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파시즘의 탄생 3부작]2. 대공황과 재건체제의 붕괴, 파시즘의 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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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大恐慌)의 전개

 


1920년대 상대적 안정기는 미국의 번영에 의존하여 표면적으로는 풍요롭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고, 이는 언제든 터질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국의 거대한 금융시장과 주식시장은 십 수 년을 주기로 소규모 공황과 성장을 반복하는 특징이 있었다. 대개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19291024일 목요일 발생한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폭락사태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1024일 목요일 단 하루 동안 1300만 주가, 1029일 화요일에는 1600만 주가 매각되었다. 전미은행연합은 1025일 긴급자금을 조성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으나 무위(無爲)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대공황은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1920년대의 번영을 선도했으나 서서히 감소세를 보이던 미국의 철강과 자동차 생산은 대공황이 가시화된 1929년 이후 일거에 대폭 축소되었으며 동시에 농업불황은 가속화되었다. 거기에 수입 감소와 해외투자자금 회수, 해외투자기피 등의 현상이 일련(一連)적으로 벌어졌다. 이는 곧 미국의 단자가 더 이상 해외로 투하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미국의 번영에 기반을 둔 1920년대의 상대적 안정기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치 인공호흡기와 같았던 미국의 자금공급이 중단되자 이미 1920년대 중반 이후 농업불황에 시달리던 주변부농업국에서는 외환위기와 농산물가격하락이 격화되었다. 미국의 자금공급 중단은 또한 이제 막 안정을 찾아가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직격했다. 1920년대 내내 독일의 경제부흥과 전후배상처리, 전채보상에 주도적으로 기여해온 미국의 자금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자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순식간에 경제적 위기가 닥쳐왔다. 생산축소, 무역 감소, 실업증대가 전 독일을 휩쓸었으며 이에 따라 정치적 혼란도 파급되어 도처에서 공산당이 세를 불렸으며 이에 반발한 나치당 역시 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처럼 정치적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자 독일은 더욱 투자처로써의 매력을 잃어 외자의 유출은 심해졌다. 특히 19315월의 대규모 예금인출로 인하여 크레디트 안슈탈트(Credit Anstalt, 오스트리아 최대 규모의 범 도이치 은행.)가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것이 방아쇠가 되어 도이치권 전체에 금융공황이 확대되었다. 19317월에는 기어이 금본위제의 기능이 정지되어 정부 주도의 강력한 환관리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공황은 심화되었다. 그 결과 1932년 독일의 공업생산량은 1929년의 50% 수준으로 급감했으며 공업노동자의 3분지 1이 실업자 신세라는 엄청난 상황에 직면했다.



credit anstalt.png

<에센의 크레디트 안슈탈트 지점. 이처럼 크레디트 안슈탈트는 도이치권 전체에 퍼져있었다.> 


독일의 공황은 전후 재건체제를 통해 영국에도 파급되었다. 독일의 공황으로 말미암아 영국의 대독(對獨)채권 1억 파운드가 동결되어 외화사정이 악화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영국 역시 19319월 금본위제를 정지시켰으며, 스털링 블록에 속한 영연방 각국도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공황의 심화


 

1932년 중후반을 전후하여 미국 내에서는 금본위제를 정지시키고 달러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이에 불안감을 느낀 투자자들에 의해 은행에서의 예금인출과 미국 국내외의 금 유출 현상이 시작되었다. 예금인출사태는 1932년 겨울 시작되어 19332월경에는 디트로이트 은행으로까지 파급되었다. 19332월부터 19333월까지의 1개월 동안 3,460개의 상업은행이 파산했는데, 이는 전미(全美) 상업은행의 20%에 달하는 것이었다. 금 유출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미국 연방정부의 금 준비 역시 날로 감소하였고, 19334월에는 기어이 금본위제가 폐지되었다. 재건 금본위제를 시작하고 이끌어온 미국마저 은행공황으로 금본위제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자 무역망의 확대와 재건 금본위제를 통해 세계 경제를 통일하려던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6년간 전 세계 45개국이 재건 금본위제를 포기했고, 이에 따라 이들은 각자도생의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uncle sam.png

<'나도 돈이 없다!', 미국의 몰락.>


 

경제블록의 군사화와 파시즘의 발호(跋扈)


 

1930년대의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구미대륙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 블록에 의존했다. 경제 블록이란 중심 국가와 그에 깊은 경제적 상호의존관계를 맺은 국가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통화권(通貨圈)을 형성한 뒤 역내(域內)에서 무역과 생산, 소비와 재생산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당시의 경제블록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범아메리카 달러 블록,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엔 블록, 영국을 중심으로 한 스털링 블록(파운드 블록),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블록, 독일을 중심으로 한 마르크 블록이 있었다.

