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내 멋대로 유럽사 (3) : 카롤링거 왕조의 서유럽 통일

내 멋대로 유럽사 (1) : 서로마 멸망 이후 혼란(5세기~6세기 초) : http://www.dogdrip.net/139544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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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시간에는 기껏 통일해놓으니까 남성 분할 상속제로 다시 갈갈이 찢어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이야기를 했었지.
저번에도 말했듯이 486년 통일 이후 몇 개의 왕국으로 쪼개져서 합쳐지고 반목하던 메로빙거 왕조는
639년 다고베르트 1세의 죽음을 끝으로
일종의 집사장(왕의 비서)인 궁재(Maior Domus)가 실권을 장악하게 돼.

잠시 프랑크 왕국의 분할에 대해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면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 1세의 네 아들들이 왕국을 사분할하면서 프랑크 왕국에는 네 개의 수도가 세워지게 돼.
파리, 오를레앙, 메츠, 수아송.
그리고 613년 프랑크 왕국을 또(...) 재통합시킨 클로타르 2세 때부터는 저번에 말했던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고뉴
의 3왕국 체제가 되지.

하지만 내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왕이란 놈의 권력이 시원찮을 리가 있나.
클로타르 2세는 죽기 전에 아들 다고베르트 1세를 공동 왕으로 올림으로써 왕권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또 분할 상속제로 엿먹고
다고베르트 1세가 629년 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했지만, 그를 마지막으로 메로빙거 왕조의 왕권은 끝이 났어.
바로 632년 바스크 족의 아키텐 침략 때문이었는데, 이걸로 열받은 다고베르트 1세가 바스크 원정을 준비했지만
말 그대로 개털리는 바람에 왕권이 다 무너진 상황에서 639년 죽어버렸어.
아들 성 지게베르트 3세(왜인지는 모르지만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는 나름 선정을 펼쳤지만
지방 귀족들의 등쌀에 휘말려 얼굴마담에 불과했고
그의 사후 5,6세에 불과했던 다고베르트가 또 이런 싸움에 휩쓸릴까봐
양자 힐데베르트 3세 아돕티부스를 왕위에 올리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어쨌든 허수아비에 불과했지..


허수아비들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실권을 장악했던 궁재 이야기를 해 보자.
궁재는 이전에 말했던 3왕국의 유력 귀족 가문이 독점하던 일종의 귀족의 대표직이었는데,
다고베르트 1세 이후로는 사실상 왕권을 대행했다고 봐도 무방해.
그리고 아우스트라시아(수도는 메츠, 오늘날의 독일 문화권)의 궁재 가문이었던
아프눌핑거(Arnulfings; 아르눌프의 집안, 아르눌프는 메츠의 주교로 이 가문의 실권자였던 인물)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이 집안 바로 카롤링거 가문 되시겠다. 
작명법에서 대충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 때 게르만 성씨는 다른 게 아니고 가문에서 두드러진 인물을 따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후 등장하는 카롤루스 대제 이후 이름이 카롤링거 가문이 된거 ㅇㅇ

어쨌든 프랑크 왕국의 4수도 중 메츠를 중심으로 하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장악했던 이 가문은
넓은 영토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오늘날 프랑스 북부이자 파리와 수아송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3왕국의 일원 네우스트리아를 집어삼키면서 또다른 3왕국의 일원 부르곤트를 굴복시켰고
그 빛나는 업적을 이룬 헤리스탈의 피핀(피핀 2세)은 사실상 프랑크 왕국의 전권을 쥔 셈이 되었지.

