 생활하는 길을 끊는다면 그들은 분함을 품고 반드시 땅을 다투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심처 야인 역시 어염에 의한 이익을 잃는데 어찌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결사적으로 대항하지 않겠는가?

나라 안의 백성이 떠돌고 있어 수많은 촌락에 모두 가시나무가 나고 있는데도 아직 경작하는 백성이 없다.

그런데 도리어 한 고을을 위하여 오랑캐 땅을 취하려 하면 변방의 흔단이 조석간에 생길 것이다.’ 하였습니다.

 

-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 8월 16일 병인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8016_002

 

1552년 명종 때의 기록이다. 세종이 함경도의 여진을 몰아내고 4군(압록강쪽) 6진(두만강쪽)을 세운 이래 조선의 국경이 두만강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 중 4군은 유지하지 못하고 단종~세조 때 걸쳐 폐하여 이후 폐사군이라고 불린다.) 

 

 

(상략)

신이 여기에서 또 그윽이 느낀 바가 있습니다. 대체로 두만강 북쪽은 지금은 비록 다른 지역이 되었지만 (중략)

압록강과 두만강의 근원이 모두 백두산 꼭대기에서 출발하여 동서로 나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계한(경계)입니다.

때문에 지금 이 성경도에도 이렇게 조선의 경계를 두 의 남쪽으로 쓴 것입니다.

(하략)

 

-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5월 18일 정유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305018_002

 

(상략)

대개 압록강·두만강 두 강의 근원은 다같이 백두산에서 나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 나라의 경계입니다.

(하략)

 

- 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1월 13일 갑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201013_001

 

(상략)

남관은 북관보다 비록 백성은 많고 곡식은 적다고는 하지마는,

땅이 양서와 접해져 있으므로 민생들을 옮기거나 곡식을 옮기거나 하여 본시 서로가 필요해지는 방도가 있지만,

북관에 있어서는 이미 영동 곡식의 운반이 힘든데다가 또한 교제곡 수송을 아끼고 있고,

두만강 이북은 곧 우리 땅이 아니므로, 아! 저 부황이 든 무리들이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하략)

 

- 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 12월 8일 을축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12008_001

 

 

조선의 강역은 삼면이 바다로 막혔고, 북쪽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는바, 지역이 전 시대보다 훨씬 더 넓다.

(중략)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경의 강역은, 동남쪽으로는 희객탑산까지가 2000여 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봉천장군이 관할하는 강역은 동남쪽으로는 진강성까지가 540여 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봉황성의 성수는, 동쪽으로는 애강까지 120리로 조선과 경계이고, 동남쪽으로는 의주강까지 12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영고탑은 남쪽으로 토문강까지가 60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오라 성수는 남쪽으로 장백산(백두산)까지 1300여 리이며, 그 남쪽은 조선과 경계이다. 

혼춘은 서쪽으로 토문강까지가 2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하략)

 

- 한치윤 '해동역사' 속집 12권 지리고(地理考) 조선(朝鮮)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m005&gunchaId=bv012&muncheId=01&finId=001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청나라의 지리지인 성경통지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오늘날 위치로 확인해보면 이렇다.

 

 성경통지.jpg

 

하늘색 선은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 대략적으로 위치한 곳이다. 저곳이 조선의 국경이라면 기록이랑 전혀 맞지 않는다.

영고탑 남쪽으로 600리를 가면 토문강이 있고 훈춘에서 서쪽으로 20리 가면 토문강이 있다고 함을 보면 청나라가 분명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가보자.

 

(상략) 

목극등은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진 사이에 앉아서 말하기를, ‘여기는 분수령이라 할 만하니 비석을 세워 경계를 정해야 하겠다.