 


가장 먼저 형성된 것은 영국의 스털링 블록으로, 영국은 자국의 금본위제가 정지된 1931년 이후 수입관세법(1932)을 제정하여 영연방 국가와 자치령, 식민지들이 연합한 보호무역을 추구하였다. 1932년 동년(同年)에 오타와 협정이 체결되어 제국특혜관세제도가 확립되었는데, 이에 따라 스털링 블록에 속한 국가 간의 무역에서는 타국에 비해 낮은 관세와 각종 특혜를 누리는 한편 이에 속하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의도적으로 각종 제도적 제재를 가하였다. 또한 제국 내에서의 농공분업체제를 유지하여 영국의 공업제품은 권역 내로 수출하고, 자치령과 식민지의 농산물만을 수입함으로써 폐쇄적인 블록이 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강경책이나 심지어 군사적 수단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공격적인 블록이 되었다.

 


이는 당장에 일본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미 일본은 1921년의 워싱턴 해군군축조약과 4개국조약으로 인하여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던 상황이었다. 1930년대 영국이 스털링 블록을 형성하자 일본은 1920년대 후반의 주요 성장 동력이었던 영연방권(英蓮坊圈) 국가에 대한 면제품 수출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반발이 정치권과 군부, 민간을 불문하고 더욱 심해졌다. 이는 파시즘 세력인 일본 군부가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일본은 스털링 블록에 대항하여 엔 블록을 형성코자 1931년의 만주사변을 군사적으로 더욱 확대하고, 1934년에는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러나 엔 블록에 포함된 피지배 권역들, 즉 식민지 조선과 괴뢰만주국, 전쟁 중인 중화민국 내의 점령영토의 이해관계는 지배자인 일본의 그것과 상충되는 것이었으므로 스털링 블록처럼 잘 운영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엔 블록은 생산력과 구매력이 모두 떨어져 공업원료와 식량 공급지로써의 기능도, 일본 공산품의 수출지역으로써의 기능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결국 일본 군부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태평양 전쟁을 획책하게 된 것이다.

 IJN Navy.png

<일본의 반발과 본격적인 팽창의 시작.>



독일의 반발 역시 엄청났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범 도이치권 금융위기를 불러온 1931년의 크레디트 안슈탈트의 도산 사태 당시에, 오스트리아 내각은 각국에 원조성 차관을 요청했었다. 프랑스는 이것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사활이 걸려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차관을 제공할테니 오스트리아·독일 간 관세동맹을 파기하라고 종용했다. 이것을 주권침탈과 국정개입이라고 여겨 거부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숙적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영국은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전 유럽 금융의 해결사를 자처하며 흔쾌히 차관을 제공하는 척 했다. 그러나 1931616일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실제로 제공된 차관은 700만 달러에 불과했으며 대차 기간은 고작 7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비협조로 인하여 크레디트 안슈탈트가 도산했다는 인식은 이미 독일인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거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자행한 1930617일의 스무트-홀리법() 발효, 1932616일의 로잔의정서 거부, 1933612일의 ··3국 통화안정협정 거부라는 일련의 사태는 독일 내에서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만을 키웠다. 스무트-홀리법으로 인하여 공산품에 평균 59% 이상의 관세를 부여받은 독일의 공업생산은 수출판로가 완전히 막히게 되었으며, 크레디트 안슈탈트 도산 사태 이후 이를 타개하고 불황을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던 로잔의정서와 3국 통화안정협정에 미국이 번번이 퇴짜를 놓으면서 도이치권의 금융위기는 끝없이 지속됐다. 이러한 배경은 히틀러와 나치당이 내세운 반미(反美반영(反英)색채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파시즘이 승승장구한 원인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들의 중상모략에 맞서 독일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동구로의 군사적 전진을 통한 생활권역(Lebensraum)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Vorwärts nach Osten!’이라는 문구에 드러나듯이), 이는 당대 독일인들에게 매우 현실적이고 당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lebensraum.png

