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장한철의 표해록

장한철의 표해록

과거를 보러가던 제주도 선비가 두 번의 조난을 당하다.

1770/10/01 1차 조난

경인년 10월에 나, 장한철이 향시(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자 마을 어른들이 모두 서울에 가서 과거보기를 권하고, 또 삼읍{제주(濟州)·정의(旌義)·대정(大靜)}의 관가에선 노자를 도와주면서까지 예조에서 보는 회시(會試)에 응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김서일과 같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1770/10/26 1차 조난

북풍이 심히 급하게 부니, 배는 쏜살같이 달려간다. 외연도로 갈 가능성이 없어지자 나는 사람들에게 이 바람대로만 간다면 유구(琉球)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서일은 이 상황을 두고 음릉(陰陵)에 빠진 항우와 같다고 사공을 나무랐지만, 나는 반식재상(伴食宰相)이나 건괵장군(巾幗將軍) 사마의가 되기 싫으면 열심히 하라고 놀려주었다. 배 안은 금세 화기애애해지니 나는 유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편 뱃멀미에서 깬 김서일은 나와 같이 배를 탄 것을 후회한다며 화를 내고 이윽고 통곡을 하였다. 
오후가 되니 한라산도 시야에서 사져버렸다. 바람은 점점 사나워지고, 파도도 다시 날뛰기 시작하였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밥을 짓자고 하였고, 밥은 아주 잘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길할 징조라고 좋아하였다. 때마침 배 안에 물이 떨어졌는데, 사람들이 내가 어제 물을 저장해 둔 안목에 탄복하였다. 
나는 일찍이 남쪽 바다에 깔려 있는 여러 나라의 지도에 대해서 쓴 많은 책을 열심히 훑어본 적이 있다. 무릇 탐라의 한란산은 큰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직 북으로 조선과 통할 뿐인데, 그 수로(水路)는 980리 남짓하다. 동·서·남의 삼면은 바다가 있을 분 땅이 없는데, 넓고 넓어 끝이 없다. 일본의 대마도는 한라산의 동북쪽에 있고, 일기도(一岐島)는 정동(正東)에 있으며 여인국(女人國)은 동남에 있다. 한라산의 정남(正南)에는 크고 작은 유구의 섬이 있으며 서남에는 안남(安南)·섬라(暹羅)·점성(占城)·만랄가(萬剌加) 등의 나라가 있다. 정서(正西)는 곧 옛날의 민중(閔中), 지금의 복건로(福建路)다. 복건의 북쪽은 서주(徐州)와 양주(揚州)의 지역이다. 옛날 송이 고려와 교통할 때에는 명주(明州)에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넌다. 명주는 양자강의 남쪽에 있는 l방이다. 청주(靑州)·충주(茺州)는 한라산의 서북에 있는데, 이상 여러 나라는 모두 탐라와는 바다로 막혀서 몹시 먼데 그 거리가 몇 천만 리가 되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은 동해에 있는 벽랑국(壁浪國)으로서 일본의 동쪽에 있다.



거인도(巨人島)는 일기도의 동남에 있는데, 인적이 두절되고 백성들에게는 정교(政敎)가 미치지 못해서 이 세상과는 완전히 딴판인 곳이다. 옛날 송 천성(天聖) 기사년(己巳年, 송 인종 7년, 서기 1,029년)에 탐라인인 정일(貞一) 등이 표류하여 거인국(巨人國)에 도착하였는데, 섬사람들에게 붙잡혀 배 타고 도망하여 살아온 자는 겨우 일곱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동사(東史)에 적혀있다. 이 배가 만약 유구에 도착하지 못하면 반드시 여인국이나 일기도에 가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인국(裸人國)으로 표류해가는 것이 아닐까. 혹은 흑치(黑齒)란 종족이 사는 곳에 흘러들어가지나 않을까. 
한편 뱃사람들이 서북풍에서 서풍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마침 알아차렸다는 듯이, 광해조 신해년간(辛亥年間, 광해군 3년, 서기 1611년)에 유구의 태자가 탄 배가 바람 부는 대로 흘러 제주(濟州)에 닿았는데, 그때 목사(牧使)가 조정에 노략질하러 온 도적이라 속이고는 화공(火攻)으로 죽이고 재화와 보배를 빼앗았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서 지금의 풍향을 확인하고는, 서풍이라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였다.

