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지항의 표주록

이지항의 표주록

이지항이 항해 중 표류하여 홋카이도까지 갔다 온 이야기


1756/04/13 발선(發船)과 표류(漂流)

이지항(이름은 지항[志恒], 자[字]는 무경[茂卿])의 선조는 영천(永川) 출신의 학자로 동래부(東萊府)에서 살아왔다. 을묘년(영조 11, 1735)에 별시(別試)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정사년 여름에 수문장(守門將)으로 천거를 받았었다. 병으로 취재(取才)에 응하지 못했고 수어청(守禦廳)의 군관에 속해 있다가 본청의 정식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급(資級) 6품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지항은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상기(喪期)를 마친 후, 병자년(영조 32, 1756)년 봄에 영해(寧海)로 왕래할 일이 생겼다. 
그 때 부산포 사람 공철(孔哲)·김백선(金白善)·김여방(金汝芳)이 “어물 흥판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강원도 연해(沿海)의 각 고을을 다닌다”는 말을 듣고 그 배에 합류하기로 한다.
이지항은 사공 김자복(金自福), 격군 김귀동(金貴同)·김북실(金北實)·김한남(金漢男) 등과 더불어 부산을 출발했다.

1756/04/28 표류

모진 바람을 만나 밤새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막막할 뿐 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배에 걸쳐진 나무에 허리를 매고, 비옷을 덮어 몸을 가렸다. 기력은 이미 다하고 정신은 혼미해져 갔다. 방향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으나 해가 돋는 곳을 보고 동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끼니는 생쌀을 씹고, 약간의 물로 목마름을 풀었다.

1756/05/04 표류 7일째

물이 다 떨어졌다. 바닷물을 솥에 담아 솥뚜껑을 거꾸로 닫고 소주 내리듯이 하여 솥뚜껑에 겨우 반 보시기 가량의 증류수를 받아 목을 축이기도 하였다.
표류 8일째 물개가 배 주변에 나타났다. 김북실은 칼을 가지고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지항이 그것을 말리고 선원들을 달래었다. 선원들은 모두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기도했다.

1756/05/06 표류 9일째

점을 쳤더니, 길한 점괘가 나왔다. 사람들이 다 답답한 근심을 조금 풀었다. 지항은 예전에 일본 지도를 본 것을 떠올리며, 사람들에게 동해가 다하는 곳까지 가면 반드시 일본의 땅에 닿을 것이라고 얘기 했다. 그날 밤 큰 바람이 일어나고 파도가 크게 치솟았다. 모두들 엎드려 기도하였는데 꼭 죽을 것만 같았다.

1756/05/12 하이(蝦夷)에 표착

흰 눈이 쌓인 태산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나아가 정박하려는 사이에 날은 이미 저물었다. 배는 동요하여 안정되지 않고, 주림과 갈증으로 기력이 없어진데다 파도가 배를 쳐 배 안에는 물이 가득차서 거의 뒤집혀지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은 잠시 배에서 옮겨 편을 나눠 작은 두 개의 통으로 물을 퍼내어 물에 빠져 죽는 것만은 면했다. 그러나 옷이 물에 다 젖어 추워 덜덜 떨었다. 겨우 물이 얕은 굽이진 곳을 찾아 정박하고 비옷을 덮고 밤을 지냈다.

1756/05/13 다음날

육지를 바라보니 산이 중천에 솟아있고 중턱 이상에는 눈이 가득 덮여 있었다. 가서 살펴보니 이곳 산기슭 밑에는 임시로 지어 놓은 초가 20여 채 정도 있었다. 집 안에는 대구, 청어 등의 고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선인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삶아 먹고 물로 마른 목을 풀었다.