그런데 토문강의 원류가 중간에 끊어져서 땅속으로 흐르므로 경계가 분명치 않다.’ 하고, 이에 비석을 세우고 쓰기를,

‘대청의 오랄총관 목극등은 명령을 받들고 변경을 조사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 되고 동쪽은 토문강이 되었으므로 분수령에 돌을 세우고 글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 하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토문강의 원류가 끊어진 곳에는 하류까지 연달아 담을 쌓아서 표시를 하라.’ 했다.” 하였다.
이 말은 세태가 직접 그때에 목격한 역관  김경문에게서 얻어들은 것이니 거의 믿을 만하다. 토문강은 두만강이다.
옛날에 윤관(12세기 고려의 인물)이 속평강까지 국경을 넓히고 그 일을 기록한 비석이 아직까지 그곳에 서 있는데

김종서 때에 와서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을 나라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윤관의 비를 가지고 따져서 경계선을 정하지 못한 것은 그 일을 맡은 사람의 잘못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함경도는 모두 말갈의 땅이었다. 지금에 와서 경계를 정한 지가 오래되었고 우리 영토 안에 있는 폐사군(세종 때 세운 4군 6진 중 4군)도

가끔 외적의 침범이 있어서 모두 이민을 시키고 비워두었는데 하필이면 다시 쓸데없는 땅을 가지고 외국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 무엇이냐?

지금의 국토는 금구와 같이 완전하게 되었으니 아무튼 손상을 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 이익 '성호사설' 2권 천지문(天地門)  백두산(白頭山)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08&gunchaId=av002&muncheId=01&finId=076

 

 

(상략)

두만강은 바로 토문강이며 백두산 큰 못이 근원이다. 동쪽 흐름 수십 리는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돌 틈을 따라 백리를 숨어 흐르다가

비로소 큰 물이 솟아나서 동량ㆍ북사ㆍ지하ㆍ목하ㆍ수주ㆍ동건ㆍ다온ㆍ속장 등을 거쳐 경원 회질가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경흥ㆍ사차마도에 이르러 나뉘어서

5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략)

 

- 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h006&gunchaId=bv016&muncheId=01&finId=001

 

  

(상략)

조선조가 일어나서는 함경의 남쪽과 마천령의 북쪽을 차츰 우리의 판도로 끌어들였고,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에 무산부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천참의 국경으로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의 땅으로서, 삼한 이래로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에서 발원하고, 장백산의 남맥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 만년에 오랄총관 목극등이 명을 받들어 정계비를 세우니, 드디어 양하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지금 저들의 땅과 우리 땅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을 상고해 보면, 연하 지방에 군ㆍ현ㆍ보ㆍ위가 있지는 않으나

두만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영고탑부내 혼춘 와이객이고, 압록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길림부내 책외번지로서,

흥경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따라서 삼을 캐고 담비 사냥을 하는 흥경 백성들이 이따금 월경하는 경우가 많고,

강계ㆍ위원ㆍ벽동ㆍ초산에 사는 우리 백성들도 불법으로 저들 땅에 들어가 삼도 캐고 사냥도 하므로 두 나라는 엄한 조약을 맺어 서로 금하여 왔다.

또 우리의 강북이 저들 땅이긴 하지만 그곳에 사람이 살게 되면 월경하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이고 그러면 우리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에

저들이 강 연안에 방수를 설치하고자 할 적마다 우리는 매번 철거를 진정하였는데, 저들도 따라 주었다.

이로 인하여 두 나라 사이에  쟁상의 근심과 복망의 화가 없어진다면 다행이겠다. 그러므로 정계 이후로 왕복한 문자를 모아 강계고를 만든다. 

 

 - 정약용 '다산시문집' 15권 강계고서(疆界考敍)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c001&gunchaId=av015&muncheId=01&finId=013

 

 

평안도 동쪽에서 백두산의 큰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하늘을 자른 듯 끊어져서 영(嶺 ; 고개)이 되었다.

이 영의 동쪽이 바로 함경도인데 옛 옥저의 땅이다. 남쪽은 철령, 동북쪽은 두만강이 경계다. (하략)

 

- 이중환 '택리지' 팔도총론(八道總論) 함경도(咸鏡道)

허경진 옮김, 두산동아, 2010.