1770/12/25 1차 조난

본선사공(本船沙工) 이창성(李昌成), 船夫 유창도(兪昌道)·김순기(金順起)·김차걸(金次傑)·고득성(高得成)·정보래(鄭寶來)·유일춘(柳一春)·이성빈(李星彬)·김수기(金壽起)·이강일(李福日), 商人 강방유(姜方裕)·김방완(金方完)·양윤하(梁允夏)·이도원(李道元)·박항원(朴恒元)·김복삼(金福三)·이득춘(李得春)·고복태(高福泰)·양윤득(梁允得)·이우성(李友成)·이춘삼(李春三)·이대방(李大方)·김필만(金必萬)·김순태(金順泰)·장원기(張元起), 陸商 백사렴(白士廉)·김칠백(金七白) 그리고 나, 김서일(金瑞一)까지 모두 스물아홉사람이 한 배에 같이 탔다. 
바다를 건너는데, 돌연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라도 한바탕 쏟아지려는지 비올 기색이 하늘을 덮었는데, 배는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물결을 따라 흐를 뿐 하늘은 높고 바다는 넓어 망망하여 끝이 없다. 따라서 취사부가 밥을 짓고 북을 치며 수신(水神)에게 치성을 드리고 나서, 배에 탄 사람도 나누어 먹게 하였다. 
저녁에 하늘을 바라보니, 붉은 해가 잠깐 구름을 벗어나자 구름인지 연기인지 허연 기운이 물결 사이로 일어난다. 구름이 가리기도 하고 햇빛이 반짝거리기도 하여 한참 명멸하며 꿈틀거리더니, 돌연 구름은 오색찬란한 무늬를 이루어 반공(半空)에 나란히 떠 있다. 구름 아래로는 마치 무엇인지 우뚝 높이 솟아 있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마치 층루누각(層樓樓閣) 같으나 멀어서 분별할 수가 없다. 
이윽고 사람들이 고래를 발견하였다. 고래와 배가 너무 가까워서 배가 요동치니 뱃사람들이 모두 흙빛이 되어 뱃바닥에 꿇어 엎드리고서는 관음보살만 외우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윽고 고래는 사라졌다. 하지만 한 사공이 신기루가 뜨고, 고래가 나타나고, 비바람이 칠 징조가 보이는 등 천기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하고, 배에 탄 사람 모두 잠시라도 마음을 놓지 말라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기 전에 북륙(北陸)과는 70리가 되는 소안도(所安島)의 서쪽에 있는 노어도(鷺魚島)에 도착하였다. 사공은 손을 부지런히 놀려서 닻을 내려 배를 이 섬에다 머무르게 하려고 하나 이 배의 닻에는 돌만 있고 삼지(三枝)가 없어 삽착(揷着)이 되지 않아 끝내 배를 해안에 대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는 동안 동풍이 크게 불어 배는 바람에 몰리어 서쪽 바다 밖으로 떠내려 나갔다. 노도(鷺島)를 돌이켜 보는 것도 잠깐뿐, 다시 푸르고 끝없는 바다가 눈앞에 전개된다. 사나운 바람, 성난 파도, 외로운 배는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는데, 높이 솟을 적엔 마치 하늘 위로 오른 듯 하고, 내려갈 딴 밑도 끝도 없는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는듯하였다. 
밤은 이미 캄캄하여 동서를 분별할 수가 없는데 바람은 까불어대고 비는 마구 퍼붓고 배는 풍랑에 들볶인다. 배 밑으로는 사정없이 물이 새어들고, 배 위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진다. 배 안에 고인 물은 이미 허리까지 찼는데, 사람들은 어차피 죽으려니 생각하고 배에 고인 물을 퍼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한테 동풍이 부는 대로 흘러가면 소안도(所安島) 서쪽 1,300에 있는 외연도(外烟島)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고 사람들에게 배에 차오르는 물을 퍼낼 것을 독려하였다. 내가 사람들에게 전해준 내용들은 야화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로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고자 한 말이다. 밤이 이슥하니 바람은 차차 기세가 꺾이고 비도 멎었지만, 배는 뱃줄도 삿대도 잃어버렸다. 게다가 배는 기울어 엎어져 버릴 위험도 있었다.