자 프랑크 왕국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제쳐두고 잠시 이슬람 세계 이야기를 해보자.
이슬람교는 창시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중앙아시아를 집어삼켰어.
622년부터 632년까지 단 10년동안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했고
4대에 걸친 정통 칼리파 시대에 북아프리카 일부와 소아시아를 점령,
마지막 정통 칼리파 알리를 암살하고 선출 칼리프제에서 세습 칼리프로 전환시킨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면서 북아프리카 전역과 이베리아 반도마저 꿀꺽하지.
그리고 이때 이베리아 반도에 잔존했던 서고트 왕국, 수에비 왕국과
북아프리카에 잔존하던 반달 왕국이 완벽히 멸망해.
비잔티움 제국이 훗날 지도에서 자주 보게 될 모습인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만을 장악한 모습도
이 때 나온 모습이야. 그래도 이 때는 베네치아 쪽도 가지고 있었다..

(이슬람의 영역. 짙은 빨강은 622-632 무함마드 시기, 연한 빨강은 632-661 정통 칼리파 시기, 노랑색은 우마이야 왕조 시기)

여담으로 고구려 유민 출신 장군 고선지가 당나라 군인 신분으로 탈라스 전투에 참전하여 싸웠던 적이
바로 이 우마이야 왕조였어.

어쨌든 우마이야 왕조의 공격적인 정복사업은 711년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렀고, 로마 교회는 당황했어.
이슬람이 진짜 턱밑까지 온 꼴이니 부들부들했겠지..
심지어 우마이야 왕조는 720년대에 피레네 산맥을 건너 프랑스 중부까지 위협했어.
그리고 이 때 우리의 프랑크 왕국이 다시 등장하신다.
가톨릭을 처음 받아들였던 이민족 출신이자
자칭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후손임을 자처하던 프랑크 왕국으로서는
이교도의 침입을 막아내야할 의무가 있었고
실제로 엄청난 위협이 있었어.

전 유럽이 이슬람의 말발굽 아래 묻히려는 찰나
프랑크 공작이자 궁재, 프린스(대공) 칭호를 받은 카롤루스 마르텔은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크게 격파, 피레네 산맥 너머로 쫓아버렸어.


원래 카롤루스 마르텔은 전 궁재였던 피핀 2세의 서자로,
피핀 2세의 적자들은 다 죽고 피핀 2세가 적자의 아들, 즉 손자들에게 상속하려 하자
반발, 자기가 궁재 자리를 꿀꺽하고 이에 반발했던 아우스트리아와 바이에른, 아키텐, 프리지아 등등을
전부 때려잡은 뚝배기의 화신이었어. 애초에 저 '마르텔'이란 별명이 망치라는 뜻이니...

여튼 이슬람의 뚝배기를 절찬히 깨뜨려준 이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우리 호구 교황 성하께서는 왕관을 제의했지만 거절했어.
사실 이 친구는 그 전까지 가톨릭 계와 사이가 안 좋았어. 집권 내내 이리저리 전쟁하느라 전쟁 자금도 딸렸고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마냥 봉신들에게 땅 나눠줄 것도 부족해서
교회 재산 전부 쓸어가는 바람에 성직자들이 상업에 종사해야 할 정도였거든.

하지만 언제나 외부의 적은 같은 공통점을 가진 이들에게 결집력을 주는 법.
무슬림이 침략해온거다.
711년부터 718년까지 착실히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해온 우마이야 왕조는
719년 코르도바 공국을 설립, 721년에는 아키텐을 침략해.
당시 아키텐 공 에우도는 아키텐을 분리독립시켜준다는 조건으로 네우스트리아의 힐페리히 2세와 제휴,
카롤루스 마르텔과 대항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남쪽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군에 의해 포위, 오도가도 못하게 됐어.

에우도는 급히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SOS를 쳤고, 카롤루스 마르텔은 군을 이끌고 툴루즈로 가서
우마이야 왕조를 상대해.
이 때까지 이슬람군은 서유럽은 좆밥일거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이베리아 반도를 전부 장악하는데 겨우 7년이 걸렸고,
존나 강력했던 동로마에 비해(그래도 이땐 나름 최강국 중 하나였지..) 서로마는 일찍 털리고
거기는 야만족(게르만족)들이 땅따먹기 하는 동네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툴루즈에서 보니까 어 씨발 얘네 조직화된 군대가 있네?