1756/05/14 다음날

해안으로 올라가 인가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모퉁이 도는 곳에 밥 짓는 듯한 연기가 보였다. 곧 배를 이동시켜 가 보았는데, 7~ 8채 정도의 인가가 있었다. 해부(海夫)인 왜인의 움막일 것이라 여겨 정박하지 못하고 있던 찰라, 선창에서 대여섯 사람이 나왔다. 그들은 모두 누른옷을 입었고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그 들 중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었다. 조그만 배를 타고와 말을 걸어봤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같이 집으로 가자는 것 같아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들을 따랐다. 
그들의 집은 염막(鹽幕)과 같고, 은밀한 곳이란 없었다. 그들이 저장하고 있는 물건은 말린 물고기, 익힌 복어, 유피(油皮) 등의 옷들에 불과했고, 그 밖의 연장으로는 낫, 도끼, 반발 정도의 크기로 된 나무 활, 사슴뿔로 만든 화살촉을 단 한 자 정도의 나무 화살 등 뿐이었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무수히 만들어 놓아 물고기를 숲처럼 걸어 놓았고, 고래의 포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본시 글자로 서로 통하는 풍습이 없고, 피차 말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시험 삼아해 보였더니 다만 어탕을 작은 그릇 하나에 담아 줄 뿐 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남녀가 혹은 나무 껍질로 짠 누른 베의 긴 옷을 입었고 혹은 곰 가죽의 여우 가죽 또는 초피(貂皮)로 만든 털옷을 입었다. 그들의 머리털은 겨우 한치 남짓하였고 수염은 다 매었는데 혹은 한 자 혹은 한 발이나 되었다. 귀에는 큰 은고리를 달았고 몸에는 검은 털이 나 있었다. 눈자위는 모두 희고, 남녀가 신과 버선을 신지 않고 있었다. 형용은 남녀가 모두 같았는데 여자는 수염이 없어서 이것으로 남녀를 분별할 뿐이었다. 60세가량의 늙은이가 목에다 푸른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풀기를 청하여 그것을 보니 수염이 매우 길어서 귀찮아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다 수염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의 밥을 먹이는 비용을 꺼리고 쌀을 아끼느라 이처럼 밥을 짓지 않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집집마다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어탕에다 물고기의 기름을 섞어서 먹고 있어 본시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다시 배를 저어 해안을 타고 남하하면서 제모곡(諸毛谷), 점모곡(占毛谷), 지곡(至谷) 등을 지났는데 그곳에 사는 무리는 다 앞에서 보았던 무리들과 같았다. 더 나아가는 것은 일단 보류하고 소유아(小有我)에서 유숙하였다. 시장기가 매우 심하던 차에 길가에 집 한채를 발견하였는데, 그 집을 찾아 들어가 보니 솥을 걸어 놓고 불을 때는데 마치 죽을 쑤는 것 같았다 솥 안의 것을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이 먹는 수제비 같았는데, 맛은 율무와 비슷한데 곡식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었고 형체가 어린애의 주먹같이 생겼고 색은 희고 잎은 파란 풀뿌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풀로 잎은 파초잎과 비슷하고 뿌리는 무우와 비슷했으며 별로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풀의 이름을 물으니 요로화나라고 했다. 그리하여 풀뿌리를 캐어다가 죽을 쑤어먹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풀뿌리를 캐고 한편으로는 어물을 구하여 연명하였다. 
언덕 위로 올라가 두루 살펴보니 평원과 광야에는 옥토(沃土)가 아님이 없었고 흐르는 냇물 두터운 둑이 다 논으로 만들 수가 있었는데 한 자도 갈지 않았다. 면죽(綿竹)이 우거지고 갖가지 풀과 큰 나무 숲에 살쾡이·수달·담비·토끼·여우·곰 등의 짐승이 무수히 있었다. 육지에는 길이라곤 없고, 또 죽은 사람을 묻은 묘도 없었다. 5월인데도 산 중턱 위에는 눈이 녹지 않았다. 어떤 곳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은 곰·여우·담비 등의 가죽으로 털옷을 만들어 입었다. 고기 잡는 그물은 7~8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실로 짠 것이 아니라 나무껍질의 실로 짠 것이었다. 잡은 고기는 송어와 그 외 이름 모를 잡어가 한없었다. 부러운 듯 물고기를 만지니, 그 중 한 자가 넘는 송어 20여 마리를 내 앞에 던지고는 가져가라고 가리켰다. 
담비 가죽을 입은 자는 지항의 남빛 명주의 유의(襦衣)에 크게 관심을 보였는데, 바꾸어 입자고 하는 것 같았다. 허락하여 즉시 옷을 벗어 바꾸었는데 무척 좋아하였다. 그 다음날 그곳 사람들은 떼를 지어 각기 털옷을 가지고 와 지항 무리의 물건(옷, 그릇, 갓끈에 단 수정, 허리에 두른 옥 등)과 물물교환을 했다.