1770/12/27 1차 조난

날이 저물어지려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새가 울며 날아 지나갔다. 사공이 저녁 때 물새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주변에 모래섬(洲渚)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자 모두 기뻐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침부터 끼인 바다안개(海霧)가 걷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이 되니 하늘이 맑게 개고, 하늘에는 은하(銀河)가 씻은 듯이 밝게 걸려 있다. 나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보고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김서일이 이에 대해 남극노인성은 중국의 형악(衡岳)이나 조선의 한라산 같은 높은 곳에서만 보이는 별자리라고 하였지만, 나는 위의 산들이 남쪽에 있어서 노인성이 보이는 것이지 산이 높아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지금은 남쪽바다에 있으니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밤이 깊어졌지만 나는 고아인 나를 길러 준 중부(仲父), 쌍오당(雙梧堂)이 내가 바다에 빠져 죽은 줄 알고 통곡하고 울부짖는 모습을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호산도1770/12/28 호산도

북풍이 불더니 조그마한 섬에 닿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해안가에 들어섰다. 섬을 둘러보니, 사슴은 발견하였지만 고기잡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섬은 근처에 샘이 있고, 면적은 30리 정도 되는 무인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에 남은 양식을 확인해 보니 스물아홉사람이 수삼일 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가자, 언덕에 의지하여 장막을 치고 밤을 지낼 곳을 마련하였다.

1770/12/29 호산도

섬의 높은 곳에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니 이 섬의 길이는 남북으로 20리가량, 동서로는 5리가량이다. 섬에 가득 찬 것은 나무들로서 푸른빛, 초록빛을 내뿜는 듯 무성함을 자랑한다. 아가위·소나무·잣나무가 많고, 그 밖에도 잡초가 많은데 때는 아직 봄이 아니건만 새잎이 돋아나고 있어 봄의 모습을 나타내니, 마치 우리나라의 이삼월 기후 같다. 바위나 골짜기 사이에는 대가 많은데 큰 것은 서까래만하다. 또 산약(山藥)을 파내니 큰 뿌리는 팔뚝만하다. 쥐가 큰 것은 고양이 만한데 맥없이 암혈(巖穴) 사이를 출몰한다. 갯가에는 전복이 많고, 노루와 사슴 같은 산짐승은 떼를 지어 다닌다. 물새·들새는 그 이름을 모르는 것이 많다. 갈가마귀는 수풀을 둘러싸고 갈매기·해오라기는 섬에 가득하다. 한줄기 원천(源泉)이 가운데 봉우리 아래에서부터 나오는데, 그 끝물은 기다란 시냇물을 이루어 굽이굽이 돌아 흘러 한참 어정거리다가 동쪽으로 해서 바다로 빠져든다. 
막사에 돌아와서는 대를 베어 막대기를 만들고 여기에 옷을 찢어 기(旗)를 만들어서 높은 봉우리에 세우게 하였다. 또 봉우리 꼭대기에 장작을 쌓아 불사르게 하여 연기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게 하였다.

1770/12/30 호산도

아침에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오후가 되니 퍼붓듯이 내렸다. 사람들은 모두 막(幕) 속으로 들어가므로 나들이 할 수 없었다. 비는 상(床)마다 새어 마른 곳을 찾아 앉을 수도 없었다. 몰골들이 수참(愁慘)하기가 마치 물이 새는 배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날이 개자 사람들은 포구(浦口)에 가서 전복을 뜯기도 하고, 혹은 산에 올라가서 마(薯)를 캐기도 했다. 날이 저물어 사람들이 죄다 모였을 때는 산나물이 결에 그득하고, 해산물이 대광주리에 철철 넘쳤다. 강재유가 따 온 전복에서 까마귀 알만한 쌍주(雙珠)가 발견되었다. 그러자 상인 백사렴이 돌아가면 50금으로 구슬을 사겠다고 하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익을 탐하는 장사치의 중리(重利)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있을까 생각했다. 한편 사공이 지금 물이 잠잠하니 배를 띄우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배위에서 상황이 변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왜구1771/01/01 왜구