(이게 군대라는 거야)

어쨌든 이슬람군은 좀 충격받은듯해.. 그래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몸 추스르는 동안
카롤루스 마르텔은 교회 재산을 몰수한 일로 파문까지 몰리자 재산을 환수하고
바이에른과 프리지아 등 새로 정복한 땅과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는 등 환심을 샀어. 
그리고 724년부터 732년까지 다시 이 재산을 서서히 압수하는데, 다시 파문 여론이 일었지만
731년 일이 터져.

에우도는 교회와 반목하던 카롤루스 마르텔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진 틈을 타
아키텐의 독립을 시도해.
하지만 우리의 망치부ㅇ... 망치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은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을 공략하지.
그리고 에우도는 산상왕한테 뒷통수 맞은 발기마냥 적군을 끌어오지.
우마이야 왕조 코르도바 공국의 우스만 이븐 나이사에게 SOS콜을 때린거야.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교도와 손을 잡은 에우도한테 비난 때리고
아키텐에서 쑥을 재배한 다음 다시 여유롭게 프랑크로 들어갔어.

하지만 근성가이 에우도는 732년 이베리아 총독 아브드 알 라람 가비키와 손을 잡고 분리독립을 기도했고
이슬람군은 바스코니아(바스크족의 땅)을 넘어 보르도를 향해 전진, 도시와 교회를 점령하고 약탈했어.
아브드 알 라만이 이끄는 군대는 보르도에서 아키텐을 가로질러 투르-푸아티에에서 카롤루스 마르텔의 군대와 부딪히지.

카롤루스 마르텔은 기병이 강한 이슬람군과 대적하기 위해 프랑크 군제를 개편했고
이는 너무나도 잘 들어맞아 피레네 산맥을 건너오는 이슬람군의 뚝배기를 여지없이 깨버렸어.
그리고 이 전투의 승리로 서유럽을 이슬람에서 지켜내었고, 이게 훗날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그리고 투르-푸아티에에서 이슬람을 격퇴한 카롤루스 마르텔은
남은 아키텐인들을 무자비하게 처리했는데
이 때문에 별명 마르텔이 붙었다고 하는군.

원래는 이 카롤루스 마르텔이 기사의 병역을 부담하는 가신에게
교회령을 줌으로써 봉건제의 효시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게 주류 이론이었는데
최근에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가 있다고 해.

카롤루스 마르텔은 교회와의 불편한 동거를 지속했는데
보면 강력한 왕권(?)을 장악했던 카롤루스 마르텔한테 교회가 엄청 휘둘렸어.
이슬람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준 군사력 정치력 만렙의 재상이 사실
교회를 수단으로만 이용한다는 사실에 어쩌면 애가 탔을지도...
위의 수많은 만행(?)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각종 칭호와 왕 시켜줄까? 하는 회유,
심지어는 성 베드로의 무덤의 열쇠(!)도 바쳤지만
카롤루스 마르텔은 당시 북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롬바르디아 왕국을 막아달라는
교황의 요청을 묵살하면서
사실상 롬바르디아 왕국이 이탈리아를 차지하는 것을 방관했어.

그리고 다시 분할 상속.. 하지만 카롤루스 마르텔의 차남 피핀 3세는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어.
사실 토이데리히 3세 이후 프랑크가 완전 분할된 적은 베르됭 조약까지는 없지만..
여튼 피핀 3세는 메로빙거 왕조 족보를 뒤져서 힐데리히 3세를 옹립하고
이복동생 그리폰과 형 카를로만 1세를 제거, 궁재 자리를 차지하지.

(단신왕 피핀, 714~768)

743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프로방스의 궁재직을 물려받은 피핀 3세는
형 카를로만 1세와 협력하에 바이에른, 아키텐, 작센, 알레마니(오늘날 슈바벤 지역)를 공략했어.
카를로만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깊은 신앙심을 가졌기에 고민하다가
747년 모든 권력을 아들 드로고에 이양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어.
하지만 피핀 3세는 조카 드로고 2세를 바로 폐위시키고 수도원에 처박아놓았으며
이에 반발한 카를로만 1세가 이탈리아의 수도사와 주교들과 연대하여 쿠데타를 기획했지만 진압, 프랑크에 유배되었어.

