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나 한세기 전으로 가면.

모자랄 거 없이 떵떵거리며 살아온 부르주아나 귀족출신 젊은이들이 극좌파나 맑스주의를 신봉하는 노동자-농민 연합 정치파벌에 가입해서 두각을 드러내는 게 꽤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ㅇㅅㅇ..

당대엔 그저 '멍청한 이상주의자'나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 정도로 여겨졌죠. 나중에 공산당 국가가 세워지면서 도출된 결과도 끔찍한 편이라 보통 가문의 흑역사로 여겨지거나 무시되고 잊혀지곤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옳았다던가. 그르다던가 하는 얘기가 아니라.

한 사회의 첨탑-혹은 첨탑의 기둥다리에 속하는-계층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회의 밑바닥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며 나아가 아예 그들과 섞여 일원이 될 수 있었느냐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라. 추한 것은 눈에 담지 않으려합니다. 귀족의 장자로 태어나 모든 미래가 보장된 이들은 하물며 어떻겠습니까.
자연히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 권리,명예,부. 당연한 것으로 여길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째서? 눈 앞에 있는 것들을 제치고 그들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을까요.

사실 귀족과 노동자라는 계급적 구분은 치밀했을지도 몰라도 둘 사이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니 감시카메라니 하는 게 있던 시절도 아니라.
젊은 친구들이 부모님 시선 밖으로 잠깐의 '일탈'을 경험하는 건 일도 아니었죠.
그저 자기네 저택이 세워진 동네 밖.
연기가 피워오르는 커다란 굴뚝이 나란히 늘어서있는 저 신기한 동네로 걸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오늘날에야 치밀한 행정시스템과 부촌끼리의 격리. 거대해진 도시의 교통망 덕에 '부자동네'의 젊은이가 번화가로 놀러갈 순 있어도 공장단지를 들르는 건 힘든 일이죠.

과연 그들이 '거대한 굴뚝이 늘어선 신기한 곳'에서 맨 먼저 본 건 뭘까요?
팔다리가 잘려나간 노숙자?
거무죽죽한 낯으로 몸을 파는 늙은 창녀?
꾀죄죄한 몰골로 토굴속에 쫓겨들어가는 어린이 노동자?
간사한 낯으로 자신에게 굽실대는 공장의 감독관?

그들이 보았던 게 무엇이건 간에.
이 젊은이들은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고 돌아옵니다.

일부는 그들의 현실을 보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어떤 이는 애써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헌데 열에 하나라도.
그걸 '이상하다'라고 여기는 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열에 하나라면 백 중엔 열이 되고
천 중에는 백이 되며
만 중에선 천이 됩니다.
나라란 사람의 덩어리고.
사람은 많고. 경우의 수도 많겠죠.
이상하다고 여긴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그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그것을 이해해보려 애씁니다.
그런 이들이 나중에 맑스의 책을 읽고 납득함으로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겠죠.

이러한 상황이 되면 사회의 붕괴가 다가올거라고 여깁니다.
젊은이라함은 훗날의 사회의 일원이 될 이기에.
자신들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에? 흔한 소설소재 아니냐구요?

그 소설은 누가 썼을까요?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 혁명? 깨어있는 지식인들이여 펜을 들어라?

이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쳬계적으로 문학 교육도 받은 상위계층이었고..

그들이 자신들이 직접보고 경험한 생생한 현실을 종이에 옮기는 건 큰 난관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을 겁니다.





헌데 오늘 날엔. 오늘 날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재벌이나 자본가들의 후세대들이 서민들에 대한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들이 공산당선언을 하라던가 뭐 그딴 개소릴 하자는 건 아닙니다.

공감의 부재가 문젭니다.

오늘날 계층간의 보이지 않는 장벽은 더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사실상 격리지요

그들이 공장단지의 단칸방에 들를 일은 없습니다.
공시생들이 부대끼는 공시촌이요? 그런 걸 왜 갑니까?
학교는 소위 귀족학교라 불리는 값비싼 사립들이 있구요.
뉴스나 언론. 그걸 볼 일이 있습니까? 주식시장부터 봐야되는데.
거리에서 시위를 한다지만 역시 도시 반대편이라 구경할 일도 없네요.

혹여나 궁금해서 가보려해도.
이 감시사회는 부모에게 자식위치를 꼬박꼬박 보고합니다.


서민의 아이와 부자의 아이는 이제 철저히 단절됩니다.
신데렐라같은 동화적이고 우연한 접촉조차 있을 수가 없는 사회네요.
태어날 적부터. 아니 아예 늙어 죽을 때까지도 둘이 서로 마주칠 일이 없게 됩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으로서 만나봐야..
피고용인이 고용주에게 어떤 쓴소릴 할 수 있을것이며..
날적부터 그렇게 살아온 고용주가 피고용인의 하소연을 어떻게 공감하겠습니까.

우리는 격리된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공감이란 말은 이제 비아냥거리는 용어로 전락했고..
혐오만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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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발 무슨 글을 쓴건가.

병신소설 읽는 느낌으로 읽어주세욧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