사람들은 만리나 떨어진 먼 지역에서 해를 맞이하는 슬픔을 누르기 어려워 서로 마주보고 울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윷놀이를 시켜서 이긴 사람은 바위에 높이 앉게 하고, 진 사람은 발가벗은 채 그 아래에서 절을 하게 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대낮에 한 점 돛대가 동쪽바다 너머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불을 불고, 섶을 더 집어넣었다. 법석대며 연기와 불빛을 일어나게 하고, 높은 언덕에서 죽기(竹旗)를 휘두르고 모두들 목소리를 높여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날이 저물려 하자, 그 배는 점점 우리가 있는 섬으로 다가왔다. 배 위에는 머리를 푸른 수건으로 동여매고, 아래는 아무것도 가린 것이 위에 검은 장의(長衣)를 꿰어 입은 왜인이 보였다. 그 배에서 조그만 배가 내려 우리가 있는 섬으로 왔다. 장정 10여명이 섬에 올라오는데, 허리에는 모두 길고 짧은 검을 차고 있었다. 필담으로 구해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보물에만 관심이 있었다. 결국 칼로 우리를 위협하고 옷을 발가벗겨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단 채, 생복을 가지고 떠나가 버렸다. 
결박을 푼 사람들이 나를 구해주었다. 나는 왜놈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백해무익한 존재라고 되뇌었다. 일본 해적의 약탈로 사람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들은 봉우리 위에 둔 깃대와 연화(煙火)를 없애서 다시는 수적(水賊)을 부르지 말자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근처에 왕래하는 배가 모두 수적은 아닐 거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어떤 사람은 북풍을 타고 3일이면 유구에 도착할 것 같으니 배를 띄우자고 했으나 이 역시 바다의 상황은 자주 변하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다만 뱃줄과 삿대를 잃어버렸으므로 나무를 배어 노를 만들고, 삼지정(三枝碇)도 갖추게 하였다.

안남산성1771/01/02 안남 상선

아침에 서남풍이 사납게 불기 시작한다. 그런데 서남쪽을 바라보니 멀리 돛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저녁때가 될 무렵, 배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는데, 그 크기가 하늘을 가리는 산과 같다. 그 배는 동북쪽으로 직향하고 지나가 버렸다. 앞선 배가 지나쳐 가버리니 뒤따라오던 배도 역시 지나가버린다. 아무리 기를 휘두르고, 연기를 올리고, 부르짖어도 그 배는 덤덤히 바라보기만 하고 구해주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갈 때, 표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처치하기 곤란하므로 못 본 체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 배는 아직도 뒤떨어져 있어서 있는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다행히 그 배는 갑자기 노를 돌려 우리를 향해 와서는 닻을 내리고 배를 세웠다. 
다섯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내려왔다. 타고 온 사람들은 모두 붉은 빛 바탕의 화포(畵布)로 머리를 싸고, 몸에는 소매가 좁은 초록빛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필담을 통해 그들이 명나라 유민으로 이제는 안남(安南)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은 일본에 콩을 팔러 가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필담으로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결국 이들의 배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다. 이들의 배에 탄 뒤 그들은 먼저 차반(茶飯)을 먹게 하고, 다시 백소주(白燒酒)를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죽(粥)도 주었다.

1771/01/03 안남 상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문득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지에 도착한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배 안에서 닭과 개를 기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임준(林遵)이라는 원건을 쓴 사람에게, 뱃사람 중에 머리를 깎지 않고 건(巾)을 쓴 사람이 있는 반면, 머리를 깎고 머리를 싸맨 사람이 있는데 무슨 차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임준은 안남에는 명(明)나라가 청(淸)에 망하자 이곳으로 피해 온 사람이 많다고 하며, 건을 쓰고 머리를 깎지 않은 사람은 모두 명의 유민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가 머물렀던 무인도의 이름이 호산도(虎山島)였음을 알려줬다. 
이윽고 이들의 인도로 선내를 구경할 수 있었다. 배의 크기는 가히 100걸음 남짓하고 그 길이는 배(倍)가 될 것 같다. 배 한구석에는 파와 채소를 심어둔 밭이 있다. 닭과 오리도 있는데 사람이 가까이 가도 놀라서 날아다니는 일이 없었다. 한구석에는 땔감을 많이 쌓아두었고, 혹은 그릇 등의 것을 잡다하게 쌓아두었다. 또한 어떠한 물건이 있는데, 그 크기는 열섬들이 항아리 같으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가 나 있었다. 
옆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연보다 큰, 붉게 칠한 나무못으로 그 구멍을 막았다. 그 못을 빼면 물이 솟구치듯 뻗쳐 나온다. 그 위에는 전자(篆字)로 된 작은 명문(銘文)이 있는데 그 뜻은 알 수가 없다. 임준이 말하기를 이것은 물그릇인데 여기에 물을 채워두면 써도 다 마르지 않고, 물을 더 부어도 넘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한 켠에는 양·염소·개·돼지 등 가축을 많이 기르고 있는데, 떼를 지어 놀고 있다.