그리고 마침내 751년,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허울뿐인 왕보다는 실권있는 왕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은밀히 서신을 보냈어.

"실력은 있는데 왕이 되지 못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합니까?
왕이면서도 실력이 없는 자가 통치를 해야 합니까?"

교황은 이를 승인, 힐데리히 3세는 프륌 수도원에 유폐되고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했지.
그리고 피핀 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756년 롬바르디아를 정벌, 로마 부근의 땅을 교황에게 기증하는데
이를 "피핀의 기증"이라 하고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내려오는 교황령의 시초로 봐.
위의 이슬람 지도에도 보이지만 원래 그 부근은 동로마 땅이었는데 반환하지 않고 교황한테 줬으니 교황은 얼마나 이뻤을까??

피핀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차지한 건 사실 명분이 없었으므로
피핀은 즉위의 정당성을 위해 1. 귀족들에 의한 선거의 방법을 취하고, 2.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축성받는
두 가지 형태의 명분을 취했어. 그리고 이후 선거 왕위 상속제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 상속법의 기본이 되지.
또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왕위를 인정받는 행위는 귀족의 개입을 원천 차단한 것으로,
귀족들의 선거나 영향력과 별개로 교황이 유럽 각국의 군주들의 즉위를 승인하는 전통의 초석이 돼.

평소 메로빙거 왕조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교황은 왜 왕위 찬탈에 동의했을까?
힐데리히 3세는 꽤나 유망한 신학자였고 관계도 무난했는데 말야.
이는 바로 성상 파괴에 관련해서 동로마와 대립중이었던 기독교 세계의 알력도 있었어.
롬바르드 족의 등쌀에도 밀리던 로마 교황과는 달리 비잔티움에서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을 모두 쥔 황제는
당연히 황제가 우세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서유럽 최강국의 왕을 승인해주며 교황은 든든한 후원국을 얻은 셈이었고
아예 754년에는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생 드니 대성당에서 피핀 3세에게 도유식(기름부음)을 거행하였어.

자 그리고 꽤 많은 사람이 기다리던 사람이 등장한다. 피핀 3세의 사후 또다시 프랑크 왕국은 분할 상속되었어.
프랑크 왕국의 서부는 카를로만 2세에게, 동부는 카롤루스에게 분할되었는데
이 카롤루스가 바로 카롤루스 마그누스, 샤를마뉴 되시겠다.

(샤를마뉴, 742~814)

드디어 신성 로마 제국의 모체가 되는 프랑크 제국의 등장이다.
피핀 3세의 왕비 랑의 베르트라다의 어머니는 메로빙거 왕조의 공주였기 때문에
샤를마뉴부터는 지겹겠지만 트로이 왕가의 피와 예수의 피가 흐른다고 늘 선전했지.

샤를마뉴는 피핀 3세와 그의 왕비 랑의 베르트라다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별장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
그래서 동생 카를로만 2세를 비롯한 반대파들에게 사생아라고 공격받기도 했지.
피핀 3세 생전에도 카를로만 2세와 그의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 같아.
피핀 3세가 두 형제에게 서로 협력할 것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샤를마뉴는 유년시기, 754년 피핀 3세가 교황의 롬바르드 정벌 요청에 대한 답 사절에
국왕의 장자 자격으로 교황을 영접했어.
그리고 그는 피핀 3세의 아키텐 정복 - 얘넨 진짜 끊임없이 독립을 시도하는데, 진짜 근성있음;; - 등
아버지의 원정에는 항상 동행했어.

귀족가의 딸 이멜트루다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은 기형아였고
곱사등이 피핀을 낳은 이멜트루다를 멀리했던 샤를마뉴는 롬바르드 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차녀 데시데리아와 재혼했지만
데시데리우스가 771년 동생 카를로만 2세를 지원하자 데시데리아와 이혼, 히스파니아 백작의 딸 힐데가르트와 재혼했어.