 

 

조선 측의 기록도 두만강 = 토문강 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두만강이 조선의 경계임을 명시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런 기록은 지금 이 글에서 예시로 든 것들 이외에도 넘쳐난다.

두만강에 호인들이 나타나 쫓아버렸다는 기록이나 두만강물이 범람해 방비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내용이나 조선인들이 월경하는 문제를 의논하는 등등...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 두만강이란 기록을 찾아보면 무려 250여 건이 발견된다. (사족으로  중국과 교류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압록강은 천건이 넘게 검색된다.)

 

두만강 검색 결과.png

 

반면 그분들이 조선의 국경이라고 주장하는 토문강은  17건 발견된다.

 

토문강 검색 결과.png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숙종 때 8건, 이후 영조 때 딱 1건, 마지막으로 간도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고종 때 8건이다.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이고 조선이 토문강을 국경으로 생각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그렇다면 오늘날 간도영유권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 진실을 살펴보자면 숙종 때 기록부터 찾아봐야 한다.

숙종 때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넘어가 청인 5명을 죽이고 그들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문제 외에도 당시 월경 문제가 빈발하자 청나라와 조선이 경계를 확정짓기로 하면서 청나라에서는 목극등이라는 인물을 파견했고 조선은 박권을 대표로 보냈다.

이 때 대화를 살펴보면 숙종 때 정계가 무엇을 위함인가가 분명해진다.

 

(상략)

총관이 ‘그대가 능히 두 나라의 경계를 밝게 아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비록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장백산 산마루에 큰 못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니,

큰 못의 남쪽이 곧 우리 나라의 경계이며, 지난해에 황제께서 불러 물으셨을 때에도 또한 이것으로 우러러 답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빙거할 만한 문서가 있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나라를 세운 이래로 지금까지 유전해 왔으니, 어찌 문서가 필요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략)        

 
-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5월 5일 정해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805005_002     

 

  

접반사 박권이 치계하기를,

"총관(목극등)이 백산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로 삼았으며,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이 되었으니 분수령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의 뜻이다. 도신과 빈신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5월 23일 을사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805023_001

 

실록의 이 기사에서는 토문강과 두만강을 섞어 쓰고 있다.

또한 위 두 기사를 통해 백두산정계를 확정짓는 문제가 두만강의 상류 수원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밝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백두산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를 정확히 하자는 것이었지 그 이북의 소위 '간도' 땅을 두고 다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간심은 자세히 살피다는 뜻인데 함께 가서 간심하지 못했다 함은 박권이 백두산에 안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ㅅ'=3

결국 박권은 이 일로 공격받는다.  

 

사헌부에서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새로 아뢰기를,

"저 사람들의 백두산 행차에 사명을 맡은 신하가 진실로 마땅히 함께 가야 하는데도, 접반사박권과 함경 감사 이선부

대신 편비(부장)를 보내고 모두 물러나 앉아 몸이 쇠약하고 늙었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백두산의 길이 비록 험난하다고 하지만 차원 이하가 모두 통행했으니, 접반사와 함경 감사만 유독 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경계를 정하는 막중한 일에 다만 1장의 수본으로 상문하였을 뿐,

물의 근원을 다투어 논할 즈음에는 이미 목격하지도 않고 단지 ‘예예’하고 답하기만 하였으니,

사명을 맡긴 뜻이 어찌 제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청컨대 박권이선부를 모두 파직하소서."

(중략)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6월 9일 신유 3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806009_003

 

숙종이 허락하지 않아 이 일은 잘 넘어갔으나 이후 국경에 푯말을 박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목극등과 조선관원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물줄기(수원)는 입지암류(복류)가 되어 땅으로 스며들었다가 수십리를 지나 다시 땅 위로 나와(용출) 두만강이 된다.