대저 배의 제도는 모두 4층으로 되었는데 사람은 상층에서 거처하게 되어 방옥(房屋))이 서로 연이어 있다. 그 밑 3층에는 간가(間架)가 연달아 있고, 백물(百物)이 고루 저축되어 있으며 기명(器皿)이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어서 무엇을 하든 한 가지도 불편한 점이 없게 되어있다. 배의 밑바닥에는 두 개의 작은 배가 들어있는데, 그 중 하나는 호산도에 정박했던 우리들의 배이다. 배의 바닥에는 물을 넣어두어서 작은 배가 뜨도록 되어있으며, 또 널판문이 달려 있어, 바다와 통하게 되어있다. 널판문을 열고 닫고 할 때, 바닷물이 그 문을 통하여 배 밑바닥으로 들어와서는 목통(木桶)속을 거쳐 바깥으로 흘러내리는데, 그 광경이 마치 높이 내리 떨어지는 폭포 같다. 그 밖의 장치들도 모두 극히 기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나 그 규구(規矩)를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오후가 되니 서남풍이 크게 일어난다. 파도는 산더미처럼 밀려들었지만, 그들은 하나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백포(白布)로 된 돛을 높이 펴니, 배는 나는 듯이 달린다.

1771/01/04 안남 상선

저녁때가 되어가니, 바람이 차차 잠잠해지고, 안개가 사방을 가렸다. 안남인 방유립(方有立)이 나에게 향사도(香瀉島)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청려국(靑黎國)의 향사도는 광동(廣東)의 남해 밖에 있다. 청나라 세상을 피해 명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 섬에는 조선촌(朝鮮村)이 있고 김대곤(金大坤)이라는 명망가가 있었다. 그의 4대조는 옛날 조선에서 청나라의 포로로 잡혀 남경(南京)에 갔다. 그 때 명나라 사람들을 따라 이 섬(향사도)으로 왔다. 그리고 아내를 맞아들여 자손을 낳고 정착하였다. 그러나 고향이 그리워 높은 산에다 대(臺)를 쌓아 멀리 고국(故國)을 바라보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 대의 이름을 망향대(望鄕臺)라고 불렸다. 
이러한 얘기를 한 후 임준 등은 나에게 조선의 풍속·인물·의관(衣冠) 및 산천·지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조선이 기자(箕子)가 남긴 문화를 이어받아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이학(異學)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에선 예악(禮樂)·형정(刑政)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들은 효제(孝悌)·충신(忠信)을 행동의 근본으로 삼아 나라가 일어난지 400년(조선 건국부터 영조 때까지)이 지났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들이 나에게 글로써 물을 때에는 ‘너희나라(爾國)’라 하지 않고, ‘귀국(貴國)’이라 칭하고, ‘너희들(爾們)’이라 하지 않고 ‘상공(相公)’이라 하였다.

1771/01/05 안남 상선

해뜰 무렵에 동북쪽에 한라산이 보였다. 표류하던 우리 일행은 한라산을 보고는 기쁨이 지나쳐 저도 모르게 목을 놓아 울었다. 어떤 일행은 지금 우리 배를 띄어 제주도로 향하자고 하였다. 안남인 임준이 이 상황을 보고 물어보자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이윽고 안남인들이 서로 떠들썩하게 지껄이더니 싸움이라도 벌어지려고 하였다. 원건을 쓴 임준 등 수십여 인은 한쪽 구석에 둘러서 있고, 또한 머리를 깎은 사람 80인도 나누어져 한 구석에 둘러섰다. 머리를 깎은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성난 눈초리로 으르렁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임준 무리와 싸울 것 같은 기세였다. 임준이 모두를 천천히 달래는 기색이었다. 
한나절 후 임준이 이러한 사단이 일어난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이유인즉슨, 옛날 탐라왕이 안남 세자를 죽였으므로 안남인들이 우리가 탐라인이란 사실을 알고 우리일행 모두를 배를 갈라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나, 임준 등 중국인들이 만방으로 달래 그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즉 예전에 제주목사가 죽였다는 유구태자가 실은 유구태자가 아니라 안남세자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원수끼리 같은 배를 탈 수 없으므로, 지금 당장 길을 나누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원래의 우리 배를 내려 주고 안남선은 쏜살같이 가버렸다. 밤이 되니 바람이 급히 불어 배는 몹시 빨리 달렸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2차 조난1771/01/06 2차 조난