768년 피핀 3세가 죽자 아우스트리아와 프리지아 등을 상속받은 카롤루스 1세에게 프랑크 왕국의 왕이라는 칭호가 돌아왔고
동생 카를로만 2세는 부르군트, 프로방스, 네우스트리아를 받았는데
샤를마뉴는 또다시 분리독립을 시도한 아키텐을 무자비하게 정벌하고
이전에 할아버지 카롤루스 마르텔이 물먹었던 작센마저도 772년 정벌, 
교황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롬바르드 왕국도 774년 멸절시켰어.
777~8년 이슬람군의 침입을 물리쳤지만 이베리아 원정에서는 참패했고, 
다시 쳐들어오는 사라센(이슬람인을 일컫는 말, 사실 중세 내내 이 이름으로 불림)군을 802년 격퇴했어.

카를로만 2세가 아키텐의 혼란을 틈타 내전을 일으켰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사,
승리한 샤를마뉴는 동서남북으로 군대를 보내 영토를 넓혔어.
북의 작센, 동의 바이에른, 남의 롬바르드, 서의 사라센까지.
물론 사라센 원정에서는 참패했지만.. 쳐들어오는 건 확실하게 막았지.
그리고 아버지의 정책을 받들어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킨 후에 일부를 교황에게 또 기증했어.

799년, 교황 레오 3세는 반대파들에게 습격을 받아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했어.
샤를마뉴는 교황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호위 병력을 붙여 이탈리아로 보냈고,
교황은 마침내 비잔티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적임자를 찾았다고 생각했지.

프랑크 왕국은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동양의 그것과는 약간 다름)을 바치던 처지였어.
그러나 800년, 로마 교황을 등에 업은 카롤루스 1세는 자신이 예전 로마 제국의 서부 지역을 다 차지하고 있으며,
동로마 제국이 현재 황태후 이레네가 다스리고 있으므로
마지막 로마를 차지했던 비잔틴 황제인 유스티아누스 대제 이후 정통 로마 황제는 자신이라고 선언했어.
교황은 그에게 로마 황제라는 직위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주었고,
정식 서로마 황제로 인정했어.
당연히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훗날 812년 동로마 황제 미카엘 1세 랑가베는 로마인의 황제로서가 아닌 프랑크인의 황제로서
샤를마뉴의 황제위를 인정하게 돼.

그리고 훗날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일컫는 프랑크 왕국 최전성기를 보내고
원래 분할 상속을 하려 했지만 장남 피핀 4세, 차남 피피노 카를로만, 삼남 소(小) 샤를 등 아들이 계속 죽자(...) 
육남 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공동 황제로 선언, 유일한 후계자로 확정하고 아키텐으로 되돌려보냈어.

하지만 정치적으로 무능력하고 신앙심만 깊었던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즉위식 이후 10년간 휘둘리기만 했고,
830년, 831년, 833년, 834년 무려 네 번이나 왕위에 축출되었지만 매번 기적적으로 복귀했어.
이쯤 되면 거진 오뚜기..
심지어 축출을 기도한 상대가 아들인 로타르 1세, 피핀, 루트비히 독일인 등이라는거?

840년 루트비히 1세가 로타르 1세에게 모든 왕국을 상속시키고 다른 아들들에겐 공작위만 분봉했지만
대머리 카를을 위시한 다른 아들들이 반발,
내전이 발발했지만 843년 그 유명한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링거 제국은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삼분되지.

삼분할된 프랑크 왕국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자.


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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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애초에 서로마 멸망전이라도
동로마 경제력이 7이면 서로마는 3 아니었나
오도아케르조차 쫄아서 동로마황제한테 서로마황제 깃발 같은걸 싸그리 상납했는데 뭐
나름 최강정도가 아니라 사실 동로마한테 페르시아가 털린사이에
어부지리로 이슬람이 커버린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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