하여 이 수원이 어디인지를 찾아 경계를 확인하는 것이 목극등과 박권의 일이었고

이후 정계비가 세워진 뒤 조선은 이 수원과 복류시작지점, 그리고 물이 다시 땅 위로 나오는 용출지점에 목책을 세우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조선 측에서 국경에 푯말 세우는 작업을 할 때

겸사겸사 하류까지 둘러보려고 하자 정계비의 수원이 두만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상략)

신이 여러 차사원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과 차원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목극등)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양과 박도상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목극등)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목극등)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략)

  

정계비가 세워진 수원을 따라가면 두만강으로 안가고 오랑캐 땅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발언에 주목하자.

재미있는 점은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 말대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면서 송화강 지류의 토문강을 조선국경으로 인정받았다면

조선 측에서 수원이 두만강으로 가지 않는다고 당황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여기서 당황하는 이유는 그곳이 조선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조선의 관원들은 조정의 명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자신들이 찾은 두만강 수원을 향해 목책을 박았다.

잘못된 정계비라지만 어찌되었든 청나라의 대표인 목극등이 세우고 조선도 동의한 정계비를

허양 등의 하급관원들이 무시하고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은채 마음대로 푯말을 세웠기에 일단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다.

실록의 기사를 계속 읽어보자.

 

(상략)

영의정 이유가 아뢰기를,

목차(목극등)가 정한 수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박권이 아뢰기를,

"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길이와 넓이)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유가 아뢰기를,

"그들이 이미 경계를 정하고 돌아간 뒤 이러한 잘못이 있음을 우리 쪽에서 발단하여 그들을 견책받게 하는 것은 또한 불편한 데 관계됩니다.

우선 목차에게 연유를 묻고 답변을 얻어 본 다음에 요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는데, 시급하게 다시 간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내의 수령들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차원으로 택정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략)

 

- 숙종실록 52권, 숙종 38년 12월 7일 병진 3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812007_003

 

 

그런데 이에 대해 논의하는 조선의 모습도 간도영유권이 주장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목극등이 수원을 정하고 일단 우리도 거기에 동의를 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하여 우리가 마음대로 경계를 수정한다면 뒷날 문제가 발생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박권은

"엥? 그것도 어차피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이미 이렇게 된거 걍 경계로 하고 정말 그 수원이 북쪽으로 가서 두만강이랑 안 이어지면 목극등한테 먼저 이야기하죠." 라고 하고 있으며

오히려 조선은 청나라에 알렸다가 목극등 등이 이 일로 처벌받을 것을 꺼리고 있다.

 

같은 기사에서 허양이 한 진술을 살펴보면 목극등이 정계비를 세울 무렵의 일을 알 수 있는데

짧게 정리하면 목극등은 백두산에서 발흥하여 사방으로 흘러내려가는 여러 물줄기들 중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수원을 찾아야 했는데 그것을 잘못 결론내리고 북방으로 흘러가는 물줄기에 정계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목극등도 조선관원들도 참 일을 설렁설렁했다. )  

결국 조선은 1712년 목책을 세워 국경에 푯말 박는 일을 잠시 중단했다가 1713년 다시 승인하고 관원들이 수정한대로 목책을 세웠다.

 

(상략)

이유가 또 함경도 감사 이선부의 장계로써 나아가 아뢰기를,

"백산(백두산)에다 푯말을 설치하는 일은 일찍이 허양 등에게 사문한 뒤에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케 했는데,

이제 이 장계를 살펴보건대, 허양의 말과 같으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사신의 장계 중에,

목차(목극등)가 전하기를, 「이제 다시 살펴볼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푯말을 세우는 일도 농사 틈을 기다려서 하고,

백성을 혹시라도 상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더욱 서둘러 끝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전일에 푯말을 설치했던 곳에 따라 천천히 일을 끝마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략)

 

- 숙종실록 53권, 숙종 39년 3월 15일 임진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903015_002

 

 

이게 숙종 때 있었던 백두산정계비의 전말이다.

과학적인 수계 확인이 불가능했던 전근대의 해프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두산정계비가 두만강으로 안 이어지는 것 같다는 지적은 애초에 당대 실록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문제는 당대 조선에서는 정계비의 수원이 두만강으로 안 이어지는 걸 보니 정계비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하고 목책까지 수정해서 박았는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정계비의 위치와 그 수원이 당시의 국경선이 맞다고 우기고 있는 것...