해뜰 무렵에 보니 배는 한라산의 서북쪽에 와 있는데, 남풍에 몰리어 흑산도(黑山島)의 큰 바다를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오시(午時)에 비가내리고, 서남풍이 불다가 멎었다가 한다. 하지만 배에는 돛대가 없어 뜻대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윽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서풍이 불었다. 
황혼이 깃들 무렵, 배는 노어도의 서북쪽에 닿았다. 바로 처음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곳이다. 저문 뒤에 서북풍이 크게 일어나고 비와 눈이 번갈아 내렸다. 큰 물결일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고, 회오리바람은 바다를 체질하듯 들까불어댄다. 
사람들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호산도에서 점을 쳐보니 먼저 흉(凶)한뒤 길(吉)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사공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노도의 북쪽은 모두 난서(亂嶼)와 험안(險岸)으로 그곳의 바윗돌이 마치 칼날 같고 파도가 몹시 험악하므로 바람이 불지 않는 날도 배가 부서져 빠지기도 하는데, 지금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성난 파도가 몰아치니 죽지 않고 어찌 배기겠냐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까무러쳐버렸다. 기절한 동안 일찍이 기축년(己丑年)에 죽은 동네 사람이 보이는가 하면, 별별 괴상한 도깨비 형상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문득 한 미녀(美女)가 소복을 입고 나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기도 하였다. 그 후 겨우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바람은 세게 불고, 사공은 키를 놓고 엉엉 울고만 있었다. 키를 잡으려던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려서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결국 배가 부서져 버렸다. 사람들은 속절없이 죽겠구나 생각하여 서로를 찾으며 울고만 있었다.

다행히 배가 부서진 정도를 살펴본 결과 크게 부서지지는 않았다. 배에 찬 물도 생각보다 많지 않아 나는 사람들에게 살 수 있을 거란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강진(康鎭)의 뱃사람(船人) 김칠백에게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전방에 보이는 뾰족한 돌섬은 출렁이는 물결 위로 성난 짐승의 이빨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흘러가면 파선(破船)은 불 보듯 뻔하였다. 그러나 배는 다행히 물결을 따라 흘러가 부딪치는 것을 모면했다. 배는 소안도(所安島)를 지나 크고 작은 모도(茅島)사이를 20여리 가량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돌섬들에 부딪치려는 것을 네 번이나 모면했다. 
해시(亥時)무렵, 사람이 살 정도의 은연(隱然)히 큰 산이 보였다. 뱃사람들은 헤엄에 능하므로 섬에 도달하고자 너도나도 물속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헤엄을 잘 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는 사이 배는 점점 뒤로 물러나니 별 수 없이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물 속의 석맥(石脈)에 발이 닿아 얼굴을 물 밖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석맥을 따라 물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섬에 닿아 평평한 곳에 있으니 헤엄 친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파도가 높아 모두 다 헤엄쳐 올 수는 없었다. 한 뱃사람이 내가 헤엄을 못 치는 것을 알고 죽었으려니 하면서 슬피 울었다. 주변이 깜깜하여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자 모두들 기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사람 수를 세어보니 뭍에 올라온 사람들이 나까지 전부 열 사람이었다. 뭍으로 올라온 사람들도 추위와 피로함에 빨리 만가를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이 험하여 사람들은 낭떠러지를 붙들며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절벽에서 미끄러져 하마터면 바다에 빠질 뻔 했으나 다행히 굴러 떨어짐을 면하였다. 다시 언덕을 부여잡고 평탄한 땅에 다다랐지만, 앞서간 사람들은 벌써 멀리 가버려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인가(人家)를 찾아 가버린듯 했다. 
나는 퉁퉁 부은 발로 수없이 넘어지면서 밭두덕과 산비탈을 걸었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쪽에서 불빛이 보여 그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10리나 걸어도 불에 가까워지지 않았고 그 불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도깨비불(鬼火)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마을을 찾아야 됐다. 다행히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니 마을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먼저 마을에 도착한 사공 이창성이 섬사람 10명과 함께 다른 사람을 찾으러 나온 사람들과 만났다. 
이 섬은 청산도(靑山島)라고 한다. 도깨비불을 따라가지 않았던들 이들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행을 살펴보니 두 사람이 안보였다. 아마 절벽에서 떨어져버린 것 같다.