소유아에 머문지 닷새될 무렵, 그곳 사람들과 얼굴이 익고 물건을 바꾼 정분으로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각기 마른 고기를 안고 정을 표시하였다. 주는 대로 받은 고기가 다섯섬이 넘었다. 
그들 중 좀 낫다고 보이는 한 사람을 데리고 갈 길에 대해 물어보니 남쪽을 가리키며 ‘마즈마이······]라 하였다. 그때 갑자기 북풍이 불어왔다. 그리하여 이곳을 떠나 남쪽으로 향해 떠났다. 순풍을 만나지 못하면 노를 저어 가다가 배 댈 곳이면 정박하여 상륙했다. 인가를 찾아보았지만 다 같은 무리였다. 그렇게 10일을 갔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물어보면 무조건 [마즈마이·····]라 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어물만 먹어서 치근(齒根)이 솟아 나오고 아파서 다들 고통스러워 했다. 
계속 남쪽을 향해 가던 4일이 되던 날(5월 28~29일 경), 해안의 높은 곳에서 갑자기 손을 흔드는 자가 있었는데, 전 무리와는 달랐다. 가 보니 일본인 두 사람이었다. 김백선이 일본어를 조금 알아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그들은 남촌부(南村府)의 왜인들이었고, 금을 캐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가옥을 크게 짓고 50여 명의 왜인을 거느리고 앞으로 며칠 가야 하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 중 장왜(將倭)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근방에 표류하여 굶주리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그들을 보내어 찾아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백미 서말, 잎담배 다섯 뭉치, 장·소금 등을 전해주었다. 또 신곡 십랑병위(新谷十郞兵衛)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일본어라 자세한 내용은 몰랐지만 심중은 매우 기쁘고 마치 꿈을 꾸는 듯 했다. 지항 일행은 두 왜인의 숙소를 따라갔다. 그곳 국명과 지명을 물으니 국명은 하이(蝦夷)이고 지명은 계서우(溪西隅)라 하였다.

1756/05/15 다음날

아침 일찍 발선하였다. 약 70~80리 쯤 가니 해안에 초가가 많이 있었다. 배에서 내려 들어가니 30여 칸의 초가에는 각각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의복과 기명(器皿), 기타 집물(什物)을 늘어놓은 모양은 부산의 관왜(館倭)의 거처와 비슷했다. 그 중 우두머리 왜인 한 사람이 맞아들여 대좌(對坐)하고서는 생선과 술로 대접했다. 그 왜인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송전(松前) 봉행(奉行)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신곡 십랑병위(新谷十郞兵衛)라 하였다. 송전 태수의 명을 받아 이곳에 머물면서 금을 캐고 있은 지 10년이 되었고 3년 만에 한번씩 송전부에 세금으로 황금 50냥을 바친다고 하였다. 그는 지항 일행의 표류한 과정에 대해 자세히 묻고 그들이 도착한 곳과 만난 무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대화가 끝난후 그 집에 머물면서 후하게 대접받았다.
* 하이(蝦夷)의 지경 : 사방이 다 바다. 송전에서 3천 6백리나 떨어진 곳. 아주 먼 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 해포(海浦)가 서로 이어져 있다.

* 무리 : 이들에게는 원래 다스리는 왕이 없고 태수(太守)도 없다. 문자를 모르고 농경도 하지 않으며 다만 해착(海錯)을 업(業)으로 삼고 있다. 산에 올라 여우나 곰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입고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나무껍질을 벗겨서 옷을 짜 입는다. 일본에 속해있으나 공물을 바치는 일이 없고 다만 송전부에 익힌 전복을 매년 만여 동만을 받친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각 마을마다 우두머리 한 사람씩 송전 태수의 앞에 나가 배알한다. 그러나 언어가 같지 않고 금수와같 아 송전은 하이어 통사를 별도로 두어야 하며 매년 한 번씩 송전에서 시자(侍者)를 보내어 그들의 나쁜 바가 있는가를 살피어 다스린다. 또 그들은 마을 안에 나이가 많은 자를 수장으로 정해서 마을 안에 나쁜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잡아 내어 그들끼리 죄악을 논해서 손바닥 모양으로 만든 쇠매로 등을 서너번 때리고 그치고, 더욱 죄악이 중한 자면 다섯 번을 때리고 그친다. 그 밖에 아주 심한 자면 송전 태수 앞으로 잡아다 놓고 죄를 논하여 알리고 참수케 한다. 무리들의 성질은 본래 억세고 포악하여 신이나 버선을 신지 않은 채 산곡이나 우거진 숲속을 돌아다니며 가시덩굴을 밟고 넘어 높은 언덕 위에서 여우나 곰을 달려가 쏘아 잡는다. 작은 배를 타고서 큰 고래를 찔러 잡고, 눈과 추위를 참아 습한 땅 위에서 자도 병에 걸리지 않는다. 옛날 남방 사람들의 상선이 그곳에 표류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 무리들은 선인들을 모두 죽이고 물건을 약탈했다. 송전에서는 그것을 알아채어 그 무리들을 적발해 부모·처자·족당(族黨)들을 불에 태워 죽였던 적이 있는데 이후 근래에는 사람 죽이는 일은 없어졌다. 
처음 지항 일행이 정박했던 곳은 갈악도(羯惡島)인데, 어느나라에 속해 있는 땅인지 모른다. 그곳 사람들은 키가 8~9척이나 되고 얼굴·눈·입·코가 모두 하이족과 같고 모발도 길지 않고 그 색깔은 다 붉으며 창으로 찌르기를 잘한다.