 

그렇다면 고종 때의 간도관리사니 조청감계회담이니 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상략)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경계를 조사하는 한 가지 일은, 정계비를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곧 비석은 대천(백두산 천지)의 남쪽 산기슭 10리쯤에 있습니다.

비석의 서쪽 부근 몇 걸음 떨어진 땅에 도랑이 있어 압록강의 원류가 됩니다. 비석의 동쪽 부근 몇 걸음 떨어진 땅에 도랑이 있어 토문강에 원류가 됩니다.

잇달아 석퇴과 토퇴를 만든 것이 90리가 되었습니다. 언덕의 높이는 수척이 되고, 언덕 위에 수목이 자생하였는데 이미 늙어서 한아름 정도 되는 나무는

그해에 마땅히 한계를 표시한 것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대각봉의 후미 중간에 이르러서 도랑 모양이 갑자기 좁아져서 흙 언덕이 문처럼 마주보고 서있습니다.

옛날부터 토문이라고 부른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며 두만강 상류의 여러 물들의 발원처 가운데 봉퇴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이 홍토산수의 발원처입니다.

가로로 질펀한 긴 둑과의 거리가 이미 40~50리 정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토문의 위아래의 형편을 말씀드리자면, 비석의 동쪽 건천으로부터

동쪽으로 백 여리를 비스듬이 가서 비로소 물이 나와 동북쪽으로 송화강으로 들어갑니다. 송화강은 곧 흑룡강 상원의 한 물줄기입니다.

길림과 영고등의 땅이 모두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중국파원은 중국과 조선의 강역 경계는 도문강(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총서 예부의 주의도 도문강의 옛 터를 조사하자고 하였는데 지금 이 비석의 동쪽 도랑이 이 송화강의 상류입니다.

‘동쪽이 토문이 된다’는 뜻과 부합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설이 많았습니다. 신은 하류가 비록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경계를 표시한 비퇴는 이미 저 토문의 형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처럼 멀어서 두만강 상류와 서로 이어지지 않으니

곧 우리나라 사람은 다만 토문으로 경계를 인정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하나의 털끝만치도 속이거나 숨기는 것이 없었고 입이 닳도록 힘을 다해 변론하였던 것입니다.

(하략)

 

- 이중하 '감계사등록' 을유감계회담(1885년 1차 회담)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gd.k_0001_0900

 

  

내부 대신 임시 서리 의정부 참정 김규홍이 아뢰기를,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중략)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전에 분수령 정계비 아래 토문강 이남의 구역은 물론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으니

결수에 따라 세를 정해야 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비어 두었던 땅에 갑자기 온당하게 작정하는 것은 매우 크게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보호할 관리를 특별히 두고 또한 해당 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시찰관 이범윤을 그대로 관리로 특별히 차임하여

해당 간도에 주재시켜 전적으로 사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여

조정에서 간도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8월 11일 양력 1번째기사(1903년)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008011_001

 

고종 때 들어오자 갑자기 조선의 기록들은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감계사로 임명되어 1885년 을유감계회담과 1887년 정해감계회담에 조선측 대표로 나갔던 이중하는

정계비 수원의 하류가 비록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경계를 표시한 비석은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을 경계로 하고 있을 뿐이라며 

처음부터 하나의 털끝만치도 속이거나 숨기는 것이 없었고 입이 닳도록 힘을 다해 변론하였던 것이라고 고종에게 보고했다.

또 고종실록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는 일과 관련해

수백 년간 비워두었던 땅 운운하며 정계비 아래 토문강 이남의 구역이 조선의 경계로 확정되었다며 합리화한다.

하지만 그냥 이건 억지에 불과하다. 이중하는 이미 두만강을 토문강 혹은 도문강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만강의 이름은 예전부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왕래하는 공문서에 혹은 토문강이라고 칭하고 혹은 도문강이라고 칭했습니다.