사랑과 귀향1771/01/07 사랑과 귀향

대낮에 가까워져서 비로소 의식이 들었다. 섬사람들이 모두 찾아와서는 온갖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살아나온 놀란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 섬에 사는 김만련(金萬鍊)·김하택(金夏澤)·곽순창(郭順昌) 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돌보아주었다. 일행을 점검해보니 이창성·유창도·김순기·김칠백·김재완·양윤하 그리고 나와 김서일은 이승으로 살아 돌아왔으며, 강재유 등 21명은 저승사람이 되었다. 뱃사람들이 해변에서 박항원·이도원의 시체를 수습하였는데, 시체가 찢어지고 부서진 것이 그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이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내가 다친 곳을 치료하였다.

1771/01/08 사랑과 귀향

이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신지도진(新智島鎭)에 예속되어있다. 북으로 본진(本鎭)과의 거리가 수로로 100여리가 되며, 서남쪽으로는 탐라(耽羅)와의 거리가 700리나 된다. 섬의 넓이는 30리이며 이 섬에 있는 민가는 몇 백 집에 달한다. 논은 비옥하고 해산물 역시 풍부하다. 부유한 사람은 바다에만 의존한다고 한다. 초옥(草屋)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며 남자가 적은 데 비해 여자의 수가 더 많다. 고깃배들은 쉴 새 없이 드나드는데,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이 섬엔 둔장(屯長) 한사람, 검찰(檢察) 한사람이 있어서 이들이 이 섬을 맡아 다스린다.

1771/01/09 사랑과 귀향

나는 둔장에게 부탁해서 아침밥을 스물한 상을 차려서 바닷가 언덕머리에 벌여놓고, 바다 쪽으로 각자의 지방(紙榜)을 만들어서 물에 빠져 죽은 스물한 사람의 혼을 제사지냈다. 내가 친히 제문(祭文)을 읽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눈물이 흐르고, 하도 슬퍼서 목이 멘다. 또 모두들 소리를 같이하여 울었다. 
이날 나는 해구(海口)의 형세를 두루 돌아보았다. 험한 해안과 여기에 부딪쳐 일어나는 물결, 거기에 한 가닥 마을로 들어오는 섬의 길이 암벽 사이로 꼬불꼬불 연이어 있다. 그날 밤 부여잡고 오르던 곳이 바로 이 길인데, 어찌나 험난한지 한 발자국도 허술히 내디딜 수가 없을 정도다. 저녁 썰물 때에는 석서(石嶼)를 보았다. 그 길이가 100걸음 남짓한데, 바다 속에 한 가닥 돌길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용왕당(龍王堂)에서 용신(龍神)께 빌러 가는 것을 따라갔는데, 거기서 제사를 끝낸 후 술대접을 받았다. 소복(素服)한 미녀(美女)에게 시켜 나에게 먹을 것을 올리게 하며, 술 항아리를 기울여서 또한 술마시기를 권하게 하였다. 소복한 여인을 바라보니, 왠지 낯이 익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다에서 풍파(風波)를 만나 까무러쳐 정신을 잃었을 때 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준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청산도에 있고 나는 제주도에 살면서 머나먼 바다로 가로막혀 평생에 단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난날에는 꿈속에서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제는 사당 아래에서 마주 대하게 되었으니 전생(前生)에 연분이 없었다면 어찌 이럴 수 있으리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조씨(趙氏)의 딸로 스무 살의 과부란다.

1771/01/10 사랑과 귀향

절벽에 떨어져 죽은 이도원과 박항원을 당촌의 서쪽에 장사지냈다. 저녁 때 돌연 떠들어대며 다투는 소리가 길거리에서 들려왔다. 이유인즉슨, 이 섬이 육지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화(王化)를 입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북륙(北陸)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작폐(作弊)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방금 이진진(梨津鎭)의 아전 하나가 신은(新恩) 한 사람을 거느리고 주식(酒食)을 달라 하고, 남자 광대의 전재(錢財)를 마구 빼앗고, 사람들의 농우(農牛)를 빼앗는 등 행패를 부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를 빼앗김에도 불구하고 송사(訟事)가 벌어지면 더욱 괴롭힘을 당할 생각을 하니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1771/01/11 사랑과 귀향