<나치당의 레벤스라움 선전 포스터.>



나치 독일의 성공


 

이러한 상황은 나치당에게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독일의 경제와 대외관계가 혼란할수록 파시즘이 내세우는 국가적 개혁·개조 방안이 기대를 모았기 때문이다. 결국 19331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민적 인기를 끌어 모은 아돌프 히틀러를 제국 총리(Reichskanzler)에 임명했다. 권력을 잡은 나치당은 우선 스털링 블록에 대항하는 것을 최우선적 대외과제로 하였다. 외환위기로 인하여 원료수입이 불가능할 정도가 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나치 독일은 동구 유럽과 중남미 국가를 상대로 양국쌍무협정·환청산협정을 연속적으로 체결했다. 외화를 직접 사용하여 거래하지 않더라도 상호간 수출입을 증대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독일은 원료·식량공급지와 수출시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으나, 이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로 삼고 남은, 경제성이 떨어지는 지역에 국한된 것이어서 재생산권(再生産圈)으로써의 자립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었다. 따라서 블록의 확대를 위해 지속적인 전쟁의 요청이 있었다(이를 파시즘 자체의 호전성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파시즘 자체가 전쟁광적 사상이므로 대규모 전쟁으로 나아간 것이라는 주장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파시즘은 극단의 시대에 인기를 얻은 개혁적 사상이었고, 시대상황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전쟁이 벌어진 것이지 파시즘의 사상적 오류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비()파시즘국가가 모두 평화로운 국가였는지를, 혹은 호전적인 국가가 모두 파시즘 국가였는지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한편 히틀러는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햘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1933년 라이히스방크 총재로, 1934년에는 제국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하며 파시즘에 의거한 경제개혁을 실시하도록 했다. 경제개혁의 핵심은 샤흐트가 고안한 신계획(Neoplan)’이었다.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긍정하는 파시즘 사상에 따라 샤흐트는 국가가 일반상거래, 무역거래, 관세, 일반투자, 외환거래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여 제국 경제부 장관에게 특별비상권한을 부여했다.


 

샤흐트는 주어진 비상권한을 이용해 임금과 물가를 통제했다. 대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할 경우 통화량 확대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마련이었지만 샤흐트는 이를 막아낸 것이다. 또한 협박과 회유를 통해 시중은행으로 하여금 재무개선작업(워크아웃)에 의무적으로 참가하게 하여 수많은 독일 기업을 살려내 실업자가 발생하고 기술자가 소실 및 유출되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샤흐트는 미국과 영국의 불만과 비난을 히틀러가 막아주는 동안 관세장벽을 높여 독일 농민과 중소기업이 생존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한편, 마르크 블록에 속한 중남미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여 판로를 개척해냈다(아르헨티나, 칠레 등의 친독성향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전후 나치 지도자들이 대거 남미로 도주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샤흐트의 파시즘적 경제개혁에 힘입어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에 총 600만 명으로 34.36%에 달하던 실업률은 극적으로 감소하여 1938년에는 겨우 5.5%로 감소했다. 이는 미국과 영국 등 다른 국가에서는 일찍이 성공시키지 못한 성과였다.


히틀러와 샤흐트.png

<히틀러와 함께 선 샤흐트.>


18개의 댓글

언제 올린테치 추천인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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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31
3편 기대한당
0
2018.03.31
[삭제 되었습니다]
2018.03.31
@쥬니
제가 공부했을 적에 한창 세계체제론이 각광을 받았으니 그럴 수 있습니다.
0
2018.04.01
재미있었읍니다.글이 쉽게 읽혀지네요 다음번에도 이번과같은 글을
보면 좋겠읍니다
0
2018.04.01
@정린이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파시즘에 대한 개괄에 조금이라두 도움이 되어 드렸길 바랍니다.
0
2018.04.01
난 이런거 볼때마다 궁금한게 동쪽의 소련에서도 인간 도살장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왜 파시즘만큼 금기시 되지 않는가 하는거.
0
2018.04.01
@시베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하지요. 소련의 유대인 학살이나 대숙청, 굴라크 운영을 예로써 삼아 나치 독일의 만행을 정당화해서는 안 될 일이겠습니다만, 파시즘은 악하다는 공식을 세워두고 매도부터 하는 것도 자중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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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1
통화권 단위로 블록경제 굳어져서 지금까지 지속되었다면 세계는 더 발전했을까 아님 진작에 폴아웃을 찍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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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2
@캔디
1984 찍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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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캔디
어쨋든 자본주의는 자유 무역에 의해서 발전하니까
블록 경제를 계속 지속했다면 개도국만 엄청 죽어나가고 애시당초 식민지 기반이 없던 나라들은 발전하기가 쉽지 않았겠지. 그 블록들도 자기 식민지 기반, 동맹 기반으로 이루어진거니까 말이야
0
2018.04.04
@엄마 
그런건가?