1756/07/01 송전(松前)에서의 생활

신곡 십랑병위와 배를 같이 타고, 하이 땅을 다스리는 부중(府中)인 송전(마즈마이;松前)을 향해서 출발하였다. 여러 날 배를 타고 갔다. 오랫 동안 표류하는 배에서 지내고, 또 들판에서 잠을 자면서 뜨거운 열에 삶아지고 장기(瘴氣)의 엄습을 받았고 기갈증으로 몸이 상해진데다가 밤에는 모기에게 물리고 벼룩과 이에 뜯기는 괴로움을 당했다. 순풍을 만나면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그렇지 못하면 포구에 배를 정박시켰다. 정박 시키는 곳의 인가는 모두 하이의 인가여서 그 집 습기와 몰려드는 벼룩은 배위만도 못하였다. 나흘을 가서 역풍을 만나 어느 포구에 정박했는데 장사하는 왜의 배가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 십랑병위만이 걸상에 올라가 앉고 나머지 모두 걸상 밑에서 절하고 무릎을 꿇었다. 십랑병위가 지항에게 같이 걸상에 앉기를 청하고 공손히 술과 생선을 내어와 후히 대접하였다.

1756/07/10 송전에서 9일째

오래 바다 위에서 장기(瘴氣)와 피로가 매우 심했다. 향수를 견디기 매우 힘들었다. 십랑병위는 금 1전을 꺼내어 좋은 술 한 통을 사다가 지항 일행을 위로해주었다.

1756/07/23 송전에서 22일째

송전 북쪽 백여 리 밖인 예사치(曳沙峙)에 당도해서 그곳을 지키는 변장(守邊將)을 한 사람을 만났다. 큰 관자가 지어져 있고 호위병에 둘러싸여 존중을 받았으며 거기에는 백성이 5백여 호가 살고 있다. 시장에는 물산을 별여 놓고 남녀의 의복은 극히 화려하고 묘했고 인물들은 영리하고 여자들은 아름다웠다. 구경꾼들이 양쪽 길가에 늘어서 있어서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다 좋아했다. 변장은 풍성하게 차려 놓고 맞이해주었다. 
변장이 부중으로 보고하매, 부중에서 관원이 와 데리고 갔다.

1756/07/27 송전에서 26일째

송전에 도착해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부중으로 들어가는 중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지항 일행을 호위하고 촛불을 환하게 밝혔다. 성밖에 이르자 봉행왜 10여 인이 하인들을 많이 거느리고 좌우에 두 줄로 행렬을 지었는데,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맞이하여 읍하며 계속 호위하여 부중의 공사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잔치 자리를 풍성하게 차려 놓고 지항일행을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하이 땅을 다스리는 송전씨의 보고가 있었다.

56/07/28 송전에서 27일째

태수가 일등 봉행(奉行) 왜인 고교천우위문(高橋淺右衛門)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해 주었다. 그는 몇 달 체류해 있는 동안 몸이 상하지 않게 잘 보호해 줄 것이라 약속했다. 그리고 추운 계절이 풀려 적당한 시기가 되면 돌아갈 수 있도록 일을 재촉하겠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 올 적에 봉행 왜인 등이 앞에 서서 인도하여 돌아왔다. 비록 노상에는 구경꾼들이 많았지만 조금도 떠들지 않았다. 송전 태수의 시위의 융성함과 고을 안의 인물 및 시전 물산의 풍성함은 우리나라 주부(州府)보다 백 배나 더하였다. 그 직을 대대로 물려주기 때문에 이렇게 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1756/07/29 송전에서 28일째