섬사람 정재운(丁載雲)과 문식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청산도의 사람들이 제주도 사람들보다 글을 덜 배웠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어젯밤 뱃사람들이 포구(浦口)에서 가죽으로 만든 행담(行擔)을 주워왔다. 이 안에 내가 호산도에 있을 때 써둔 표해일록(漂海日錄)을 넣어두었는데, 지금 꺼내보니 떨어져 달아나고 젖어 뭉개지고 해서 대부분 그 내용을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뜻을 더듬어 생각해 올라가니, 어느 정도 그 대강을 알 수 있었다. 
저녁때, 김만련이 조씨의 집으로 팔려간 자신의 옛 계집종 매월(梅月)과 함께, 내가 담을 넘어 조씨의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일을 꾸며주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 나는 조씨의 딸과 운우(雲雨)의 정(精)을 나눌 수 있었다. 이 후 조씨의 딸은 나에게 마음이 있어 나한테 재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는 슬프게도 이미 결혼한 상태라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씨의 딸은 슬퍼하며 5년간 나를 기다리다가 그래도 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겠다고 말했다.

1771/01/12 사랑과 귀향

섬사람들이 이 섬과 강진(康鎭)의 남당포(南塘浦)와의 사이는 그 길이 몹시 멀다는 말을 들었다. 또 이 섬에 제일 가까운 신지도(新智島)만으로 수로(水路)로 겨우 100리 남짓인데, 여기서 나루 둘을 건너면 곧 편안히 육지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강진으로 가려 했지만 몹시 데었기 때문에 먼 바닷길을 건너는 것은 딱 질색이므로 지도를 거쳐 육지로 나가려고 하였다.

1771/01/13 사랑과 귀향

선주(船主)가 오늘이 순풍(順風)이니 오늘 떠나지 않으면 시일이 지체된다고 하여, 배를 타고 지도로 갔다. 해가 저물어가 지도에 있는 당촌의 마을에서 잤다.

1771/01/14 사랑과 귀향

당촌에서 10리를 가서 나루를 건너니 고금도(古今島)에 닿았다. 고금도에서 20리를 가서 나루를 건너니 마두진(馬頭鎭)에 도달했다. 진 밑의 객점(客店)에서 잤다.

1771/01/15 사랑과 귀향

마두진에서 떠나 50리를 가니, 강진의 남당포(南塘浦)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일행은 제주도 출신의 상인들을 만났다. 모두들 제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나는 과거를 보기위해 제주로 돌아가자는 이들의 제안을 뿌리쳤다. 고향에 전하는 편지를 써서 제주로 가는 김서일에게 주었다.

1771/01/16 사랑과 귀향

나와 같이 표류한 사람들(漂人輩)은 어제 만난 제주 상인 김중택(金仲澤) 등과 함께 제주로 향하였다. 나루터에서 서로 이별하니 헤어지는 마음을 참기 어려웠다. 서로 눈물을 뿌리치며 헤어졌다. 객점에 돌아와 누우니 고향이 그리워지는 마음과 이별의 한스러움이 마음을 짓눌렀다. 술을 사서 흠뻑 마시고 취하여 쓰러져 잠들었다. 내가 서울로 간다고 한 것은 단지 핑계고 실은 지금 바람이 높기 때문에 배를 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관사(官事)로 서울로 향하는 동향인 김창현(金昌賢)의 권유로 서울로 갈 결심을 하였다. 



1771/01/19 사랑과 귀향

길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8개의 댓글

2017.10.05
오 재밌다 끝까지 다 읽었네
표류 당했어도 씹선비 정신은 잃지 않음 ㅋㅋㅋ
0
2017.10.05
면적이 30리가 된다는건 뭔소리야 증말 조선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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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5
@따그닥Hook
너비의 오타가 아닐까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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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5
@단군
애초에 단위 좆같이 쓰는게 일반적인 샤끼들이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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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5
먹버선비 ㅅ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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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5
대정산다 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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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이 이렇게나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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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8
죽었다 살아나서 미인 과부를 보고 담을 넘어 들어가서 쎆쓰만 하고 도망가다니 나쁜 새끼구만 ㅋㅋㅋㅋㅋㅋ

근데 안남선이라 부른 배의 모습이 흥미롭다
마치 정화의 원정에 쓰였던 거대한 배들의 형상을 말하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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