일찍이 변계를 밝히지 않아서 그 칭하는 바를 크게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경계를 논의하는 것에서 우리나라의 원래 자문에 토문강 경계 조사를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토문감계사의 명을 받들고 나아가 비석의 동쪽 토문강의 경계를 자세히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총리아문 주의에서는 곧 도문강 사계파원의 직함이라고 했습니다. 또 도문강의 감계조사를 위주로 하면서 "도문강은 두만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단지 두만강의 근원을 조사한다면 신이 명을 받든 뜻과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계를 논의하는 일은 자연히 갈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이 수차례 토문과 도문은 같지 않다고 말하면 저쪽에서는 오직 토문과 도문을 본래 한 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만주어인데 '청문감'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 이중하 '감계사등록' 을유감계회담(1885년 1차 회담) 별단초(別單草)

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gd.k_0001_0910_0010

  

별단초는 간단히 생각해서 정식 보고서 뒤에 첨부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막말로 조선이 간도에 집적거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2년 뒤 1887년 정해감계회담에서 조선은 이미 손을 든 상태였다.

  

(상략)

신이 말하기를, 저번 때에 총리아문의 주의에 의거해서 토문과 두만이 이미 하나의 강이라고 충분히 밝혔으니

우리나라도 감히 옛날과 지금의 상황을 밝히기 어렵다는 안건으로 자주 상국(청나라)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략)

 

- 이중하 '감계사등록' 정해감계회담(1887년 2차 회담) 계초(啓草)

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gd.k_0002_0830

 

 

결국 중국이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고종 때 와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을 의미한다고 우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문헌 기록 뿐만 아니라 고지도를 봐도 명확하다.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간도 땅이나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 동편의 땅들은 조선의 고지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하 지도들의 출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

 

 

청구도 2.jpg

 

 

청구도

 

여지도 함경도(필사본).jpg

 

정상기가 작성한 여지도 필사본 - 함경도


동국지도.jpg


동국지도

 

여지도(함경도).jpg


여지도 - 1730년대 이후 작성, 목판본

 

대동여지도.jpg

 

 

마지막으로 대동여지도

 

사실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조선은  폐사군도 군을 폐했을 뿐이지 계속해서 병력을 두고 그 땅을 관리하였다. 

그런데 소위 '간도' 땅에 관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저 고종 때 갑자기 수백년 버려놓은 땅 운운하며 국경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 측의 주장을 합리화 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말까지 한다.

 

 

동아일보 왜곡기사.jpg


 

위 기사는 옛날에 나왔던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다.

어처구니 없게도 청나라가 자국 영토에 내린 봉금령과 조선이 국경인 두만강을 넘어가는 것을 금한 것을 동선에서 취급하며

'간도는 오랜 세월 조선과 청 어느쪽도 일방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중간지대' 운운하고 있다.

애초에 봉금령을 내렸다가 풀었다가 한다는 것 자체가 영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의미의 범월(犯越)과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버려진 땅이고 조선인들이 넘어가 개척했으니 조선땅이라는 논리도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다. 

조선의 공도정책을 생각해보자.

 

봉금령을 공도정책으로, 간도를 독도로 바꿔서 읽어보면 한국의 논리는 일본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그 나라가 비워두었고 우리 백성들이 넘어가 살았으니 우리땅이라는 논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

 

 

 

 

세줄 요약

 

1.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을 의미하는 거 맞음.

2. 애초에 백두산정계비는 압록강 상류 수원과 두만강 상류 수원을 찾아 세운 것.

3. 중국이 토문강은 두만강이라고 우긴게 아니라 고종 때 조선에서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라고 우겨본 거임.