나는 블럭경제로 묶이고 2세대 정도 지나서 안정되기 시작하면 약하게는 현재의 EU, 최대로 미합중국 강도로 연방, 연맹 느낌으로 통합될 거라 생각했거든.

일단 블록경제로 자력구제에 성공한 뒤로는 오히려 자유무역이 하기 쉽지 않았을까 싶었어. FTA 5번만 하면 바로 세계 자유무역이잖아?
0
2018.04.04
@캔디
확실한건 그 당시에 블록경제에 포함되지 못했던 파시즘 국가들(일,독,이탈리아)의 상황을 보면
부작용도 생각 해 볼 수 있지. 난 블록 경제가 무한 이기주의에 의한 정책이라고 봄.
자기만 잘 먹고 살면 되고 나머지 나라는 신경 안쓴다 그거지.
블록 경제에 포함돼있는 나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언제든지 식민지 기반의 나라를 토대로 (미국은 식민지가 없어서 협상했지만,먼로주의)
무역 상대국이 있을 수 있었던 것에 반해서, 소외된 제 3국가는 극심한 경제난에 빠져서 회복 되기도 힘들었을꺼야.
미국이 공산주의 배척하고 민주주의, 자본주의 늘리려고 한 것도 자본 주의는 무역하는 나라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더 큰 효율을 보는 제도이기 때문에 당장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한 나라라도 자유 무역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지.
0
2018.04.04
@엄마 
그런거구나ㅋㅋㅋ

국가가 자유무역으로 성장하려면 문 걸어 잠그고 관세장벽 높이고 존버해서 기초 체력 만들어야 한다는 게 진짜 모순적인 거 같음ㅋㅋㅋ

그렇다고 나 혼자 존나 크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 뉴비들 들박도 해줘야하고ㅋㅋㅋ

마지막 크리티컬로 그 존나 들박해주던 국가가 휘청이면 당장 자기부터 문 걸어잠그고ㅋㅋㅋ

존나 좋은 거 같은 데 좋은 걸 체감 할 수 없는 게 자본주의 같다
0
2018.04.04
@캔디
아무래도 이론과 실제는 다르니까 ㅋㅋㅋ 마치 페미니즘처럼 ㅋㅋㅋㅋㅋ
나도 어릴땐 왜 굳이 우리나라 돈 써가면서 외국에 원조를 해주지? 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원조에도 다 이유가 있더라. 원조한 나라에 무역 체결해서 거기 인프라 구축 해주면서 우리도 돈 벌고...
참 세상이라는게 기브앤 테이크가 만연하더라... 뭐가 좋다곤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확실한 건
지금처럼 보호무역 주의로 가다간 큰일 난다는 거지. 미국도 그거 의식하면서 눈치보면서 보호무역 하는듯
0
2018.04.06
@캔디
보호무역주의를 마냥 비판할 수 없는게 산업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걸 개방해 버리면 후진국은 선진국에 종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70~80년대에 국내 산업을 철저하게 보호한 결과가 지금의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국제 경쟁력을 가진 대기업으로 나타난 겁니다.

미국이 자유무역 국가의 대명사처럼 인식 되고 있지만 그 미국마저도 공업 경쟁력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철저한 보호무역국가 였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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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2
글이 디게 쉽게 읽히네요. 비교적 전문적인 내용에 비해서는. 저같은 일반 무지렁이들을 위하여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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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독일이 낼 배상금이 적었다고 해도 나치는 부상했겠네. 난 막대한 배상금 떄문에 경제가 박살난줄알았는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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