태수는 봉행 고교 천우위문을 시켜 검은 명주 3단, 솜 5편, 옥색 명주 1단, 푸른 명주 1단, 분지(무리풀을 먹여 만든 희고 단단한 종이) 10속, 보통 종이 5속을 나에게 주었고, 김 백선 등 세사람에게는 흰모시 각 2단, 일본옷 1벌씩, 분지 3속, 보통 종이 3속씩 주었으며, 선인들에게는 무명 각 2단, 일본옷 1벌씩, 보통 종이 3속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 중 검은색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색이어서 검은 명주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의 일행은 송전에서 48~49일간 체류하는 동안 후대를 받았다. 송전에 머물고 있는 동안 매일 세 끼니마다 밥·국·술을 세 차례씩 대접받았고 간간이 별도로 먹을 것을 보내 주었다.
또한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태수는 시사(詩思)를 제법 즐기고 또 회화를 좋아해서 그 자신도 좋은 그림을 그리고 항상 강호에서 온 중 서류(瑞流)라는 이와 시와 그림을 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숙식도 같이 한다 하였다. 송전에 있은지 48~49일 만에 종이에 쓴 것이 거의 백여 권에 이르렀다. 그들은 문방구를 보내 보답하고 싶지만 앞으로 강호로 가면 반드시 수색을 당하는 일이 있는데 존좌의 일행 중에 만약 우리 나라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 준 자가 벌을 받게 되므로 물고기와 술로 사례하겠다고 하였다.

1756/08/26 강호(江戶) 관백의 통보

강호(江戶)의 관백으로부터 육로로 데리고 오라는 통보가 내려왔다. 태수는 푸른 명주 2단, 흰베 2단, 풀솜 5편, 옥색 명주로 만든 요 1부, 독수리 날개 1미, 황금 2전, 떡·국수·물고기·술 등을 보내왔다. 
하루는 시는 자주 지어왔으나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서류라는 중이 와서 만나고는 치사하였다. 그리고 시를 한 수 지어 주고는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갔다.

1756/08/30 귀향(歸鄕)

배를 발선시켜 한 작은 바다를 건너갔는데 그곳은 진경군(津輕郡)이었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서 숙박했는데 그 군에서는 출참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데리러 온 송전부의 다섯 봉행이 가마를 정돈해 들여와서 내게 타라 하고 사람들에게 메게 했다. 곳곳의 지경에서 정연하게 기다렸다. 길을 안내하는 나장이 6명, 심부름하는 사환이 무수히 따르고 있어 마치 우리 나라의 별성행차와도 같았다. 
이지항 무리가 지낸 길의 각 고을은 진경군·남부현(南部縣)·선대부(仙臺府)·오주(奧州)·목신우군(牧信友郡) 등 다섯 고을이었다. 각 고을을 지낸 날을 계산해 보니 27일간의 일정이었다.

1756/09/27 귀향(歸鄕)

강호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통상과 외교를 전담하고 있는 대마도주의 처소로 이관되는데 도주는 그대로 대마도로 내어보내려 하여 도주의 집에서 머물렀다. 데리고 오는 봉행 및 모든 왜인을 차정(差定)하는 동안에 저절로 5~6일이 되었다.

1756/09/30 귀향(歸鄕)

술과 국수를 간소하게 차려 한방에 모아서 수봉행 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전별(餞別)케 했다.

1756/10/17 귀향(歸鄕)

대판성(大阪城)에 도착했다. 3일을 머물렀다가 오사포(五沙浦)의 왜선을 타고 해로로 출발했다. 지낸 연안의 고을은 병고보(兵庫堡)·하관(下關)·적간관(赤間關)·지도(芝島)·승본도(勝本島)·일기도(壹岐島)·단포(壇浦)등이었다

1756/12/14 대마도 출발

대마도에 도달해서 한달 남짓 머물렀다. 
다음해인 정축년의 2월 2일 대마도를 출발하였다.

1757/03/05 귀향(歸鄕) 부산도착

부산포에 도착했다. 왜관의 금도왜(禁徒倭) 등이 날이 어두워 검사 할 수 없으므로 날이 새기를 기대려 검사를 받은 뒤에야 그곳에서 나왔다. 가지고 온 짐은 같이 표류했던 울산 도포(桃浦) 사람 박두산(朴斗山)의 배에 옮겨 실었다. 부산진의 영가대(永嘉臺) 앞에 정박하여 배에서 내렸다. 부산 첨사(僉使)가 표류했던 사람들의 배가 닿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항 일행을 불러 공술(供述)을 들이라 하여 다음날 아침 관아로 들어가 공술을 들였다.

6개의 댓글

2017.10.04
호에엥 신기하당
0
2017.10.05
재밌다 이런거
더올려줘
0
2017.10.07
0
2017.10.07
본 게시물의 게시자 본인인데
이 내용은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 에서 퍼온 것이다.
이러한 글이 많이 있는 곳인데

이 게기물을 올린 날, 내가 옛날 표류기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이처럼 읽을 만한 것이 있길래, 여기다가 복붙해 놓은 것이다.
0
2017.10.08
1년만에 돌아왔네.
0
2017.10.10
재밌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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