 

 

 

 

비웃음짤.gif


 

 

32개의 댓글

2016.08.23
병신들은 딴 나라에만 있는게 아니니까.
0
2016.08.23
ㅋㅋㅋㅋㅋㅋ 차라리 요동을 정벌 하지 ㅋㅋ
0
2016.08.24
공무원이 또?!
0
2016.08.24
ㅊㅊ
0
2016.08.24
역사는 승자가 적고 싶은것만 적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0
2016.08.24
근데 짱개새키들이 역사왜곡 더 심하더만ㅋㅋ 우리가 정상적으로사고해봣자 짱개놈들은 악랄해서 안됨 똑같이해야함
0
2016.08.24
@츄잉잉
뉴라이트세요?
0
2016.08.24
@츄잉잉
지구상에 짱개랑 한국만 있냐? 짱개랑 똑같이하면 짱개랑 동급으로 다른 나라들에게 욕처먹겠지
0
2016.08.24
@프링글스조아
짱개가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가 숙이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 이거지.

예를들면 불법어업때문에 어민들 존나 피해보는데 우리정부는 뭐 강경 대응 한번이라도 한적있냐

사회생활 하면서도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텐 잘할 마음이 생겨도

나한테 좆같이 하는 사람한테 잘할 마음이 생김? 뭐 모든 사람한테 똑같이 잘해줘야되냐
0
2016.08.24
@츄잉잉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간단하고 무식하게 대응하면 니가 말하는 악랄한 짱깨랑 뭐가 다르겠냐
0
2016.08.24
@해탈한문과생
우리나라사람들은 눈에는눈이에는이안하면 무시하던데.. ㅅㅂ
0
2016.08.24
@해탈한문과생
그럴만한 놈들한텐 그렇게 해줘야함.
0
@츄잉잉
피장파장의 오류..
0
2016.08.24
예전에 인강들을때 메가스터디에 고종운이라는 강사가 저 얘기해서 간도가 구라인거 알았지ㅋㅋ 자료로 상세히 본건 첨이네ㅋㅋ
근데 고종대기록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좀더 있다고 생각함. 일단 고종실록부터는 쪽바리놈들 영향이 있자나. 그리고 170년전 일을 다시 논의한다는 문제도 있고ㅇㅇ 토문이냐 두만이냐 가지고 논쟁하던걸 일제가 조선이 우기네로 조작하고 간도협약체결해서 우리가 정리해줌 이런 식의 논리전개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함. 물론 저런 영토인식이 고종대에 나온 원인을 찾는 것만으로도 이미 석사급 논문주제인거 같다만ㅋㅋ
0
2016.08.24
@프링글스조아
고종실록은 분명 문제가 많지만 일단 간도에 관리를 파견한 것 자체는 사실이라 그 부분을 집어넣었뜸.
또 고종 때 갑자기 왜 저런 영토인식이 생겼는지, 실제 사람들이 그쯤가서 토문강과 두만강을 달리 인식하게 되었는지,
(물론 달리 인식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정계비 세울 당시에는 토문강 = 두만강이었으니 큰 의미는 없지만...)
조선은 왜 영토를 남만주로 확장하려 했는지도 의문이고 그 역시 네 말대로 연구 주제가 될테지만
(아니면 선행연구가 있는데 내가 그걸 못 본 걸수도 있구)

난 개인적으로 일제가 '조선이 간도를 자기네꺼라고 우기네, 우리가 정리해줌' 이런 식으로 나섰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게
현재까지의 연구를 보면 일단 일본은 간도가 조선땅이라는 논리를 펴서(심지어 그 영역을 남만주 전체로 확대한 것도 일제...)
그걸 빌미로 만주에 대한 야욕을 노골화했음.
간도는 조선땅, 조선의 보호국은 일본, 그러니 간도도 우리가 관할한다는 식.

또 위 사료들에서 살펴봤듯이 명종 때까지만 해도 분명 조선은 두만을 경계로 보고 있고 이후에도 마찬가지임.
숙종 정계 문제 역시 실록에서 보이듯이 두만강 상류의 수원이 정확히 어디인가를 찾는거였지, 간도를 두고 다툰게 아니었고.
오히려 당시 실록에는 압록, 두만 이남을 별 충돌 없이 영토로 인정받아 다행이라는 말도 나옴.
조선왕조실록 자체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거라고 하지 않는 이상
두만강 너머 조선인들의 개간이 활발해지고 조선이 관심을 가지는 고종 전까지 간도에 조선이 연고가 없음은 일단 주지의 사실임.
1885년, 1887년의 감계사등록 역시 인정받는 문서지, 조작되었다는 말은 없으니
감계사 이중하가 거기서 토만과 두만이 같은 강이라고 인정한 것 역시 사실이고...
0
2016.08.24
@프링글스조아
물론 일제의 국권피탈과 조선을 제하고 지멋대로 맺은 간도협약이 없었으면
조선과 청의 분쟁은 결과가 어찌되었든 주체적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테지. 그게 비극인거고...
근데 그것도 간도협약 전으로 되돌아가봤자 감계회담 때로 돌아가는거지 누구처럼 '잃어버린 땅' 운운하는 건 좀...

근데 메가스터디는 고종운이 아니라 고종훈 아니냐 ㅋㅋㅋ
0
2016.08.24
@바실레오스
6년전에 들은거라 아재이름이ㅋㅋ
간도문제는 사실 반론의 여지가 없는거지ㅋㅋ
단지 몇백년간 두만=토문으로 인식하고 두만강, 압록강을 경계로 삼던 조선이 고종대에는 왜 간도에 집적되는지가 의문이어서 써봄ㅋㅋ
0
2016.08.24
우리나라도 일본 중국처럼 역사를 확대해석하거나 곡해하는 면이 꽤 있다 ㄹㅇ
0
2016.08.24
역잘알 부럽다.. 교양서한권만 추천좀
0
2016.08.24
@妖異
너무 시대가 방대하고 그 안에서도 세세한 분야가 많아 특정한 한권을 찝어주긴 어렵고
시대나 분야 별로 관심 있는 거 말해주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추천해 드릴게여

일단 개인적으로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시리즈랑 '민음 한국사 조선'시리즈를 먼저 추천합니다.
민음 한국사 조선의 경우 시각적 자료도 풍부해서 읽기 편함.
0
[삭제 되었습니다]
2016.08.25
@오늘부터그림왕
아니 그게 대체 뭔소리여... 제주도, 독도 부유설인가 미친
0
@00억
[삭제 되었습니다]
2016.08.25
@오늘부터그림왕
ㅋㅋㅋㅋㅋㅋㅋ뭔가 웃프다...
0
06년... 삐빅! 아재입니다.
그래도 요즘은 간도가 어쩌니 이러면서 개소리하는 사람이 좀 적어진것 같음. 다행.
0
2016.08.25
@세그먼툼판다리아
책이 2006년 판인거지 2006년에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거 아니거든욧!
0
2016.08.25
@바실레오스
그래서 춘추가...?
0
2016.08.25
좋은글 잘봤음 ㅊㅊ!
고딩때 이과라서 역사는 거의 못 접했는데 이런 글 보니까 재밌넹
0
2016.08.30
근데 생각해보면 웃긴게.. 청나라는 대체 왜 간도가 자기네 꺼라고 일본하고 조약으로 확인 받은 걸까?

이거 완전 독도를 국제재판소 가저가는 건이랑 같은거 아님? ㅋ
0
2016.08.31
@하델
러일전쟁 이후의 수습 과정이랑 연계된 문제임.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얻은 만주의 이권을-그게 적법한 것이든 아니든-보장받으려 했고 중국은 그걸 거부하려 했음.
그 과정에서 남만주 지역에 일본이 더 집적 거리지 않는 조건으로 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거.
철도부설권(안봉선) 문제도 그런건데. 애초에 이 안봉선 자체가 러일전쟁기에 일본이 전쟁을 위해 급하게 무단으로 지은 철도임.
즉 이미 지어져있던 철도를 개축,노선변경할 권리를 청나라한테 요구한거.
1
2016.08.31
[삭제 되었습니다]
2016.08.31
@돌키위
당장 학자들 국회 불려가서 식민사학자 아니냐는 식으로 모욕 당하는거 보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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